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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정조 18)∼1860년(철종 11).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도관(道貫)이며, 호는 복촌(復村)이다.본관은 울산(蔚山)이고,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복흥면(福興面) 사창(社倉)에서 태어났다.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예이며, 부친 김응환(金膺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관직은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기개와 도량이 넓고 의기가 당당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엄하여 집 근처에는 불량하거나 옳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얼씬거리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또 자식이나 조카들을 가르칠 때에는 언제나 《소학(小學)》에 기본 바탕을 두고 교육하는 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8세손으로 관직이 이조참의(吏曹參議)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등과는 도의(道義)로서 사귀었다. 저서로 유집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나, 정확한 서명(書名)이나 소장된 곳은 확인 되지 않고 있다.
1814년(순조 14)∼1890년(고종 27).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복흥면(福興面) 사창(社倉)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우(景佑)이다.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다. 부친은 증 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지환(金趾煥)이다. 1846년(헌종 12)에는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특별히 제수(除授)되었으며, 1886년(고종 23) 17차 정사에서 가감역관(假監役官)에 제수(除授)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능력을 인정받아 호군(護軍)에 단부(單付)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가설(加設)되었다. 노년에는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除授)되는 등, 말년에 이르기까지 복록을 누렸다. 이에 따라 그는 3대가 추숭(追崇)되는 임금의 은혜도 입었다.
미상∼1363년(공민왕 12). 고려 후기의 정치가. 본관은 안성. 공민왕이 원자(元子)로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할 때 시종한 공로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호군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응양군상호군이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의 관직을 받았다. 권신 조일신(趙日新)과는 반목했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된 뒤 수충분의공신(輸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조일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궁중에서 숙직하면서도 적을 막지 않고 홀로 무사하였다고 하여 마침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354년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할 군대를 조직할 때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져서 이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제수되었고, 그뒤 홍의(洪義)·정세운(鄭世雲) 등과 함께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한편, 이들과 권행(權幸)을 다투던 김보(金普)가 어머니상을 당하자 비밀리에 행성도사(行省都事) 최개(崔介)를 설득하여 왕에게 백관들로 하여금 삼년상을 행하도록 청하여 김보를 견제하려고 왕지(王旨)를 고친 사건이 발각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다. 1356년 기철(奇轍)일당을 제거한 뒤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1358년에는 중서문하시랑평장사(中書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순군만호(巡軍萬戶)가 되어서는 무뢰배들을 모아 순군에 두고 항상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며, 1361년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되어 이를 방어하였다. 1362년 평소 사이가 나쁜 정세운이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공을 크게 세우자 이를 시기하여 음모를 꾸며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로 하여금 죽이게 한 다음, 안우 등이 주장(主將)인 정세운을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이를 또한 참살하였다. 그뒤 찬성사(贊成事)에 올랐으며,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쉽게 항복하여 군(郡)으로 강등된 수원부(水原府)에 대하여 주민들의 뇌물을 받고 다시 부로 승격시켜 주었다. 1363년 순군제조(巡軍提調)가 되어 흥왕사(興王寺)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왕을 시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 등을 살해하였다. 이 음모가 실패하자 도리어 난병을 토벌하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잡힌 자는 모두 죽여 난이 진압된 뒤에는 오히려 일등공신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마침내 그와같은 사실이 드러나 밀성군(密城郡: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유배되었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로 옮겨진 뒤 처형되었다.
1557년(명종 12)∼1620년(광해군 12).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 수일(守一)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체직되었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정·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1702년(숙종 28)∼1789년(정조 13).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제대(濟大), 호는 효효재(嘐嘐齋). 서울 출신. 아버지는 주부(主簿) 창즙(昌緝)이고, 영의정 수항(壽恒)의 손자이다. 족형(族兄) 시보(時保)에게서 수학하였다. 신임사화에 의해 백부 창집(昌集)이 사사될 때 전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와 더불어 경서와 예설을 강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경행(經行)으로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되고, 이듬해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748년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78년에는 특례로 우승지에 임명되어 자주 소대(召對)에 나아가서 군신간의 정의가 두터웠고, 경사백가(經史百家)로부터 국조헌장(國朝憲章)에 이르기까지 두루 토론하였다. 권신 홍국영(洪國榮)의 뒷받침으로 추천된 송덕상(宋德相)의 사람됨에 대한 왕의 물음을 받고, 그의 부적함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784년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오르고, 1786년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학문과 전교(典敎)에 깊어 사류로부터 인망이 높았으며, 〈여씨향약〉 4조로 백성을 교화하고, 사마광(司馬光)의 10과를 사람을 쓰는 방도로 할 것을 청하였다.
