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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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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오응(五應)
    명재(明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47(영조 23) - 1819(순조 19)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성익(康聖翊)에 대하여

    1747년(영조 23)∼1819년(순조 1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오응(五應)이고, 호는 명재(明齋)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이고, 제주도 정의(旌義) 출신이다. 증조부는 강사안(康嗣安), 조부는 강문달(康文達)이고, 부친은 강일명(康一鳴)이다. 외조부는 김무홍(金武弘)이다. 1781년(정조 5) 6월에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濟州巡撫按査試才御使)가 유생들을 시취(試取)하였는데, 이때 김용(金墉)·변경우(邊景祐)와 함께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782년(정조 6) 1월 12일에는 시권(試券)에서 으뜸을 차지한 세 사람을 직부 전시하게 하였다. 37세에 1783년(정조 7) 계묘증광문과 병과 27위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승문원검교(承文院檢校) 및 병조정랑(兵曹正郞)·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다. 1800(정조 24) 윤 4월 26일에 그는 제주도의 민폐 두 가지를 선처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나는 제주도의 곡식창고가 처음의 기근을 해소한다는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형과 습도 등으로 곡식 보관에 유용하지 않으니 다른 방안을 모색해 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갑인·을묘 두 해에 걸친 흉작으로 죽은 국둔마(國屯馬)의 수효가 1, 500여 두나 되자, 5년을 기한으로 목졸(牧卒)들의 말까지 합쳐서 전량을 바치도록 하였다. 그 해가 되자 굶어 죽은 목졸(牧卒)들이 많아서 죽은 사람의 몫으로 국둔마를 징수해 내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또 개인소유로 기르는 것도 열 가구 중에 일곱 여덟 가구는 비었으니 관가의 명령이 아무리 엄중해도 사다가 바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그동안 공축(公畜)의 숫자가 늘었으니, 목졸들에게서 국둔마를 거둬들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조는 민폐를 지적한 일을 매우 가상히 여기고 곡식 창고 문제는 좋은 방향을 모색해보도록 하고, 마정(馬政)에 관한 일은 공축(公畜)이 이미 예전보다 늘어났다면 굳이 목졸들에게서 징수할 필요는 없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 일로 그는 제주도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외직으로 1800(정조 24)에는 경상도(慶尙道) 사천현감(泗川縣監)을, 1801년(정조 25)에는 경상도 비안현감(比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그만둔 후에는 제주 성산시(城山市) 삼달1리(三達1里)에 정조 임금이 제주에 베풀어준 은정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은여천도보무지근이설단월헌만수(聖恩如天圖報無地謹以設壇月獻萬壽)’라는 글자를 새긴 헌수단(獻壽壇)을 세워놓고, 한 달에 한 번씩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분향재배(焚香再拜)를 하였다. 1983년에 후손들이 그의 행장(行狀)을 비각(碑閣)에 새겨두었다. 유물로는 제주민자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문서 2건이 있는데, 하나는 1783년(정조 7) 4월 교신급제 강성익(康聖翊)을 교검(校檢)으로 임명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훼손되어 연대를 추정할 수는 없으나 강성익(康聖翊)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장령(行司憲掌令)으로 임명하는 내용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51(효종 2) - 1696(숙종 22)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성좌(姜聖佐)에 대하여

    1651년(효종 2)∼1696년(숙종 2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석무(錫武)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재주와 꾀가 많았다. 1677년에 금군초관(禁軍哨官)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겸 내승직(宣傳官兼內乘直)을 거쳐 오위도총부도사가 되었는데, 1679년 허견(許堅) 등 남인의 모함으로 제주판관에 좌천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되자, 훈련원정이 되어 돌아온 뒤 여러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하동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뒤 풀려나왔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제거되고 소론이 등용될 때 별군직에 기용되었는데, 숙종은 보직을 받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묻고 이조와 병조에 벼슬을 주도록 명하여 영변부사가 되었다. 나홍좌(羅弘佐)·정홍좌(鄭弘佐)와 함께 삼좌(三佐)’로 불렸다.

