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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고려의 왕족. 본관은 개성(開城). 태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 유금필(庾黔弼)의 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다. 효은태자는 정사(正史)에 그 이름이 빠졌는데 혹은 동양군(東陽君)이라고도 불렸다. 성품이 사나워 군소(群小)들과 사귀어 몰래 다른 생각을 품으므로 광종이 죽음을 내렸다. 아들 임(琳)과 정(禎)은 어리므로 죽음을 면하고 도망하여 민가(民家)에서 목숨을 이어오다 강조(康兆)가 정권을 잡았을 때 작위를 주고 노비와 토지를 지급하여 종실의 적(籍)에 올리게 하였다.
1753년(영조 29)∼1821년(순조 21).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비(妃). 청풍김씨(淸風金氏)로 아버지는 좌참찬·증영의정 시묵(時默)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증찬성 상언(商彦)의 딸이다. 한성부 가회방(嘉會坊)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嘉禮)를 올렸고,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和緩翁主)가 그를 몹시 괴롭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청연(淸衍)·청선(淸璿)두 군주(郡主)와는 더욱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청선군주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 하였고,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성품이 개결(介潔)하고 사정에 흐르지 않아서 사가(私家)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경계하여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화(宮貨)는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사가에 물화를 내린 적이 없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휘호(徽號)는 예경자수(睿敬慈粹)이고, 시호는 효의(孝懿)이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健陵)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 중대의 정치가. 진골귀족 출신이다. 714년(성덕왕 13) 정월 위문(魏文)에 이어 이찬(伊飡)으로서 중시(中侍)가 되어 718년 정월 퇴임할 때까지 4년간 역임하였다. 754년(경덕왕 13) 황룡사종을 주조할 때 삼모부인(三毛夫人)과 함께 시주가 되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충선왕 때의 승려. 1313년(충숙왕 즉위) 충선왕은 백팔만승(百八萬僧)을 공양하고, 백팔만등을 켜는 만승회(萬僧會)를 베풀고자 하여, 10월 20일부터 5일 동안 연경궁(延慶宮)에서 승려 2,000명에게 공양하고, 등 2,000개를 밝히는 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교종의 승려인 효정은 선종승 충탄(冲坦)과 함께 초빙되어 설법하고, 왕으로부터 백금 100근을 보시받았다.
1831년(순조 31)∼1903년. 조선 헌종의 계비(繼妃).남양홍씨(南陽洪氏) 판돈령부사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재룡(在龍)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왕비가 되었고,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왕대비가(王大妃)가 되었다. 딸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경릉(景陵)이다.
1619년(광해군 11)∼1659년(효종 10). 조선 제17대왕. 재위 1649∼1659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1. 가계와 병자호란 때의 행적 인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서 태어났고,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하였으며,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하여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및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과 같이 지내면서 형을 적극 보호하였다. 즉,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하여 동행을 막았으며, 그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하여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그대로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다가 그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2. 북벌계획의 시말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하이관, 금주위 송산보(錦州衛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은 데다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와 은밀히 연결되어 있어 이들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 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실세(失勢)함으로써 이듬해부터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하여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본격화하였다. 즉,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600여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3. 군사훈련·군비확충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는 동시에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대폭 강화하기 위하여 원두표를 강화도, 이후원(李厚源)을 안흥,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 경기도 부천시)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수보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선하는 등 군비의 확충을 적극화하였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수보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하여 염초(焰硝)생산에 극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단히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참가하여 군사훈련 강화에 노력하였다. 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能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로 하여금 강습권과(講習勸課)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로 바꾸어 행동에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 어린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효종의 군비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하여져 북벌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다만, 군비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 4. 경제·문화관련 치적 한편, 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 확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전세(田稅)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화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행전(行錢)의 유통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문화면에 있어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하여 태음력의 옛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하였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 간행하였으며,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하여 농업생산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656년에는 전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 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 警民編》을 간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선조실록》을 다시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 간행하였다. 5. 평가·사후상황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확충에 전념한 군주였으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朝臣)들과 뜻이 맞지 않는 괴리현상이 일어나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죽었다.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이라 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능호를 영릉(寧陵)이라 하고, 경기도 양주의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장사하였으나 뒤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미상∼672년(문무왕 12).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관등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나당전쟁 중이던 672년 당나라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이 각각 거느린 당군은 7월 평양에 주둔하더니 8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이어 백수성(白水城) 부근까지 진격하여 오매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군의 도움을 받아 당군 수천명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고 석문(石門)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적에 대한 방심으로 기습을 받아 대패할 때, 사찬(沙飡) 의문(義文)·산세(山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생몰년 미상. 신라 중대의 승려. 화엄종 승려 의상(義湘)의 부탁을 받아 금 9푼(分)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중국 화엄종 제3조인 법장(法藏)에게 전달하였다.
