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1617년(광해군 9)∼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원(仲源), 호는 칠매당(七梅堂). 칠촌(漆村) 김충남(金忠男)의 증손이자 명암처사(鳴岩處士) 김형(金逈)의 손자이다. 아버지 김성로(金成輅)는 1624년(인조 2) 갑자증광사마시(甲子增廣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다. 김오(金浯)는 1660년(현종 1) 경자증광사마시(庚子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문(斯文)을 확립하였으며 경학(經學)에 전념하였다. 아들 죽은(竹隱) 김진우(金震羽)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동몽훈설(童蒙訓說)》·《천인도(天人圖)》·《심성도(心性圖)》를 저술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1906년(광무 10)∼미상. 평론가·공산주의운동가·정치가. 평안북도 용천 출생. 일본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6년에는 용천에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고, 1927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학생독서회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28년 이후에는 주로 문학과 철학에 관련된 문화비평에 종사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고, 1945년 11월 15일에 건국동맹이 해소되고 결성된 여운형(呂運亨)의 조선인민당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46년 2월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民戰)의 상임위원 및 선전부장을 맡았고, 홍증식(洪增植)이 발행인으로 있는 《조선인민보 朝鮮人民報》에 참여하였다. 1946년 9월 미군축출을 선동하여 미군정포고령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인민보》·《현대일보 現代日報》·《중앙신문 中央新聞》 등의 좌익신문에 대해 정간처분이 있을 때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하였으며, 복역중인 1946년 11월에 조선인민당의 합당파와 함께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당하여 발족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1948년에는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였으나, 1953년 8월에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제명당하였다. 저서로는 광복 직후 좌익계 인물들에 대한 평론집인 《지도자론 指導者論》과 《지도자군상 指導者群像》 등이 있다.
1603년(선조 36)∼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상지(相之). 김천우(金天宇)의 증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김제군수(金堤郡守) 김가기(金可幾)의 손자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별좌(別坐) 김덕민(金德閔)의 아들이다. 외조는 신담(申湛)이다. 1627년(인조 5) 정묘식년사마시(丁卯式年司馬試) 진사(進士) 2등에 합격하였고 이어 현풍현감(玄風縣監)을 지냈다. 공무를 잘 수행한 행적이 《현풍현지(玄風縣誌)》에 기록되어 있다.
1596년(선조 29)∼1660년(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자는 여정(汝精), 호는 고산(孤山). 영주 출신. 늑(玏)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승사랑 수선(首善)이다.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수에 이르렀다. 남달리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또한 마음이 맑고 욕심이 없어 행실이 바르다는 평판을 받았다.
1851년(철종 2)∼1894년(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개화운동가. 본관은 안동.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 공주 출신. 1. 성장기 병태(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 양부 병기가 강릉부사로 되어 임지에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학문뿐만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2. 개화당의 세력확장 노력 당시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박규수(朴珪壽) 등에 의하여 나라의 근대적 개혁을 위한 개화사상이 형성되자, 김옥균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으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확장에 진력하는 한편,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진전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한 다음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제1차 도일(渡日)직후에 《기화근사 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 3. 자주근대화의 노력과 청국의 방해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라의 자주근대화를 위해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을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장을 국가의 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청국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당시 청국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하여 3천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해가고 임오군란을 진압, 명성황후 정권을 재수립한 뒤에도 철수하지 아니하고 청군을 그대로 서울에 주둔시킨 채,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 위한 적극간섭정책을 자행하였다. 청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이 그들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조선의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김옥균 등의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극도로 탄압하였으며,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명성황후 친청 사대수구파들도 이에 야합하여 김옥균 등 개화당을 박해하였다. 4. 위로부터의 대개혁 모색 김옥균은 임오군란 후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徐光範)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치도약론 治道略論》을 저술하였다. 김옥균은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Mo"llendorff, P. G.)와 명성황후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김옥균이 휴대한 조선 국왕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하여 방해함으로써, 국채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1884년 4월 귀국하였다. 그는 세차례에 걸친 도일과정에서 일본 명치유신의 성과를 견문하고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으며, 그가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 및 명성황후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하게 되었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 그의 개화사상과 주장을 실천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청국과 프랑스가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 5월 청국은 조선에 주둔시킨 3천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청군은 1,500명만 남게 되었으며, 1884년 8월 마침내 청·불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1884년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에 갔다가 그해 10월 30일 서울에 귀임하여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면서 추파를 던져오자, 김옥균은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개입을 막는 데 이용하기 위하여 조선군 1천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용의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5. 삼일천하와 개혁실패 그리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그날밤으로 명성황후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李載元: 국왕의 종형)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김옥균은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여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형식(傳敎形式)을 빌려 공포하였으며, 이날 오후 3시에는 국왕도 이를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국정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듯하였다. 그러나 청군 1,500명은 이날 오후 3시부터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개입을 시작하여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하면서 공격해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국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은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도망하고 철수해버렸다. 이에 개화당은 청군의 무력공격을 방어하지 못하여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망명한 김옥균을 박해하여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1888년 북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그뒤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1894년 3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으나, 명성황후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 동화양행(東和洋行)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명성황후 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 4개월 뒤에 갑오경장으로 개화파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에 의하여 그의 죄가 사면, 복권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저서로는 《기화근사》·《치도약론》·《갑신일록 甲申日錄》 등이 있다.
