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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융희 1)∼1983년. 판소리의 여류명창. 본명은 분칠(粉七), 호는 향곡(香谷). 1907년 4월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城內)에서 살다가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으로 이사했으며, 그뒤 다시 서울 인의동과 봉천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양금과 가야금 등의 악기와 판소리 및 시조를 배웠는데, 김봉이(金鳳伊)에게서 〈심청가〉를 배웠고, 정정렬(丁貞烈)에게서 오랫동안 〈심청가〉·〈적벽가〉·〈춘향가〉를 배웠다. 민족항일기에 레코드판에 판소리를 취입한 적이 있고, 조선성악연구회와 창극단에서 활동하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향곡(鄕谷)에 은거해 있다가 광복 뒤 다시 창극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60년대초 판소리계에 나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64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정정렬의 〈춘향가〉를 가장 순수하고 완벽하게 전창(全唱)하는 명창으로 평가받았으며, 박초선(朴初宣)·최승희(崔承希)·최영기(崔英基)·정금내(鄭今乃)를 후계자로 두었다.
1603년(선조 36)∼1683년(숙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 자는 명보(明甫), 호는 오소재(吾巢齋).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노(簵)이며, 어머니는 배천조씨로 헌(憲)의 딸이다. 김집(金集)·민재문(閔在汶)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올랐으며, 봉상시주부 겸 승문박사(奉常寺主簿兼承文博士)·성균관전적 겸양현고주부·음성현감·김제군수·창원부사·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부임했던 군현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70세가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의 갈천(葛川)위에 오소재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오소재집》 2권 1책이 있다.
1556년(명종 11)∼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 문신·효자. 자는 이정(而正), 호는 서암(西岩)이고, 본관은 통천(通川: 옛 통주)이며, 전라북도 완주(完州) 출신이다. 고조부는 김환길(金丸吉), 증조는 김시보(金時輔)이고 조부는 김개근(金漑根), 부는 김진(金瑱)이다. 김여련의 가계는 대대로 효행이 지극하여, 고조부와 증조부는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고, 조부 김개근과 백부 김원(金瑗), 부친 김진에게는 정려가 명해졌다. 천성이 후덕하고 재예가 출중하였으며 친척들과 화목하였다. 1588년(선조 21)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한림(翰林)에 올랐다. 왕이 의주로 몽진(蒙塵)할 때 호종(扈從)하다가 의주(義州)에서 순절했다. 조헌(趙憲)이 그의 효행과 덕행을 크게 칭찬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할아버지는 응룡(應龍)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볼모가 되어, 청나라의 심양(瀋陽)으로 갈 때 이들을 수행하였다. 용감하고 도량이 넓어 박배원(朴培元)·신진익(申晋翼) 등과 함께 세칭 용만팔장사(龍灣八壯士)에 선발되어 심관(瀋館)을 호위하였다. 청나라가 금주위(錦州衛)와 산해관(山海關)을 칠 때도 별시위(別侍衛)로 두 왕자를 호종하는 등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고 이듬해 두 왕자의 귀국이 허락되자, 서울에 소식을 전했다. 이러한 공로로 별군직(別軍職)을 지냈고, 자산(慈山)·덕천(德川)의 군수를 지냈다.
