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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1780년(정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 자는 백고(伯高),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 시직 치만(致萬)의 아들이며, 동생은 종수(鍾秀)이다. 민우수(閔遇洙)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진사가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에 이어 장령·돈유장령·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에 이르렀다. 영조대 신임사화 때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또, 종수가 벽파(僻派)인 김구주(金龜柱)와 일당이 되자, 행동을 같이하여 장헌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하였다. 그뒤, 김구주 일당이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상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는 등 보신에 급급하였다. 후세 학자들은 권력에 추종하는 이같은 정치적 행적을 비난하여, 유자(儒者) 또는 선비로 자칭하면서도 유가(儒家)의 진의(眞義)를 해치고 국가의 흉화와 세도의 극치를 초래하는 역할에 가담하였다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본암집》이 있고, 편서로 《가례집고 家禮集考》·《청풍세고 淸風世稿》가 있다.
1930년∼1957년. 문학평론가. 함경북도 단천 출생. 6·25남침 때 월남하여 1956년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 그뒤 교사와 신문기자를 역임했다. 1956년에 〈작가의 패기〉와 〈위기의 해명과 초극〉이 《현대문학》 13·15호에 추천되면서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뒤 오대산 월정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의 평론은 주로 동양철학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그 사상적 융합과 통찰에 초점을 맞춘 자아해방의 모색이었다. 주요평론으로 〈장자론 莊子論〉(현대문학 39∼41호)·〈삼교계합(三敎契合)의 종지(宗旨)〉(현대문학 28·29호)·〈동양의 휴머니즘〉(현대문학 23호)·〈민족문학소론 民族文學小論〉(현대문학 17호) 등이 있다. 특히, 추천작 〈위기의 해명과 초극〉은 현대의 위기를 메카니즘정신에 두고, 철학과 과학 또는 그밖의 메카니즘화한 모든 것의 종합적인 근원 속에서 그 극복을 모색하려는 것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비평태도는 불교적 입장에서 유교·도교 등 3교를 조화하는 사상적 특색을 견지했다.
1783년(정조 7)∼1866년(고종 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호(聖浩), 호는 서소(書巢).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김상온(金相溫)의 아들로 태어났다. 1822년(순조 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生員) 1등 1위로 합격하였다. 사마시에 급제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만 전력했다. 대소과(大小科)에 합격한 그의 제자만 해도 30명이 넘었다. 관동지방의 명승고적을 돌아보며 지은 시문으로 묘사하고, 자신이 돌아본 고적들을 일기체 형식의 글로 남겼다. 저서로는 《서소문집(書巢文集)》이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22년∼1981년. 기업가. 본관은 순천. 호는 현암(玄巖).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 출생. 아버지는 재민(在民), 어머니는 오명철(吳明哲)이다. 어렸을 때는 고집이 매우 강하였고 장난이 심하였다. 천안북일사립학교와 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에 경기공립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느날 운동부의 일본인학생이 한국인학생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일본인학생을 구타하였는데, 이 일로 퇴학을 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여 1940년에 졸업하였다. 1941년에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상과 2년을 중퇴하였고, 1942년에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 광복 후 우리나라 화약산업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화약관리사업체를 운영하면서 1952년 10월 28일에는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53년 8월에 서울 회현동으로 사무실을 옮겨 화약의 자체생산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56년 4월에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생산하였다. 1964년에는 한국베어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66년에는 골든벨상사주식회사와 한국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67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에 피선되는 한편, 주한그리스 총영사에 취임하였다. 1968년에는 재단법인 백암문화재단(白巖文化財團)을 설립했고, 1969년에는 경인에너지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70년에는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고, 대한사격연맹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제일화재해상보험 대표이사가 되었고, 1972년에는 그리스 금성십자대훈장(金星十字大勳章)을 받는 한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에 피선되었다. 1973년에는 대일유업주식회사·태평양건설주식회사·태평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4년에는 김포요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철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975년에는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天安北一學院)을 창립하여 이듬해 3월 6일에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76년에는 서울프라자호텔과 제일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7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죽은 뒤 1981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1797년(정조 21)∼1869년(고종 6).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이며,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그의 누이이다. 영의정 창집(昌集)의 5대손이다. 1819년(순조 19)에 생원이 되고 부수(副率)·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을 거쳐 1838년(헌종 4) 판관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직각·대사성·이조참의·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병조판서·지돈령(知敦寧)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우참찬·제학 겸 지실록사를 거쳐 총위영(總衛營)을 총융청(摠戎廳)으로 개편, 총융사(摠戎使)를 맡고 이어 금위대장 등 무직(武職)의 수뇌부를 관장하여 당시 혼란한 사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그뒤 예조판서·형조판서·훈련대장·공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세번씩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62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발생한 각지의 민란을 진정해보려는 의도에서 설립된 이정청(釐整廳)의 총재관(摠裁官)을 맡기도 하였으나,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나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후 영돈령으로 1866년 기로사에 들어갔다. 