1678년(숙종 4)∼1738년(영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이견(而見). 충청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두정(斗井)이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1720년(경종 즉위) 정언이 되었다. 이때 너무 관인하여, 왕으로부터 국론에 대한 올바르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문학·지평·수찬·교리 등을 지내면서 소론의 처결과 노론 4대신(四大臣) 복작(復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북평사를 거쳐 시독관으로 육진(六鎭)의 병폐를 정리하는 상소를 올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1731년 승지에 이어 대사간·이조참의·승지·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738년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성품은 매우 침착, 관인하였으며, 의리와 처세에 항상 조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97년∼1967년. 과학대중화운동가·요업전문가. 호는 장백산(長白山). 황해도 재령 출생.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화학공업과를 거쳐 동경의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藏前高等工業學校) 요업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1924년 발명학회를 설립하는 데 중심이 되었고, 과학대중화운동의 모체가 된 과학지식보급회의 산파역을 맡아 전무이사로 재직하면서 과학계뿐 아니라 언론·법조·교육·종교계에까지 참여하여 과학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과학종합지 《과학조선》을 창간하였고, 다윈(Darwin, C. R.)이 죽은 날인 4월 19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고 ‘과학주간’에는 과학지식보급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대대적인 과학계몽행사를 벌였다. 이밖에 이화학연구기관의 설립운동, 과학문고 발간사업 등 과학대중화운동을 펴나갔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민족의 과학의식을 높여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고 종국적으로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는 큰 목표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1938년 제5회 ‘과학의 날’ 행사를 하던 중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낙향하자, 과학대중화운동도 핵심인물을 잃어 시들어버렸다. 광복 이후 그는 전공인 요업분야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대한요업총협회와 한국요업학회 창립에 헌신적으로 관여하였다.
미상∼1918년. 한말의 의병장. 자는 유성(有聲), 호는 후은(後隱). 전라남도 영광 출신.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봄부터 기삼연(奇參衍)과 내왕하며,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여 동지를 모아 일심계(一心契)를 맺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논의하였다. 1907년 8월 8일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1일 김형식(金炯植)·박용근(朴溶根) 등 의병 1백명이 응하였다. 9월 6일 적 20명과 연곡사(蓮谷寺)에서 접전하여 10여명을 포살하고, 9월 24일 장성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여 기우만을 맹주로 추대, 도통령(都統領)이 되어 장성·함평·영광·고창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12월 중순 선운사(禪雲寺)에서 머무를 때 외아들 기봉(起鳳)이 합류하였고, 13일 흥덕 안치(安峙)에서 기봉이 전사하였다. 28일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통수권을 위임받았는데, 며칠 뒤 기삼연은 붙잡혀 총살되었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탄환 부족으로 철수하여 다내동에 머물렀다. 2월 19일 고창읍내로 들어가 세무주사 서상달(徐相達)을 사살하였으며,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명을 사살하였고, 3월 8일 구수산(九岫山)에서 적의 기병·보병 등 40여명을 사살하였다. 23일 대덕리에서, 4월 11일에는 무장 선운사에서 접전하였으며, 17일 무장 와공면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명을 사살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 18일 방장산(方丈山)에 머물렀다.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통수권을 박도경(朴道京)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白巖山)에서 3∼4년 동안 부상을 치료하였다. 1911년 봄 이후 금산에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많은 문헌 중에서 의병활동에 관한 〈의소일기 義所日記〉만 전하며, 이것은 《독립운동사자료집1》에 수록되어 있다.
