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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1971년. 언론인·정치가. 본관은 김해. 호는 낭산(朗山).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출생. 상경(相逕)의 9형제 중 장남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1914년 영암보통학교, 1917년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와 1921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獨法科)를 거쳐, 이듬해 같은 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의 조수로서 일하였다. 1922∼1924년에는 베를린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192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1926년부터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1927년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로서 교단에도 섰다.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공산당사건(세칭 ML당사건)에 관련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1934년 동아일보에서 주필을 지냈다. 1936년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말살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한 뒤, 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海東農場)을 관리하였다.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과 한국민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 1950년 법무부장관, 1954년 제3대 민의원 의원, 1955년 동아일보사 중역 및 민주당 상무위원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유엔 한국대표도 지냈다. 1957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제4·5대 의원이 되고, 1960년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1963년 자유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고, 1967년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독립노선 獨立路線》(1947)·《나의 소전(小傳)》(1957)·《나의 길》(1966)·《나의 편력(遍歷)》(1969) 등이 있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842년(헌종 8)∼미상. 조선 말기의 화가. 본관은 개성. 자는 치규(致規), 호는 석년(石年). 화원 석신(碩臣)의 증손이며, 벼슬은 감찰(監察)을 지냈다. 서예가 김석준(金奭準)은 그를 위하여 “맑고도 여위어 흰 학과 같고 쌍절(雙絶)을 지닌 특별한 재주로세. 중국에 마음맞는 벗이 많아서 해마다 편지가 오고갔었네. 요즈음에는 산수에 낙을 붙이어 숭악산(崧嶽山)에 서실을 지었다 하네.”라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산수와 절지(折枝)를 잘 그리고 글씨에 능하였다 하나, 형식화된 남종화풍(南宗畵風)으로 그려진 산수화가 주로 전한다. 대표작으로는 1865년(고종 2)에 그린 〈구로고회도 九老高會圖〉(개인 소장)를 꼽을 수 있는데, 산뜻한 필묵법(筆墨法) 등이 청대(淸代) 문인화가 주학년(朱鶴年)의 화풍을 연상시키며, 또한 이용림(李用霖)의 〈청설연음도 聽雪聯唫圖〉(개인 소장)와도 상통된다.
1907년∼1961년. 대중가요 작곡가. 황해도 옹진 출생. 동경의 도요음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한동안 일본에서 소녀가극단이라는 공연단체를 위하여 관현악 편곡을 하였고, 1930년경부터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내왕하며 음반제작을 위한 반주음악의 작곡과 편곡을 하였다. 1936년 강홍식(姜弘植)의 노래로 〈먼동이 터온다〉와 〈처녀 총각〉을 발표, 크게 성공하였다. 이 두 곡은 광복 후에도 중국의 연변(延邊)지방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1939년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와 〈홍도야 우지마라〉를 각각 남일연(南一燕)과 김영춘(金永春)의 노래로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44년 극영화 〈병정님〉의 음악을 담당하였고, 뒤에 중국 북경에서도 활동하였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와 한때 황해도 해주에서 아내와 함께 유치원을 경영하였으며, 1947년 동경으로 건너가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라는 예명으로 송죽관현악단(松竹管絃樂團)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먼동이 터온다〉·〈처녀 총각〉·〈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우지 마라〉 등이 있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용(季用), 호는 소은(素隱). 아버지는 김규서(金圭瑞)이다. 김준혁(金駿赫)은 문장으로 그 이름을 드러내었다. 그의 글은 맥이 통하여 더욱 명백하게 되었고, 일단 붓을 들어 글을 썼다 하면 유려한 문장을 남겼다.
1918년∼1961년. 피리의 명인. 본관은 경주. 호는 가농(笳濃).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 영제(寧濟)는 그의 작은아버지이며, 재원의 아들로 종남(宗南)의 손자이다. 14세에 아악부원양성소 4기생에 입소하였는데, 전공은 피리였다. 최순영(崔淳永)으로부터 피리를 배웠고, 김계선(金桂善)에게서 비곡(祕曲)을 배웠다. 1936년 졸업 후 아악수(雅樂手)로 아악부에 9년간 근무하였고, 1944년 12월 이화동회(梨花洞會)에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피리솜씨는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기악은 물론 가사·시조·속요에 이르기까지 뛰어났다. 특히 즉흥적인 수성가락은 신운이 넘쳤다. 또한, 그는 합주곡인 〈평조회상 平調會相〉을 처음으로 피리 독주곡으로 불었다. 광복 후 국립국악원의 국악사로 재직하면서 부설 국악사양성소에서 피리를 지도하였는데, 정재국(鄭在國)이 그의 뒤를 잇고 있다. 음악에 끼친 공로로 1958년 국악진흥회의 국악상을 받았다.
