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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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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13(순조 13) - 1895(고종 32)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기휴(金沂休)에 대하여

    1813년(순조 13)∼1895년(고종 32). 조선 후기 무신.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조천읍(朝天邑) 출신이다. 부친은 전 정의현감(前旌義縣監) 김종관(金鍾輨)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명월만호(明月萬戶)로 재임하며, 명월진의 군기를 일신(一新)하고 청사를 재건하였는데, 복냉증(腹冷症)으로 만호(萬戶)을 수행할 수 없어 파출(罷黜)되었다. 1858년(철종 6) 3월∼1859년 12월까지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있을 때, 현성(縣城) 내에 청풍당(淸風堂)을 재건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5(고종 32)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기휴(金起休)에 대하여

    1895년(고종 32)∼미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성산읍(城山邑) 신풍리(新豐里)에서 출생하여 고성리(古城里)로 이주한 뒤 농사를 지었다. 평소 민족주의(民族主義) 노선인 성산청년회가 주관한 성산면 체육대회의 씨름경기 중 한국인 선원과 일본인 선원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일제는 이를 빌미로 항일적인 청년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어 1927년 12월 광주지법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이에 항소하여 징역 10월을 확정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2(고종 29) - 197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독교인
    김길창(金吉昌)에 대하여

    1892년(고종 29)∼1977년. 장로교 목사·교육사업가. 경상남도 고성 출신. 1910년 10월 순회전도사 백도명(白道明)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하던 날 그의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려준 것을 잊지 않고 교회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여, 어릴 적부터 남다른 신앙의 열정을 쏟게 되었다.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만에 중퇴, 고향으로 돌아와서 19세 때부터 교회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하여, 창원·함안·영산 지방에 산재한 교회를 책임지고 순회목회를 하게 되었다. 한때 그는 전도사 직책을 포기하였다가 다시 호주선교회의 서기로 취임하여 선교사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녔다. 26세 때 함안 길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는데, 교회당 안의 남녀좌석 사이의 포장을 철거한 일로 인하여 경남노회로부터 전도사직을 파면당하였다. 파면된 지 한달 뒤 마산 문창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문창교회의 학비보조로 1923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거창과 부산 영도교회 등에서 목회하다가 1929년 일본 동경에 가서 교포학생들을 위하여 4년 동안 목회하면서 메구로교회(目黑敎會) 등 다섯 군데 교회를 개척하였다. 귀국한 뒤 밀양교회에서 잠시 목회한 뒤 1933년에 부산 항서교회에 부임하여 죽을 때까지 목회목사와 원로목사로서 관계를 가졌다. 또한, 한국교육계를 위하여서도 많은 일을 하였다. 1934∼1936년 연희전문학교 이사, 1936∼1965년 경남노회장을 여섯 차례 역임, 1945년 동아대학 설립이사장, 1945∼1960년 부산기독교연합회장을 여섯 차례 역임, 1945∼1967년 학교법인 남성·훈성·대동·한성재단 설립이사장, 1961∼1962년 한국기독교연합회장, 1962∼1968년 장로회경남노회 학교법인 금성학원·건국학원 및 창신학원의 이사장 및 이사, 1962년에는 부산연합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정부로부터 교육공로자상을 받았으며, 1963∼1965년까지 부산기독교학교연합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한평생 목회생활에서 일곱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항서교회에서 33년 근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 부산 지방에서 남녀중등교육기관과 대학 및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 숙경(叔經)
    월천(月川)
    시호
    문평(文平)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08(태종 8) - 1473(성종 4)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길통(金吉通)에 대하여