1892년(고종 29)∼1964년.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는 운서(雲瑞), 호는 번와(樊窩)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系行)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김기순(金氣淳)이고, 조부는 김찬근(金瓚根)이며, 부는 김병희(金炳禧)이다. 2월 23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진곡리(眞谷里)에서 태어났다. 5세에 권상익(權相翊)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제상(李濟相)의 문하에서 성리(性理)를 탐구하였다. 학문이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에 예를 다하였다. 권상익(權相翊)의 문인이며, 유교경전에 박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합방) 이후로 두문불출하고 경서에 침잠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1월 26일 73세의 나이로 졸(卒)하였으며, 문집으로 《번와선생문집(樊窩先生文集)》 4권 2책이 전한다.
1840년(헌종 6)∼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원복(元復). 아버지는 정식(廷植)이다. 1871년(고종 8) 3월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가 되었다. 1892년에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그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64년(고종 1)∼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증조부는 명순(明淳)이며, 할아버지는 응근(應根),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병시(炳始)이다. 1891년(고종 28)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올랐다. 189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고, 1897년에는 5품에서 3품으로 전격적으로 승격되어 비서원승(祕書院丞)에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종2품에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동시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올랐다. 그해 4월에는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가 되었고, 이어서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1965년. 정악 거문고의 명인. 호는 금사(琴史). 전라북도 이리에서 출생하였다. 풍류와 가곡에 통달하였고, 전라북도 일대에서 추앙받던 율객이었다. 1950년대에 이리에서 활약하였으며, 정읍에 초산국악원(楚山國樂院)을 개설하였다. 가곡과 현금정악 등의 연주활동과 제자양성에 주력하였다. 제자로는 김윤덕(金允德)·황상규(黃祥奎)·신쾌동(申快童)·김홍진(金洪珍)과 정경태(鄭坰兌)·나용주(羅龍柱)·강낙승(姜洛昇) 등이 있다.
1901년(광무 5)∼미상. 독립운동가. 일명 용득(龍得).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 1920년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뒤 김좌진(金佐鎭)부대로 전속되어 1922년 8월까지 관전현(寬甸縣)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3년 8월 의군부 특파원이 되어 제1소대 이경일(李京日)의 인솔하에 의주군(義州郡) 춘성진(春城鎭)에 잠입하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우체국과 면사무소 등을 불태웠다. 그로 인하여 1924년 6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5년 3월에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金光男〉
1912년∼1988년. 기독교농민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경기도 양주 출생. 1930년 광동학교(廣東學校) 졸업 후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기독교농민운동의 뜻을 품고 귀국하였다. 1938년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봉안 이상촌’을 만들어, 기독교사회주의 실현을 위하여 힘썼다. 이상촌에서는 공동생활형태를 취하면서 가축부업을 의무화하고, 협동조합·소비공매조합 등을 결성하여 농민의 권익을 도모하는 한편, 금주·금연, 관혼상제 간소화운동도 전개하였다. 1942년 ‘고구마 12개월 저장방법’을 개발하여 농가소득에 기여하였다. 1944년 10월 용문산부근 농민들을 중심으로 농민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공출(供出)과 징용·징병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할 때 여운형(呂運亨)도 참여하였다. 1946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교회(현 임마누엘수도원)와 농장을 건설하였고, 1950년 경기도 용인에 복음고등농민학교를, 1954년에는 광주에 가나안농장을 설립하였다.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기독교농촌지도자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73년 강원도 원주에 제2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였다.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이상적인 농촌사회건설과 지도자양성에 헌신한 공로로 1962년 제1회 향토문화공로상, 1966년 막사이사이상(사회공익 부문), 1973년 제1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필리핀 세이비어대학에서 명예인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3월 농촌후계자양성을 위한 가나안농군사관학교를 설립,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복음사업과 아울러 농촌운동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 《참 살길 여기 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심는대로 거두리라》·《이렇게 살 때가 아닌가》·《그분의 말씀따라》·《조국이여 안심하라》·《나의 한길 60년》·《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등이 있다. 1990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일가상(一家賞)을 제정하고, 매년 농민운동·협동조합운동 등 사회공익실현운동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시상하고 있다.