1881년(고종 18)∼1949년. 일제강점기 유학자·효자·교육자. 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지산(智山)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금수방(金水坊) 덕촌(德村) 출신이다. 여산군(麗山君) 김유정(金惟精)의 후손이다. 고조는 김성택(金聖宅), 증조는 영모(永慕) 김윤도(金潤道), 조부는 김병권(金秉權)이다. 부친 석천(石泉) 김호석(金浩碩)과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이지복(李志復)이다. 첫째 부인은 연안이씨(延安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풍채가 컸으며 기개가 강직하였다. 몸가짐은 신중하였고, 과묵하였다. 자손들을 훈계할 때에는 먼저 생각하게 만든 후에 깨우쳐 주었으며, 더러 깨우치지 못하면 그때서야 가르쳤다. 경사(經史)를 담론하고 의리(義理)를 강론할 때는 침식도 잊었으며, 예학(禮學)에 특히 열심이었다. 먼 곳 가까운 곳에서 의심스러운 것을 물으러 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선현(先賢)들의 말로써 증명한 후에 답을 해 주었다. 부모님이 병이 나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약을 달여 드렸는데,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먼저 자신이 맛보고 나서 드렸다. 부모 묘소가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추우나 더우나 날마다 가서 곡하는 일을 거르지 않자 고을 사람들은 진정한 효자라며 칭찬하였다. 그는 또 부친의 유집 《석천유고(石泉遺稿)》를 송증헌(宋曾憲)의 서문과 김준호(金俊昊)의 발문을 붙여 1946년에 간행하였다.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첫째 부인 연안이씨와의 사이에는 4남 1녀를 두었으며, 둘째 부인 성주이씨와의 사이에는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종원(金宗遠)·김숙원(金夙遠)·김굉원(金宏遠)·김우원(金寓遠)·김정원(金定遠)·김기원(金屺遠)·김두원(金斗遠)이다. 묘소는 금수방(金水坊) 남계촌(藍溪村)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유집 《지산유고(智山遺稿)》는 이만영(李晩永)의 서문과 권용현(權龍鉉)의 발문과 김굉원(金宏遠)의 후지(後識)가 붙어 있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성원(聲遠). 김중거(金重鐻)는 갑자(甲子)년에 일어난 난리(亂離) 때 임금의 거가(車駕)를 공주(公州)까지 호위한 공로(功勞)가 인정되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병자(丙子)년에는 임금이 탄 수레를 남쪽으로 호위하였으며, 이러한 공훈(功勳)이 훈적(勳籍)에 기록되었다. 관직은 부사(府使)를 지냈다.
1889년(고종 26)∼1933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일명 소래(笑來), 호는 불폐(不吠)·연산(蓮山), 도호(道號)는 마루진·원백(元伯). 함경남도 영흥 출신. 교화(敎和)의 아들이다. 1908년 고향에 연명학교(鍊明學校)를 세워 청소년에게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1909년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원종(元宗)을 개창하였다. 1911년 천도교에서 출교당하였고, 1913년 만주에 건원학교(建元學校)를 세웠다. 1916년 안도현에 도전학원(道田學院)·북구학원을 세웠으며, 191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회령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장백현 왕가동에 덕수학원(德水學院)·왕가학원(王歌學院)을 설립하였으며, 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하였다. 1920년 연길현에 자피구학원, 1921년 이도구학원, 국자가 남령(局子街南領)에 팔포강학원(八浦岡學院)을 세웠으며, 1922년에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중국체류금지 3년을 언도받은 후 1925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갔고, 만종학원(萬宗學院)과 건원학원을 합쳐 농대학원(農大學院)을 만들었다. 그리고 종우회(倧友會)·여성종우회 등을 조직하고, 《새바람》지를 창간하여 항일혁명사상을 고취시켰다. 1927년 또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된 후 1928년 동만주에 건너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동만주 각 지방에 농우동맹(儂友同盟)을 조직하고, 십가일촌(十家一村)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어복촌(魚腹村) 또는 주의촌(主義村: 사상운동의 마을이라는 뜻)이라 부르면서, 만주 영안현 팔도하자(八道河子)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모든 주민을 조직, 교육, 훈련시키고 국내의 신간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각 독립단과 사상단체 등의 규합을 시도하였다. 1927년 어복학원·하음자학원(下窨子學院)을 설립하고, 진우회(震友會)·에이비시단(ABC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혁명지도처를 설치하여 항일투쟁의 총지휘부로 삼고, 중국구국군사령부와도 긴밀히 접촉하면서 연합전선 구축에도 노력하였다. 항일투쟁은 만주대십자정책(滿洲大十字政策)·동방약소민족해방대연맹·항일백만단체결속운동 등으로 수행되어나갔으나, 1933년 조선공산군 이광(李光)의 부대에 붙잡혀 사살되었다. 유저로 《소래집》이 있으며,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미상∼717년(성덕왕 16). 신라 성덕왕의 원자(元子). 어머니는 승부령(乘府令)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 엄정왕후(嚴貞王后)이다. 715년(성덕왕 14) 12월에 태자로 책봉을 받았으나, 성덕왕 재위중에 죽었다. 중경이 죽은 연대는 승경(承慶)이 724년 봄에 태자로 책봉된 것으로 미루어, 723년 또는 724년초가 될 것 같다.
