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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태조 4)∼1459년(세조 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조선 태조 때 동북면도순문사를 역임한 회백(淮伯)의 아들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희맹(希孟)의 아버지이다.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중이던 1416년(태종 16)에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되어 파직되었다. 세종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에 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였고, 일시 면직되었다가 1441년(세종 23) 우부승지로 복직되었다. 그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년(문종 즉위)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저서로 《완역재집》이 남아 있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숙중(叔重), 호는 취암(翠岩). 황해감사를 역임한 강유후(姜裕後)의 아들이다. 남계 박세채에게 수학하여 학문에 매우 능했다고 한다. 겸산(兼山) 유숙기(兪肅基) 또한 일찍이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관직은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1631년(인조 9)∼1691년(숙종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위사(渭師).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사상(士尙)의 현손이며, 목사 욱(頊)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명을 떨쳤으며,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1668년 강원도도사가 되었으나, 기민구제를 게을리한다는 대간의 계(啓)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669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하여 현종에게서 호피(虎皮)를 하사받았으며, 1675년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사간원정언에 복직, 홍문관부수찬·수찬을 지냈다. 이듬해 충청도암행어사·이조좌랑·교리·사인(舍人)·응교(應校)·사간을 역임하였다. 문무의 재능을 인정받아 묘당(廟堂)의 추천으로 경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정권이 서인에게 넘어가자, 경기수사로서 민폐가 많고 근무가 태만하다는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689년 원자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풀려나와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1691년 대사간이 되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노독(路毒)으로 죽었다. 진선군(晋善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634년(인조 12)∼1681년(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숙하(叔夏). 아버지는 여재(汝載), 어머니는 신용(申涌)의 딸이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거쳐 1671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사서(司書)로서 사은 겸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수찬이 되었으나 숙종이 즉위한 뒤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공격받던 송시열(宋時烈)을 구호하다 파직당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부교리로 복직되었고, 같은해 고산찰방으로 올린 장계에서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의 모역문제를 제기하였다. 뒤에 종성부사가 되었다.
1679년(숙종 5)∼1755년(영조 3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공망(公望), 호는 송은(松隱). 강균(姜均)의 아들이다. 조선후기의 학자로서, 저서에는 《송은시집(松隱詩集)》이 있다. 《송은시집》은 2권 1책으로 된 시집으로, 서문·발문은 남아 있지 않다. 시 294수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실려 있는 그의 시 대부분은 오언절구 및 칠언절구와 칠언율시로 되어 있다. 〈차화옹매시운기적소(次華翁梅詩韻寄謫所)〉, 〈만화재(輓華齋)〉, 〈회자용헌(懷自容軒)〉, 〈계정즉사(溪亭卽事)〉 등의 시가 실려 있다.
1644년(인조 22)∼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하경(夏卿), 호는 죽은(竹隱).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연풍현감(行延豊縣監) 강대후(姜大後)이다. 15∼6세경에는 경서(經書)에 통달하여 1675년(숙종 1) 식년(式年)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지만, 대과(大科)에는 들지 못하였다. 만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성격이 겸손하여 남에게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학문을 하고자 하였으며, 두보(杜甫)의 시(詩)를 매우 흠모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문에 문집 약간이 전해지고 있다.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환관. 일명 석호(錫浩).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896년 친러파 이범진(李範晋)과 러시아공사관 통역 김홍륙(金鴻陸) 등의 사주로 고종의 아관파천 때 막후에서 연락임무를 맡았다. 아관파천 이후 김홍륙과 함께 왕의 총애를 빙자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뇌물을 좋아하여 정사를 크게 어지럽혔다.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미(子美), 호는 사괴자(四乖子) 또는 일진(一塵). 사예(司藝) 의호(義虎)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그 이듬해에 평양 숭녕전참봉(崇靈殿參奉)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으로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왕을 영유(永柔)까지 호종하였으며, 1594년 선공감직장이 되고 뒤에 제용감직장·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등을 역임하였다. 1605년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1월 29일 인목대비를 폐할 때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백치둔필 白癡鈍筆》이 있다.
