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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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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삼농(三儂)
    시호

    이칭
    김재용(金在用)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2() - 1985()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용우(金用雨)에 대하여

    1912년∼1985년. 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재용(在用), 아호는 삼농(三儂).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우(鍾宇), 어머니는 전영애(田英愛)이며, 부인은 심양순(沈良順)이다. 193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마쳤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39년 남캘리포니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광복되던 해 9월 서울시장의 고문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시 후생국장에 기용되었다. 한때 중앙기술교육위원회 사무총장과 주택영단(住宅營團) 이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5·10총선거에는 서울시 서대문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년 국회 사무총장을 거쳐, 1955년 국방부차관, 1956년 국방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57년 주영(駐英) 초대대사가 되었다. 1958년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59년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이 되었다. 1962년 국제테니스클럽회장, 5·16장학회 이사,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연맹 총무,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민주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하여 1963년 당무위원에 뽑히고,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68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총재가 되었다. 1971년 폭넓은 사회적 명망으로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었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에 부임하였다. 1972년 7월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1975년까지 총재로 있으면서 남북적십자회담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 치언(致彦)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9(고종 6) - 192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용욱(金容旭)에 대하여

    1869년(고종 6)∼1921년. 한말의 의병장. 호는 치언(致彦). 경상북도 울진 출신. 1906년 신돌석(申乭石)이 경상북도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휘하에 들어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신돌석 의병진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6년 4월에는 일본군 선박 9척을 파손시킨 울진 장흥관(長興館) 기습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907년에는 울진지방에서 투쟁을 하였다. 1908년 1월에는 경상북도 평해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3월에는 경상북도 안동과 강원도 삼척 등지에서, 4월에는 울진에서, 그밖에 경상북도 예천과 순흥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해 10월 신돌석 의병진이 해산하자, 1909년 이후에는 태백산맥을 무대로 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한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미사(薇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2(헌종 8) - ?
    본관
    청풍(淸風)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용원(金鏞元){1}에 대하여

    1842년(헌종 8)∼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청풍. 호는 미사(薇史). 1876년 제1차 수신사 김기수(金綺秀)가 일본에 파견될 때 부사과(副司果)로서 화원(畵員)의 직분을 띠고 수행하였다. 그뒤 견외사절(遣外使節)로서 활약하였으며, 1881년 경상좌도 수군우후(水軍虞候)를 역임하였다. 이때 정부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으로 파견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유람단은 3차에 걸쳐 충원되었는데, 기선(汽船)과 총포(銃砲)구입을 담당하였던 참모관(參謀官) 이동인(李東仁)이 2월 15일경 실종되었다. 이에 김용원은 이동인 대신에 기선운항에 관계된 제반사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2월 26일경에 유람단의 조사(朝士)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인천개항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수행원 손붕구(孫鵬九), 통사(通事) 김대홍(金大弘)을 대동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사들이 복명(復命)한 뒤에도 일본에 그대로 남아 임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화학과 양잠학(養蠶學)을 배웠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이른바 제1차 한로밀약설(第一次韓露密約說)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즉, 전 영령관(營領官) 권동수(權東壽)와 함께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조선의 보호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그들 러시아측 회답문의 내용이 누설됨으로써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연로거청(聯露拒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2(고종 29) - 193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원(金庸源){2}에 대하여

    1892년(고종 29)∼1934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대덕 출생.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金九)아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부터 1920년 6월까지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고,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귀국하여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大同團)에 입단하여 의친왕(義親王, 李堈)의 탈출에 조력한 바 있었다. 1919년 8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임시정부가 조직한 바 있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에 가담하여 군자금 조달에 앞장섰다. 1923년 7월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에 활약하다가,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8개월간 복역 후 병으로 인하여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일대에서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수형기록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34년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옥중에서의 병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죽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9(고종 26) - 195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이(金龍伊)에 대하여

    1889년(고종 26)∼1958년.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옥천 출신.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육창주(陸昌柱) 등과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태극기 3개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許相基)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허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3백여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헌병주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출동한 일본헌병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연행되었으나, 다시 1백여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들이닥치자, 일본헌병이 발포하는 사이 혼란한 틈에 탈출하여 주재소를 공격하는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7(융희 1) - 1979()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용익(金龍益)에 대하여

