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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태봉(泰封)의 장군. 914년(신덕왕 3)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의 명으로 나주 지방을 평정할 때 강선힐(姜宣詰)·흑상(黑湘)과 함께 보장(步將)이 되어 병선 1백여척을 만들고 3천여인의 병사를 동원하여 왕건을 도왔다.
1909년∼1990년. 고고학자·미술사학자. 호는 여당(藜堂). 함경남도 함주 출신. 학호(鶴鎬)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927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에서 교육학과 고고학을 전공, 1934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벨기에 켄트대학 헨체(Hentze, C.)교수를 사사하고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광복 후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1970년 퇴임하기까지 불모지에서 박물관을 육성하였고, 1954년부터 학술원 회원을 지내면서 우리 학술원이 국제학술원연맹(Union Acad ie Internation-ale)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기여하였다. 1957년부터 1976년까지 동아문화연구위원회(Harvard-Yenching Institute 서울지부)를 이끌면서 6·25 후의 어려움 속에서 연구비 등을 관리하여 학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화재위원을 비롯하여 UNESCO한국위원회 위원, 한일회담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당시 단 한 사람도 한국인 전문가가 없는 박물관에서 미군정 당국과 교섭하여 총독부박물관 책임자이던 아리미쓰(有光敎一)의 귀국을 1년간 연장시키면서 박물관 소장품을 인수하는 한편, 경주 호우총(壺杅塚)을 발굴하여 박물관 직원들로 하여금 고고학적 소양을 쌓게 하였다. 이 호우총에서 신라고분으로서는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명문(銘文)이 있는 호우가 출토되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6·25 중에는 서울에 남아있으면서 북측에 의한 문화재 반출을 암암리에 저지하였고, 다시 2차 공세 때에는 미군의 도움을 얻어 문화재를 부산으로 대피 시켰다. 수복 이후에는 문화재의 해외전시 등 활발히 벌인 국제교류로 한국문화 선양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또, 과감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박물관이 연구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하였다. 최초로 감은사지(感恩寺址)와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하였는데, 감은사지의 발굴조사보고서 《감은사》는 한국일보 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7년에 걸친 지석묘발굴조사를 거쳐 간행된 《한국지석묘연구》는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들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발굴조사보고서의 규범이 되고 있다. 196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Treasures of Korean Arts》(金元龍과 공저)로 5·16민족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金理那와 공저)은 영어판·일어판으로도 간행되었는데, 영어판 《Arts of Korea》는 일본국제문화교류협회의 출판문화상 대상을 획득하였다. 또, 진단학회 이사로서 《한국사》 간행을 적극 추진하여 방대한 업적을 완 성하였고, 그밖에도 《단군신화의 신연구》 등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한편, 고고학이나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자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국내에서의 훈련은 물론, 부문별로 각국에 유학을 보내 오늘날의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학계의 인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김원룡·윤무병(尹武炳)·한병삼(韓炳三)·이난영(李蘭暎)·안휘준(安輝濬)·정영화(鄭永和) 등이 모두 그 일환으로 외국에 나가 교육을 받았으며, 두 딸인 리나와 영나(英那)가 각기 동양과 서양의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항상 정도를 지켜 고집스럽고 엄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유머도 풍부하였다. 천부적인 외국어실력으로 널리 세계의 석학들과 친분을 맺어 국제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장 퇴임시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808년(순조 8)∼1893년(고종 30).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우홍(宇洪), 호는 운고(雲皋).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 김훈(金壎)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평생을 학문과 후진양성으로 업으로 삼았으며, 80세에 산직(散職) 벼슬인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 되었다. 저서로는 1899년(광무 3)에 간행된 5권 2책의 인본(印本) 《운고문집(雲皐文集)》 이 있는데,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38년∼1983년. 경제학자·경제관료. 서울 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1960년까지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까지 한국은행 조사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거친 뒤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의 근간을 다루는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저물가정책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의 버마 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사태로 순직하였다.
