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1580년(선조 13)∼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형조참판 상준(尙寯)의 아들이다. 1606년 진사시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병조좌랑·정언·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다시 정언이 되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1617년 폐모논의를 위한 정청(庭請)에도 참가하지 않아 삭직되자 고양(高陽)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고원군수(高原郡守)·판교(判校)·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로 국가재정의 확보에 큰 공을 세웠다. 164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경직에 돌아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도승지·병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경기감사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개성유수에 보임되었으며, 동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찬하였다. 저서로는 《죽소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1274년(원종 15) 일본정벌을 위한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편성될 때 응양군의 상장군으로 고려군 징집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듬해 1275년(충렬왕 1)에는 제주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요구에 따라 유수군(留守軍) 4령(領)을 징집, 편성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같은해 10월, 다시 원나라의 일본 재침 계획에 따라 경상도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에 임명되어 전함수조(戰艦修造)의 일을 담당하였다.
1478년(성종 9)∼1550년(명종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봉(月峰). 이조참판 필(㻶)의 손자이고, 헌납 괴(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의 우효신(禹孝新)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조광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1519년(중종 14) 사마양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인 장흥(長興)으로 돌아왔다. 그뒤 1521년(중종 16)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으로 있으면서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당시 기묘사화로 조정은 사림들을 몰아내고 오로지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안처겸은 시산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권전(權磌) 등과 함께 간신들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 볼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송사련(宋祀連) 등이 이를 듣고 밀고하여 일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송사련의 밀고 문서에 습독관인 그도 들어 있었으나 당시 조광조를 구하려했던 정광필(鄭光弼)의 두호로 해남(海南)에 유배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뒤 1533년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을 그만두고 장흥으로 돌아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사후 이조참의에 이어 이조참판에 각각 추증되었다.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에 제향되었다.
1571년(선조 4)∼1596년(선조 29). 조선 중기의 사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용(子容)·덕요(德饒). 조부는 김사걸(金士傑)이고, 아버지는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내고 후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만취당(晩翠堂) 김위(金偉)이다. 은진송씨(恩津宋氏) 송남수(宋枏壽)의 딸과 혼인하여 문정공(文貞公)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를 낳았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절친했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591년(선조 24)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 2등·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사마시에 동생 김광후(金光厚)도 진사 3등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부친이 남원(南原)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혹한에 달려가 상(喪)을 치르고 애통해 하다가 병을 얻어, 1596년(선조 29)에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후에 그 효성과 학덕을 높이 평가받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본관은 김해. 자는 천서(天瑞), 호는 반포암(伴圃庵). 이만수(李晩秀)가 쓴 〈반포유고서 伴圃遺稿序〉에 의하면 군부(軍府)의 서리였다고 한다. 아들 재명(載明)도 유명한 여항시인으로 그의 시집 《반포유고》를 간행했다. 허서(許瑞)·한욱(韓旭)·김진태(金振泰)·안상덕(安尙德)·장도문(張道文)·장도순(張道純)·김선여(金善餘) 등과 금란사(金蘭社)라는 여항인들의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작에 열중하였다. 그의 시의 특징은 대개 쉽고 평이한 시어로 생활주변에서의 감상을 표현한 점이다. 내용은 대체로 자연의 고요함 속에서 세속을 멀리한채 자족하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저서로는 《반포유고》 2권 1책이 있다.
1289년(충렬왕 15)∼1363년(공민왕 12).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 중찬(中贊) 태현(台鉉)의 아들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 성균학관이 되고,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1339년(충혜왕 복위 1)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복주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으며,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郞)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듬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으며, 이어 밀직부사·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의 설치와 함께 그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정사에 간섭이 심하여 물러났는데, 뒤에 덕녕공주가 수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350년(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하였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1351년 공민왕 즉위 후 12년간이나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어머니가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으므로 왕이 가상히 여겨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정표(旌表)하고 그 마을의 호(戶)일부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여 이를 봉사하게 하였다. 효제(孝悌)에 힘써 생산에는 관심이 없었고, 항상 금(琴)과 서(書)를 가까이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768년(영조 44)∼1859년(철종 10). 조선 후기 자선가. 자는 찬기(贊器)이고, 호는 옥현(玉峴)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이고, 통덕랑(通德郞) 김수해(金壽海)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인자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많이 베풀었다. 집이 없는 자에게는 집을 주고, 빈한하여 학문을 계속하기 어려운 자에게는 의식을 해결해 주어 배움을 이어가게 하였다. 행려자(行旅者)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 선행이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이 그의 덕행을 기리었다.