    1408년(태종 8)∼1473년(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증좌찬성 효례(孝禮)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143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의영고부사가 되었으며, 이어 감찰과 병조좌랑을 지내고, 1436년 진잠현감(鎭岑縣監)이 되었다. 1440년 우헌납이 되고 그뒤 이조정랑·장령·사예를 거쳐, 1451년(문종 1) 지승문원사가 되고 이듬해 판종부시사에 올랐다. 우사간대부를 거쳐 1454년(단종 2)에 황주목사로 나갔으며, 첨지중추원사를 지내고 1458년(세조 4) 전주부윤이 되었다. 1460년 대사헌을 지내고 황해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로 나갔으며 예조와 형조의 참판, 한성부좌윤을 거쳐 1469년(예종 1)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 즉위 후 지중추부사가 되고 한성부판윤 등 여러 내외직을 두루 지내고 호조판서에 올라,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청백하여 항상 청빈하였고, 평생 동안 공도(公道)로써 관직생활을 지냈다. 저서로는 《월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한의사
    김길호(金吉浩)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의관. 문종 때 내의로 있었으나 문종의 죽음을 책임물어 장(杖) 90에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가 곧 내의원으로 복귀되었다. 1453년(단종 1)에는 일본 사신이며 승려인 희익(喜益)에게 침구 및 의방을 가르치고, 활동분야에서 전문성을 닦았다. 1455년(세조 1)에는 행사직(行司直)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60년 12월에 영응군(永膺君) 염(琰)이 병이 들었을 때 간병불근(看病不勤)의 죄로 국문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1(고종 18) - 192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낙선(金樂先)에 대하여

    1881년(고종 18)∼1925년. 한말의 의병·독립운동가. 일명 낙진(洛振). 전라남도 부안 출신. 1909년 의병장 이용서(李用西)의 부대에 가담하여 총기 15정 등으로 무장한 의병 30여명과 함께 고부·부안·태인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같은해 3월 일본군 기병대의 습격으로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고 피신하여 집에서 치료를 받은 뒤, 8월에 다시 이용서의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계속해서 총기 8정 등으로 무장한 부하 12명을 지휘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를 이동하며 활약하다가 김제에서 일본헌병에 붙잡혀, 같은해 11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6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맹암(孟巖)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0(철종 11) - 1919()
    본관
    전주(全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낙용(金洛用)에 대하여

    1860년(철종 11)∼1919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 호는 맹암(孟巖). 평안북도 영변 출신. 재욱(在旭)의 아들이다. 1880년경 무과에 급제하여 선달(先達)이 되었다. 그뒤 천도교에 입교하여 신봉전도사(信奉傳道師)로 각지를 순회하며 교리를 전파하였다. 1918년 천도교 대절의 하나인 인일기념식(人日紀念式)에 참석하기 위하여 상경,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3·1운동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귀향하여 동지와 신자들을 규합하고 3월 30일경 초산(楚山)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부상을 입고 검거되었다. 그뒤에도 계속 항거하다가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된 후 그해 5월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치일(致一)
    벽봉(碧峰)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59(철종 10) - 1909(융희 3)
    본관
    부령(扶寧)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낙진(金洛進)에 대하여

    1859년(철종 10)∼1909년(순종 3).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치일(致一), 호는 벽봉(碧峰)이다. 본관은 부령(扶寧)이며 전라북도 고부(古阜) 창동(滄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독실하게 정진하였다. 만년에는 당대에 명망이 높던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교우하였다. 문집으로 《벽봉유고(碧峰遺稿)》가 전한다. 2권 1책의 석판본(石版本)으로 1945년에 간행되었다. 전우의 〈벽봉전(碧峰傳)〉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들 김택술(金澤術)과 김억술(金億術)의 발문이 있다.

