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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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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기타인물
    김장청(金長淸)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현손. 증조부는 이찬(伊飡) 삼광(三光), 할아버지는 성덕왕의 총신이었던 대아찬(大阿飡) 윤중(允中)이다.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으로 유명한 김암(金巖)과는 형제간이다. 그의 가문은 김유신의 증손 김융(金融)이 난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몰락하여, 그는 집사부의 말단직 집사랑(執事郞)을 지냈을 뿐이다. 저서로는 김유신의 《행록 行錄》 10권이 있는데, 《삼국사기》의 김유신전 3권은 이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 덕부(德夫)
    지암(持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1(헌종 7) - 1926()
    본관
    선산(善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재경(金在敬)에 대하여

    1841년(헌종 7) 12월 11일∼1926년 12월 10일.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지암(持菴)이다. 초명은 김태린(金台鱗)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사천리(沙川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김상구(金相九)이고, 조부는 김진호(金振琥)이며, 아버지는 김치명(金致明) 이다. 외조부는 김만중(金萬重)이고, 처부는 김필균(金弼均)이다. 평생 덕성(德性)을 이루는 데 힘을 기울여 문장(文章)을 꾸미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술(醫術) 등 다방면에 능하여 선비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간점산(肝占山)에 있다. 문집으로 《지암선생문집(持菴先生文集)》이 있다.


  • 성암(城庵)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8(고종 25) - 193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천도교인
    김재계(金在桂)에 대하여

    1888년(고종 25)∼1938년. 일제강점기 천도교인·독립운동가. 호는 성암(城庵)이다. 전라남도 장흥(長興) 대덕면(大德面) 신상리(新上里) 205번지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전남 장흥군 천도교(天道敎) 교구장(敎區長)인 그는 군내(郡內) 천도교 신도들과 함께 49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대로 독립운동자금 500원을 거둬서 서울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에 납입하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독립선언서를 받아와서 장흥군과 강진군(康津郡)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그는 천도교중앙총부 금융관장이 되었다. 1933년 9月이후로는 일본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불과 석 달이면 끝마칠 것을 팔 년이나 걸린 것은 무슨 일인가? 나도 또한 신선으로 이런 풍진(風塵) 무슨 일인고. 나도 또한 한울님께 신선(神仙)이라고 명을 받았어도, 이런 고생 다시 없다. 세상 사람들의 음해(陰害) 많고도 많구나. ……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림으로부터 조화를 받아 하룻밤 사이에 멸망시키고, 그멸망시킨 사적(史蹟)을 후세로 무궁하게 전할 것이다.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이(汗夷)원수 갚아보세. …… 한울님께서 내 몸 내시어 우리나라 운수를 보전하네.’라는 기도문을 작성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매일 이 기도문을 읽게 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그는 중일전쟁 발발을 독립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기위해 천도교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적인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일본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리다가 체포되었다. 일설에는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서 옥중 사망하였다고 하나, 《조선일보》 1937년 7월 31일자에 의하면 70여일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석방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에는 천도교회월보사(天道敎會月報社)가 발행한 귀중본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에는 그가 쓴 3쪽 분량의 〈아천아대(我天我侍)〉가 있는데 국한문혼용체로 서술되어 있다.

  • 사득(士得)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광산(光山)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재관(金在寬)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무신. 자는 사득(士得),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인조반정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감찰(監察)을 지낸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이고, 아버지는 김성함(金聲咸)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의사(義士)로 선발되어 청군(淸軍)과 싸웠다. 강화가 성립되자 이를 분히 여겨 낙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략과 용맹을 높이 산 이완(李浣)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올랐으며,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까지 올랐다.


  • 서강(西剛)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2() - 1993()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재광(金在光)에 대하여

    1922년∼1993년. 정치가.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서강(西剛). 충청북도 청원 출신. 아버지는 동묵(東默)이고 어머니는 유옥(柳玉)이다. 1960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1968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고, 1989년 미국 퍼시픽대학교(Pacific States University)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8월 초대서울시의회 의원, 같은해 10월 민주당(民主黨) 원내총무, 1960년 12월 제2대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었다가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 1963년 4월 군정연장반대시위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고, 수감중 105인동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같은해 11월 민정당(民政黨) 서대문구갑구 후보로 위원장이 되었지만 그해 8월 한일조약비준반대를 위하여 소속정당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도 사퇴하였다. 1967년 2월 신민당 창당을 발기하였으며, 같은해 6월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이 되어 신민당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을 맡아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1976년 신민당 최고위원,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12월 이른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4년 11월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되자 12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창당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하면서 2월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7년 11월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상임고문,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90년 연임하였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해 7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이 되었다. 한편 1968년 국가진단연구소(國家診斷硏究所) 이사장, 1972년 동아정경연구회(東亞政經硏究會) 회장, 아시아의원연맹(APU) 이사, 건국대학교 재단이사, 그리고 1989년 서울시의정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이정표》가 있다.