1645년(인조 23)∼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화(子和).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백년(柏年)이다.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79년에 부수찬·정언을 지냈고,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680년 지평으로 재직중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교리에 등용되어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나국(拿鞫)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장례원판결사·형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6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1698년 형조참의로 다시 기용되었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705년 강원도관찰사, 이듬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708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574년(선조 7)∼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적이(積而). 돈령부첨정(敦寧府僉正) 수곤(秀崐)의 아들이다. 1606년 사마시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평안평사(平安評事)를 지내고 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귀(李貴)가 그를 청요직(淸要職)에 두려 하였으나, 외직으로 나가기를 원해 영천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을 지내고 이어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사도시정(司導寺正)을 역임하였다. 1626년 1년 동안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나 청양(靑陽)에서 살았다. 1627년 명나라 희종(熹宗)이 죽어 이듬해 진향사(進香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통례원(通禮院)의 좌·우통례를 지냈다. 1633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법대로만 일을 처리하고 굽히지 않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892년(고종 29)∼1935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강판형(姜判馨)은 그의 다른 이름이다.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성수면(聖壽面) 봉강리(鳳崗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서울에서 전달되면서, 강선칠(姜善七)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천도교와 기독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부 주동자들이 사전에 눈치 챈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되면서 학교에는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기독교 신도들이 신흥(新興)학교와 기전(紀全)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천도교 신도들은 수천 장에 달하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에 흩어진 신도들에게 13일 전주(全州) 장날에 있을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거사 예정일이 가까워올 수록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경계를 더욱 삼엄하게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28세였던 강선칠(姜善七)은 당일 오전 0시 30분 경 전라북도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대화정(大和町) 남문 부근에서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가 들어있는 가마니 1개를 채소 가마니로 위장해서 서정공립제2보통학교로 운반하였다. 그 태극기를 150여 명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도들에게 배포하고, 오후 1시경부터 김봉추(金鳳樞)·김진영(金鎭永)·이운영(李云泳) 등과 함께 서정공립제2보통학교에서부터 대화동(大和洞)을 지나 대정정 우편국까지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주동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은 총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는데, 강선칠도 체포되었다. 후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시위 행진으로 거리 치안을 방해했다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후삼국시대 궁예(弓裔) 휘하에서 활약한 장군. 914년 궁예의 명령을 받은 왕건(王建)이 나주 지방으로 출정할 때, 보장(步將)으로서 흑상(黑湘) 김재원(金材瑗) 등과 왕건을 도와 군선을 정비하여 군사와 양식을 싣고 나주로 갔다.
1516년(중종 1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월당(松月堂)·송일(松日)·낙봉(樂峰). 할아버지는 대사간 경서(景敍)이며, 아버지는 공망(公望), 형은 욱(昱)이다. 1540년(중종 35) 진사가 되었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 예조좌랑에 보임된 뒤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함경도어사·사간원헌납·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병조참지가 되었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첨지중추부사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562년 회령부사로 나갔다. 그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행부호군(行副護軍)으로서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주상(主喪)을 맡아, 3년간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다. 1566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는데 판윤 재직 때 성황제(城隍祭)의 헌관(獻官)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하여 제사에 불참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전보되었다. 1568년(선조 1)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3년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석한 바 있고, 신병으로 판윤을 사직하자 경기관찰사로 체직되었다. 1583년 비변사로부터 재경원수(在京元帥)로 추천을 받았으며, 범죄인을 사면할 때 외류(外流)이하는 납속(納粟)으로 속죄시킬 것을 주청한 바 있다.
1771년(영조 36)∼1835년(헌종 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거(聖居), 호는 오정(梧亭). 아버지는 강침(姜沈)이다. 숙부인 유천한(柳川瀚)에게 학문을 배웠다. 집을 떠나 백화산(白華山)에 들어가 주자(朱子)의 글을 좋아하여 손수 쓰고 읽으며 깊이 생각하기를 즐기며 근심을 잊었다고 한다. 회인(懷仁)의 오봉산(五鳳山) 아래에 기거하면서 날마다 마을의 젊은이들과 경서의 뜻을 토론하기도 하였으며, 오정(梧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시를 짓는 것을 낙으로 삼으면서 소박하게 살았다.