  • 응선(應善)
    우석(友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3(고종 30) - 1963()
    본관
    진주(晉州)
    분류
    경제/사회 > 사회사업가
    강성준(姜成俊)에 대하여

    1893년(고종 30)∼1963년. 일제강점기 자선가. 자는 응선(應善), 호는 우석(友石)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이고, 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만희(姜萬熙)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경학(經學)에 통달하였고 천성이 청검(淸儉)하며 기개가 고매(高邁)하여 소아(小我)와 명리를 버리고 어려운 이를 구제하는 일로 평생의 선업(善業)을 삼았다. 그는 퇴락하는 문중의 일가들을 교화(敎化)하여 저축의식을 기르는 한편 특히 일제 치하에 흩어진 제족(諸族)에게 가택과 전장을 마련해 주어 함께 살게 하였다. 또한 대인관계에도 인자와 위의(威儀)로써 계도하니 지역민이 그 은덕을 기렸다. 사후에 문중에서 공적비를 세웠는데 전남대학교 이돈주(李敦柱) 교수가 비문을 찬(撰)하였다.

  • 상견(尙見)
    이당(梨堂)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8(고종 35) - 1939()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학 > 문필가
    강성중(姜聖中)에 대하여

    1898년(고종 35)∼1939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상견(尙見), 호는 이당(梨堂). 그의 정확한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동향(同鄕)의 독립유공자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의 문집인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에는 그에게 보내는 여러 통의 편지들이 남아 있고, 그의 저서인 《이당유고(梨堂遺稿)》에는 하겸진에게 보내는 편지가 다수 남아 있고, 《이당유고》의 서문(序文)을 하겸진의 제자 중 한 명인 성환혁(成煥赫)이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 회봉 하겸진의 제자였거나 혹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4권 1책으로 이루어진 《이당유고》는 1963년에 간행되었는데, 여러 편의 시(詩)와 편지글, 제문(祭文), 상량문(上梁文) 등이 실려 있다. 서문(序文)은 하겸진의 제자로서 문장이 뛰어났다고 알려진 성환혁이, 발문(跋文)은 강성중의 삼종제(三從弟)인 강용중(姜瑢中)이 썼다.


  • 직당(稷堂)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3(광무 7) - 1976()
    본관
    진주(晋州)
    분류
    경제/사회 > 실업가
    강성태(姜聲邰)에 대하여

    1903년∼1976년. 실업가·정치인.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직당(稷堂). 경기도 양주 출생. 경성제국대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6년 최초로 서구식 테니스를 도입하여 이를 보급하는 데 주력하였다. 1946년 대한테니스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선임되어 1958년까지 13년간을 봉직하면서 테니스발전에 공적을 남겼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재무부 관세국장에 보임되어 우리나라 관세행정체계를 마련하였고, 1953년 재무부차관으로 승진되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상공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1956년 한국무역협회 회장과 1958년 제4대민의원 의원을 지냈다. 1958년 다시 대한테니스협회장에 추대되어 1963년까지 6년간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손해보헙 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63년부터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사장에 부임하여 1973년까지 11년간을 근속하였다. 1963년 대한테니스협회에서 ‘강성태배(姜聲邰盃) 테니스대회’를 창설하였다. 1968년 라이온스클럽309지구 총재를 역임하면서 사회봉사와 지역사회 발전 및 회원 상호간의 친목도모에 솔선하였다. 1969년 대한손해보험협회 이사장에 다시 취임하였고, 197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72년 직당장려상(稷堂奬勵賞)을 창설하여 테니스선수의 발굴과 육성에 주력하였으며, 동 이사장으로 활약하였다.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한국보험학회로부터 한국보험문화상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강세(康世)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흘해이사금 때의 정치가. 345년(흘해이사금 36) 정월에 이벌찬(伊伐飡)이 되었다. 이듬해 왜병이 바다를 건너와 민가를 약탈하고 마침내 금성(金城)까지 공격해오자 왕은 그들을 바로 격퇴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지구전법을 왕에게 건의하여 적을 고립시킨 뒤 식량이 모두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적을 공격, 격퇴시켰다.