1625년(인조 3)∼1711년(숙종 37).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회일(會一), 호는 기산(箕山). 김윤안(金允安)의 손자이며, 김기후(金基厚)의 아들이다. 종숙부(宗叔父) 김윤문(金允文)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외조는 안동(安東)의 권빙(權憑)이고, 처부는 안동(安東)의 김희진(金希振)이다. 재종형(再從兄) 김여옥(金如玉)에게 배웠고, 이유장(李惟樟)과 도의(道義)로 강마하였다. 향인(鄕人)들이 ‘산남의 두 원로[山南二大老]’라고 칭송하였다.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오직 ‘충신독경(忠信篤敬)’ 넉 자를 저력처(著力處)로 삼았다. 후에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기산집(箕山集)》·《일력(日曆)》 이 있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부령(扶寧), 부안(扶安). 아버지는 문정(文貞) 김구(金坵)이다. 고려 때 형부상서(刑部尙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가 되었다. 충렬왕이 세자(世子)일 때 그를 모시고 원(元)나라에 들어가 보필하였다. 이후 충렬왕이 왕위에 오를 때 단권(丹券)을 받았다. 유교의 진흥에 힘써 동생 강릉안렴사(江陵按廉使) 김승인(金承印)에게 학교를 세우도록 권하여 강릉(江陵)의 서쪽 화부산(花浮山)의 현적암(峴滴岩) 아래에 문묘(文廟)를 짓고 우리 나라 최초의 향교(鄕校)를 세웠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548년(명종 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충신. 본관은 순천.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평산 출신. 찰방 훈(壎)의 아들이고, 영의정 유(瑬)의 아버지이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높은 벼슬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담양부사를 지냈고,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옥에서 풀어 자기 막중(幕中)에 두려고 하였으나,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충의로운 선비임을 알고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하여 신립과 함께 출전했다. 신립이 단월역(丹月驛: 현재의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몇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왜적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정찰할 때 상주(尙州)에서 패주해온 순변사 이일(李鎰)을 만나 조령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충주로 나아가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것을 반대하고 많은 적을 적은 수의 군사로 물리치는 데는 먼저 조령을 점령하여 지키는 것이 좋고,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하여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㺚川)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치고 신립을 따라 탄금대(彈琴臺)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을 당하지 못하여 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그는 충주싸움의 패배를 예견하고 아들 유에게 “삼도(三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요청했으나 한 사람도 이에 응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이 힘을 다해 싸우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남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본시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또 장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갓 재가 되어버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지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가족에게는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우리 일가는 모두 임금님의 행재(行在)로 가서 돕되 결코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광해군초에 충절로써 정려(旌閭)되었으나, 인조반정 뒤에 종래의 포상에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여 고쳐진 일이 있으나 1639년(인조 17)에 그의 아들 유의 청에 의하여 다시 정표(旌表)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신립 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의(殉義)한 충주 달천의 옛터에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복(基福). 아버지는 안국(安國), 어머니는 임효창(林孝昌)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관직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인물이 경박하고 출세에 급급하여 가정의 교훈을 따르지 않아 일찍이 숙부 정국(正國)이 우리 형제의 뒤를 이을 만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에 와서 외척 윤원형(尹元衡)에게 붙으니 정국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평소 김홍도(金弘度)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로 당을 만들어 다투었다. 1557년(명종 12) 윤원형이 첩을 처로 삼은 사실을 김홍도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더라고 윤원형에게 고자질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어 그의 당인 대사간 김백균(金百鈞)·사간 조덕원(趙德源)과 함게 탄핵하여 김홍도와 김규(金虯)를 각각 갑산과 경원으로 귀양보내고 김계휘(金繼輝)를 삭출시켰다. 뒤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으로부터 사사로운 원한으로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을 받았고 또 이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1574년(선조 7)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서용을 청하여 한때 선조의 허락을 받았으나 삼사(三司)에서 극력 반대하여 끝내 서용되지 못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본관은 경주.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를 부르짖고,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사재를 털어 군량미를 확보하고서, 휘하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 곳곳에서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뒤 아들 응춘(應春)과 함께 왕의 행재소에 나아갔으나, 곧 죽었다. 난이 평정된 뒤 아들과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뒷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1445년(세종 2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은경(殷卿). 강화부사 수(洙)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 겸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으며, 뒤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재행겸비자(才行兼備者)를 선발할 때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뽑혔으며, 1472년 병조정랑이 된 뒤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79년 성균관의 사예(司藝)로서 원수(元帥)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481년 사간원사간·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도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참의로 재직중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1487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판결사(判決事)를 겸한 뒤 경상도·강원도의 관찰사, 호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9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493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사람의 뜻을 살피기에 힘써 향응(響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전라남도 영암(靈岩) 출신이다. 조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김극조(金克祧)이고, 부친은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이다.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경흥부사(慶興副使)를 거쳐 방백(方伯)의 봉계(奉啓)로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에 발탁되었다. 변방의 오랑캐를 잘 다스려 호인(胡人)들이 두만강 건너편의 후춘(厚春: 지금의 훈춘)에 송덕비를 세웠다. 부임 초에 군제를 잘 통솔하여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다. 1649년(효종 1)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내면서 군민(軍民)의 재물을 갈취하였다는 장계가 올라와 벼슬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이전의 공로가 참작되어, 1652년(효종 4)에 다시 벼슬에 등용되었으며,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 겸 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냈다. 향년 71세에 사망하였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가 추증(追贈)되었다.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적자(嫡子) 김세기(金世器)는 1651년(효종 2), 서얼(庶孼) 김세량(金世亮) 은 1672년(현종 13)에 각각 무과에 급제하였다.