1689년(숙종 15)∼1760년(영조 36). 조선 후기 유학자·문신. 자는 덕용(德用)인데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상보(尙甫)’라고 되어 있으며, 호는 희헌(希軒)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해주판관(海州判官) 강응주(姜應周)의 9세손이고, 태자태사(太子太師)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5대손이다. 조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 강익무(姜翼武)이고, 아버지는 유학(幼學) 강중제(姜重齊)이다. 동생으로 강성은(姜聖殷)·강성필(姜聖弼)이 있다. 평소 효심과 우애가 깊고 행동거지가 독실하였다. 33세 때인 1721년(경종 1) 신축(辛丑)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50위로 합격하였다. 1728년(영조 4)은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고 관례와 가례를 치르는 세 가지 경사가 있었는데, 이때 그는 성균관 생원진사를 대상으로 치른 시험에서 5위에 올라 회시(會試)에 직부(直赴)되었다. 30년 동안 성균관(成均館)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영조(英祖) 때에는 12년 동안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있으며 강연(講筵)에 참석하였다. 군왕지도(君王之道)에 대한 8조문의 상소를 올리자, 영조 임금이 ‘진선보과 절절유미(陳善補過 節節有美: 좋은 것을 펴고 잘못을 보충하니 글마다 아름답다)’라고 비답한 뒤 월록(月祿)을 올려 주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무신·의병. 자는 원중(元仲), 호는 청파(靑坡)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벼슬은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미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는 통곡한 뒤 도읍(都邑)을 지켰다. 뒤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시대 박사(博士)를 지낸 강계용(姜啓庸)의 증손이다. 학문을 좋아하였다. 관직은 재보(宰輔)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866년(고종 3)∼1903년. 천주교신부. 세례명 라우렌시오. 충청도 홍산 출신. 만주에서 한국 입국준비를 하며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선교사업의 하나로 계획하였던 주교 리델(Ridel)과 신부 로베르(Robert) 등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1877년 한국 입국에 성공하자 곧 신학생교육에 착수, 신학생을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한편, 한국정부의 천주교탄압이 약화되면서부터는 국내의 신학생교육과 병행하여 일부 신학생들을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으로 유학시켰는데, 1882년에서 1884년까지 유학생수는 21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 제일 먼저 페낭으로 유학간 사람이 강성삼이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건너가 신부 코스트(Coste)의 지도로 1년간 예비신학교육을 받은 뒤 페낭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기후와 풍토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1884년부터는 신학생의 파견을 중단하고 유학중에 있는 신학생들도 철수시키기로 한 교구의 결정에 따라, 1890년에 귀국하여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藥峴聖堂: 지금의 중림동성당)에서 강도영(姜道永)·정규하(鄭圭夏)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서품된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뒤 곧바로 임지인 부산 절영도로 내려갔고, 1898년 1월에 경상남도 밀양군 명례로 옮겨갔으며, 그뒤 6년간 양산·언양·진양 등 14개 공소를 돌아다니며 전교하다가 죽었다.
1904년(광무 8)∼1966년. 양정고보(養正高普)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하여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學)에서 1935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요코하마(横濱)의 사이세이카이병원(濟生會病院)과 와카쿠사카이병원(若草會病院)에서 주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938년에 귀국하여 인사동에서 병원을 열었다. 이후 서울의사회 이사·부회장,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부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 대한결핵협회 서울지사 부지사장을 거쳐 이듬해 대한의학협회 이사, 이어 대한적십자사 서울 지사장을 세 차례 중임(重任)하였다.
1890년(고종 27)∼1968년. 일제강점기 기업가·육영사업가. 자는 기삼(箕三)이고, 호는 남주(南州)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법환동(法還洞)에서 태어났다. 한학은 물론 신학문에도 능통하였으며, 1919년 제주도 법환리의 제1구 구장(區長)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어업해녀조합위원 및 서귀포축항기성회간사 등을 역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해나갔다. 1927년 7월에는 전라남도 통조림조합의 이사로 취임하였으며, 1937년에는 전라남도 도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2년에는 서귀포 상공회의소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50년에는 남제주 자동차회사와 남제주통조림 회사 사장직에 있으면서 서귀포중학교(西歸浦中學校)의 후원회장직도 맡았다. 1950년에는 남제주(南濟州)의 군수(郡守)에 임명되어서 4·3제주 사건과 6·25전쟁 피해복구 등의 사회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954년 7월 도내 전분업자들의 공동판매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장이 되었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인 그는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영재를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었다. 1955년 4월에는 자신의 전 재산으로 중등교육의 불모지였던 산남(山南) 서귀포에 남주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56년 2월에는 재단법인 남주학원을 정식 인가받았으며, 7월에는 남주고등학교 및 부설 중학교까지 개설하는 등 육영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1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濟州島知事)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