인품은 정량(貞亮)하고 공평했으나, 안동김씨 세도정치시기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역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16년(광해군 8)∼1671년(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 영의정 육(堉)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164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사국(史局)으로 등용된 뒤, 박사·설서(說書)를 거쳐 홍문관에 전임되었다. 1646년 병조좌랑이 되어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1648년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안변(安邊)으로 귀양갔으나 그 이듬해 풀려났다. 이조좌랑·대사헌·경기도관찰사·도승지·이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현종초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극력 사양하고, 이때 아버지가 생전에 호남 지방에 실시하게 한 대동법의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펴기 위하여 호남관찰사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62년(현종 3) 공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할 때, 현종 즉위초에 좌참찬 송시열(宋時烈)의 제안으로 실시되었던 전라도 산군(山郡)의 대동법이 중단된 것을 재차 주창, 시행하게 하였고, 《전라도대동사목 全羅道大同事目》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과 함께 주관, 강정(講定)하여 그 이듬해에 발표하였다. 1668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노량의 대열병(大閱兵)에 흩어진 군율을 바로잡았고, 병기·군량을 충실히 하였다. 한때 호조판서가 되어 크게 국비를 덜어 재정을 윤활하게 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용모가 단정하였다. 특히, 호조판서가 되자 서리(胥吏)들의 부정이 줄었고, 병조판서가 되니 무사가 경복(敬服)하여 군율이 엄정하였으며, 매사에 과단성이 있고 공정하였다.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백부인데도 조정에서는 믿고 중용하였다. 특히, 아우 우명(佑明)이 척족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에 서인(西人)이 낙당(洛黨)과 한당(漢黨)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아버지 묘의 수도사(道事)가 당쟁의 논란이 되었을 때도 별로 휘말리지 않아 명망을 얻었다. 글씨에 능하였는데 도연명체를 본받아 필법에 있어 글씨의 획이 힘찼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귀계유고》가 있다. 글씨로는 고성의 유점사춘파당대사비(楡岾寺春坡堂大師碑), 안동의 권태사묘비(權太師廟碑), 양주의 김식비(金湜碑)가 있으며, 그밖에 김육비(金堉碑)·이수일비(李守一碑)·김장생묘표(金長生墓表)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889년(고종 26)∼1930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형규(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칸의 자기집을 학교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고,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였다.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 애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미 결성된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하여 군사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졸업시켰다. 그러나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였다. 3일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천여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신비한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고, 여기에 집결한 10여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여기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우수리강을 건넜다가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하여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미상∼1404년(태종 4).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낙안(樂安). 문과에 급제한 뒤 공민왕 때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간관(諫官) 정공권(鄭公權)이 신돈(辛旽)의 죄를 극간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서용되어 비서감승(祕書監丞)의 직에 올랐다. 우왕 때 사헌집의(司憲執義)·지신사(知申事)·밀직제학(密直提學)·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고, 1377년(우왕 3) 9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79년에 양광도(楊廣道)에 왜구가 침입하자 원수 도흥(都興)과 더불어 이를 막았다. 1386년 9월에 동지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중국 난징(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또, 1388년 5월 양광도지역에 왜구가 침입하여 유린하니 원수 도흥,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이를 막았다. 1389년(공양왕 1)에는 도평의사사 신청사(新廳舍)의 건축공사를 감독하였고, 1391년 8월에는 문하평리 겸 대사헌(門下評理兼大司憲)이 되어 상소를 올려 5도(五道)의 정부(丁夫)를 뽑아 도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축성공사가 시작되자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에 공사가 너무 크다 하여 축성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규정(糾正) 박자량, 집의(執義)우홍득, 사복부정(司僕副正) 변벌개(邊伐介), 한양부윤 유원정(柳爰廷) 등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392년 3월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2월에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가 되었으며, 1393년(태조 2) 2월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서 계룡산 아래 신도(新都) 후보지의 새 도읍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조사하던 중, 조운(漕運)과 도로 관계를 조사하는 데 참여하였다. 태조가 개성에 돌아간 뒤에도 그곳에 남아 신도경영을 감독하였다. 또, 한양천도 때 좌복야(左僕射)로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등과 더불어 새 도읍지 건설공사를 급속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어 1394년 9월 9일에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市廛)·도로의 기지를 선정, 구획하고, 심덕부와 더불어 현지에 남아 모든 건설사업을 감독, 시행하였다. 1398년(태조 7) 9월 제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되어 김사행(金師行)이 참수당할 때, 그와 더불어 백성을 혹사하였다 하여 영주(寧州)로 유배되었으나 성곽 경영의 공로로 감형되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1512년(중종 7)∼1563년(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은 선산.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원로(元老)이며, 어머니는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느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할 것과 조복(朝服)과 신을 부치니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자 명나라 태조는 그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므로 평생동안 그에 해당하는 녹(祿)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의 형초(刑楚)에 살았고, 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전한다. 1597년(선조 30) 일본으로 파견된 사행(使行)의 막하관으로 수행한 허유성(許惟誠)이 그의 외손이라고 전하며, 명나라 고공(高珙)이 엮은 《병탑유언 炳搨遺言》에는 그의 자손이 대대로 통주(通州)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농암일고》 1책이 있다.