  • 중보(重寶)
    삼휴당(三休堂)
    시호
    문안(文安)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32(인조 10) - 1703(숙종 29)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세구(姜世龜)에 대하여

    1632년(인조 10)∼1703년(숙종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중보(重寶), 호는 삼휴당(三休堂).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호(鎬)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고, 1676년(숙종 2) 강릉참봉에 기용되었으며, 167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정언·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승지가 되고, 1689년에 충청도관찰사, 1692년에 예조참의 등을 역임, 1693년 대사간이 되어 이듬해 왕의 유행(遊幸)을 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701년 장희빈(張禧嬪)을 사사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홍원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복관되고, 회덕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 공서(公敍)
    긍암(兢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62(영조 38) - 1833(순조 33)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세규(姜世揆)에 대하여

    1762년(영조 38)∼1833년(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공서(公敍), 호는 긍암(兢菴). 아버지는 필형(必炯)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로 석좌(碩佐)의 딸이다.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7년(정조 11) 승문원을 거쳐 조경묘(肇慶廟)의 별검(別檢)에 제수되었고, 전적·현릉령(顯陵令)을 거쳐 1790년에 병조좌랑·이조좌랑과 공조정랑·예조좌랑·감찰·경상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793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797년에 지평·정언·기주관(記注官)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긍암집》 6권 3책이 있다.

  • 중경(重卿)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세신(姜世臣)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중경(重卿)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조부는 진사(進士) 강정(姜鼎)이다. 용력이 출중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선봉(先鋒)이 되어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 윤지(胤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84(숙종 10)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세윤(姜世胤)에 대하여

    1684년(숙종 10)∼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윤지(胤之). 아버지는 예조판서 현(鋧)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당시 과장(科場)에서 아버지의 분부에 따른 시험관의 부정이 밝혀져 변방에 유배되어 충군(充軍)되었다. 그뒤 1715년에 풀려나고, 1721년(경종 1)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천거되었으며, 1728년(영조 4)에는 이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는데, 적괴 서호(瑞虎)를 포박하여 공을 세웠으나 체포된 난도(亂徒)들의 국문중 그들과 내통하였다는 자백을 받아 파직, 하옥 후 또다시 유배되었다. 그뒤 1738년에 풀려나 1750년에 직첩을 환급받았다. 1763년에 당시 적괴 정세윤(鄭世胤)이 그와 이름이 같았던 까닭으로 억울하게 벌을 받았던 사실이 밝혀져 신원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신천(信川)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세지(康世知)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무신.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전라북도 임실(任實)에서 태어났다. 대사간(大司諫) 임백진(任伯珍)의 후손이다. 타고난 체력이 건장하고 기상이 뛰어난데다 용맹과 지략(智略)까지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 태종이 20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하며 일으킨 병자호란 때, 그는 고을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이때 청나라 군사들이 마을을 사방으로 에워싸자, 고을 수령(守令)과 관리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두 달아나버렸다. 이에 그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관원들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도망을 가는 것은 수령 자격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말에 올라타고 바람같이 칼을 휘두르며 청나라 군사들을 무찔렀다. 이에 청나라 군사들은 몹시 놀라워하며 물러가버렸으며 이로 인해서 그 고을은 다시 평온을 찾게 되었다.

  • 사원(嗣源)
    경현재(警弦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17(숙종 43) - 1786(헌종 14)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세진(姜世晋)에 대하여

    1717년(숙종 43)∼1786년(헌종 14).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원(嗣源), 호는 경현재(警弦齋). 아버지는 안주현감과 장령 등을 역임한 모헌(慕軒) 강필신(姜必愼)이다. 1753년(영조 29)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55위로 합격하였다. 문명(文名)은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방 안은 각종 책과 글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혜포(蕙圃) 강박(姜樸), 기헌(寄軒) 강해(姜楷) 등에게 배웠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경현재집(警弦齋集)》이 있다. 《경현재집》은 아들 강봉흠(姜鳳欽)이 수집한 것을 외손 정상리(鄭象履)가 간행하고 발문(跋文)을 지었다. 4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詩)·서(書)·잡저(雜著)·서(序)·기(記)·전(傳)·여문(儷文)·애사(哀詞)·구묘문(丘墓文)·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 광지(光之)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시호
    헌정(憲靖)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13(숙종 39) - 1791(정조 15)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학 > 문필가
    강세황(姜世晃)에 대하여

