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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고종 30)∼1953년. 기독교 감리교 목사·신학자. 서울태생으로 1896년에 세례를 받았다. 1912년 6월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韓英書院: 지금의 송도고등학교 전신)을 수료하고, 1915년 서울 피어선성경학교를 거쳐 1920년 12월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석교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22년 9월 남감리교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협성신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미국 에모리대학(Emory University)에 유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1927년 3월에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협성신학교 교감으로 임명되어 구약을 강의하면서, 당시 협성신학교 교수회에서 발행하는 신학지인 《신학세계 神學世界》의 편집인으로도 활약하였다. 1932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다가 1941년 5월에 제7대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학교를 유지해오다가 광복과 더불어 1946년 1월에 서울의 남산교회를 설립,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곧 정동교회로 옮겨 담임목사직을 맡았다. 1947년부터는 서울남지방 감리사직도 겸임하면서 광복 직후의 교회의 혼란과 분열을 치유하는 데 진력하였다. 광복 후 재건파(再建派)와 부흥파(復興派)로 갈라졌던 감리교회의 분열을 1949년에 극적으로 통합하여 대한기독교감리회(大韓基督敎監理會)라는 하나의 감리교회를 탄생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6·25사변 때는 미처 피난을 못하여 3개월간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다가 1·4후퇴 때에 겨우 서울을 빠져나왔다. 정부가 환도하기 전에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정동교회와 서울남지방에 있는 감리교회의 재건과 복구를 위해 노력하다가, 1953년 8월에 죽었다.
1873년(고종 10)∼1958년.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인·항일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호근리(好近理) 정성옥방(鄭成玉方)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처음에는 1911년 차경석(車京石)이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입암면(立岩面) 대흥리(大興里)에서 창시한 증산교 계통의 신흥 민족종교인 보천교(普天敎)를 믿었었다. 그 후 1919년 전라북도 정읍(井邑)에서 조철제(趙哲濟)가 창시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1936년 제주도 중문(中文) 출신 강승태(姜昇泰)가 제주도 안덕면(安德面) 동광리(東廣里)에 설파하며 스스로 교주가 되어,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고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며, 1940년이면 일본 소화(昭和)왕이 조선 민족에게 항복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신도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는 '경천수도(敬天修道)'와 '성신양성(誠信養性)'과 '안심안신(安心安身)'의 교리를 내세우던 무극대도교의 신도가 되었으며, 교단의 포교 활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무극대도교가 이렇듯 일본 패망을 단언하며 항일 감정을 드러내며 많은 신도들을 모아들이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무극대도교의 항일운동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교단의 핵심 인물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이 언도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현종의 비인 원순숙비(元順淑妃)와 이자연(李子淵)의 처인 계림국대부인(鷄林國大夫人)의 아버지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1024년(현종 15) 딸이 덕비(德妃)로 책봉되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 경조현 개국남 식읍 삼백호(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縣開國男食邑三百戶)를 받고, 이어 치사(致仕)하였다.
1876년∼1923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서천 출생.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그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 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인재를 육성할 계획하에 중국 각지의 군사강습소·병공국(兵工局)·학생단(學生團) 등에 파견하여 전문적인 훈련과 강습을 받게 하였다.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1만여명의 노병(勞兵)을 양성하여 독립전쟁 요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으며, 1백만원 이상의 군자금을 적립하여 역시 전쟁수행에 충당할 목표하에 동지들을 규합, 독려하여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그뒤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미상∼1127년(인종 5). 고려 중기의 문신·학자. 초명은 연(緣), 자는 처후(處厚). 신라 선덕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주원(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상기(上琦)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선종·헌종·숙종의 삼대에 걸쳐 내시직(內侍職)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보직되기를 간청하여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을 거쳐 개성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기거사인지제고(起居舍人知制誥)에 올랐다. 