1828년(순조 28)∼1843년(헌종 9). 조선 제24대왕 헌종의 비(妃).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영돈령부사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조근(祖根)의 딸이다. 1837년(헌종 3)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嘉禮)를 올렸다. 왕후가 된 지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1851년(철종 2) 경혜(敬惠)·정순(靖順)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端聖)·수원(粹元)의 존호가 더해졌다. 능은 경릉(景陵)이다.
1511년(중종 6)∼1531년(중종 26). 중종(中宗)의 장녀로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하가하였다. 김희는 김안로의 아들이다. 1521년에 김희와 결혼하였으며 1528년부터 병이 있어 1531년 졸한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혜종의 제2비.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다. 태조는 고려를 개창한 뒤 맏아들 무(武 : 혜종)를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무의 외가가 미약하므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인물인 병부령(兵部令) 임희(林曦)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그리고 이미 태조 자신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왕규의 딸을 제2비로 삼았는데, 왕규의 학문적 능력과 군사적 지원으로 혜종의 왕위가 안정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왕규는 태조가 죽을 때 태자를 잘 받들어 나라의 정사를 처결하라는 태조의 유훈을 직접 받은 근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고, 혜종이 죽은 뒤 태조의 셋째 아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생존하여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으므로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3비. 합주(陜州: 지금의 陜川) 사람이며 대광(大匡) 이원(李元)의 딸이다. 부인의 이름에 붙은 대량은 신라말·고려초의 합천 지방 이름 이므로 출신지 명을 따서 왕비의 이름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자 첫머리에 후(後)가 붙어 있으며, 이는 선(先)·전(前)에 대칭되어 사용되는 용어이므로 태조 후비 가운데 그에 합당한 인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전)대량원부인의 이름을 가진 태조 후비는 보이지 않으므로 비록 이름은 다르더라도 대량 지방과 관계있는 인물을 찾아보면, 태조 제5비 신성왕후(神聖王后) 김씨(金氏)가 있다. 신성왕후에 대해서는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라는 《삼국유사》 보주와 신라 경순왕의 종매라는 《삼국사기》 설의 두 설이 있지만, 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이 대량주 태수를 역임한 일이 있으므로 후설의 경우에도 대량 지방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대량원부인은 태조비 신성왕후와 비견되어 후대량원부인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량 지방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관문이며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해인사 승군의 도움으로 전세를 만회한 접전지였다. 이러한 전투 요충지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태조는 자신의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생몰년 미상. 이름은 이간(李衦). 태종(太宗)의 7남으로 배위는 수안군부인(遂安郡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와 동양군부인(東陽郡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신씨는 딸 하나만 낳았고, 조씨가 2남 1녀를 낳았다. 시호는 희도(僖悼)이다. 자식은 정해도정(貞海都正) 이집(李緝)이 있다.
생몰년 미상. 백제 제17대 아신왕(阿莘王)의 둘째 아우이다. 405년(아신왕 14)에 임금이 죽었는데, 이때 태자 전지왕(腆支王)은 일본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그래서 중제(仲弟) 훈해가 섭정을 하며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계제(季弟) 설례(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일본이 병사를 보내 전지왕을 호송하도록 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니 국인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왕을 맞이해 세웠다.
생몰년 미상. 성종(成宗)의 서녀로 어머니는 숙의김씨(淑儀金氏)이다. 휘숙옹주는 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에게 하가(下嫁)했는데, 임숭재는 임사홍(任士洪)의 아들이다.
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관인.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의 명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수호(修好)를 구하였으나, 일본이 받아주지 않으므로 922년 6월 5일 대마도(對馬島)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생몰년 미상. 성종(成宗)의 서녀로 어머니는 숙의김씨(淑儀金氏)이다. 의령남씨 선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에게 하가하여 1녀를 두었다.
