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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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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신지(新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83(선조 16) - ?
    본관
    부령(扶寧)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극신(金克新)에 대하여

    1583년(선조 16)∼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신지(新之)이다. 본관은 부령(扶寧)이다. 주부(主簿) 김중일(金重鎰)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일찍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경상우도병마우후(慶尙右道兵馬虞侯)에 재직 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족숙 수분와(守分窩) 김단(金湍)과 해옹(海瓮) 김홍원(金弘遠) 등과 함께 군량을 모았다. 그리고는 여산(礪山)으로 달려 갔는데,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 용협(用協)
    모암(慕庵)
    시호
    효절(孝節)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기타 > 의열
    김극일(金克一)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용협(用協), 호는 모암(慕庵). 의흥현감(義興縣監) 서(湑)의 아들이며, 부인은 한성부윤 이간(李暕)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장성한 뒤에는 장인의 간곡한 사관요청이 있었으나, 양친의 봉양을 이유로 거절하고 성심을 다하여 봉양하는 등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아들 맹(孟)은 물론 손자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의 훈회에도 정성을 기울여 이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학식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치는 토대를 이루게 하였다. 세종 때 청도군수 이기(李掎)의 보고에 따라 효자정려(孝子旌閭)가 건립되었고, 1482년(성종 13) 김종직(金宗直)이 찬한 효자문비가 다시 건립되었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시(私謚)는 효절(孝節)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극종(金克宗)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무신. 936년(태조 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후백제와 마지막 결전을 할 때 간천대장군(杆天大將軍)이 되어 원보(元甫) 조간(助杆) 등과 함께 보군(步軍) 1천인을 거느리고 중군(中軍)으로 참가하여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 선산군)에서 후백제의 신검군(神劒軍)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 자성(子誠)

    시호
    정평(靖平)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72(성종 3) - 1531(중종 26)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핍(金克愊)에 대하여

    1472년(성종 3)∼1531년(중종 2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자성(子誠). 아버지는 좌리공신 좌참찬 겸광(謙光)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가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다. 검열·전적·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수찬에 선임되어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임했다. 1503년 지평에 올라 언론활동을 벌이다 부사직으로 좌천되었으며, 이듬해인 1504년 예조정랑을 제수받은 뒤 갑자사화로 고산현에 장배(杖配)되었다. 중종반정 뒤 재기용되어 교리·장령·부응교·예빈시부정 등을 역임하였고, 승문원교감·사간·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1511년(중종 6)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호조참의를 거쳐 좌승지로 재임중, 박영문(朴永文)의 옥사에 참국(參鞫)하였다. 이어 충청도관찰사·한성부윤·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519년 개정가계사은사(改正家系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참찬을 제수받았으며,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호조판서 겸 세자좌빈객 등 현직을 두루 거쳐 1525년 좌찬성에 올랐다. 그때 권신 김안로(金安老)·허흡(許洽) 등의 미움을 받아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자 울분으로 단식 끝에 죽었다. 그는 이항(李沆)·심정(沈貞)과 함께 세간에 삼간(三奸)으로 지칭되었으며, 사림파와 대립하여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해(金克諧)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할아버지는 검교태자소부(檢校太子小傅)를 지낸 유막(兪邈), 아버지는 경시서승(京寺署丞)을 지낸 원부(元夫)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의주판관을 거쳐 남면북면구복원판관(南面北面勾覆院判官)을 역임했으며, 북방을 수비하는 진장(鎭將)이 되어서는 공이 많아 내직으로 옮겨져 중상서영(中尙署令)이 되었고, 분사대부시승(分司大府試丞)·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


  • 지명재(知命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김제(金堤)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혜(金克譿)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공신. 호는 지명재(知命齋)이며, 본관은 김제(金堤)이다.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이다. 김제군(金堤君) 김정걸(金正傑)의 5세손이며, 증조부는 찰방(察訪) 김세현(金世賢)이고, 부친은 김경흡이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벼슬은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주부(主簿)·호조좌랑(戶曹佐郞)·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과 군위현감(軍威縣監)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오성위(五聖位)를 판(板)에 써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당도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대신과 귀족들이 황망해 하자 인조를 알현하고 호종(扈從)하였다. 그 공로로 인조가 크게 칭찬하고 영국원종일등훈(寧國原從一等勳)의 녹을 내렸다.