1921년∼1990년. 교육자·여성운동가. 본관은 풍천(豊川). 평안남도 맹산 출신. 아버지 병두(炳斗)와 어머니 방신근(方信根)의 1남 2녀 중 장녀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평양으로 이사하여 숭의여자중학교·서문고등여학교를 마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진학, 1943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도미하여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1949∼1952), 템플대학 대학원(1957∼1958)에서 수학하고,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깊은 기독교신앙과 인간평등사상, 그리고 남녀평등의 이념을 신조로 하여 평생을 여성교육 발전에 헌신하였다. 1943년 모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시작, 1952년부터 기독교학과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1년 김활란(金活蘭) 총장의 후임으로 제8대 총장에 선임된 이래 18년간 총장직을 역임하였다. 재임중 학교 발전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여학사협회 회장,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이사, 백인협의회 회장, 가정법률상담소 이사 등 여러 여성단체에서 지도적 직책을 맡아 한국여성계 전반의 발전을 위한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 또한, 다락방전도협회 회장,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 기독교방송 이사 등 기독교계를 위한 활동과 장학재단을 위시한 여러 사회봉사기관에서 소외계층을 위한 인권회복과 한국사회발전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특히, 총장재임시 제4공화국 유신정권에 항거하는 학생과 교수들에 대한 정부당국의 압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여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진력하였으며, 스스로도 민주주의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여 지성인의 용기를 보여준 바 있다. 1979년 총장퇴임 후 명예총장으로 추대되고 1979년 12월부터 1980년 5월까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장관재임기간은 짧았으나 특유의 민주적이고 비관료적 행정으로 각급학교 자율화를 단행하여 많은 화제를 남겼다. 국민훈장 모란장(1970), 마리아클라라상(필리핀, 1976), 인촌문화상(1982), 유니온신학대학원 공로상(미국, 1983)을 받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 적십자인도상 금장이 추서되었다.
1878년(고종 15)∼1930년. 조선 말기의 문인. 자는 찬영(贊英), 호는 신헌(愼軒)이며,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증조부는 김중현(金重鉉)이고, 조부는 김한정(金漢貞)이며, 부는 김방식(金邦植)이다. 1878년(고종 15) 6월 23일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한 까닭에 많은 독서를 하면서 여가를 보냈다. 장성한 후에는 이미 학문이 깊어 원근(遠近)의 여러 학인(學人)들과 교유하였다. 1930년 11월 20일 53세의 나이로 졸(卒)하였으며, 문집으로 《신헌선생문집(愼軒先生文集)》이 전한다.
1907년∼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晋州劍舞〉 예능보유자.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시 동래동에서 살았다. 소학교 졸업후 김자진(金子眞)으로부터 검무를 배워 23년간 무용계에 종사하였으며, 1967년 1월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우선(李又仙)·정필순(鄭畢順)을 후계자로 두었다.