    1907년∼197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인 〈봉산탈춤〉의 예능보유자.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사리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발사로 지내다가, 1954년 월남하여 1956년부터 김진옥(金辰玉)으로부터 〈봉산탈춤〉을 배워 취발이·먹중·거사·사자마부역의 춤을 추었다. 1970년 7월에 〈봉산탈춤〉의 먹중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후계자로는 최창주(崔昌柱)·장용일(張鏞逸)·조운룡(趙雲龍)·김종엽(金鍾燁)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김준(金俊)/김종(金鍾)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4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재(金容宰)에 대하여

    1896년∼1945년. 독립운동가. 일명 준(俊) 또는 종(鍾). 전라남도 담양 출신.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뒤 1925년 중국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입학하여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31년 3월 조선의열단 간부학교 및 전술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혁명이론과 군사교육을 통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전방공작대원으로 활약하였다. 조선의용대가 충칭(重慶)으로 퇴각하여 1942년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자, 제1지대 제1구 대장에 임명되어 후베이성 라오허거우(湖北省老河口)에 주둔하면서 초모공작·대적선전공작·적정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상해에서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김용제(金容濟)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8(고종 15) - 193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제(金庸濟)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31년. 독립운동가. 일명 용제(容濟). 황해도 안악 출신. 1906년 애국단체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가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 활동하는 한편, 양산학교(楊山學校)교사로서 애국청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송종호(宋鍾昊)·김구(金九) 등과 결성하고 민족교육 진흥에 힘썼다. 1911년 일제가 우리나라 민족지도자를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이른바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았으나, 1913년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피하며 동지들과 연락하였으며,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조직을 목적으로 시행한 연통제(聯通制)에 가담, 안악군참사(安岳郡參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16()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용조(金龍祚)에 대하여

    1916년∼1944년. 양화가. 대구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네살 위의 같은 처지였던 이인성(李仁星)의 화단진출에 자극을 받아 수채화와 유화로 급속히 재능을 나타내었다. 16세 때인 1931년부터 대구의 양화가 그룹이던 ‘향토회(鄕土會)’작품전에 참가했고, 1932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계속 입선하며 화가의 길을 개척하였다. 백화점 등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을 해결하다가 1940년에 동경에 건너가 한때 태평양미술학교 야간부에서 수학하였고, 1942년에는 동경의 문부성미술전람회(약칭 文展)에도 입선하며 성공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하였다. 그러나 1943년에 대구로 돌아온 뒤 결핵을 앓으면서도, 이듬해의 조선미술전에서 〈어머니의 상〉이 특선에 오른 것을 끝으로 29세의 짧은 독신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작품에서는 맑고 경쾌한 색채구사와 다감한 붓놀림으로 풍경·인물·정물 등을 고루 다루었으며, 대표작으로 〈어선〉(1938년 조선미술전 출품작)·〈해경〉 등이 전해지고 있다.



  • 시호

    이칭
    김용준(金用俊)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1(고종 18) - 1936()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준(金容俊){1}에 대하여

    1881년(고종 18)∼1936년. 독립운동가. 일명 용준(用俊). 경기도 화성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면(洪冕) 등이 전개한 수원군 송산면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26일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1백여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고, 사강장날인 28일에도 홍면 등과 함께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일본경찰이 홍면 외 2명을 붙잡아 꿇어앉혀놓았는데, 갑자기 홍면이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는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그 광경을 본 군중의 분노는 일시에 폭발하였고, 도주하는 일본경찰을 홍면의 동생 준옥(㻐玉)과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 등과 함께 추격하기도 하였다. 만세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근원(近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4(광무 8) - 196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용준(金瑢俊){2}에 대하여

    1904년∼1967년. 화가·미술평론가·한국미술사학자. 호는 근원(近園). 대구 출생.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재능을 나타내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1931년에 오지호(吳之湖)와 동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양화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지속하지 않았고, 1938년 무렵부터는 전통적인 수묵화에 손대기 시작하였으나 또한 뚜렷한 면모는 아니었다. 반면, 신문·잡지에 미술평과 미술관계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평론가로서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참여하여 한때 전통회화의 이론 강의를 맡다가, 동국대학교로 교직을 옮겼다. 6·25가 일어나자 공산체제에 영합하여 좌익색을 드러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접수하여 학장이 되는 등 몇 달간 맹약하였고, 9·28서울수복 때에 월북하였다. 북한에서는 조선화가(전통화가)로서 체제적인 사실주의 형식의 정치적인 그림과 풍속적인 인물화를 그렸음이 단편적으로 확인되어 있다. 월북 전의 비경향적 저서로 《근원수필 近園隨筆》(1948)과 《조선미술대요 朝鮮美術大要》(1949)가 있다.