  • 여중(汝仲)
    용암(溶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91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동학교인
    김낙철(金洛喆)에 대하여

    미상∼1917년. 동학(東學)의 간부. 도호(道號)는 용암(溶庵), 자는 여중(汝仲).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지주(地主)였다. 1890년(고종 27) 동생들을 이끌고 동학에 입교하였다. 다음해 교조신원(敎祖伸寃)의 뜻을 품고 손화중(孫和中) 등 전라도의 주요지도자들과 함께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방문하였으나, 최시형은 도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조급함을 나무랐다. 같은해 5월 호남에 포덕(布德)을 하던 최시형에 의해 육임(六任)으로 임명되었다. 1893년 동생 낙봉(洛鳳)과 같이 서울의 복합상소(伏閤上疏)에 참가하였다가, 다시 보은 장내집회(帳內集會)에 부안대접주(扶安大接主)로 참여하였다. 다음해 동학혁명이 일어났으나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기포(起包)하지 않았고, 9월에 이르러 최시형의 명으로 북접(北接)이 봉기할 때 부안에서 기포하였다. 부안접주로 전라도의 북접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시형을 추종하였고, 기포한 뒤에도 온건한 태도를 지켰다. 9월봉기의 문제로 남·북접의 대립이 심각했을 때 전라도 북접주들과 함께 오지영(吳知泳)을 대표로 파견하여 최시형과 전봉준을 화해하게 하였다. 다음해 1월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지만 도피생활을 하였다. 원주에 피신해 있던 최시형이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스스로 최시형으로 가장하여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0년(광무 4) 김연국(金演國)과 함께 최시형이 내린 강서(降書)로 종통(宗統)을 재확인하려는 손병희(孫秉熙)에 반대하였다. 그뒤 김연국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를 세워 포교에 주력하며 천도교(天道敎)와의 화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7년 김연국이 교중(敎中)을 잘못 이끌었다고 비판하면서 천도교에 입교하여 성도사(誠道師)가 되었다.

  • 태화(泰和)
    인백당(忍百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25(중종 20) - 1585(선조 19)
    본관
    순천(順天)
    분류
    교육/사상 > 교육자
    김낙춘(金樂春)에 대하여

    1525년(중종 20)∼1585년(선조 19).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태화(泰和), 호는 인백당(忍百堂). 조부는 김희윤(金希尹)이고 아버지는 용궁현감 김우행(金雨行)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 김효려(金孝廬)의 딸이다. 21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와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고 내외종(內外從)간인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와 교유하였다. 만년에는 가은읍 소양동(瀟陽洞)에 영류정(映流亭)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힘썼고 후에 소양서원(瀟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인백당일고(忍百堂逸稿)》가 있다.

  • 적여(績汝)
    삼락재(三樂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86(정조 10) - 1834(순조 34)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낙풍(金樂豊)에 대하여

    1786년(정조 10)∼1834년(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적여(績汝), 호는 삼락재(三樂齋). 아버지는 성(城), 어머니는 장학호(張學浩)의 딸이다. 1814년(순조 14)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평안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으며, 온릉령(溫陵令)을 거쳐 예조좌랑과 호조·병조정랑을 역임하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822년 장령이 되었다가, 같은해 종부시정 겸 편수관이 되어 선원보(璿源譜)를 찬수한 공으로 1823년 병조참의에 올랐으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824년 돈령부도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김장생(金長生)의 예론을 열심히 따랐다.

  • 여량(汝良)
    노가암(老可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50(철종 1) - 1919()
    본관
    부령(扶寧)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낙필(金洛弼)에 대하여

    1850년(철종 1)∼1919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여량(汝良), 호는 노가암(老可庵)이며, 본관은 부령(扶寧)이다.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명당리(明堂里)에서 출생하였다. 매죽당(梅竹堂) 김종(金宗)의 후손이다. 어릴 때는 백홍진(白弘鎭)을 사사하였고, 만년에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1949년 석판본 2권 1책으로 간행된 문집 《노가암유고(老可庵遺稿)》가 있다. 그 책에는 그의 족질(族姪) 김택술(金澤述)의 서(序)와 족손 김형관(金炯觀)의 발(跋)이 있다.