  • 희민(希閔)
    사미당(四味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2(중종 37) - 1618(광해군 10)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효(金克孝)에 대하여

    1542년(중종 37)∼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 증조부는 상주판관(尙州判官)를 지낸 김영수(金永銖)이고, 조부는 진사(進士) 김번(金蕃)이며, 부친은 신천군수(信川郡守)을 지냈던 김생해(金生海)이다. 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는데, 그의 부친은 성종(成宗)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사위였다. 또 김극효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정유길은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柳自新)과 동서지간이다. 따라서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가 되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1562년(명종 17)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 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와 신도비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 있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김상용(金尙容)은 우의정(右議政), 4남인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左議政)에 오르는 등 그의 가문에서 고관대작이 조선말까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그래서 그를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중시조로 삼는다.

  • 국헌(國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32(중종 27) - 1592(선조 25)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극희(金克禧)에 대하여

    1532년(중종 27)∼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 무신. 자는 국헌(國憲)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영암(靈巖) 출신이다. 고려 말 대제학(大提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이며, 조부는 증 통례(贈通禮) 김한성(金漢城)이고, 부친은 김사종(金嗣宗)이다. 1564년(명종 19)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을 거쳐 거제부사(巨濟府使)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전라좌수군절도사(全羅左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한산도(閑山島) 전투에서 아들 원종공신(原從功臣) 선전관(宣傳官) 김함(金涵)과 선봉에서 용감히 싸우며 도망하는 왜적을 추적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아들 김함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일소(一笑)에 부치고 싸우다 전사하니 충국(忠國)의 본보기가 되었다. 뒤에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西湖面) 운호사(雲湖祠)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었으며, 1988년 창사한 충효사(忠孝祠: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소재)에 김국희·김함 부자를 향사(享祀)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근(金僅){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헌강왕 때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 관직은 시전중감(試殿中監). 886년(헌강왕 11)에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데 대한 경하부사(慶賀副使)로 당나라에 입조하였다. 이때에 김무선(金茂先)이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선발되어 동행하였으며, 또한 최광유(崔匡裕)·최환(崔渙) 등 두 사람을 당나라에 청하여 숙위학생이 되게 하였다. 소임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는 당나라 희종(僖宗)이 보내는 조서(詔書)두 함을 받아가지고 왔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근(金覲){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인종 때의 학자 부식(富軾)의 아버지이다. 1080년(문종 34) 호부상서 유홍(柳洪), 예부시랑 박인량(朴寅亮)과 더불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송나라 사람들이 박인량과 그의 시문에 크게 감탄하여 《소화집 小華集》이라는 문집을 만들었다. 1086년(선종 3)에는 예부시랑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자위(李子威)와 함께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다. 뒤에 국자좨주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에까지 올랐다. 네 아들 부필(富弼)·부일(富佾)·부식·부의(富儀) 모두가 글을 잘하여 명성이 높았다.

  • 광원(光元)
    매하(梅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7(헌종 13) - 1910(융희 4)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의열사
    김근배(金根培)에 대하여

    1847년(헌종 13)∼1910년. 순국지사. 본관은 김해.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 전라북도 이리 출신. 현교(顯敎)의 아들이다. 1866년 병인양요를 당하여 아직 약관의 나이로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상소하였다.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문명을 떨치다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여 청장년들에게 훈육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뒤 헌병주재소장을 통하여 그를 회유하기 위한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자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였으며, 앞으로 수없는 곤욕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명통(明通)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66(세조 12) - 1539(중종 34)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근사(金謹思)에 대하여