1866년(고종 3)∼미상. 민족운동가. 충청남도 보령 출신.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 國債一千三百萬과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그 요지는 대한국민 2천만명이 담배를 끊어 1개월간 담배값 20전씩을 3개월 저축하면 1천3백환이 되므로 전국민이 3개월간 단연(斷煙)하여 그 돈으로 이완용(李完用)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1천3백만환을 갚아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은 결과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한말국권회복운동 가운데 중요한 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만주로 망명, 압록강 대안의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유학생들과 제2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다 일본경찰에 잡혔다. 198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공신. 1349년(충정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지내고 공민왕 때 밀직사에 이르렀다. 1362년(공민왕 11) 개경에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다음해에 이등공신이 되었다. 1364년에 또다시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동북면도순위사(東北面都巡慰使)에 임명되고, 다음해 부천군(缶川君)에 봉해졌고, 같은해 9월에 동산군(洞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사회사업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제주도 제주시(濟州市) 한경면(翰京面) 저지리(楮旨里) 출신이다. 그는 1832년(순조 32) 3월부터 1841년(헌종 7) 9월까지 10년 동안 사재를 털어,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안덕면(安德面) 화순리(貨順里) 돌막은-소에서 도체비-빌레까지 황개천 바위를 뚫고 마을에 수로를 만들고 1만여 평의 농지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채구석(蔡龜錫), 백창유(白昌由)와 함께 제주지역 삼대 수로(水路)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향리에서는 그를 답조(畓祖)로 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그가 개척한 농지의 답주(畓主)들이 답주회(畓主會)를 조직하여 공로비(功勞碑)를 세우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김해 김광종 영세불망비(金海金光宗永世不忘碑)가 1938년 5월 5일 서귀포시(西歸浦市) 안덕면(安德面) 화순리(貨順里) 도체비 빌레에 세워졌다.
1906년∼1985년. 악기장(樂器匠)의 기능보유자. 보성군 벌교 출신. 1923년 전주제2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거문고·가야금 등 전통악기제조의 거장인 아버지 명칠(明七)에게 악기제조기술을 배웠다. 1930년에는 조선율기제작소(朝鮮律器製作所)라는 전통악기제조공장을 운영하였고, 1946년에는 대한고전악기제작소(大韓古典樂器製作所)를 운영하였다. 거문고·가야금 등 전통현악기 제작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명기를 많이 내었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제자로는 최대진·김종영·고흥곤(高興坤) 등이 있다.
1910년∼1973년. 현대소설가. 필명은 평(萍). 수원 출신. 중국 상해로 건너가 남양의학대학(南洋醫學大學)에서 수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중일전쟁중에는 중국에 머물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한때 김구(金九)를 보좌하였다. 《문화시보 文化時報》·《예술조선 藝術朝鮮》 등의 창간에 관여하였고, 경향신문의 문화부장으로 있으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는 재학 때부터 동인지 발간 및 창작극 공연활동을 하였으며, 중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1933년 단편소설 〈밤이 깊어갈 때〉(新東亞 10월호)·〈포도(鋪道)의 우울〉(1934.2.)·〈파혼 破婚〉(1934.10.)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곧이어 〈북평서 온 영감〉(1936.2.) 등을 발표했으며, 광복 후에도 발표한 수많은 단편소설은 3권의 단편소설집, 《결혼도박 結婚賭博》(1951)과 《연애제백장 戀愛第百章》(1954)과 《혼혈아 混血兒》(1960)에 수록되어 있다. 장편소설로도 〈태양은 누구를 위하여〉(1951)·〈석방인 釋放人〉(1954) 등이 있으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것은 단편 〈악야 惡夜〉와 장편 〈석방인〉이다. 전자는 양공주의 집에서 하룻밤 사이에 겪은 이야기이며, 후자는 반공포로석방으로 자유를 찾은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자취를 그린 작품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세계는 6·25 뒤의 세태를 나름의 현실감각으로 작품화한 하나의 계열과, 오랜 기간에 걸친 중국생활 및 그 자신의 대륙적 기질이 반영된 폭넓고 선이 굵은 또 하나의 작품계열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주제와 작품화 과정에서 매우 다양하고 개방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문학은 우리나라 현대소설사상 하나의 특이한 예를 보여준다. 그밖에 그의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남경로(南京路)의 창공(蒼空)〉(1935.5.), 장편소설 〈장미의 침실〉(1957)·〈흑백 黑白〉(1959) 등이 있다.