  • 준서(準瑞)
    만회(晩悔)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6(고종 3) - 1916()
    본관
    의성(義城)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구(金在龜)에 대하여

    1866년(고종 3)∼1916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준서(準瑞), 호는 만회(晩悔)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흥덕면(興德面) 대천리(大川里)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이성(金以成)이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으로 일찍이 위정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반대하여 1906년(광무 10) 전라북도 정읍(井邑)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일어난 이른바 ‘무성창의(武城倡義)’에 유생 수십 명을 이끌고 동참하였다. 1910년(융희 4) 국권피탈 이후 항일운동을 도모하던 중 1913년 2월, 3월 15일 봉기설(蜂起說)을 유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창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13년 4월 고종의 복국밀칙(复國密勅)이 내려졌는데, 이때 특승정삼품 통정대부(特陞正三品通政大夫)명전라도독립의군부소모사(命全羅道獨立義軍府召募使)와 흥덕군(興德郡)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거사가 좌절되자 전라북도 진안(鎭安)으로 피신하였다. 묘는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한수동(漢水洞)에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6() - 1980()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군인
    김재규(金載圭)에 대하여

    1926년∼1980년. 군인·정치가·행정관료. 경상북도 선산 출신.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김천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국군창설 때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2월 제2기생으로 졸업한 뒤, 잠시 대구 대륜중학교 및 김천중학교의 교사생활을 역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군요직을 거치면서 정치가와 행정관료의 길을 걸었다. 1954년 제5사단 제36연대장, 1957년 육군대학부총장, 1963년 제6사단장, 1966년 제6관구 사령관, 1968년 육군보안사령관, 1971년 제3군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5월혁명 직후 군정하에서 호남비료사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維新政友會 소속)이 되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의원직을 사퇴하고,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그뒤 빈번한 소요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에서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79년 와이에이치무역여공농성사건(YH貿易女工籠城事件), 신민당총재 김영삼(金泳三)의 의원직박탈사건, 부산·마산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해결하면서,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대통령 박정희를 둘러싼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등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 직속부하인 박선호(朴善浩)·박흥주(朴興柱) 등과 사전모의하여 이른바 ‘10·26사태’인 대통령시해사건을 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에 대한 재판과정은 당시 여러가지 시시비비가 뒤따랐으나, 그는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0년 사형집행되었다.



  • 시호

    이칭
    김상덕(金相德)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4(고종 31) - 196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근(金載根)에 대하여

    1894년∼1964년. 독립운동가. 일명 상덕(相德). 강원도 김화 출신. 1908년에 고향인 김화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세워 민족정신을 선양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서 이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 권인채(權仁采) 등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의 조직에 관하여 협의한 뒤 철원으로 내려와 박연서(朴淵瑞)·강대려(姜大呂)·김완호(金完鎬) 등과 함께 철원군단(鐵原郡團)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재정자금 모집 및 조달활동을 폈는데, 그 지부로 조직된 철원군단은 그뒤 강원도단(江原道團)으로 발전하였고, 강원도내 각 군에 군단을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이밖에도 충청도와 전라도에 지부를 조직하였으나, 강원도단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여 보통 철원애국단이라고 불리었다. 1920년초 재정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던 중, 이 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본경찰에 발각됨으로써 단원들과 함께 붙잡혔으며, 이어 징역4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백송(白松)
    시호

    이칭
    김구(金球)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3(고종 30)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덕(金在德)에 대하여