1922년∼1991년. 역사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우인(又仁). 경기도 개성 출신. 영환(永煥)의 아들이다. 1935년 개성 만월국민학교, 1940년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韓國史專攻)에 입학하였으나 1944년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였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경성대학 법문학부 선과를 수료하고 개성고등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49년 배재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로 군에 입대,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학과에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중앙대학교·휘문고등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하다가, 1957년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88년 정년퇴임한 뒤 명예교수를 지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제문화연구소 평의원, 교사편찬위원회 부위원장 및 책임간사, 60년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3급국가공무원시험위원·기술고등고시시험위원·외무고등고시시험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학회활동으로는 한국사학회 이사, 역사학회 이사, 한국사연구회 이사, 한국향토사연구협의회 회장, 향약연구회 대표를 역임하였다. 특히, 1989년 향약연구회를 향촌사회사연구회로 발전시키면서 이 회의 대표로 50회의 연구발표회를 주관하였다. 해외연수로는 1968년 1년 동안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에서 한국근대사, 특히 일제시대사연구를 하였으며, 미국·일본 등지에서의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70년 중앙대학교에서 〈박제가연구 朴齊家硏究〉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3년 중앙문화연구원 공로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국사개설 國史槪說》·《한국사의 탐구》·《조선후기사상사연구 朝鮮後期思想史硏究》·《향청연구 鄕廳硏究》·《한국제도사연구 韓國制度史硏究》·《한국사수록 韓國史隨錄》·《신한국사의 탐구》 등이 있으며, 주요논문으로는 〈향소부곡고 鄕所部曲攷)〉·〈철령위고 鐵嶺衛考〉·〈소현세자연구 昭顯世子硏究〉·〈동학사상연구 東學思想硏究〉·〈태형고 笞刑考〉·〈정여립연구 鄭汝立硏究〉·〈향청연혁고 鄕廳沿革考〉·〈경재소론 京在所論〉·〈부곡의 규모 및 부곡인의 신분에 대하여〉·〈향규연구 鄕規硏究〉·〈김기향약연구 金圻鄕約硏究〉 등 여러 편이 있다.
1891년(고종 28)∼미상. 법조인·정치가. 전라남도 무안 출생.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업을 개업, 항일민족변호사로서 대민무료변론으로 성망이 높았다. 1930년 10월 동아일보사 취체역으로 일제에 의한 강제폐간 때까지 만 10년간 민족언론 창달에 공헌하였으며, 1930년 초반부터 보성전문학교에 위탁강사로 초빙되어 법률학 실무를 강의하였다. 1935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기념사업회 실행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이승우(李升雨)·최두선(崔斗善) 등 9인 위원의 1인으로 선출되고, 1939년 보전학회(普專學會) 회원으로 사학진흥에 큰몫을 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주요 임원을 거쳐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 12일자로 대법원장에 올라 혼란기 수습에 진력하였는데, 당시 대법원 판사는 서광설(徐光卨)·심상직(沈相直)·이인(李仁)·이종성(李鍾聖) 등이었다. 1945년 9월 한민당(韓民黨) 창당과 함께 문교부장을 맡아 당시 문교부원 양원모(梁源模)·양주동(梁柱東)·현제명(玄濟明)·신도성(愼道晟) 등과 정부수립에 즈음하여 건국의 교육정책 성안에 기여하였다. 1950년 5·30총선 때 무안갑구에서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공천으로 당선,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의정활동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한 채 6·25 때 27인 의원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1895년(고종 32)∼1961년. 철학자. 경기도 광주 출신. 호는 만학(晩學)·자연(自然). 고향에서 한학공부를 하다가 42세(1937)의 만학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동양철학과에 선과생(選科生)으로 입학, 1939년에 졸업하고 다시 철학과에 편입학하여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46세 때인 194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혜화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1947년 동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동서철학을 모두 섭렵하였으나 교단에서의 강의는 주로 동양철학분야였으며, 한국철학부문에서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에 해박하였다. 세계실학사에서 원조를 묵자(墨子)로 보고 중시조는 이이라고 주장하였다. 1956년에 발간한 저술 등에서 자신의 평소 철학적 견해를 담은 이른바 과학적 세계관, 정치역사관, 에너지철학 등의 이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철학적 주장은 지나치게 개괄적이고 논증부족의 이론인 데서 당시 학계의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동서철학을 함께 연구한 배경에서 헤겔철학의 관념성과 동양철학에의 왜곡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엥겔스 유물사관의 경제우위론을 비판하는 대안에서 문화의 흥망성쇠의 원리를 정치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의 핵심적 철학은 소위 에너지철학이다. 물질과 생명 및 정신을 포괄하는 에너지·힘·원기(原氣)가 모든 존재와 문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철학은 동서철학 및 한국철학의 소재를 포괄하는 필생의 학설이자 신념이었다. 저서로는 《철학신강》(1947)·《미학예술론》(1948)·《예술의 근본문제(문화독본)》(1948)·《최신과학적 세계관》(1956)·《동양철학사대관》(1956) 등이 있다.
