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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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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 말기의 장군. 서부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장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大興)을 근거지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의 나당연합군으로는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광복운동을 막아내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보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자, 백제유민의 광복운동은 더 버텨나가기 어렵게 되어 수로로 공격한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 데 공을 세워,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中女)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즉,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고, 이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 뿐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676() - 706()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장군
    흑치준(黑齒俊)에 대하여

    676년∼706년. 중국 당나라에서 활동한 백제 유민출신의 무장. 백제 왕족 부여씨(扶餘氏)에서 분파된 흑치씨(黑齒氏) 가문출신이다. 증조부는 현덕(顯德 혹은 加亥), 조부는 사차(沙次, 혹은 沙子)이며, 백제 멸망기의 장군으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이다.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무략(武略)을 품었으며, 정기(旌旗)를 벌이거나 군진(軍陣)을 그리며 노는 등 무장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696년 약관(弱冠)의 나이로 양왕(梁王) 이삼사(李三思)를 따라 이진충(李盡忠)의 난을 토벌하는 데 출전하여 군공을 세워 유격장군 행난주광무진장 상주국(游擊將軍行蘭州廣武鎭將上柱國)을 제수받았으며, 698년 선고(先考) 흑치상지의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伸寃)이 이루어지고 추증을 받게 됨과 더불어 자신도 지금까지의 공로가 고려되어 우표도위 익부 좌랑장 상주국(右豹韜衛翊府左郞將上柱國)에 임명되었다. 699년에는 당 고종에게 청하여 아버지 흑치상지의 무덤을 낙양(洛陽)의 망산(邙山)으로 이장하여 그 혼령을 모셨으며, 얼마 뒤 우금오위 수익부중랑장 상주국(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으로 옮겼다. 이후 평탄한 관료생활을 누리다가 706년 5월 31세를 일기로 낙양현 사제(私第)에서 병으로 죽었고, 같은해 8월에 아버지 흑치상지의 무덤 곁에 묻혔다. 1929년 낙양 망산에서 그의 묘지명이 출토되었으며, 그것이 1980년대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서 그의 일생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흔린(昕鄰)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문성왕 때의 귀족. 관등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으며, 849년(문성왕 11) 9월 이찬(伊飡)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모반을 도모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당할 때, 이 사건에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 48(다루왕 21)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흘우(屹于)에 대하여

    미상∼48년(다루왕 21). 백제 다루왕 때의 대신. 동부(東部) 출신. 30년(다루왕 3) 10월 백제를 침입한 말갈의 군대를 마수산(馬首山: 지금의 金化) 서쪽에서 격파하여 왕으로부터 말 10필과 조(租) 500석을 받았다. 34년 2월 우보(右輔)가 되고, 37년 2월 좌보가 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 356(흘해이사금 4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에 대하여

    미상∼356년(흘해이사금 47). 신라 제16대왕. 재위 310∼356년.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각간(角干) 수로(水老, 또는 于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내해―우로―흘해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생존연대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로와 흘해 사이에 2, 3세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명원부인(命元夫人)이다. 기림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312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여오므로, 아찬(阿飡) 급리(急利)의 딸을 시집 보내어 화친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뒤 단교하였고, 왜병이 풍도(風島)와 변방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金城)까지 포위하였으나 격퇴시켰다. 《삼국사기》에는 330년에 벽골지(碧骨池: 전라북도 김제)를 개착(開鑿)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온 것 같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백제병이 처음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두 나라가 처음으로 직접 충돌한 것이라고 보아 《삼국사기》의 초기 백제 관계 기사를 의심하게 한다. 재위 47년에 아들 없이 죽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927(태조 10)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장군
    흥달(興達)에 대하여

    미상∼927년(태조 10). 고려 초기의 장군. 처음 견훤(甄萱) 휘하에 들어가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지금의 聞慶)의 성주가 되었다. 927년에 왕건(王建)이 강주(康州)를 순행할 때 고사갈이성을 지나자, 성주로 있으면서 그 아들을 보내어 귀순하는 뜻을 전하고 항복하였다. 그의 귀순으로 후백제에서 배치한 군졸과 관리들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왕건은 그 공을 높이 사서 청주(靑州)의 녹을 내려주고 맏아들 준달(俊達)에게는 진주(珍州), 둘째아들 웅달(雄達)에게는 한수(寒水: 未詳), 셋째아들 옥달(玉達)에게는 장천(長淺: 지금의 長湍)의 녹을 내려주고, 또 전택(田宅)을 후하게 하사하였다. 이후 견훤이 고사갈이성을 공격하려 하자, 이를 막으려고 출정 준비를 하던 중 병을 얻어 10여일 만에 죽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36(희강왕 1)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
    흥덕왕(興德王)에 대하여