미상∼1553년(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 자는 숙예(叔藝).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승정원주서를 역임하고 1532년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헌납으로 옮겼다가 장령으로 승진하고, 1539년 홍문관전한이 되어 경연의 시강관을 겸임하였다. 삼사의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거쳐, 1543년 국왕의 특명으로 전한에서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의 한 사람으로서 을사사화를 일으켜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2등으로 상락군(上洛君)에 책봉되고,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호조참판·이조참판·호조판서를 거쳐 1546년(명종 1)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우참찬·우찬성을 역임하고, 1553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미상∼1170년(의종 24). 고려의 문신. 과거에 급제한 뒤 1163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당시 압록강 하류의 섬에는 인주(麟州)와 정주(靜州)의 주민들이 드나들며 농사를 짓고, 여진인들도 섞여 살았다. 공을 세우려고 섬을 공격하여 여진인들의 막사를 불사르고 여진인을 내몬 뒤 둔전(屯田)을 설치하며 군대를 주둔시켜 지켰다. 이로 인하여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1165년에는 정주별장 원상(元尙) 등이 금나라에 잡혀가기도 하였으며 금나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하여 1167년 둔전을 혁파하고 수비군도 철수하였다. 1168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 김영윤(金永胤)과 함께 장영재(張令才) 등 진사 27인과 명경 4인을 뽑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비서감(秘書監)·상서우승(尙書右丞)에 올랐다. 1170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수많은 문신들이 화를 당했는데, 평소에 사랑하여 구사(驅使)로부터 대교(隊校)로 보충시켜주었던 박광승(朴光升)의 밀고로 살해되었다.
1495년(연산군 1)∼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자임(子任). 아버지는 세훈(世勳)이고, 형은 동지중추부사 광철(光轍)이다. 1526년(중종 21) 생원으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37년 시강관이 되어 궁중의 법률을 엄격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집의를 거쳐 전한이 되었으며, 같은해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체직되었다. 1540년 다시 진주목사로 나아가 민폐를 제거하고 위엄과 은혜를 베풀어 아전들과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칭찬하는 치적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포상을 받고 당상관이 되었다. 1541년 제포첨사(薺浦僉使)가 되었으나, 군령(軍令)을 어겼다 하여 파직시키고자 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지 않자 사헌부에서는 파직만으로는 죄가 가볍기 때문에 고신(告身)마저 빼앗아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여 결국 파직되었다. 1544년 다시 양주목사로 나아가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구휼하고 부역을 고르게 한 공으로 포상을 받았다. 1546년(인종 1) 차사원(差使員)으로 파견되어 특별한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승진하였다. 1547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나아갔다가 사양했으나, 군졸이 피폐하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기 때문에 군졸을 다스리고 방어에 대비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그 일에 힘썼다. 1549년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역적 이치(李致)의 노비·전답·재물을 추쇄한 문서를 즉시 수송하지 않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51년(명종 6) 전주부윤이 되었고, 1553년 함경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554년 군사를 다스리는 데 치적을 쌓아 곧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육진(六鎭)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폐단이 많음을 들어 다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55년 함경도 지방의 호인(胡人)의 토벌과 군사들을 다스리는 데 힘을 다하여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155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사양하였으나, 풍년이 들지 못하고 왜구가 침입하여 군사들이 곤핍하여 지방수령들을 순찰할 때라 하여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564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주로 지방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쌓아 명성이 높았다.