    1893년(고종 30)∼미상. 독립운동가. 일명 구(球) 또는 구(龜). 호는 백송(白松). 평양 출신.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배포책임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같은해 10월에는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교사 및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여 회원 70여명을 확보, 선봉대 구실을 하며 활동하다가 기소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비서로 근무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국내와의 연락과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평양에 잠입했다가 조선총독부경찰에 잡혔으나 가족의 협조로 다시 상해로 탈출한 뒤 만주의 연길현 쌍하진(延吉縣雙河鎭)에서 한인자위단장(韓人自衛團長)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공채모집(公債募集)을 위하여 또다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활약하였으며, 1925년에는 중국 산둥성(山東省)과 진남포 등지의 연락조직책으로 귀국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정의부(正義府)가 세력만회를 위해 간부진을 개선할 때 만주 액목현 지방총관에 선임되었으며, 그곳 납법구 교하중아학교(蛟河中亞學校) 교장으로 있으면서 정의부 중앙상임대의원이 되었다. 1930년 8월 국민부(國民府)가 흑길특별위원회(黑吉特別委員會)를 편성할 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뒤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중례(仲禮)
    청사(淸沙)/허주자(虛舟子)
    시호
    충정(忠靖)
    이칭
    문정(文靖)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82(숙종 8) - 1759(영조 35)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재로(金在魯)에 대하여

    1682년(숙종 8)∼1759년(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우의정 구(構)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검열·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716년 부수찬으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1718년 헌납·동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대사성·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 농민층의 토지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승지·부제학·이조참의 등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내고, 개성유수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말미암아 파직되고 이듬해 울산으로 귀양갔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듬해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양사(兩司)와 더불어 소론측의 유봉휘·이광좌(李光佐) 등 5인을 죄줄 것을 청하고,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의 무고사실을 상소하여 사형하게 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좌빈객(左賓客)·예조참판을 역임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게 되자 다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인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목사로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를 겸하여 난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쟁을 조성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使) 겸 수어사(守禦使)를 지내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하여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731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복관(復官)을 상소하여 이를 달성시켰다. 그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37년에도 당파싸움을 벌여 탕평책을 어긴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고,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새로 간행된 《명사 明史》를 얻어왔다. 1740년 영의정에 올라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년간 영의정을 지냈고, 그밖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함으로써 그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고, 5인의 역안(逆案)을 그대로 둘 것을 주장한 박문수와 이종성(李宗城)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후 소론은 관직이 추탈되는 반면 노론의 권력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 4대신에게 시호를 내리고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 등은 증관(贈官)하였다. 영조 초기에 탕평론을 주장한 바 있으나, 결국 노론의 선봉에서 영수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한, 영의정 재임기간 중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하여 한천이혁절목(翰薦釐革節目) 10조의 제정과 과거의 의정절목(議定節目) 8조를 제정하고 왕실의 상복제를 바로잡는 등 치밀하게 정사를 폈다. 50여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으로 지냈으며,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며 예학에 깊었으며,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었다. 그리고 벼슬을 그만둔 뒤 집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잊지 않았다. 영조는 숙종의 뜻에 따라 그를 기용하여 아꼈으며, 수서(手書)를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봉조하(奉朝賀)로 78세에 죽으니 영조는 그 집에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해 기사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천의소감언해 闡義昭鑑諺解》와 《난여 爛餘》가 있고, 편저로는 《예기보주 禮記補註》·《청풍 김씨세보》·《좌씨집선속 左氏輯選續》·《금석록 金石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7(융희 1) - 1937()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룡(金在龍)에 대하여

    1907년∼1937년.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곡성 출신. 광주지역의 학생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가 회의 이탈자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1927년 3월 형식상 해산하자, 같은해 10월 김태호(金台鎬) 집에서 같은 광주농업학교생인 김만복(金萬福)·유상걸(柳上杰)·주당석(朱唐錫)·유치오(兪致五)·정동수(鄭東秀)·문승수(文升洙) 등과 함께 성진회의 재건방안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광주농업학교에 재학중인 성진회 회원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의 사직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학교측의 보복조처로 회원 12명과 함께 퇴학을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맹휴교를 더욱 강화 지속시키기 위하여 지도부내의 업무를 분담하고 모계부원(謀計部員)이 되어 학생들간의 연락을 맡았다. 7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맹휴 계속 및 식민지노예교육 철폐를 주요내용으로 한 성명서를 작성하여 광주읍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한 뒤 일본경찰에 붙잡혀 같은해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출신 동지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다가 다시 붙잡혀 1931년 6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32년 1월 곡성군 옥과면에서 정동화(鄭東華)·한명덕(韓明德) 등과 농민단체인 옥과노동회(玉果勞動會)의 재건을 협의하고 회원 1,900여명을 규합,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다시 붙잡혀 1934년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6(광무 10)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문(金載文)에 대하여