  • 성구(聖九)
    영운(穎雲)/향석(香石)/구룡산인(九龍山人)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78(고종 15) - 1968()
    본관
    안동(安東)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용진(金容鎭){1}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68년. 서화가. 본관은 안동. 자는 성구(聖九), 호는 영운(穎雲)·향석(香石)·구룡산인(九龍山人). 특진관(特進官) 흥규(興圭)와 대원군의 외손녀인 임천조씨(林川趙氏)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참판 정규(貞圭)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조부인 병국(炳國)이 영의정을 지내는 등 당시의 세력층인 안동김씨 문중을 배경으로 자라난 그는 한말에 세마(洗馬)·수원군수 및 내부(內部)의 지방국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무렵 관직을 떠난 뒤에는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1949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 서예부 심사위원과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의 명예회장과 한국서예가협회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글씨는 안진경체(顔眞卿體)의 해서와 한예(漢隷)에 바탕을 둔 예서 및 고격한 행서를 주로 썼고, 그림은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와 수선화·모란·등꽃·연꽃·장미 등의 문인화(文人畵)를 즐겨 그렸다. 문인화 수법은 근대 중국 문인화의 거장인 오창석(吳昌碩)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묵란(墨蘭)과 묵죽(墨竹)에서는 민영익(閔泳翊)의 필법과 감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많이 그렸던 꽃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풍부한 색채구사와 전통적 품격의 필치는 그의 독자적인 수법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1956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4(고종 21) - 1937()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진(金庸震){2}에 대하여

    1884년(고종 21)∼1937년. 독립운동가. 황해도 안악 출신. 1906년 을사조약 체결 후 반일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 등 여러 동지와 함께 안악지구 신민회(新民會) 및 면학회(勉學會)를 설립하고 운영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1년 1월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총살 미수라는 급조된 사건인 안명근(安明根)사건(事件)의 연루자로 김구·최명식 등과 같이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와 최명식에게 여비 3백원을 주어 중국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그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이 경영하는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의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최명식이 국내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의 임무를 띠고 들어오자 황해도일대를 비밀리에 순방하면서 연통제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통제가 폐지될 때까지 연통제 조직을 확대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기밀문서의 전달 및 독립운동상황의 정보교환 등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운경(雲卿)
    정헌(靜軒)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9(순조 9) - 1890(고종 27)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용징(金龍徵)에 대하여

    1809년(순조 9)∼1890년(고종 27). 조선 후기 문신·교육자·서예가.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정헌(靜軒)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涯月邑) 납읍리(納邑里) 출신이다. 부친은 김봉철(金鳳喆)이고, 동생으로 김상징(金象徵)과 김기징(金驥徵)이 있다. 선천적으로 인정이 넘치는 성품을 타고났으며, 총기까지 넘쳐서 나이 6세에 이미 글을 통달하였다. 1832년(순조 32)에는 전주(全州)에서 열린 소과(小科) 초시의 하나로 시험에 합격하면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였으며, 1838년(헌종 4)에는 제주의 승보시(陞補試)에도 합격하였다. 또 35세 때에는 1843년(헌종 9) 계묘식년진사시 3등에 58위로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제주도 안에는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제주향교(濟州鄕校)과 정의향교(旌義鄕校) 그리고 대정향교(大靜鄕校)가 있었는데, 그는 향교 3곳의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제주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854년(철종 5)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 목인배(睦仁培)가 제주향교 구내에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의 아버지를 제사 지내기 위한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자 그는 제액(題額)을 써서 걸어두었다. 당대 제주 최고의 학자로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시켰음은 물론이고, 학식(學識) 또한 매우 풍부한데다 글씨마저 잘 써서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최익현(崔益鉉)의 《면암집(勉菴集)》 부록(附錄)의 〈연보(年譜)〉에 따르면 귀양길에 오른 최익현이 1873년(고종 10) 12월 3일에 70리 뱃길을 노 저어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소안도(所安島)에 도착하였는데, 그곳 귀양지에서 교유한 문사(文士) 가운데에는 안달삼(安達三)·김희정(金羲正)·강기석(姜基碩)·김용징(金龍徵)·김훈(金壎)·김치용(金致瑢)·김양수(金養洙) 등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는 최익현 유배시절에 교유했었음을 알 수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4(고종 21) - ?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용찬(金容粲)에 대하여