이어 기거랑(起居郞)이 되었으나,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병부원외랑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시를 잘하여 1102년(숙종 7)에 요나라 사신 맹초(孟初)가 오자 그의 접대를 맡아 시로써 응접하여 맹초를 놀라게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이부낭중(吏部郞中) 겸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를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고, 1105년에 숙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요나라에 갔다와서 예부시랑·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을 원수로 삼아 여진을 정벌할 때 이를 극력 반대하였고, 또 1109년 여진이 구성의 환부를 요구하자 방위상의 난점과 북방백성들의 희생을 들어 그 환부를 주장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1101년 비서감(祕書監)에 올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승지(承旨), 병부·예부·호부의 상서, 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상주국(上柱國)에 올랐다. 1117년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事)가 되었는데, 요나라가 금나라와 싸우다가 내원성(來遠城)과 포주성(抱州城)을 돌려주자 그곳을 수복하고 의주(義州)를 두었다. 그해 왕이 청연각(淸讌閣)에서 연회를 베풀고 그로 하여금 청연각기를 짓게 하고,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홍관(洪瓘)으로 하여금 이것을 돌에 쓰게 했다. 이듬해 판동북면병마사(判東北面兵馬事) 겸 행영병마사(行營兵馬事)가 되었다. 인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이 권세를 잡고 횡포를 부리므로, 화가 미칠까 두려워 물러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말에서 떨어져 돌아와 누워서 다시 물러나기를 간청하여 재상은 해직되고 그 대신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임명되었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뒤 1126년에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이 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었다. 이때 금나라 군사가 송나라 변경을 침공했는데, 변방의 보고가 잘못되어 금나라가 송나라에게 패배했다 하므로,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 등이 군사를 내어 송나라에 응하여 금나라를 치자고 주장했으나 반대하였다. 1127년에 수태부(守太傅)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이부사(判吏部事)에 기용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그 당시의 조고(詔誥)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또한, 최선(崔璿)·이재(李載)·이덕우(李德羽)·박승중(朴昇中) 등과 더불어 음양지리서인 《해동비록 海東秘錄》을 지었고, 박승중과 더불어 《시정책요 時政策要》를 지었으며, 《정관정요 貞觀政要》에 주석을 붙였다. 아들로는 영석(永錫)·영윤(永胤)·영관(永寬)이 있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미상∼1392년(태조 1). 고려말의 무신. 자는 의지(義之), 호는 의암(毅菴). 양근김씨(楊根金氏)의 시조이다. 조상과 가계가 불분명하나, 1376년(우왕 2)에 북청천호(北靑千戶)이었던 점으로 보아 북청지방의 토호이었던 것 같다. 1383년 이성계(李成桂)가 동북면에서 안변으로 오던 중 밭 가운데 있는 뽕나무 위의 새 두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자, 밭에서 김을 매던 그는 이를 보고 감탄하여 한충(韓忠)과 함께 이성계의 부하가 되었다. 무재(武才)가 있었으며, 1388년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92년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중추원사(中樞院使)·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로서 태조의 친병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곧 죽었다. 죽은 뒤 개국공신 일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의 귀족. 태종무열왕의 아들이다. 655년(태종무열왕 2)에 각찬(角飡)이 되었다. 660년에 신라가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의 낭장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에서 백제군과 싸웠다. 유인원이 군사 1만인으로 사비성에 주둔하자, 사찬(沙飡) 일원(日原)과 급찬(級飡) 길나(吉那) 등과 함께 신라군사 7천인으로 사비성에 머물렀다. 신라군의 사비성 주둔은 백제 잔류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는 임무뿐만 아니라 당나라 군사를 견제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1749년(영조 25)∼1828년(순조 2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김해. 자는 사범(士範), 호는 도촌(道村). 일손(馹孫)의 10대 양손(養孫)으로 아버지는 치구(致龜)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익련(益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출중하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하사품이 내려지고 아울러 정려되었다. 일생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의 학자로 지내면서 농상(農桑)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여씨향약 呂氏鄕約》의 사절목(四節目)인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 등에 대한 해석을 가하였다. 또한, 과거 임진왜란 당시의 국내사정을 기록하여 후세인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으며, 국가의 태평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야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사후에 사헌부감찰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도촌유고》 2권 1책이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관리. 1348년(충목왕 4)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첨의평리(僉議評理) 손홍량(孫洪亮)과 함께 원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왔으며, 1349년(충정왕 1) 순성익찬보리공신도첨의참리(純誠翊贊保理功臣都僉議參)가 되었다. 1351년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1354년(공민왕 3) 다시 찬성사로 유임되었다.