1575년(선조 8) 12월 25일∼1640년(인조 18) 4월 25일.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회(伯晦), 호는 맹암(盲巖).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의 아들로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동면(東面) 두암리(斗巖里)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고상하고 담박하였고 학문과 행실에 힘썼다. 아버지의 병에 단지(斷指)하니 효우로 알려졌다.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18위로 합격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임자년에 태학에서 공부할 때에 국시(國是)가 전도됨을 보고 의관을 떨치고 집에 돌아와서 ‘담 넘는 것을 탄식한다[踰墻歎]’는 글을 지어 자신의 지조를 보이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 영천의 풍속이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따지기를 좋아하였는데, 김여엽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그의 장례에는 수백인이 와서 조문하였다. 묘소는 동면 흑석촌(黑石村) 묘향(卯向)에 있다. 1613년 계축년 사마시의 동년(同年)인 학사 김응조(金應祖)가 쓴 묘표(墓表)가 《학사집(鶴沙集)》에 실려 있다.
1596년(선조 29)∼1662년(현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군수(君粹), 호는 미산(薇山).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우급(友伋)이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검열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도보로 강화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환도 후 봉교(奉敎)·전적(典籍), 이어 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향리에서 김지수(金地粹)와 함께 싸움터로 달려가는 도중 체부(體府)의 격문을 보고 함평(咸平)에서 의병을 일으켜 방어에 임하다가 상경하였으나, 이미 강화가 성립되어 군사를 해산하였다. 이어 지평·장령·정언·사간·집의·필선 등을 역임하고, 여산군수(礪山郡守)로 나가 기민(飢民)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가 되자 진강(陳講)의 기회를 얻어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647년 밀양부사로 나가 현저한 치적을 쌓았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뒤 한성부우윤에 임명되고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황해도 및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대동법 실시의 불합리함을 주장하다가 체직되었다. 그뒤 부총관(副摠管)·형조참판을 거쳐 광주부윤이 되었으나 방백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렸다가, 형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를 거쳐 판결사(判決事)로 전직하여 노비송안(奴婢訟案)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나, 병을 얻어 파산(坡山)의 장사(庄舍)로 돌아가 치유를 하다가 죽었다.
1581년(선조 14)∼1661년(현종 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숙회(叔晦), 호는 허주(許舟). 아버지는 생원 김개국(金盖國)이다. 향리 출신 인물들을 수록한 《단권(丹券)》을 저술하였다. 병자호란 때 재야 선비의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는 《허주문집(虛舟文集)》을 저술하였고, 1892년(고종 29) 후손 김복연(金福淵)과 김창희(金昌羲) 등이 이를 편집, 간행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행의(行誼). 자는 덕휘(德輝),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영(金韺)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도량이 넓어 사람을 대할 때 꾸밈이 없이 정성으로 하였다. 학문을 할 때는 남이 알아 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몸소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특히 부모 섬기는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법도에 맞게 하고, 아이들을 훈육할 때는 엄격하게 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받았다. 영조 때에 행의(行誼)로 이조참의(吏曹參議)가 추증(追贈)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유학자. 본관은 청도(淸道)이며, 무오사화를 전후로 전라남도 무장(茂長)으로 이주하였다. 조부는 호강공(湖剛公) 김점(金漸), 부친은 공주김씨(公州金氏)의 시조인 예조참판(禮曹參判) 김의손(金義孫)이다. 김여의(金麗儀)는 청도김씨(淸道金氏) 무장파(茂長派) 낙향조(落鄕祖)이다. 그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종직이 금성(錦城)에 재직할 때 수행한 일이 있었다. 그때 무장(茂長) 동백호(冬栢湖)와 한림봉(翰林峯) 아래 원당동(元堂洞)의 경치에 반하여, 후일 은둔하여 지내기로 다짐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문인들이 화를 당하자,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가족들을 데리고 원당동에 와서 은거하였으며, 이로써 청도김씨(淸道金氏) 무장파 낙향조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1662년(현종 3).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광중(光中), 호는 삼석재(三惜齋)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전라남도 함평(咸平) 출신이다. 조부는 임진·정유왜란 때 공신 김몽복(金夢福)이다. 생부는 김우민(金友閔)이며, 김우안(金友顔)의 양아들로 들어갔다. 아내는 서산유씨(瑞山柳氏) 유엽(柳曄)의 딸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하생으로서 덕행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 탐구와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1730년(영조 6) 함평군(咸平郡) 나산면(羅山面) 용두리(龍頭里)에 있는 선호서원(船湖書院)에 배향되었고, 1816년(순조 16)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증직되었다.