    1713년(숙종 39)∼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평론가.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로도 불린다. 1. 가계 서울에서 현(鋧)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로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를 누렸으며, 할아버지 백년(柏年), 아버지 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晋州柳氏)소생인 인()·완(俒)·관()·빈(儐)과 나주나씨(羅州羅氏)소생의 신(信)이 있는데, 신과 그의 아들 이오(彝五), 완의 손자 진(溍)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2.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으며,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이수봉(李壽鳳)과 절친했고, 이익(李瀷)·심사정(沈師正)·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서 김홍도(金弘道)·신위(申緯)가 주목된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에 이주하여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였다. 영조의 배려로 61세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수석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참봉(英陵參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생활과 예술활동 등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기로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3. 업적과 화풍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서화론·서화평, 대나무 판각화, 사군자를 한벌로 짝맞추어 그리는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는데,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4. 작품 그의 작품으로는 〈현정승집 玄亭勝集〉·〈첨재화보 忝齋畵譜〉·〈방동현재산수도 倣董玄宰山水圖〉·〈벽오청서도 碧梧淸暑圖〉·〈표현연화첩 豹玄聯畵帖〉·〈표암첩 豹菴帖〉·〈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약즙산수 藥汁山水〉·〈삼청도 三淸圖〉·〈피금정도 披襟亭圖〉·〈난죽도 蘭竹圖〉·〈묵죽팔폭병풍 墨竹八幅屛風〉·〈사군자병풍 四君子屛風〉·〈임왕서첩 臨王書帖〉·〈동기창임전인명적발 董其昌臨前人名迹跋〉·〈제의병 祭儀屛〉 외 다수가 전한다. 특히, 54세 때 쓴 자서전인 《표옹자지 豹翁自誌》에 들어 있는 2폭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폭의 초상화를 남긴 사실이 독특하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197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를 영인, 출판하였다.



  • 시호

    이칭
    강용룰(姜龍律)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5() - 1963()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학 > 문필가
    강소천(姜小泉)에 대하여