1453년(단종 1)∼미상,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연숙(鍊叔), 호는 담암(潭庵). 1472년(성종 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과 동문인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등이 화를 당하자 부인 김씨(金氏)의 고향인 안동 구담(安東 九潭)으로 내려와 살았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화산(花山) 권주(權柱)와 사귀었다. 〈담암김용석유허비(潭庵金用石遺墟碑)〉가 있고,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910년∼1985년. 축구인. 황해도 신천에서 주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때 축구를 시작하였고, 경신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시절에는 한때 빙상선수로 활약하였고, 경신학교 재학시절에 개최된 제9회 전조선축구대회(1928.11.)에서 실업전수학교팀을 8대 0으로 크게 이기는 데 큰 몫을 함으로써 축구선수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았다. 제8회 메이지 신궁경기대회에서 그의 발군의 실력으로 소속팀이 우승하게 됨으로써 국제무대에 출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에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광복 후 가장 우수한 현역선수로 인정받아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에 국가대표팀 코치 겸 선수로, 제5회 세계축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 한국팀 코치로, 1958년 국제축구연맹(FIFA)총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80년 12월 한국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할렐루야팀 감독, 1985년에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지도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축구장 한쪽 골라인에서 반대편 골라인까지 105m 거리를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무릎·가슴·머리로 공을 튀겨서 옮겨갈 정도로 정교한 개인기를 부려 ‘축구공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하였고, 현역선수시절 자신이 계획한 ‘1만일(一萬日)개인기 훈련계획’을 은퇴한 뒤에까지도 꾸준히 실천하여 40여년 만인 1979년 1월 그가 70세 되던 해에 완수할 정도로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역선수 시절에 보여준 성실한 삶의 자세는 한국축구 발전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 ‘한국축구의 대부(代父)’로 칭송받고 있다. 영국축구협회가 발행한 《사커 코칭 Soccer coaching》을 번역, 《올바른 축구의 지도》를 펴냈다.
1923년∼1981년. 신학자·기독교 감리교목사. 평안남도 강서 출신. 평양 광성보통학교와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간사이학원(關西學院)신학부에 입학하여 1944년에 졸업하였다. 1951년 5월부터 부산으로 이동한 감리교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 도미하여 드류대학교 신학부에 입학, 신약신학을 전공하고 문학석사의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에서 신약학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도미, 드류대학교 대학원에서 신약을 전공하고, 〈도마복음〉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에 귀국하여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근무하면서 연합신학대학원의 신약학교수직을 겸임하였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 12년간 전국신학대학협의회의 총무직에 있으면서 신학자들 사이의 친교를 촉진시키며 신학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 같은 기간에 동북아시아신학교협의회 총무직도 겸임, 동북아시아지역에 있는 신학교의 협의체를 통하여 이 지역의 신학자들의 친교를 두텁게 하였고, 각국 신학교육의 프로그램 교환과 공동연구를 촉진시켰다. 감리교신학대학에서는 1971년에 선교대학원장, 1977년에는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한국신학문제연구소 이사, 1973년 재단법인 한국신학교육연구원장, 1974년 대한기독교청년회 전국연맹 이사, 1978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0년 2월에 감리교신학대학장에 취임하여 대학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고린도전서》(주석)·《신약개론》(공저)·《데살로니가 전후서》(주석), 역서로는 《예수》·《마태복음》·《잠언》·《전도서》·《아가》·《종말론과 역사》 등이 있으며, 기타 40여종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