생몰년 미상. 신라 헌덕왕의 아우. 아버지는 소성왕, 어머니는 계화부인(桂花夫人)김씨이다. 808년(애장왕 9)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김역기(金力奇)를 통하여 당나라 덕종(德宗)으로부터 형 언승(彦昇)과 함께 귀족 가문에 장식하는 나무로 만든 문극(門戟)을 하사받았다. 그런데 김중공을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된 민애왕의 아버지 김충공(金忠恭)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무신. 1217년(고종 4) 2월에 거란군 3만명이 쳐들어와서 방책을 불사르자,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도공역(陶公驛: 지금의 楊州)에서 힘겹게 싸우다가 패하였다. 1222년 병부상서·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최우(崔瑀)의 정용군(精勇軍)·보승군(保勝軍) 징발을 저지하여 민폐를 줄이는 데에 힘썼으며, 1223년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야(樞密院副使尙書左僕射)가 되었다. 이듬해 7월에는 최우를 몰아내기 위한 이극인(李克仁)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이내 소환되어 서경유수로 임명되었다. 공변되고 충직한 인물로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높았다. 1228년 지추밀원사가 되었고, 1232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왕경유수병마사가 되어 수도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미상∼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대기(大器). 무과에 급제, 여러 낮은 직책을 거쳐 1703년(숙종 29)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06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북한산성 축조를 건의,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그러나 작업과정에서 부정축재가 있었음이 드러나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713년 포도대장이 되었고, 1719년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으나 역시 탐학한 관리로 탄핵을 받았다. 1720년(경종 즉위) 한성부우윤, 이어서 포도대장·병조참판·한성부좌윤·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론으로 취급되어 파직되었다가 1727년(영조 3) 노론이 물러난 정미환국으로 다시 총융사로 기용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순토사(巡討使)로 출정의 명령을 받았으나 타고갈 말이 없다는 핑계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또한 반란 주동자의 한 사람이며 사돈간인 이유익(李有翼)을 숨겨주었다 하여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뒤 석방의 주장이 있었으나 감옥의 벽을 뚫고 내왕한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다.
1636년(인조 14)∼1698년(숙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덕휘(德輝), 호는 경재(敬齋). 아버지는 참봉 시숙(是熽)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로 윤우(潤雨)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651년(효종 2)에 교서관저작·박사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참례도찰방(參禮道察訪)·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단성현감을 지냈으며, 1680년 봉사(奉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682년 자인현감을 지냈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어 단성과 자인에 아직도 그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그는 집에서는 효친과 애경으로, 관직에서는 충군과 애민으로 일관된 도학정신으로 교화정치에 힘썼다. 저서로는 《경재집》 2권 1책이 있다.
1614년(광해군 6)∼1685년(숙종 1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회(而晦). 아버지는 빙고별검(氷庫別檢) 전(㙉)이다. 1645년(인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 영흥대도호부사로 재직중에 관내의 사노(私奴)가 주인을 죽인 사건의 처리로 파직되었으나, 그뒤 다시 기용되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미상∼1413년(태종 13). 조선 초기의 무신. 제1차 왕자의 난 뒤 대호군으로서 한규(韓珪)와 함께 방간(芳幹)부자를 토산(兎山)에까지 호송하였으며, 1408년에는 풍해도병마도절제사로서, 또 경기좌우도조전첨제절사(京畿左右道助戰僉制節使)로서 왜구방어에 차출되어 공을 세웠다. 왜구방어와 여진정벌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1410년 조연(趙涓)의 지휘하에 신유정(辛有定)·곽승우(郭承祐)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지휘관 8명을 비롯, 부족 수백명을 토벌한 것은 대표적인 군공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호용시위사총제(虎勇侍衛司摠制)를 거쳐서 충청도병마도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 죽으니 왕이 부의를 내렸다.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초기 기술공. 1492년에 주사(朱砂)로 수은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의 기술적 개발로 조선에서는 16세기 초에 많은 수은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한번 그 이름이 보일뿐 김중보에 대해서는 더 알려진 것이 없다.