    1906년(광무 10)∼미상. 1926년 5월 16일에 중동중학(中東中學) 특과생에 재학 중이던 김재문(金載文)은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던 곽재형(郭載炯)·황정환(黃廷煥)과 중앙고보(中央高普) 5년이던 이동환(李東煥)·박용규(朴龍圭) 등과 함께 6월 10일 순종인산일을 거사일로 정하는 모의를 하였다. 그 후 각 학교 대표자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학교 대항 축구시합을 한다는 명목으로 5월 23일 동대문 밖 삼선평(三仙坪: 지금의 삼선동)에서 학교 대표들끼리 만나서 회의를 했다. 이때 이동환은 이왕이면 일본인들 집단거주지 본정(本町: 지금의 충무로)은 물론, 조선총독부까지 때려 부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의 신분으로 그렇게까지 큰 거사는 무리라는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결국 그날 회의는 거기서 일단락되었고, 5월 25일 김재문·곽재형·황정환·이동환·박용규 등 대표자 5명이 다시 모여 토의한 결과 6·10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앞서 5월 29일 5천매의 격문을 각지에 배포하였고, 마침내 6월 10일에 독립시위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김재문은 6·10만세운동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고, 1927년 9월 20일에 출옥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재백(金才伯)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 일본에 파견된 사신. 관등은 대나마(大奈麻)였다. 764년(경덕왕 23) 7월 김재백 등 91인이 쓰쿠시(筑紫) 하카다진(博多津)에 도착하자, 일본조정은 우소변(右少弁) 종5위하(從五位下) 기우양(紀牛養) 등을 보내어 방문이유를 물었다. 이에 김재백은 당나라의 칙사 한조채(韓朝彩)가 발해로부터 와서 일본승 계융(戒融)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하고, 신라의 서진(西津)에 머무르고 있으며 신라의 사은사 소판(蘇判) 김용(金容)이 계융의 도착여부를 한조채에게 알리기 위하여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조정은 최근에 일본으로 투화한 자의 말에 의하면 신라가 군사를 내어 변방의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것은 당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고 해적들이 들끓으므로 변방을 경계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귀국하기에 이르러 대재부(大宰府)는 계융이 그 전해 10월에 귀국하였음을 통보해주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0(광무 4) - 1930()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범(金在範)에 대하여

    1900년(광무 4)∼1930년. 1919년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때, 같은 학교의 김수길(金壽吉)·백남채(白南採)·허성도(許聖徒) 등과 함께 본교의 지하실에 모여서 선언문(宣言文)과 선전문(宣傳文)을 등사기로 밀어서 복사를 한 후, 3월 8일에 장(場)이 서는 서문(西門)에서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년간 옥사를 치루고 나온 후, 숭실전문(崇實專門)과 연희전문(延禧專門)에서 못 다한 공부를 하고 안동(安東)으로 내려가 경안학원(慶安學院)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대구애락원(大邱愛樂園)에서 근무를 하며 농촌 계몽 사업에 온 힘을 기울이다 병사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0(고종 27)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사상가
    김재봉(金在鳳)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44년. 공산주의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08년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공업강습소 염직과 3년을 마쳤다. 1920년 《해주일보 海州日報》 경성지사에서 기자생활을 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이쇼(大正)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는데, 이때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사상을 전환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참가하였으며, 귀국하는 길에 치타에 있는 한인소학교의 교사로 잠시 근무하다 그해 11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연합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였다. 1923년 5월 당과 공청(共靑)을 조직하라는 코르뷰로(高麗局)의 지시를 받고 경성에 돌아와 김찬(金燦)의 소개로 신백우(申伯雨)·원우관(元友觀)·윤덕병(尹德炳)·이영(李英)·임봉순(任鳳淳)·김유인(金裕寅) 등과 접촉하였다. 이들은 각파 통일의 기초 위에서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서울청년회계열이 이를 거부하자, 그해 6월 신철(辛鐵), 상해파(上海派)의 이봉수(李鳳洙),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의 윤덕병·신백우, 북성회(北星會)의 김약수(金若水),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의 원우관 등과 김찬 집에 모여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당조직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후 코르뷰로 국내부에서는 1923년 7월 표면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 9월부터 각 지방의 순회강연 및 각 지역의 기존단체들과의 연계를 통한 연결고리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 가운데 하나가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의 결성이다. 한편, 김재봉 등은 1925년 4월 경성부 황금정에 있는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공산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비서부위원겸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가 지도하던 ‘제1차조선공산당’은 조동호(趙東祜)가 기초한 당의 강령 및 규약의 토의, 조동호와 조봉암(曺奉岩)의 코민테른 파견, 조선노동총동맹의 분리 결정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1차조선공산당’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와해되었으며, 책임비서인 그는 12월 뒷일을 강달영(姜達永) 등 5인의 후계간부에게 일임한 직후 검거되어 6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 극중(極中)
    희암(希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영양(英陽)
    분류
    기타 > 은사
    김재석(金在錫)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중(極中), 호는 희암(希岩). 용산(龍山) 이만인(李晩寅)의 문인으로 자질이 매우 영특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학문의 경지가 더욱 독실해졌다. 경상북도에는 김재석(金在錫)을 기리는 원관정(遠觀亭)과 김재석의 형, 김재영(金在濚)을 기리는 난포정(蘭圃亭)이 세워져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0(광무 4)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재선(金在先)에 대하여