    1915년∼1963년. 아동문학가. 본명은 용률(龍律). 함경남도 고원 출신. 1930년 고원보통학교, 1937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고원중학교, 1946년 청진여자고급중학교, 1948년 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월남했다. 1951년 문교부 편수관을 거쳐 1959∼1963년 한국보육대학·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의 강사로 아동문학을 강의했다. 1952년 어린이잡지인 《새벗》과 《어린이다이제스트》의 주간, 1953∼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1960년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62년 《아동문학》의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였고, 같은해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1931년에 〈길가에 얼음판〉·〈얼굴 모르는 동무에게〉·〈호박꽃과 반딧불〉·〈봄비〉, 1933년에 〈닭〉 등 우수한 동요·동시를 다수 발표했다. 1937년 이후에는 동화 및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맹이〉와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이야기〉, 《조선일보》에 〈마늘먹기〉, 《소년》에 〈딱다구리〉 등의 단편과 《아이생활》에 〈희성이의 두 아들〉 등 장편을 발표하였다. 그는 윤석중(尹石重)이 시도한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童詩)의 출현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동요·동시는 낭만적 기조 위에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이미지 형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동시집 《호박꽃초롱》에 나타난 경향은 자연유로(自然流露)가 아닌 의도적인 창작에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닭〉·〈달밤〉·〈조그만 하늘〉 등이 이에 속한다. 그는 초기의 낭만적·예술적 향기 짙은 율문시대를 거친 다음 현실에 대한 긍정적 태도 위에 강한 교훈성을 부여한 후기의 산문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꿈을 찍는 사진관〉인데, 이 작품은 교화성 문제로 많은 논란을 겪기는 하였으나, 많은 아동독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열렬한 아동애호가로, 마해송(馬海松) 등과 함께 〈어린이헌장〉을 기초, 반포하는 데도 힘썼고, 아동들의 독서와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기울여 아동문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3년 아동소설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가 49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5년 배영사(培英社)에서 ‘소천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동요동시집 《호박꽃초롱》과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진달래와 철쭉》·《꽃신》·《꿈을 찍는 사진관》·《종소리》·《무지개》·《인형의 꿈》·《꾸러기와 몽당연필》·《대답 없는 메아리》, 그리고 소년소설집에 《해바라기 피는 마을》·《꽃들의 합창》·《봄이 너를 부른다》 등이 있다. 전집으로는 《강소천아동문학전집》(전6권)·《강소천아동문학독본》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강소춘(姜笑春)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강소춘(姜小春)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종·순종 때 활약한 여류 판소리 명창. 일명 소춘(笑春). 대구 출신. 여류 판소리 명창의 효시인 진채선(陳彩仙)과 허금파(許錦波)이후에 명창으로서 이름을 떨치었다. 그의 소리는 5명창 이전의 고제의 소리였다고 한다. 미인명창으로 성음이 아름다웠고, 〈춘향가〉와 〈흥부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애원성으로 〈춘향가〉 중 ‘망부사(望夫詞)’를 잘 불렀다 한다. 고종 말기에 원각사(圓覺社) 및 협률사(協律社)의 창극공연에 참가하였고, 협률사의 지방공연에도 참가하여 이름을 떨치었다. 창극 〈춘향전〉과 〈심청전〉에서 춘향역과 심청역을 잘하였다고 한다. 취입한 음반에는 〈남도선인단가 南道船人短歌〉,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등 8매가 있다.

  • 유원(惟遠)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0(선조 3)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수(姜𢢝){2}에 대하여

    1570년(선조 3)∼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유원(惟遠). 아버지는 현감 효윤(孝胤)이다. 1616년(광해군 8) 익위(翊衛)의 신분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다음해 예조좌랑과 장악원첨정을 거쳐서 장령에 올랐다. 1618년까지 장령으로 재직하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李恒福)을 탄핵하는 등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의 정책을 정계 일선에서 추진하였다. 또 같은 북인출신이면서 이이첨 등에 맞서는 기자헌(奇自獻)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618년 사예·예빈시정을 거쳐, 1621년 겸필선이 되고, 그뒤 집의에까지 승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폐모론 주장의 죄목으로 위리안치되었으며, 1625년과 1627년에 석방명령이 내렸지만 언관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 시호

    이칭
    강우두(姜牛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수(强首){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통일기의 유학자·문장가. 초명은 우두(牛頭). 1. 가계와 성향 중원소경(中原小京: 지금의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六頭品)으로 보이는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를 찾아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의리를 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아보려고 “불도를 배우겠는가, 유도를 배우겠는가?” 하고 물으니, 강수는 “제가 듣기로는 불도는 세외교(世外敎)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의 사람이온데 어찌 불도를 배우겠읍니까. 유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뒤에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여 학문이 뛰어나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으며,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지냈다. 2. 재능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국서(國書)에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어, 임금이 그에게 물으니 해석과 설명에 막히는 곳이 없었다. 왕이 감탄하여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라(任那加良: 大加耶, 지금의 高靈일대)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이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가히 ‘강수선생’이라 할만하다고 하였다. 또, 당나라에 보내는 훌륭한 답서를 지으매, 임금은 더욱 기특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하였다. 그뒤 당나라와 고구려·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되어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그 글 가운데 당시 당나라에 갇혀 있는 김인문을 석방해줄 것을 청한 〈청방인문표 請放仁問表〉는 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 위로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내는 글도 지었다. 3. 성품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자 태종무열왕은 유사(有司)에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의 창고에 있는 조 1백석을 하사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문무왕이 논공행상을 할 때 그는 외교문서로써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하여 사찬(沙飡)의 관등과 세조 2백석을 증봉(增俸)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사람들이 사사로이 가지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생활이 곤란하여 향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대신이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백석을 주게 하였으나 받지 않고 향리로 돌아가버렸다. 4. 학풍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를 세외교라 하여 버리고, 사회적으로 그 힘이 미약한 유학에 뜻을 둔 것은 개인의 착상이라기보다는 진골중심의 골품제사회에서 육두품 이하의 귀족으로 편입된 그의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커간 것이며, 또 크게는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하여 강제로 이주시킨 중원경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가 공부한 학과목은 《효경 孝經》·《곡례 曲禮》·《이아 爾雅》·《문선 文選》으로, 주로 유교적인 실천도덕과 아울러 문자와 문학에 관한 것에 비중을 두었다. 이리하여 유학자로서보다 문장가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5. 윤리관 청년시절에는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곡(釜谷)의 대장장이의 딸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너는 지금 명성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 읍 중의 인물로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들어라.”고 하였지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이렇게 신분이 낮은 부인을 택한 것은 새로운 윤리관의 제시이며, 신라의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또, 나아가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제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띤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는 신라사회의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또 신흥의 유교관료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으로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본격적인 유교적 문인으로 사회사적·사상사적 의의가 크다.