1854년(철종 5)∼1930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진경(晉卿)이고, 호는 윤산(輪山)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신라의 왕자 김석(金錫)의 후예이다. 증조부는 김성빈(金聲彬), 조부는 김동욱(金東旭)이며, 아버지는 김주노(金周魯)이다. 어머니는 전수두(田秀斗)의 딸 연안전씨(延安田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의기가 있으므로 같은 마을에 살던 수재(修齋) 이유선(李有善)과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이유선이 문둥병에 걸리자 사람들은 모두 피하였지만 그는 손수 약을 달여 먹여가며 간호하였다. 그러다 이유선이 죽자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이후 일제에 의하여 나라가 힘을 잃게 되자 괴로워하며 두문불출하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1749년(영조 25)∼1817년(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김해. 자는 여현(汝賢), 호는 묵헌(默軒). 해남 출생. 아버지는 창오(昌五)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윤태(潤泰)의 딸이다. 박용구(朴龍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6년(정조 10)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이듬해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휘능별검·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792년에 무고를 받아 인천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94년 종부시주부에 임명되었고, 그뒤 사헌부감찰·병조좌랑·함경도사·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인사부정의 척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 근절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또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강력한 진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뒤 사헌부장령으로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묵헌유고》 5권이 있다.
1880년(고종 17)∼1938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호는 회천(晦泉).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전라북도 고창(高敞) 도산리(道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진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일찍이 뛰어난 학행으로 명성을 얻었다. 저서로 문집인 《회천유고(晦泉遺稿)》가 있다.
1901년∼1987년. 신학자·목사. 함경북도 경흥 출생.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김익두(金益斗)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28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톤신학교를 거쳐 1932년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舊約學)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부터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서교사 겸 교목으로 있으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 神學指南》에 기고하기 시작, 신복음주의적인 신학논문 발표로 한국신학의 자유로운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1936년 8월부터 간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강원룡(姜元龍)·안병무(安炳茂) 등을 가르쳤다. 1940년 4월 새로 개원된 서울의 조선신학원(현 한국신학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45년 경동교회를 창설하여 목회도 하였으며, 1947년 신학노선문제로 정통시비에 휘말리다가 1952년 장로교총회에서 제명되었다. 1953년 이에 반발한 교회들의 기독교장로회 창립에 따라 이 교단의 주도적 신학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거쳐 1963년 10월 정년퇴임과 함께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뒤 1965년 기독교 장로회 총회장, 1969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 5월 간도에서 《십자군》을 창간하였는데, 2년만에 중단되었다가 1951년 다시 속간, 제36호까지 발간하였다. 《제3일》은 1970년 9월부터 1974년 5월까지 정기간행으로 제45호까지 발간하였는데 5·16 이후의 공화당정권에 대한 도전을 감행, 사회참여와 민주화운동을 고취하였다. 실제로 1965년의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 때부터 반독재민주화투쟁에 깊숙히 참여하여, 1969년 3선개헌반 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1972년 국제앰네스티한국위원회 위원장,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일하다가, 1974년 캐나다로 이주,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의장, 1978년 북미주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 1982년 한국민주촉진국민연합 고문 등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귀국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낙수 落穗》(1953)·《요한계시록주석》(1968)·《황야에 외치는 소리》(1983)·《범용기 凡庸記》(1983) 등이 있다.