  • 간부(艮夫)
    구사당(九思堂)
    시호

    이칭
    김진행(金晋行)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08(숙종 34) - 1766(영조 42)
    본관
    의성(義城)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낙행(金樂行)에 대하여

    1708년(숙종 34)∼1766년(영조 4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초명은 진행(晋行), 초자는 퇴보(退甫), 자는 간부(艮夫), 호는 구사당(九思堂). 아버지는 교리 성탁(聖鐸)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이재(李裁)의 문인으로 그는 《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 등에 조예가 깊었다. 1737년(영조 13)에 홍문관교리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추존문제로 무고를 받고 있던 이재를 변호하다가 이해로(李海老)·신헌(申瀗) 등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자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뒤 아버지가 광양(光陽)에 이배되어 죽자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냈다. 효행이 지극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제문에 뛰어나서 구제밀찰(九祭密札: 九思堂 金樂行의 제문, 密庵 李裁의 편지라는 뜻)의 미칭(美稱)이 전한다. 저서로는 《계몽질의 啓蒙質疑》·《기법질의 耆法質疑》·《상복경전주소통고 喪服經傳註疏通考》·《강록간보고의 講錄刊補攷疑》·《구사당집 九思堂集》 등이 있다.

  • 중원(仲源)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50(영조 26) - 1835(헌종 1)
    본관
    울산(蔚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낙휴(金洛休)에 대하여

    1750년(영조 26)∼1835년(헌종 1).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중원(仲源)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쌍치면(雙置面) 출신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며 김방섭(金邦燮)의 아들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배웠으며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행실이 모범되어 인근 마을의 선비들이 추종하였다고 전한다.

  • 계응(季應)
    병산(缾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07(중종 2) - 1570(선조 3)
    본관
    청도(淸道)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난상(金鸞祥)에 대하여

    1507년(중종 2)∼1570년(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도.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缾山). 좌참찬 점(漸)의 현손이며, 할아버지는 영우(靈雨), 아버지는 현(俔)이다. 1528년 이황(李滉)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8월에 윤원형(尹元衡)이 왕의 명이라 하여 양사(兩司)를 협박,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김광준(金光準)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윤임 등을 대역으로 논하려 하여 집의 송희규(宋希奎), 지평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우(朴光佑)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모두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이기(李芑)·윤원형 등의 청에 의하여 남해로 유배되었고, 1565년에 감형되어 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선조초에 이준경(李浚慶)의 청으로 풀려나와 기대승(奇大升)의 주장으로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추천되어 집의·응교·직제학 등을 지내고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1569년 사류망담(士類妄談)의 잘못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천 오산사(梧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산유집》이 있다.

  • 사상(士祥)
    병성(甁城)
    시호
    효정공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선산(善山)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난서(金鸞瑞)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사상(士祥), 호는 병성(甁城). 효정공 김종리(金從理)의 후손이다. 선조 때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렸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영천(永川)과 경주(慶州)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녹선되고, 전라수사(全羅水使)에 제수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난손(金蘭孫)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혜공왕 때 일본에 파견된 사신. 779년(혜공왕 15) 대일본하정사(對日本賀正使)가 되어 사절을 이끌고 그해 10월 북구주(北九州)의 태재부(太宰府)에 상륙하여 절차를 마친 다음, 수도인 평성경(平城京)에 도착하였다. 다음해 정월 3일에 국가적인 의식을 행하는 장소인 태극전(大極殿)에서 일본왕에게 하례를 하고 신라국왕의 표문(表文)을 구두로 대신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신라와 일본은 예로부터 서로 내왕하는 사이였으나, 근래 나라 안에 도둑떼들의 침입이 있어 자주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살찬(薩飡) 김난손과 급찬(級飡) 김암(金巖) 등을 보내어 예물을 드리고 하정(賀正)하는 바이다. 또, 귀국의 견당판관(遣唐判官)인 우미카미[海上三狩] 등을 찾아서 신라사신을 따라 환송(還送)하고, 상례에 따라 학어생(學語生)을 보내는 바이다.”라는 것이었은데, 일본측에서는 표문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3일 뒤인 6일에 그는 일본조정으로부터 정5품상(正五品上)을 받았다. 부사(副使)인 급찬 김암은 정5품하를, 대판관(大判官)인 한나마(韓奈麻) 살중업(薩仲業)과 소판관인 나마(奈麻) 김정락(金貞樂), 대통사(大通事)인 한나마 김소충(金蘇忠) 등 3인은 각각 종5품하를 제수받았다. 그밖에 6품 이하도 각기 차등있게 제수받았다. 또한, 그해 2월 15일 귀국하려고 하자 일본측에서 답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앞으로 양국이 서로 표문을 가지고 사신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779년에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은 고대 한일교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 사의(士猗)
    벽곡(碧谷)
    시호
    효문(孝文)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81(정조 5) - 1851(철종 2)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난순(金蘭淳)에 대하여