1919년∼1989년. 농학자·농림행정가. 본관은 의성(義城). 경상북도 청송 출생. 상의(相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남(申南)이다. 1938년 안동공립농림학교 농과를 졸업하고, 이어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부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같은해 일본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한 뒤 학도병에 끌려 입대하였다가 광복과 더불어 귀환하였다. 그뒤 대구농업전문학교 교수를 시작으로 1957년까지 경북대학교 농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농사원(농촌진흥청 전신) 시험국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60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1962년 농촌진흥청의 발족과 함께 시험국장으로 1964년까지 근무하다가 농림부 농업생산국장으로 1967년까지 근무하였다. 그해 12월 농정차관보에 임명되어 1968년까지 근무하다가, 농촌진흥청장으로 옮겨 1980년까지 농업진흥사업에 힘썼다.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농촌진흥청장으로 재직하면서 벼의 육종사업에 역점을 두었는데, 특히 ‘통일벼 ’의 보급확대에 강한 의지를 발휘하여 미곡증산에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쌀의 자급자족의 숙원을 달성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녹색혁명이 촉진되었다. 또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국제미작연구소 이사,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사단법인 한국종묘협회 회장,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농촌진흥청 농진회장을 맡아 일하였다. 1960년과 1963년 홍조소성훈장, 1972년 황조근조훈장, 1975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510년(중종 5)∼1560년(명종 15).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전라도 장성 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四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1366년(공민왕 15) 11월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으로서 금적사(禁賊使)가 되어 일본에 가서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에 대하여 해적의 출몰을 금지시키도록 1년 이상 교섭을 벌였으나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 1368년 돌아올 때 일본에서는 중 본도(梵盪)와 본류(梵槱) 등을 보빙사(報聘使)로 하여 함께 보내 답례하였다.
1662년(현종 3)∼1724년(영조 즉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인감(人鑑), 호는 아계(丫溪). 아버지는 생원 여중(呂重)으로, 소론의 거두이다. 1687년(숙종 13)에 진사가 되었고, 1702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뒤 정언(正言)·감찰(監察)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지평(持平)을 지냈다. 1707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판결사(判決事)에 특진되었고, 1710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곧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서 한직인 부사과(副司果)로 전직되었다. 1720년 소론이 추대한 경종이 즉위하자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노론정권은 연잉군(延礽君) 금(昑: 후에 영조)을 세제(世弟)에 책봉케 한 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하자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인 조태구(趙泰耉)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취소하게 하였다. 이해에 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 등과 함께 경종이 병을 앓지 않고 있으며 손수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데도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들이 세제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일은 나라를 망칠 죄과라고 탄핵하여 사대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였다. 이어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정권을 수립한 뒤 노론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고, 1722년(경종 2)에 노론의 일원인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여 목호룡 자신이 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 등과 모의하여 경종의 시해와 이이명의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변하게 하였다. 이에 일대 옥사가 일어나서 유배중이던 노론사대신들은 모두 사사되었고, 노론 수백명이 살해 또는 추방되었다. 2년에 걸쳐서 주도한 노론 숙청을 신임사화라고 한다. 그뒤에 우참찬·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가, 청주의 유생 송재후(宋載厚)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사화가 무고(誣告)로 조작된 것이라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목호룡과 함께 투옥되어 친국을 받았으나, 공모자들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참형을 당하였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1914년∼1943년. 독립운동가. 일명 문명철(文明哲) 또는 한광(韓光). 전라남도 담양 출생.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뒤 1933년 여름 중국에 망명하였다. 그해 9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에서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 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 학교 전술학 교관인 김종(金鍾:일명 김준)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이 학교에서부터 주로 문명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4년 2월 하순경이 학교를 중퇴하고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가 운영하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으로 전학하였다. 한인특별반에서 다시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잠시 한광(韓光)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한인특별반을 졸업하고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10월 중국의 우한(武漢)에서 편성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입대하였다. 그뒤 국민정부군과 함께 중국의 후난(湖南)·후베이(湖北)·광시(廣西)·윈난성(雲南省)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특히, 1939년 일본군의 전차를 두대나 파괴하는 큰 전공을 세워 국민당정부의 광영(光榮)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1년 7월경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의 활동지역인 화북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자 여기에 동행하였다. 조선의용대가 국민당과 임시정부의 활동지역에서 벗어나 북상한 뒤 3개 지대의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되면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제2분회 제2소조(小組) 조장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의 대원이 되었다. 그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자 조선의용군 진서북지대(晋西北支隊) 책임자의 한사람이 되었고, 동시에 화북조선독립연맹 진서북분맹(晋西北分盟)의 조직위원을 겸하여 활동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워 많은 공을 쌓았으나,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반소탕전’을 전개하다가 1943년 4월 14일 한·중 양군보다 10여배나 되는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의 사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거행하였고, 팔로군측에서도 조의를 표명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반란자. 1489년(성종 20) 황해도 신계(新溪)에서 난을 일으켜 황해도관찰사 이극검(李克儉)을 위협한 뒤 잡혀갔던 처자와 재산을 도로 찾고, 금제사(摛制使) 이계동(李季仝)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수안군수 김귀정(金貴汀)과 많은 군사를 죽여 한때 세력이 컸으나 여러 차례의 싸움과 기한(飢寒)에 못 이겨 잡혀죽었다. 이 싸움에 공을 세운 박산(朴山) 등은 승진하였고, 그에게 항복한 이극검은 파면되었다.