1746년(영조 22)∼1827년(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보(國寶), 호는 해석(海石). 아버지는 영의정 익(熤)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0년(정조 4)에 검열(檢閱)이 되어 《이문원강의 摛文院講義》를 편집하였고,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다. 이어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고, 검상(檢詳)·이조참의·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86년에 원춘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울릉도에 잠입, 고기와 향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고, 영동지방 무사들의 시험에서 그들을 삼진(三鎭)에 속하게 하였으며, 봄·가을로 나눈 시험일을 한날로 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789년에는 홍문관제학·대사헌·규장각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영의정인 아버지가 사망하여 일시 관직을 떠났다가 1794년에 규장각직제학으로 재임명되었고, 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병조판서·평안도관찰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96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1799년에 병으로 이조판서를 사임하고, 좌참찬·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그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규장각제학에 임명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에 정조가 승하하자 《건릉표석음기 健陵表石陰記》를 제술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또한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임명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2년에 수원부유수와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804년에 홍문관제학,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애책문제술관(哀册文製述官)을 역임하였다. 1805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거절하여 황해도 재령에 부처(付處)되었고, 이듬해 석방되어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807년 우의정에 다시 임명되어 당시 공정함을 잃고 있었던 과거의 폐단을 지적, 시정을 요구하였다. 1808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영남지방의 대동미 3분의 1과 호남지방의 대동미 4분의 1을 아울러 정퇴(停退)하도록 조처하였다.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석집》·《해석일기》가 있고, 편서로는 《이문원강의》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770년(영조 46)∼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덕여(德汝), 호는 향포(香圃). 아버지는 광은부위(光恩副尉) 기성(箕性)이며, 어머니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녀(庶女)이다. 1801년(순조 1) 고양군수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이 되고 1806년 승지·대사성을 거쳐 1809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 재직시 지평현의 서리 방복항(方福恒)이 1만여석을 포흠하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의 파직을 주장하였다. 이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1811년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14년 형조판서·대사헌·지돈령이 되었다가 1816년 판의금부사, 이듬해 공조판서를 거쳐 광주부유수로 좌천된 적도 있다. 1821년 병조판서, 1826년 형조판서·이조판서가 되고 1830년 원접사가 되었다가, 1835년(헌종 1) 병조판서가 되었다. 병조판서를 지내던 중, 정시무과 초시의 시험날짜를 통지하지 못하여 지방무사들이 응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한때 파면되기도 하였다. 1837년 이조판서로 복직되고, 1843년에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편서로는 《광주부공도회과작 廣州府公都會科作》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887년(고종 24)∼1961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예산 출신. 1915년 7월에 결성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아산·보령 등지에 사는 부호의 군자금 수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인천에서 곡물상을 경영하며 연락거점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만주에서 우재룡(禹在龍) 등과 독립을 위한 격문·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로 발송하여 독립운동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93년(고종 30)∼미상. 일제강점기 법조인.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을 졸업하고 1921년 조선변호사시(朝鮮辯護士試)에 합격하였다. 1923년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광주변호사협회장과 와세다대학 법률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1949년 제주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950년 제주 지역의 유지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한 이른바 ‘제주도 유지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8월 8일 제주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계엄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 대위의 음해·조작 사건임이 밝혀져 9월 3일 석방되었으나,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 등을 겪었다. 1953년 다시 변호사로 개업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사망하였다.
1887년(고종 24)∼1959년. 일제강점기 유학자·교육자. 자는 봉규(奉奎), 호는 봉은(鳳隱)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전라북도 화산면(華山面) 와룡리(臥龍里) 출신이다. 고려 조 대사성(大司成) 김구용(金九容)의 후손이다. 고조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세원(金世源), 조부는 비원비서서승관(秘院秘書書丞官) 김영태(金榮泰), 아버지는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 김현묵(金賢黙)이다. 평소 과묵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농우(農牛)는 가산(家産)의 근본이라 하여 외양간을 비운 적이 없을 만큼 중농적(重農的) 실학풍(實學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 ‘인간이 있는 곳에서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사랑(舍廊)에 서당을 개설하고 가손(家孫)들은 물론 지역의 학생들을 모아 무료로 교육하고, 손수 책까지 만들어 주었다. 김운회(金云會), 김양회(金良會)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김양회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 장학재단인 '양우회(良友會)'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묘는 화산면 와룡리 나복동(羅伏洞)에 있다.