  • 여진(汝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5(인종 1) - 1610(광해군 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수곤(姜秀昆)에 대하여

    1545년(인종 1)∼1610년(광해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진(汝鎭). 영선군(永善君) 지(漬)의 현손, 생원 응운(應運)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의 어머니인 고모집에서 성장하였다. 1582년(선조 15)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으로 입사한 뒤에 차차 관직이 올라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593년에 공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가 고창현감이 되었다. 1604년에는 괴산군수가 되었으며, 지방관으로 재직중 흉년이 들어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는 수천명의 백성을 구휼하여 명성이 높았다. 아버지의 노환을 이유로 귀향하려 하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치(善治)를 아쉬워하였다.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병간호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친척과 주위 사람들에게는 인덕과 온정으로 대하였다. 평생 동안 선악을 구별하여 행동을 조심하였고, 성품이 돈후하고 사람들에게는 항상 인정을 베풀었다.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 인수(仁叟)

    시호
    충렬(忠烈)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2(명종 7) - 1592(선조 25)
    본관
    진산(晋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수남(姜壽男)에 대하여

    1552년(명종 7)∼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산(晋山). 자는 인수(仁叟). 아버지는 진사 숙(璹)이다. 작은아버지인 진사 서(瑞)에 입양되었으며,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과 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경기도관찰사 심대(沈岱)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그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군사에 관하여 배운 일이 없었지만, 오로지 충의의 마음으로써 국가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출전하기에 앞서 가족들을 불러 이별을 고하고, 죽은 뒤에 자신의 시체라도 찾게 하려고 붉은 실을 상투에 얽어매고 옷소매에는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해 10월 군사를 움직여 한성을 탈환하려던 중 삭녕전투에서 야습을 받아 군사가 흩어졌으나 가노(家奴) 검산(檢山)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출전할 때 신표로 상투에 묶었던 붉은 실을 보고 겨우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뒤에 검산의 자손도 복호(復戶)되었고 선조가 제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백윤(伯潤)
    귤암(橘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62(철종 13) - 1890(고종 27)
    본관
    진주(晉州)
    분류
    기타 > 의열
    강수형(姜壽馨)에 대하여

    1862년(철종 13) 5월 10일∼1890년(고종 27) 2월 28일. 조선 말기 효자. 자는 백윤(伯潤)이고 호는 귤암(橘庵)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통정대부(通政大夫)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강재만(姜在萬)이고, 조부는 강치흠(姜致欽)이며, 아버지는 강용하(姜龍夏)이다. 외조부는 하대련(河大連)이다. 아버지가 조모의 상에 효성을 다하여 병이 나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여 인근의 칭송을 받았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귤암선생문집(橘庵先生文集)》 1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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