1891년(고종 28)∼1967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김해. 일명 동진(東鎭). 자는 동수(東秀), 호는 추산(秋山). 전라북도 순창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백여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시교원(施敎員)·참교(參敎)를 역임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대한유생독립단(大韓儒生獨立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미상∼1365년(공민왕 14). 고려 후기의 문신. 1332년(충숙왕 복위 1)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원자(뒤에 공민왕)를 원나라에서 수종한 공로로 공민왕이 즉위한 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고, 수종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평리(評理)가 되었다. 당시 관전(官錢)을 빌려갔다가 갚지 못한 자가 많아서 쇄권도감(刷卷都監)을 설치하여 징수하게 했는데, 그것이 친척과 이웃 주민에게까지 미치게 되고 또 본전을 배 이상 거두어들이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 원성이 높아졌다. 그때, 상소를 올려 폐단을 잘 지적하여 1353년(공민왕 2) 도감이 폐지되었다. 1356년 기철(奇轍) 일당을 제거한 뒤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관제가 개혁되면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358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거쳐, 136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방물(方物)을 바치기도 하였다.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1363년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올랐으며, 그뒤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883년(고종 20)∼미상. 조선 후기의 독립운동가. 대전 출신으로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후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여의치 않자, 이를 해산하고 뜻을 함께할 동지를 찾았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집안현(輯安縣)에서 정의단(正義團)에 입단하였다. 이어 상해(上海)를 왕래하며 창의단원(倡義團員)인 계의산(桂義山)과 옥천 사람 전좌한(全佐漢) 등을 만나 무장 항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25년 7명의 동지와 함께 거사를 맹세하고 귀국하였다. 그의 매부 정원득(鄭元得)에게서 화약을 얻어 폭탄을 만들어 1926년 1월 22일 조선총독부 등 5개 곳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직전에 전좌한의 밀고로 실패하고 피습당하여 만주 봉천(奉天)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군자금 모집계획이 탄로나 체포되어 4년간 복역했다. 사망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사헌부집의 맹(孟)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의 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홍문관의 부교리·교리 및 사간원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중종 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失勢)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1896년∼1971년. 여류문인·승려. 본명은 원주(元周). 호는 일엽(一葉). 평안남도 용강 출신. 아버지는 용겸(用兼).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관계로 20대까지는 교회에 다니며 성장하였다. 그는 기독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찍 개화하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세학교(救世學校)와 진남포 삼숭학교(三崇學校)를 거쳐 서울 이화학당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 닛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기독교신자였으나 불교신앙으로 전향하게 되어 만공(滿空)이 있던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 문학활동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같은해에 창간된 《폐허》의 동인으로 활약한 바도 있다. 활동하였던 문학영역은 시·소설·수필 등 분야이며, 192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新女子》를 간행하여 스스로 그 주간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을 하는 한편, 동아일보사 문예부기자, 《불교 佛敎》지의 문화부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하며 지위향상운동을 폈다. 그의 문학적 특성은 예술성보다도 주제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작품자체는 그다지 높이 평가할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에 여성으로서 대담한 사회활동과 아울러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오랫동안 폐쇄된 규범 속에 묻혀 있어야 하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사회진출과 문학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만하다. 작품으로는 소설에 〈계시 啓示〉·〈자각 自覺〉·〈순애의 죽음〉·〈사랑〉 등이 있고, 시에 〈추회 秋懷〉·〈이별〉·〈동생의 죽음〉 등과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文宣閣, 1962)·《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휘문출판사, 196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