생몰년 미상. 신라의 왕족. 성은 김씨(金氏). 내물마립간의 어머니이다. 남편은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角干) 말구(末仇: 仇道葛文王으로 추봉됨.)이다. 아들 내물은 흘해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520년(중종 15)∼1604년(선조 37). 조선 중기의 고승(高僧)·승군장(僧軍將). 완산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법명이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 1. 가계와 탄생일화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3세 되던 해 사월 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하였다. 2. 출가·승려활동 그뒤 아명은 운학이 되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원각경 圓覺經》·《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법화경》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3. 승군활동 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은 문도 1,500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다가,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4. 입적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5. 선교관 휴정의 선교관(禪敎觀)에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이와같은 정의는 가장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그 진수를 밝히고 확립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정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一切衆生悉有佛性)’ 때문에 누구나 닦으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성도문(聖道門)에 입각하고 있다. 그의 선교관은 석가모니 이후로 면면히 이어온 전통적인 불교관(佛敎觀)에 근거를 둔 것이며,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의 뜻을 삼처전심(三處傳心)과 오교(五敎)로써 풀이하였다. 또,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세존(世尊)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부처님께서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 다음, “세 곳이라 함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多子塔前 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靈山會上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밖으로 내보이심(沙羅雙樹示雙趺)이 셋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선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선지의 근원을 밝혔다. 이어 “부처님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이니, 첫째는 인천교(人天敎)요, 둘째는 소승교(小乘敎)요, 셋째는 대승교(大乘敎)요, 넷째는 돈교(頓敎)요,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바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하였다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교의 근원을 밝혔다. 이는 선교의 근원을 밝힌 일종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같이 동떨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휴정의 선교관은 선이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되어, 깨달음에로 나아간다고 보았고,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선교의 관계에 대하여 교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먼저 모든 법을 가려서 보이고 다음에 공(空)의 이치를 가르친 것인데, 이 공의 이치에 곧바로 들어가서 체득하는 것이 선이며, 특히 조사선(祖師禪)은 그 자취가 뜻의 자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6. 선교의 정의 이상의 선교에 관한 정의를 간추려보면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敎是佛語)이며, ② 실재를 증득함이 없는 선지는 교의 흔적일 뿐이며, 마음을 얻은 자는 교문만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헛된 수작까지도 먼지가 된다. ③ 선은 분별이 없는 경계를 뜻대로 오가는 천지간의 한도인(閑道人)이며, 교문의 8만 4000법문은 일심(一心)에 귀착하며 일념회광(一念廻光)으로 심성(心性)을 뚫어보는 견성일의(見性一義)에 귀결한다. ④ 교문은 공을 설파하여 유상(有相)의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며, 조사선의 목적은 언하(言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게 함으로써 언어와 문자에 잡힌 분별을 끊고 자기의 영광(靈光)이 천지에 비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⑤ 교는 활과 같아서 우여곡절이 있지만, 조사의 격외선지(格外禪旨)는 직선의 활줄과 같아서 모든 차별을 여의고 일체의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일미에로 직입(直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점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관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7. 선교관의 정립 따라서, 선교양종을 제도상으로 통합하기 위한 토대로서 선교관을 정립할 필요를 느껴 그는 《선교석 禪敎釋》을 저술하였다. 《선교석》은 독단을 피하고 옛사람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론을 논리정연하게 설득시켜 선이 주요, 교는 선에 추종한다는 이론을 내세운 것으로 의의가 깊다. 즉, 선적(禪的)인 통일불교의 토대를 굳힌 것으로 재래의 선문에서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타파하고 있는데, 전통을 전수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지를 구명함에 있어서의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려 한 것이다. 그 예로서 《능엄경》을 선의 소의경전으로 삼아 오던 종래의 전통을 한낱의 갈잎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고, 《반야경》에 대해서도 성문(聲聞)을 위한 방편문(方便門)이 어찌하여 선종의 종주가 될 수 있는 것인가를 반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만 중히 여기고 마음을 가벼이 보면 비록 수많은 겁(劫)을 닦는다 하더라도 천마외도(天魔外道)를 지을 뿐이라.”는 고덕(古德)의 말을 인용하여 혹평하였다. 그리고 필경의 이치인 선의 본지, 즉 부처님의 본심에 대하여 “자기의 본분 위에는 본래 명자(名字)가 없지만, 방편으로 그것을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선교의 차이를 논하면서 선과 교를 통합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선교일치의 입장보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그는 염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염불과 선을 일치시키려는 목적에서 “부처님은 상근인(上根人)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이 정토(淨土)이며 자성(自性)이 곧 미타(彌陀) 이다(淸虛堂集 권4)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성미타’가 ‘자심정토’로 이룩됨을 강조한 것이다.” 하였다. 이러한 유심정토사상(唯心淨土思想)은 그의 선지의 진리와 상통하고 있다. 8. 법맥과 저서 휴정의 법맥, 즉 그 사상의 계통을 그 자신이 언명한 것을 보면, 벽송(碧松)은 조(祖)요, 부용(芙蓉)은 부(父)며, 경성(敬聖)은 숙(叔)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직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의 말에 의하면, “태고(太古, 普愚)화상이 중국 무하산(霧霞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을 사(嗣)하여 이것을 환암(幻庵)에게 전하였으며,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구곡은 정심(正心),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지엄은 영관에게, 영관은 서산에게 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휴정의 법맥은 중국 5가 7종 중의 한 종파인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며, 우리나라의 임제종조인 보우의 7대손이 된다. 휴정의 제자는 1,000여명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가 70여명이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현빈인영(玄賓印英)·완당원준(阮堂圓俊)·중관해안(中觀海眼)·청매인오(靑梅印悟)·기암법견(寄巖法堅)·제월경헌(霽月敬軒)·기허영규(騎虛靈圭)·뇌묵처영(雷默處英)·의엄(義嚴) 등이 특히 유명하며, 유정·언기·태능·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4권 2책과 《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선교석》·《운수단 雲水壇》·《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제산단의문 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생몰년 미상. 백제 말기의 장군. 서부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장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大興)을 근거지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의 나당연합군으로는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광복운동을 막아내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보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자, 백제유민의 광복운동은 더 버텨나가기 어렵게 되어 수로로 공격한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 데 공을 세워,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中女)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즉,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고, 이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 뿐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