    1781년(정조 5)∼1851년(철종 2).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안동. 자는 사의(士猗), 호는 벽곡(碧谷). 아버지는 군수 이유(履裕)이다. 1804년(순조 4)에 진사가 되고, 1813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검열·어사·이조참의·보덕·홍문관부제학·황해도감사·이조참판·호조참판·형조판서·평안도관찰사·대사헌·우참찬 등을 거쳐 1841년(헌종 7)에는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뒤 우참찬·형조판서·판윤·예조판서를 거쳐 1848년 판돈령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수원부유수·형조판서를 지냈다. 과거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며, 안동김씨인 이유로 일생을 통하여 관력이 순조로웠으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의 지문(誌文)·존호옥책문(尊號玉册文)·시책문(諡册文)·제문·행장 및 음기(陰記)를 짓고 썼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고령(高靈)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남득(金南得)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고령. 충혜왕 때 진사에 합격하여 공민왕 때 감찰집의·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역임하였다. 공양왕 때는 서해도관찰사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고 벼슬이 문하평리에 이르러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지(李至)와 함께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에 정몽주(鄭夢周)가 제거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서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일찍이 상주목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관아 동쪽에 정자 하나를 세웠는데 이색(李穡)이 이 정자를 풍영루(風咏樓)라 이름하여 기(記)를 지었으며, 또한 이숭인(李崇仁)도 이 정자에 대하여 시를 지어 남기니, 그뒤 이곳은 명승지가 되었다.



  • 시호
    장양(莊襄)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50(충정왕 2) - 1423(세종 5)
    본관
    연안(延安)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남수(金南秀)에 대하여

    1350년(충정왕 2)∼1423년(세종 5).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본관은 연안. 밀직부사(密直副使) 을진(乙珍)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현화사진전직(玄化寺眞展直)으로 관직에 나간 후, 소부윤·홍주목사·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태조 때에 순제등처병마사(蓴堤等處兵馬使), 이조·예조·병조의 전서(典書),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1402년(태종 2) 충청도도절제사 재직중에 ‘재물을 탐하여 백성들을 소요시킨다. ’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장단에 유배되었다. 1407년 중군도총제, 이어 충좌시위사상호군(忠佐侍衛司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이듬해에는 태조가 피병을 위해 그의 집에 왔다. 1409년 명나라의 요청에 따른 군마의 진헌을 위한 진헌관마색(進獻官馬色)이 설치되자, 이천우(李天祐)·설미수(卨眉壽)·윤사수(尹思修)와 함께 제조(提調)가 되었다. 또한 11도도절제사의 설치로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10년 여진족이 동북면을 침략하자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로 파견되었다. 1412년 삼군별시위(三軍別侍衛)·응양위절도사(鷹揚衛節度使)·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 등이 설치되면서, 이흥발(李興發)과 함께 별시위좌일번절제사(別侍衛左一番節制使)가 되었다. 이어 지의정부사 겸 판사복시사(知議政府事兼判司僕寺事)·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9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재직중 수년 전 사복시제조로서 전곶목장(箭串牧場)의 전지 수결을 도경한 사실이 발각되어 온수(溫水)에 귀양갔다가 태종의 선지로 귀환하였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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