1625년(인조 3)∼1698년(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진옥(晋玉). 길주(吉州) 출신. 아버지는 호겸(好謙)이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0년(현종 1) 입수성찰방(立輸城察訪)으로 있을 때, 죄인 원세흠(元世欽)의 유배지를 정하지 않았으며, 폐단을 만들고 말을 함부로 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1667년 홍원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는 암행어사의 추천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1675년(숙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인하여 화를 당하게 되자, 수찬 강석창(姜碩昌)과 함께 소를 올려 그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도리어 파직당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다시 등용되어 성균관에 보직을 받은 바 있고, 삼화현령(三和縣令)을 역임하였다.
미상∼1964년. 독립운동가. 가명 광해(廣海). 평안북도 의주 출신. 3·1운동 때 의주군 광평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조선총독부 경찰의 눈을 피하여 오동진(吳東振) 등과 남만주로 망명하여 청년단조직에 헌신하였다. 1920년 9월 18일에 미국의 국회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제청년단장(廣濟靑年團長) 오동진의 지령에 따라 7월에 동지 임용일(林龍日)과 폭탄을 휴대하고 평안북도 선천에 잡입하였다. 이들은 미국국회의원단의 입국을 기해 국내 주요도시의 일제기관 폭파와 일본요인 암살을 위해 준비공작을 하였으나, 일본경찰이 이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경계강화를 취하였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고 만주로 귀환하였다. 1925년 7월에 정의부(正義府) 군사부(軍事部) 별동대원 이진무(李振武)·홍학순(洪學淳)·김인옥(金仁玉)·김학규(金學圭)·이창만(李昌萬)·오동락(吳東洛) 등과 함께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車輦館)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 주재소를 습격, 4명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그 부근에 있는 부호 양조업자 집에 들어가 군자금 4천원과 금시계 1개를 영수하고 군중이 많이 모인 장터로 나와 그들의 활동상을 설명하였다. 야음을 틈타 만주로 귀환하던 중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격을 받아 치열한 교전 끝에 1개월 만에 귀환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후에는 광해(廣海)라는 가명을 쓰고 톈진(天津)·상해 등지를 전전하면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광복 후 1949년 10월에 귀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597년(선조 30)∼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회(思晦). 아버지는 부사 상관(尙寬)이며, 작은아버지인 좌의정 상헌(尙憲)의 양자로 들어갔다. 광해군 때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1627년(인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서로 세마(洗馬)가 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아버지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통진·교하의 현감 등 지방관을 역임하던중, 아들 수흥(壽興)·수항(壽恒)이 출세하자 1661년(현종 2) 공조참의에 특제되었다. 뒤에 청풍군수·파주목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637년 아버지 상헌이 척화를 주장하며 자살을 기도했을 때 적극 만류하지 않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미상∼1349년(충정왕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광산. 호는 둔재(鈍齋). 아버지는 중찬(中贊) 태현(台鉉)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1344년(충목왕 즉위) 6월에 서연(書筵)이 베풀어지자 지신사(知申事)로 시독(侍讀)하였고, 1347년 2월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판사가 되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그뒤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1493년(성종 24)∼1550년(명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자유(子由). 아버지는 세훈(世勳)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밀양현감으로 있을 때 형벌을 남용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1530년 군자감첨정이 되고 이듬해 장령이 되었다. 1532년 사송(司訟)이 바르지 못하고 지체되는 일이 많음을 지적하여 바르게 고칠 것을 주장하고, 곧 집의가 되었다. 1533년 판교·동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우승지·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35년 장례원판결사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7년 병조참지가 되었다. 곧, 찰리사에 천거되었으나 이 직책은 호조에 해당하는 관직이라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같은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인물됨이 용렬하고 공론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2년 안동부사로 흉년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검소함을 강조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하였으므로, 이 공으로 포상을 받고 자급(資給)을 올려받아 가의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고 1545년(인종 1) 종부시제조가 되었다. 예조참판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양하니 왕이 불러 흉년과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해줄 것을 특별히 요구하였다. 154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가 고부군수 김응두(金應斗)와 태인현감 신잠(申潛)이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거두는 등, 그 지방 백성들의 부담을 적게하는 데 힘써 선정을 남긴 것을 왕에게 보고하여 이들을 상주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