    1466년(세조 12)∼1539년(중종 3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통(明通). 부사 면(勉)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3년(연산군 9)에 사헌부장령을 지낸 뒤 다음해 홍귀달(洪貴達)의 유배사건에 연루되어 서천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환되었다. 1509년(중종 4) 경차관(敬差官)으로 경상도 삼포(三浦)의 왜인들을 추고(推考), 단속하였고, 1512년 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515년 홍문관부제학,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517년 판결사(判決事)·충청도관찰사·병조참의를 지내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일파 승지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1525년 동지돈령부사로 있으면서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황해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대사헌·공조참판·한성판윤을 지냈다. 1531년 병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33년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 겸 세자사부가 되었으며, 153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37년에 대간으로부터 김안로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김안로가 실각되면서 파직당하여, 하동(河東)으로 유배되었다가 1539년에 배소에서 죽었다. 관직은 매우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였으나, 김안로와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하였다.

  • 여인(汝仁)
    십청(十靑)/귀연(歸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72(영조 48) - ?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근순(金近淳)에 대하여

    1772년(영조 48)∼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인(汝仁), 호는 십청(十靑)·귀연(歸淵). 아버지는 이규(履銈)이다. 1794년(정조 18)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799년 직각(直閣)이 되었다. 순조 즉위 후 그의 합리적이고 강직한 성품이 비변사(備邊司)의 인정을 받아 어사(御史)에 합당한 인물로 추천되었으며, 1801년(순조 1) 부제학에 올랐다. 같은해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그의 문장과 학식이 뛰어남을 알고 경연관으로 천거하였다. 이때 왕은 이언적(李彦迪)이 정부에 건의한 서계십조(書啓十條)의 하나를 대궐의 벽에 걸도록 그에게 지시함으로써 정치수행에 교훈을 삼고자 하였다. 같은해 대사성이 되었고, 1802년 직제학이 되어 깨끗한 문관의 표본이 되었다.

  • 경구(景龜)
    우국(又菊)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5(고종 12) - 1956()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근시(金根蓍)에 대하여

    1875년(고종 12)∼1956년. 일제강점기 관리·기업가. 자는 경구(景龜), 호는 우국(又菊)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제주도 출신으로, 부친은 진사(進士) 난곡 김양수이다. 충남 사립옥성학교(私立玉成學校)를 졸업하였고, 1902년(고종 39) 제주목주사(濟州牧主事)에 임용된 후, 1906년 정의군주사(旌義郡主事)를, 1914년에 제주군서기(濟州郡書記)를 거쳐, 1915년 제주도 서기와 참사(參事)를 지냈다. 그 뒤 1920년 제주도 해녀어업조합(海女漁業組合) 창립 이사(理事)로 천거되었으며, 1922년 제주상선(濟州商船) 대표이사를, 1923년에는 제주도 노동회(勞動會) 회장이 되어 경제 실력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1924년 이후에는 제주면업(濟州棉業)·소화운송(昭和運送) 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도민의 신망을 얻어 도회의원에 수 차례 당선되었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평판되었다.

  • 선회(鮮悔)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10(광해군 2) - ?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근행(金謹行)에 대하여

    1610년(광해군 2)∼미상.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선회(鮮悔). 왜어역관으로 아버지는 역관 김득기(金得祺)이고 어머니는 평산인(平山人) 신응수(申應秀)의 딸이며 고모가 선조의 후궁인 순빈김씨(順嬪金氏)이다. 김근행은 재산이 많고 품계가 높은 역관인데도 검소한 생활로 매사에 조심하여 현명하였다고 한다. 1627년(인조 5) 18세에 왜학 시험에 합격하고 1643년(인조 21)과 1655년(효종 6)에 각각 통신사의 상통사와 당상역관으로 파견되었다. 또한 그가 1640년(인조 18)에 문위행(問慰行)의 당하역관으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모두 7차례 대마도를 다녀왔다. 문위행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애경사(哀慶事)를 위로 및 축하하는 목적에서 파견되었던 행렬이다. 1633년에 훈련도감에서 유황과 무기의 밀수를 추진하였는데 김근행이 그 일을 맡아서 일본으로 들어가 밀매 상인과 접촉하여 유황 4만근을 공급할 수 있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청주(淸州)
    분류
    기타 > 지방세력가
    김긍률(金兢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척족(戚族). 본관은 청주. 혜종 비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과 정종 비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의 아버지이다. 위계(位階)는 원보에 이르렀다. 청주의 호족으로 추정되며, 그의 세력배경이 되는 혜종과 정종이 재위 2년 또는 3년으로 단명하고 후사가 모두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광종 때에 숙청당한 부류로 보인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758(경덕왕 17)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기(金耆){1}에 대하여