1604년(선조 37)∼미상.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형숙(亨叔). 증조부는 김구(金𥗫)이고 조부는 김선경(金善慶)이며 아버지는 군수 김해(金嶰)이다. 1642년(인조 20)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 23위로 합격하였다. 효종 때 풍기군수(豊基郡守)에 이어 장령·정언·헌납을 역임하고 숙종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아들 김도(金濤)가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역신(逆臣). 충숙왕 때 당시 심양왕(瀋陽王) 고(暠)와 같은 당(黨)이 되었다가, 1328년(충숙왕 15) 같은 무리였던 조식(趙湜)·권하(權賀)·전굉(田宏) 등과 순군옥(巡軍獄)에 하옥된 뒤 곧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소환해갔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문신. 1213년(고종 즉위) 강종의 죽음을 알리는 고애사(告哀使)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1216년 거란의 유족들이 압록강을 건너 북계(北界)에 침입하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서 중군병마부사(中軍兵馬副使)가 되어 상장군 노원순(盧元純) 등과 함께 이를 토벌하였다.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 가계에 대해서는 성덕왕 때 상재(上宰)의 지위에 있던 김순정(金順貞)의 아들이라는 설과 손자라고 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760년(경덕왕 19) 염상(廉相)의 뒤를 이어 이찬(伊飡)으로 시중이 되었으나 763년에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뒤 상상(上相)으로서 검교사병부령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 감사천왕사부령(檢校使兵部令殿中令司馭府令修城府令監四天王寺府令)을 지냈으며, 또한 검교진지대왕시사(檢校眞智大王寺使)도 겸하여 경덕왕과 혜공왕 때의 최고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경덕왕을 지지하고 협력한 왕당파의 인물이었다는 견해와, 이와 반대로 경덕왕의 전제주의에 반대한 반왕당파의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어 서로 맞서고 있다.
1577년(선조 10)∼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영암 출신.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극조(克祧)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가 끝나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에서 10여명을 목베었으며,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하여 후인들이 이 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점검을 위해 온 것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 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에 남원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해 절충장군, 1618년 내금위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체임되었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황해도병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1546년(명종 1)∼1577년(선조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수(彦粹). 임진란에 충무공 이순신을 쫓아 종군하여 전공으로 한산도 주사방장(舟師防將)으로 승진하였다. 온천(溫川)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구사일생으로 구조를 받았으나 왜선 안에 조선인 포로를 실은 배였다.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어선을 타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1876년(고종 13)∼1949년.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송암(松巖). 서울 출신. 1898년 여수통신주사(麗水通信主事)·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 등을 지내고, 국권상실 이후에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봉도(奉道)·법암장(法庵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그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달 27일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최린(崔麟)·오세창·권병덕(權秉悳) 등과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로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국민회 재정부장을 지냈고,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09년∼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인 〈양주별산대놀이〉의 해금 예능보유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양주군 은현면 선암리에서 살았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해금을 배워 〈양주별산대놀이〉 반주음악으로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쳤다. 1964년 12월 7일에 〈양주별산대놀이〉 해금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고희정(高熙貞)을 후계자로 두었다.
1835년(헌종 1)∼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대사헌 노(鏴)의 손자이며 병조판서 시연(始淵)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61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되어 출사(出仕)하였다. 그뒤 고종조에 들어와 사헌부대사간·성균관대사성 등 간쟁(諫爭)·문한(文翰)의 직을 두루 거친 뒤 1887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리고 그해의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또한, 광무연간에는 황주(黃州)·안악(安岳) 등지의 군수와 황해도·충청남도의 관찰사 등 주로 외관을 거친 다음 궁내부특진관·봉상사제조·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을 역임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석견(石堅)의 서자(庶子)이다. 1346년(충목왕 2) 원나라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까지 지냈다. 뒤에 고려로 돌아오니 권세있는 자들이 다투어 주연을 베풀고 그를 환대하였다. 이때 전왕인 충혜왕이 문책을 받아 원나라로 불려갔는데, 정승 채하중(蔡河中)이 그 까닭을 묻자 왕의 주위에 아첨하는 무리만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뒤에 원나라의 부름에 의하여 돌아갔다.
1606년(선조 39)∼1681년(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극계(克繼)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학유(學諭)와 전적을 거쳐 직강(直講)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김천·무장·연안·양산과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뒤 함평현감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불구당집》이 있다.
1550년(명종 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공(士恭), 호는 서봉(西峰). 할아버지는 정국(正國)이며, 아버지는 계조(繼祖)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2년에 사복시첨정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운반의 임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1599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이듬해 지평이 된 뒤, 1601년 사도시정(司䆃寺正)·장령·사간·사성·상의원정(尙衣院正)·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시와 서화에 이름이 높아 선조가 일찍이 ‘선서재자선화학사(善書才子善畵學士)’의 8자를 써서 내려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