    1884년(고종 21)∼미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휘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장환(金章煥)은 서울에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독립운동이 순조롭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야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야겠다는 뜻을 품고,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자신과 김시범(金時範)을 포함한 14명의 동지들과 함께 왔다. 고향으로 올 때 그는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몰래 입수해 가지고 들어왔다. 마침내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해 3월 21일 오후 3시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였는데, 조천·신촌(新村)·함덕리(咸德里) 주민 5∼600여 명이 모였다. 김시범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잠시 지켜보던 일본 경찰들은 만세운동이 4일간이나 계속되자, 24일날 강제 진압에 나서서 핵심 인물 검거 작전에 들어갔다. 급기야 조천만세운동의 주동자 23명이 모두 체포되면서 4일간이나 울려 퍼졌던 만세 함성은 끝이 나고 말았다. 당시 검거된 23명 가운데 14명은 법원에서 실형을 받았다. 이때 함께 참여했던 김용찬은 제주도내의 도민들을 선동하여 도민들의 치안 관리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며,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제주도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조천만세운동이었기 때문에 미밋동산을 ‘조천만세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세동산이 있는 조천리 1142-1번지 일대에는 삼일운동 기념탑과 만세를 부르는 조각상, 제주항일기념관, 야외추모탑, 위패봉안실 등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당시 18세의 나이로 독립선언문을 제주로 가져왔던 김장환이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김시범 등은 유공자 포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06(태종 6년)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용초(金用超)에 대하여

    미상∼1406년(태종 6) 1월 13일. 본관은 의성(義城). 김용초(金用超)는 고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1390년(공양왕 2)에 왜구가 양광도에 침탈하자 김용초는 밀질부사로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 자혜윤(慈惠尹) 이방과(李芳果),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柳龍生), 의덕부윤(懿德府尹) 곽충보(郭忠輔) 등과 함께 영주(寧州)의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왜구 100여 급(級)을 베었다. 조선 개국 후에 충청도병마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태조 때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배위는 옥산장씨(玉山張氏)이다. 묘소는 지례(知禮) 유천(柳川)에 있다. 아들이 셋이니, 김화(金華)·김감(金鑑)·김경(金鏡)이다. 의성김씨족보에 의하면 김화(金華)는 김화(金和)로 되어 있다.



  • 시호

    이칭
    김용수(金龍樹)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족
    김용춘(金龍春)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시대 왕족. 일명 용수(龍樹). 진지왕의 아들이며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지도부인(知道夫人) 박씨이고,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이다. 아버지 진지왕의 신분은 성골이나, 왕위에 재위한 지 4년 만인 579년에 폐위당하였으며, 용춘의 아들인 김춘추의 신분은 진골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용춘의 신분이 원래 성골이었는지, 아니면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族降)하였는지 그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654년(태종무열왕 1) 4월 아들인 무열왕에 의해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삼국유사》에는 용춘이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이라고 되어 있다. 즉, 대왕은 중국식 추시(追諡)와 비슷한 관념을 지니는 것으로, 갈문왕이 발전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갈문왕은 한 씨족 내지 가계의 우두머리로서, 왕의 즉위초에 그 왕과의 일정한 관계를 기준으로 해서 책봉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신라 중대의 첫 왕인 태종무열왕이 아버지를 대왕으로 추봉하였다는 것은 문흥대왕이 가조적(家祖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무열왕의 아버지인 김용춘이 갈문왕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중국식으로 문흥대왕에 추봉된 것을 계기로 일단 종래의 갈문왕제도가 신라사회에서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태종무열왕계 왕권의 전제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가석(可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8(철종 9) - 1934()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학 > 문필가
    김용태(金溶泰)에 대하여