1564년(명종 19)∼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지원(志遠), 호는 운암(雲巖). 경상북도 성주 출신. 아버지는 호조정랑 응곤(應袞)이며, 어머니는 안강노씨(安康盧氏)로 홍도(弘道)의 딸이다. 송원기(宋遠器)와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정구(李廷龜)·권분(權肦) 등과 교유가 두터웠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는 성주 사림들과 함께 광해군의 폭정을 비난하다가 금고(禁錮)에 처해져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면학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인조의 배려로 성주별시를 열어 이 지역 사림들을 위로하였는데, 그는 여탁(呂悼)과 함께 선발되어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되어 162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공조좌랑·병조좌랑·예조정랑·춘추관기주관 등을 거쳐 무안현감(務安縣監)이 되어 유점(鍮店)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03년(인조 8)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때는 거문고 하나만을 가지고 갈 정도로 청렴하였다고 한다. 한편, 김우옹(金宇顒)이 《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때 그 일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운암문집》 4권이 있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택부(澤夫), 호는 농암(籠巖). 김제(金濟)의 아우이다. 고려(高麗) 충신(忠臣)으로 관직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말년에 중국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편지를 써서 종에게 주어 부인에게 전하게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1798년(정조 22)에 정조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02년∼미상. 양화가. 충청북도 진천 출생. 서울에서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도화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 직후 서울에서 박광진(朴廣鎭)·심영섭(沈英燮)·장석표(張錫豹)와 양화운동 그룹인 녹향회(綠鄕會)를 조직하고, 1929년에 제1회 동인전, 그리고 다음해에 오지호(吳之湖)가 가담한 제2회전을 가졌다. 1930년까지는 일제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도 출품하였으나, 그뒤에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만 참가하였다. 그 초기의 작품경향은 서정적 사실주의였으나, 1935년 무렵부터는 오지호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화법의 신선하고 밝은 색채 및 빛의 미학에 심취한 화면작업을 지향하였다. 그것은 한국 양화사의 선명한 인상파 형성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맑은 공기와 명랑한 자연미를 선려(鮮麗)하고 투명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하려 하였고, 그 작품들은 1938년에 공동으로 자비출판한 한국최초의 원색호화판 화집인 《오지호·김주경화집》에 수록되었다. 그 화집의 김주경 작품들은 그뒤 완전히 인멸되었으나, 그 시기의 다른 인상주의작품인 〈화분〉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듯 순수회화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복 직후 급속히 좌경화하여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 이어서 조선미술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1947년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창설에 참여, 초대교장이 되었고, 1949년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1958년까지 초대학장을 역임하였다. 북한에서의 작품기록으로는 월북 직후의 〈김일성장군 전적〉(1947)과 〈만경대〉(1960년대) 등의 정치적 주제 외에 〈묘향산〉(1955)같은 순수풍경화가 알려져 있다.
1787년(정조 11)∼1863년(철종 14).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기응(箕應), 호는 사가헌(四可軒)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출생지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지례리(芝澧里)이다. 증조부는 김광한(金光漢), 조부는 김시적(金始迪)이다. 아버지는 김행운(金行運)이고, 어머니는 월성최씨(月城崔氏) 최흥렴(崔興濂)의 딸이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자라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주자(朱子)와 퇴계(退溪) 선생의 학문을 본받으려 하였다. 1863년(철종 14) 3월 17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사가헌선생문집(四可軒先生文集)》이 전한다.
1859년(철종 10)∼1916년.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는 순교(舜敎)이고, 호는 순와(順窩)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아버지는 김공락(金恭洛)이다. 저서로 시문집인 《순와문집(順窩文集)》이 있다.