1907년∼1932년. 한국연극사 연구의 선구자·국문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노정(蘆汀). 충청북도 괴산 출생. 아버지는 사원(思元)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1921년 괴산공립보통학교, 1926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법문학부 조선문학과에 진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평양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년 만에 죽었다. 학문적 업적으로는 논문으로 〈Palatalization에 대하여〉·〈조선어화(朝鮮語化)의 조선어(朝鮮語)〉가 있고, 저서로는 《조선연극사 朝鮮演劇史》 외에 민요·소설·김삿갓 등의 연구를 묶어 출간한 《노정잡고 蘆汀雜稿》가 있다. 《조선연극사》는 우리나라 연극사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87년(고종 24)∼1961년. 1917년에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祺中)·김한종(金漢鍾) 등이 광복군(光復團)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하였다. 광복군 활동을 하며 독립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후 공주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함께 건너간 김상준(金商俊)·김재창(金在昶) 등과 함께 항일투쟁운동을 벌이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한내장 만세운동 사이트에는 출생이 1884년 2월 19일로, 사망이 1960년 5월 25일로 되어 있어, 생몰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897년∼1984년. 정치가·실업인. 경상남도 충무 출생. 1912년 일본 오사카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토건업·운수업 등에 관여하였다. 1917년 동아일보사 통영지국장을 잠시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건업·운수업에 본격적으로 전념하면서 1930년에는 건설사(建設社) 사장, 조선토건협회(朝鮮土建協會) 이사, 서울 성동구 중앙시장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이후 제헌의회 총선에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통영갑구에서 한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계속되지 못하고 다시 운수업에 관여하여, 1966년부터 삼성운수(주) 대표이사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국회의원 동우회에도 참여하여 서예분과위원(書藝分科委員)을 지내기도 하였다.
1869년(고종 6)∼1940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자화(子華)이고, 호는 호석(湖石)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대산면(大山面)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판윤(判尹) 김재발(金載潑), 아버지는 죽강(竹岡) 김기풍(金箕豐)이다. 조선 말기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6년(건양 1) 스승 기우만이 광주향교(光州鄕校)에 창의(倡義) 본부를 두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함께 참여하였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이후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고 고향에 머물며 영취정(永翠亭)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문집인 《호석유고(湖石遺稿)》가 있다.
1842년(헌종 8) 8월 6일∼1904년(광무 8) 2월 11일.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경장(景章)이고, 호는 산촌(山村)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증조부는 김성구(金聲九)이고, 조부는 김기봉(金紀鳳)이며, 아버지는 김응호(金膺昊)이다. 외조부는 김효경(金孝慶)이고 처부는 유이진(柳以鎭)이다. 중부(仲父) 농계(聾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크게 발전하여 산촌서숙(山村書塾)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남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기던 치헌(癡軒) 김덕오(金德五)의 《사학의변(四學疑辨)》을 깊이 연구하여 완성본을 짓기도 하였다. 경학(經學)에서 역수(曆數)를 두루 섭렵하고 〈하도문답(河圖問答)〉·〈기주변해(朞注辨解)〉를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 《산촌선생문집(山村先生文集》이 있다.
1627년(인조 5)∼1700년(숙종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회백(晦伯). 아버지는 정랑 민교(敏敎)이다. 20세 전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예빈시(禮賓寺)에 전임, 이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지평·집의 등을 거쳐 1689년 승지로서 숙종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한 것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하고, 같은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사건에 대하여 반대의 소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등용되자 호조참의로 기용된 뒤 좌승지·한성부우윤·호조참판·도승지·공조참판·형조참지·동지중추부사·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두루 지냈다.
1808년(순조 8)∼1899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덕부(德夫). 아버지는 기순(箕詢)이며, 부승지 주현(疇鉉)의 아버지이다.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낸 뒤 1858년(철종 9)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고종조에 들어와서는 형조판서를 지낸 다음 1872년(고종 9)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의 산군(山郡)에도 해읍(海邑)과 똑같은 포군(砲軍)을 설치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탐학한 삭녕군수(朔寧郡守) 김두하(金斗河)를 단죄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뒤 이조·예조·호조·공조의 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차례로 역임한 뒤 1891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하였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홍문관·예문관의 제학 등 문한직(文翰職)에 있으면서 임금의 많은 교문(敎文)을 제술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