    1858년(철종 9)∼1934년. 일제강점기 문장가·서예가·학교 설립자. 호는 가석(可石)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전라북도 전주시(全州市) 동문 밖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장로계의 계문학교(啓文學校)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으로 박식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경성대동시사(京城大東詩社)에서 주최한 문학 대회에 응모하여 수상하는 등, 서예에서는 물론 문장에서까지 이름을 날렸다. 성격이 다정다감하면서도 후덕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박성중(朴性重)·백남주(白南住)·서동준(徐東俊)을 비롯하여 재산가이자 사회사업가인 화형(和炯)인 김용환(金容桓)·전주 지역의 유지 박기순(朴基順) 등과도 나이를 초월한 교유를 맺는 등 폭넓은 대인관계를 가졌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는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1910년(융희 4) 일본에 의해 치욕스런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45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을 하였다. 노년에는 술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며 살았다. 아들로 이리중학교(裡里中學橋) 교장 하정(荷汀) 김한규(金翰圭)가 있고, 손자로 서예가 소정(小汀) 김병용(金炳用)이 있다. 유고(遺稿)로 《가석시문집(可石詩文集)》이 남아 있다고하나, 현재 소장되어 있는 곳은 확인되고 있지 않다.

  • 덕우(德雨)
    고송재(孤松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80(숙종 2) - 1722(경종 2)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용택(金龍澤)에 대하여

    1680년(숙종 2)∼1722년(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덕우(德雨), 호는 고송재(孤松齋). 할아버지는 대제학 만중(萬重)이고, 판서 이사명(李師命)의 사위이다. 숙종이 사류(士類)들을 대거 등용할 때, 이이명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다. 1722년 노론 사대신과 그 일당 60여인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추대하려 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이천기(李天紀) 등과 함께 하옥, 국문을 받다가 고문치사되었다. 1802년(순조 2)에 신원되어 집의에 추증되었다.

  • 달우(達宇)
    우당(愚堂)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50()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교육자
    김용하(金容河)에 대하여

    1896년(건양 1) 12월∼1950년. 일제강점기 교육자·서예가·정치가. 자는 달우(達宇)이고, 호는 우당(愚堂)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하귀리(下貴里)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전인항(全仁恒)이다. 대구사범학교 교장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다. 19세에 평양제2고보(平壤第2高普)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부터는 일본 치하의 제주도에서 서기로 2년여 간 재임하였다. 그러다 일본인들의 학정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면서 관리 생활을 청산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제주도내의 의식이 깨어있는 신진청년들로 이루어진 탐라협회회원으로도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東京) 법정대학(法政大學) 예과(豫科)를 거쳐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철학과의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후 함경북도 종성(鍾城)중학교의 교사 직을 시작으로, 대구 사범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문교부 장학관에 발탁되었는데, 이때 그는 남녀공학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주장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또 경성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와 용산공립중학교의 교장, 조선 민족청년단 서울시단의 이사,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과장과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및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를 지내었다. 그는 또 1949년 4월 20일 제4대 제주도지사로 부임되어 민생 치안과 구호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도지사부임 7개월 만인 1949년 11월14일 공금횡령 혐의와 지사 전용차를 서울에 가지고 갔던 문제 등으로 결국 퇴임당하고 말았다. 퇴임 후 그는 명예회복을 위해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조직과 자금력이 부족했던 그는 낙선을 하였다. 그 후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를 갔고 곧이어 6.25사변이 터졌다. 당시 북한군들은 애국지사들 3000여 명을 납북해갔었는데, 이때 그도 북한군에 의해 납북 당했다. 서예에도 뛰어난 그는 붓글씨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해방 후 ‘한글습자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습자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교육용 붓글씨 책이기도 하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애월읍지(涯月邑誌)에는 그의 마지막 서예 작품이 실려 있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김관중(金貫中)이고, 셋째 아들은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金宇中)이다. 제주도 제주시 한라산(漢拏山) 사봉산책로 20에는 아들 김우중이 1985년 6월 11일 부친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 기증한 우당 도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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