1659(효종 10)∼1702년(숙종 28). 조선 후기 효자. 호는 최락당(最樂堂)이며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충간공(忠簡公) 김덕생(金德生)의 9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7세 때 모친이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드렸으며 돌아가신 후 3년을 시묘(侍墓)하니, 모두들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의 효에 비길만하다고 하였다. 학문에도 뜻을 두어 침랑(寢郞) 이유인(李有仁)과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썼으며 선배들과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실시하여 향속(鄕俗)의 교화에도 전력하였다. 저서는 《최락당유고(最樂堂遺稿)》 1책이 있다. 1933년 유림들의 발의로 함평군(咸平郡) 나산면(羅山面) 증산사(甑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생몰년 미상. 김중성(金仲成)은 1279년(고려 충렬왕 5), 충렬왕의 도움으로 "충현교위(忠顯校尉) 관군총파(管軍摠把)"라는 호를 받았다. 이 호는 원나라가 진도(珍島) 싸움과 일본원정(日本遠征) 때 전쟁에 참여한 고려 장병에게 포상한 것이다.
1901년∼1946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안성 출신. 1919년 4월 1일과 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에는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명의 만세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앞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을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였다. 그곳에서 양성면과 원곡면 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거주자를 축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재차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돌과 짚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이유석·남현서·조경수·김봉현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유리창을 깨고, 다른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에 방화하였다. 이어서 양성면우편소를 소각하고 다음날 새벽에는 원곡면사무소를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 후 검거되어 실형을 받은 인물은 127명이고, 그는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22년∼1988년. 건축가.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여천(如泉). 평양 출생. 아버지 영필(永弼)과 어머니 이영자(李英子)의 5남 2녀 중 차남이다. 군수인 아버지를 따라 강동·중화·성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39년 3월 평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橫濱高等工業學校) 건축학과에 진학하였다. 이곳에서 파리미술대학 출신인 나카무라(中村順平) 교수로부터 건축교육을 받고 고전에 대한 눈을 떴으며, 1941년 12월 졸업한 뒤 마쓰다(松田)·히라다(平田)건축사무소에서 3년간 건축실무를 익혔다. 1944년 서울에 있는 조선주택영단 기수로서 일하였으며, 광복 전 1945년 안양에 있는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범대학을 비롯하여, 한양공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과 부산공업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UNESCO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건축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뒤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건축사무소에서 1952년 10월부터 3년 6개월간 건축 및 도시계획을 수업하고 자아발견의 가르침을 받았다. 1956년 3월 귀국하여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창작활동을 하며, 한국의 고전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홍익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1957년 4월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김중업건축작품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작품전을 열고 그 동안의 작품과 프랑스정부가 만든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선보였다. 서울이 당면한 도시계획·건축 등의 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을 과감하게 비판함으로써 1971년 11월 출국하여 프랑스에 거주하게 되고, 1972년 3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사로 선임되었으며,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로비던스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9년 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한국문화 속의 샤머니즘적인 체험과 내면에 분출된 원초적인 힘 등 보이지 않는 무한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주제를 가지고, 시정이 흐르는 생략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건축에 대한 정취를 표현하였다. 초기 대표 작품으로는 〈명보극장〉(1956), 〈서강대학교 본관〉(1958), 서울 장위동 〈‘人’자의 집〉(1958), 〈드라마센터〉(1959) 등이 있으며, 1960년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선보였다. 콘크리트로 지붕 처마선을 직선과 곡선으로 처리한 형태와 단아한 전체구성과 공간처리는 한국의 얼과 프랑스다운 우아함이 잘 어우러진 건물로서 한국현대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뒤의 주요 작품으로는 〈설씨 청평산장〉(1962), 〈제주대학 본관〉(1964), 〈서산부인과의원〉(1965), 〈부산 UN묘지 정문〉(1966), 〈3·1빌딩〉(1969) 등이 있으며, 1970년대 외국에 체류하며 설계한 작품으로는 성공회회관(1974), 한국외환은행본점 설계경기안(1974) 등이 있다. 1979년 귀국 후에는 〈바다호텔〉(1980)·〈하늘교회〉(민족대성전, 1980) 등의 계획안을 발표하였고, 〈KBS국제방송센터〉(1988),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1988) 등을 설계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5년 주한프랑스대사관 설계로 프랑스정부로부터 받은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Chevalier) 칭호, 1985년 산업포장(건설유공부문)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