    미상∼758년(경덕왕 17). 신라 경덕왕 때의 시중(侍中). 천재지변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조량(朝良)의 뒤를 이어, 755년(경덕왕 14) 7월 이찬(伊飡)의 관등으로서 시중이 되었다. 시중으로 재임하면서 경덕왕의 전제왕권과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중 757년 3월에는 내외관료의 월봉을 없애는 대신 녹읍을 부활하였다. 한편, 8월에는 호구와 조세를 관장하는 부서인 조부(調府)의 관리 2인을 증원하여, 지방조직의 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주·군·현의 전통적인 명칭이 중국식의 한자 이름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 추진에 주도적인 구실을 담당하였으나, 그가 죽은 이듬해인 759년 신라의 고유한 관부명을 중국의 방식으로 변경시킴에 따라 경덕왕의 한화정책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경덕왕이 귀족세력의 반발을 받아 한화정책을 통하여 전제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할 때 크게 활약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535(중종 30)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金紀){2}에 대하여

    미상∼1535년(중종 30). 조선 전기의 문신. 1522년 정언이 되고, 1525년 헌납·지평이 되었으나, 이듬해 지평을 제수하자 서경(署經)전에 사피(辭避)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528년 지평으로서 왜인들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물건을 진상하고 자신들에게 유용한 물건을 무역해가는 것은 그 폐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니 무역량의 한계를 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1532년 헌납이 되고, 이듬해 재해적간어사(灾害摘奸御史)로 황해도에 파견되었다. 그뒤 1534년 장령·교리·전한·집의를 역임하였다. 그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중종은 일찍이 대간 등의 벼슬로 시종한 사람의 죽음은 반드시 알리라고 지시하였다.

  • 지숙(止叔)
    북애(北厓)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7(명종 2) - 1603(선조 36)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金圻){3}에 대하여

    1547년(명종 2)∼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지숙(止叔), 호는 북애(北厓). 예안(禮安)의 오천촌(烏川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사 부인(富仁)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로 현보(賢輔)의 딸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602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상에 모두 3년간씩 여묘(廬墓)를 살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그의 종제(從弟) 해(垓)와 함께 고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정제장 겸 소모사(整齊將兼召募事)가 되어 많은 군량을 모았다. 또, 경주의 집경전(集慶殿)에 있던 태조의 어진(御眞)이 예안의 백동서당(柏洞書堂)에 이안(移安)되었을 때, 임시로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안동의 27의사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목숨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웠다. 1598년 도산서원의 산장(山長)이 되어 《퇴계전서 退溪全書》의 간행에 힘을 쏟아 그 일을 끝냈다. 1602년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황이 남긴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고을의 풍속교화에도 힘써 《여씨향약》을 본떠 향규를 만들어 향인들을 교도하였다. 《중용》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기(理氣)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이 있었다. 사후에 임진왜란 때의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으로 사헌부감찰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북애문집》 4권이 있다.

  • 덕용(德容)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14(숙종 40) - 1775(영조 51)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대(金器大)에 대하여

    1714년(숙종 40)∼1775년(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덕용(德容). 아버지는 은율현감 세연(世衍)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 구연(九淵)에게 입양되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친정 조카 뻘이 되었다. 처음에는 문음(門蔭)으로 이천부사가 되었다가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에 승지로 특진되었다. 1762년에는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뒤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764년에 전은군(全恩君) 돈(墩)·안표(安杓)와 함께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7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서 백두산의 제사를 위한 제단 설치의 논의에 참여, 그 위치를 갑산에 정하도록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그뒤에 예조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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