1893년(고종 30)∼미상. 시인·교육자. 평안북도 정주 출신. 호는 유암(流暗). 1918년 3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 학업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줄곧 특대생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시작품은 양적으로 극히 한정되지만, 《학지광》 5호에 실린 〈산녀 山女〉를 비롯한 〈한〉·〈잘〉 등 몇 편의 시작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에 뒤이어 현상윤(玄相允)·최소월(崔素月)·김안서(金岸曙) 등과 함께 주요한(朱耀翰)이 등장하기 이전, 1910년대 신체시단의 일원으로서 과도기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 시대로 보아 ‘산(山)’을 의인화한 시의 제목조차도 특이하지만, 그 전체의 표현기법도 고도하다. 당시의 시작들에 나타난 외형적 음수율이나 행련법의 제약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로부터 〈불노리〉에 이르는 한 과도기적 작품치고는 시적구조, 곧 이미지와 은유는 물론, 시어구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자유시형에 가깝게 접근시키고 있다. 전대의 개화기 시가나 최남선과 이광수의 시작에 나타난 민중적 집단의식과는 달리 개아(個我)의 서정성을 시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의 무관.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수사 우(宇)이다. 1611년(광해군 3)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한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637년(인조 15) 봉림대군(鳳林大君)·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갈 때 옥하관(玉河關)에 이르러 〈월명비안 月明飛雁〉의 시를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무용으로 이름을 떨쳐 심양에 있을 때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가 그의 무용을 인정하고 두 사람이 씨름을 하다가 우거가 죽었으나 군법(軍法)이라 하여 죄를 받지 않았다. 본국으로 돌아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라남도 영암에서 일생을 마쳤다. 효종이 즉위하자 부름을 받았으나 이미 죽은 뒤라 관직을 내려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또, 효종은 달 밝고 기러기 나는 밤에 그를 추억하는 시제(詩題)로써 선비들을 시험하였다.
1556년(명종 11)∼1630년(인조 8). 조선 중기 의병장·공신. 자는 자임(子任)이고 호는 헌헌헌(軒軒軒)이다. 본관은 영광(靈光)이며, 전라남도 장흥(長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헌납(獻納) 석정(石亭) 김괴(金塊), 증조부는 홍문관습독관(弘文館習讀官)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郞) 김구수(金龜壽), 생부는 김상(金愓)이고 양부는 부사과(副司果) 김열(金悅)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사사하였고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과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과 교유하였다. 1591년(선조 24)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2위로 합격한 뒤 책읽기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병서(兵書) 탐독에 힘을 쏟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김여강(金汝剛)·종제 김의용(金懿龍)과 함께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의병장 임계영(任啓英)에게 보내었고, 박광전, 김익복(金益福), 이잠(李潛) 등과 함께 왜적과 맞서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이 일을 임계영이 조정에 보고하여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같은 해 9월 변사정(邊士貞)이 의병을 일으키자 병사 300명을 모집하고 군량 80석을 모아 호군(護軍)에게 식량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공을 변사정이 계문을 올려 이조참판에 제수(除授)되었다. 또 의주(義州)로 피신한 선조(宣祖)에게 3백 석의 의곡을 보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除授)되었다. 강화를 맺고 의병이 해산되었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전란에 대비하였다. 이후 실제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으며 이때에도 공을 세워 여러 차례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저서로 《헌헌헌문집(軒軒軒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