    1900년(광무 4)∼미상. 고수(鼓手). 수원 출신. 지방에서 판소리와 장구장단 및 악기를 공부하다가 상경, 한성준(韓成俊)에게 판소리 북을 배웠다. 판소리 고수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였고, 광일창극단(廣一唱劇團)·국극사(國劇社)·아리랑국극단 등 여러 창극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대한국악원 이사와 전국국악인친목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신세기레코드 주식회사에서 낸 적벽가전집에서 임방울(林芳蔚)의 소리에 북장단을 친 것이 남아 있다. 장구장단에 능하여 무용반주에서 훌륭한 솜씨를 보였다. 그래서 판소리 고수로도 이름을 얻었지만 장구가 더 낫다는 평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연안(延安)
    분류
    기타 > 의열
    김재수(金在秀)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연안. 제남(悌男)의 후손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주경야독을 하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천성적인 효자로서 여러가지 일화가 전한다. 한번은 아버지가 병이 들어 먼 시장에서 고기를 사가지고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으나 정색을 하고 꾸짖자 물러갔다. 이윽고 어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하늘을 우러러 슬피 우니 귀화(鬼火) 10여대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여 집에 이르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병이 이로써 나았다 한다. 또, 겨울에 늙은 어머니가 나물을 먹고자 하니 당귀와 미나리가 뜰에서 돋아났다고도 한다. 아내 홍씨(洪氏) 역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집에 불이 나자 화염 속에서 시어머니를 구출해내었다. 또한, 시어머니가 양쪽 눈을 잃고 수십년 병석에 누워 있게 되었으나 부부가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나물만 먹으며 무덤을 지켰다. 1876년(고종 13)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부인은 영인(令人)에 추증, 1882년 그 집 문앞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 응덕(應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32(영조 8) - ?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재순(金載順)에 대하여

    1732년(영조 8)∼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응덕(應德). 할아버지는 대사헌 상옥(相玉), 아버지는 묵(默)이며, 어머니는 교리 신정하(申靖夏)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통독(通讀)과 제술(製述)시험에 일등을 하여, 그해 식년전시에 바로 나아가 을과로 급제하여 곧 한림(翰林)에 제수되었다. 그뒤 은산(殷山)·평택(平澤)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왕의 신임을 얻었고, 경직에 복귀하여서는 홍문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세손(世孫)의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관계에 진출한 지 10년 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승지·대사간을 역임한 후 특히 지방관으로서의 재질을 인정받아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갔다.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으로 외척의 화를 우려한 상소를 올렸는데, 도리어 외척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와 대사헌을 지냈다.

  • 정일(貞一)
    효산(曉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1(고종 28) - ?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재열(金在烈)에 대하여

    1891년(고종 28)∼미상.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정일(貞一), 호는 효산(曉山)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전라남도 무안(務安)출신이다. 고려 조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치량(金稚良)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민재(敏齋) 박임상(朴琳相)에게서 칠서(七書: 사서삼경의 별칭)를 배워 심성의기(心性義氣)에 밝았다. 또한 시서(詩書)와 예문(禮文)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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