1661년(현종 2)∼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남중(南重), 아버지는 생원 일진(一振)이다. 숙종의 장인이며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 1699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이어 사헌부감찰·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서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720년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이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임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당대의 문사 최석정(崔錫鼎)·김창협(金昌協)·서종태(徐宗泰)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거가기문 居家紀問》·《수사차록 隨事箚錄》·《산언 散言》·《수곡집 壽谷集》 등이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1943년∼1960년. 전라북도 남원의 금지중학(金池中學)을 졸업하였으며, 1960년에 마산(馬山)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한 첫해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시민과 학생들은 평화적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를 강제 해산 시키던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김주열(金朱烈)은 실종되었다. 경찰의 강경진압과 무차별 발포로 인해서 희생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분노가 극에 달한 시위대는 주변의 남성 파출소와 북마 파출소 및 경찰관서, 경찰서장 자택, 그리고 부정선거 주범인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 집을 습격하였다. 이때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0일에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는데, 두부에 체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것이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부정선거를 치룬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치닫게 되면서 결국 ‘제2 마산데모’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주열의 죽음으로 서울에서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총궐기에 나서면서 4.19혁명이 발발되어, 결국 5월 1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까지 이끌어내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1644년(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안동. 자는 만고(萬古), 호는 이면(易眠). 아버지는 승지 중청(中淸)이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4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정언이 되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광해군 때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산 신하라 하여 간원에서 심히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김류(金瑬)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정언이 되었으며, 그뒤 지평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의 강도파천(江都播遷)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하여 탄핵을 받았다. 1632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있을 때, 온 집안이 큰 변을 만나 숙부가 옥에 갇히고 할아버지는 이 때문에 자살하였으며, 그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서예에 명망이 있어 13세에 진주 촉석루의 액(額)을 썼으며, 1625년에 왕명으로 동궁의 대병(大屛)에 사잠(四箴)을 쓰기도 하였다. 인조는 즉위하기 전부터 그의 재질을 알고 발탁하여 쓰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물고 말았다.
1707년(숙종 33) 3월 21일∼1789년(정조 13) 2월 9일.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창국(昌國)이고, 호는 교전(校前)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김세기(金世基)이고, 조부는 김이경(金以鏡)이며, 아버지는 김몽해(金夢海)이다. 형제로 형 김주민(金柱旻)과 동생 김주악(金柱岳)이 있다. 외조부는 강필형(姜必亨)이고, 처부는 정주명(鄭周命)이다. 1744년(영조 20)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24위로 합격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교유하였다. 경성(京城)의 이장우(李章佑)가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하자 함께 문회재(文會齋)를 건립하고 재장(齋長)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문집으로 《교전선생문집(校前先生文集)》이 있다.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진골귀족. 아버지는 각간(角干) 유정(惟靖)이다.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5세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文王)의 5세손이라고 한다. 777년(혜공왕 13)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그가 시중직에서 퇴임한 것은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왕이 즉위한 780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시중직에서 퇴임한 뒤에도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은 막강했던 것 같다. 785년 선덕왕이 죽자 왕위계승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군신들이 의논하여 선덕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을 추대하려 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귀족들이 그를 왕위에 추대한 배경은 선덕왕의 친족관계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세력관계였던 것 같다. 그는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金敬信)은 780년 선덕왕의 즉위와 더불어 세력을 잡아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지만, 실제 세력면에서는 시중직에서 물러난 김주원에게 오히려 뒤지고 있었다. 《삼국유사》 원성대왕조에 “이찬 김주원이 상재(上宰)이고, 각간 김경신은 이재(二宰)로 있었다.”고 한 것도 당시 김주원이 세력 서열의 제일인자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귀족회의에서 당연히 공식적인 왕위계승자로 추대될 수 있었으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그의 즉위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즉, 김경신은 왕위계승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상수단을 써서 왕궁을 점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삼국유사》에는 “왕(김경신)이 먼저 왕궁에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를 지지하던 무리들이 모두 왕에게 붙어 새로이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고한 꿈과 북천신(北川神)의 비호에 대한 설화가 전하는데, 당시 김주원의 집이 북천(北川: 지금의 경주 명활산과 소금강산 사이에서 경주 북부를 관통하여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냇물로 추정됨.)의 북쪽에 있었다 함은 실제 사실에 의거한 것일 수 있으나, 김경신의 즉위가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함은 당시 원성왕계 왕실이 변칙적인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설화 내용이다. 주원은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뒤 원성왕 일파에게 위협을 느꼈던지 중앙에서 계속 거주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 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명주지방에는 원래 김주원의 장원(莊園)이 있었고, 또 그와 연결된 친족세력이 있던 곳이었다. 김주원은 이를 기반으로 지방귀족화하여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칭하여졌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뒤 명주도독은 대대로 그의 후손에 의해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호족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후삼국시대 명주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왕순식(王順式: 王氏 성은 고려 태조에게 귀순한 뒤 賜姓된 것임.)도 그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 가운데는 그가 강릉지방으로 퇴거한 뒤에도 김헌창(金憲昌)·범문(梵文)부자처럼 계속 중앙에 남아 활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강릉김씨의 가계를 이루어 굴산사(崛山寺)의 사굴산파(闍堀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의 가문은 고려초 새로운 왕조에 귀의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