    미상∼836년(희강왕 1). 신라 제42대왕. 재위 826∼836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수승(秀升). 헌덕왕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金氏)이고, 비(妃)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金氏)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흥덕왕의 정치적 입장은 헌덕왕의 그것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804년(애장왕 5) 시중(侍中)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언승(彦昇: 뒤의 헌덕왕)과 함께 애장왕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고 생각된다. 809년 언승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고, 헌덕왕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819년(헌덕왕 11)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고, 822년에는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감으로써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애장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흥덕왕 2)에 명활전(明活典)을 설치하였다. 또는 그것이 914년(신덕왕 3)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源谷羊典)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執事部)를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귀족세력의 억제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헌덕왕대의 김헌창(金憲昌)의 난을 마무리짓는 조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덕왕대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服色)·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하여 골품(骨品)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졌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眞骨)과 육두품(六頭品)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이와 아울러 835년에 김유신(金庾信)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이다. 그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鎭)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弓福: 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唐恩郡)에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丘德)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度僧)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金大廉)이 차(茶)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836년 12월에 죽었다. 장지는 지금의 경주시 강서면 육통리에 있는, 장화왕비와 합장된 흥덕왕릉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홍주(洪州)
    분류
    왕실 > 왕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2비. 홍주(洪州 : 지금의 洪城) 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다. 홍규의 활약상을 알 수는 없지만, 홍주 지방은 934년(태조 17)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싸움에서 전취한 지점으로, 이로 인하여 공주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자진 내항할 정도로 후백제와의 겨룸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곳은 또한 충청도에서 서해로 나가는 출구로서 중국사신의 접대와 영송(迎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는 중요지점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태자 직(稷)인데 후손이 없었고, 실명(失名)의 공주는 태조의 제 3비 신명왕후(神明王后) 소생 태자 태(泰)에게 출가하여 이복남매간의 근친혼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신명왕후의 둘째 아들인 정종, 셋째 아들인 광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로 기록된 태자 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흥선(興宣)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아달라이사금 때의 대신. 155년(아달라이사금 2) 일길찬(一吉飡)에 임명되었다. 167년 7월 백제가 나라 서쪽의 두 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1,000명을 포로로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같은해 8월에 흥선은 국왕의 명을 받아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아달라이사금이 친히 8,000 기병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수(漢水)에 진군하니 백제 초고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포로로 잡아갔던 신라인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흥선은 이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168년 4월에 이찬(伊飡)에 임명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충신
    흥수(興首)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 좌평(佐平)으로 있다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갔다. 660년(의자왕 20)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치려 하므로, 왕이 좌평 의직(義直),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의 신하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려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논이 구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그러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다. 백강(白江, 혹은 伎伐浦)과 탄현(炭峴, 혹은 沈峴)은 우리나라의 요새지인 바 마땅히 용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士卒)들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당병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이때에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라고 하니 왕이 그럴싸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때에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부여에서는 백제 말기의 충신인 성충(成忠)·흥수·계백을 삼충사(三忠祠)에 제향하여, 매년 가을철에 부여군민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 1123(인종 1)
    본관
    개성(開城)
    분류
    왕실 > 왕자/공주
    흥수궁주(興壽宮主)에 대하여

    미상∼1123년(인종 1). 고려 숙종의 두 번째 딸로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柳氏)이다.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에게 시집갔다. 1102년(숙종 8)에 공주(公主)로 책봉하고 1111년(예종 6)에 아들을 낳으니 승선(承宣) 김고(金沽)를 보내어 예물(禮物)을 사(賜)하였는데 1123년(인종 1)에 졸하였다. 《고려사》에 열전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624(인조 2)
    본관
    전주(全州)
    분류
    왕실 > 왕족
    흥안군(興安君)에 대하여

    미상∼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제(堤). 선조의 열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온빈 한씨(溫嬪韓氏)이다. 성품이 활달·호협하여 엉뚱한 짓을 잘하였다. 1624년 서인 사이의 반목으로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 그들과 내통하여 역모하였다는 설이 있어 대간이 주청하여 남쪽에다 안치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난을 피해 왕과 함께 공주로 가던 중 도망하여 이괄의 군중(軍中)으로 들어갔다. 반란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이괄은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논공행상을 하였으나 관군의 승전으로 패하게 되자 소천(昭川)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安士誠)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도원수 심기원(沈器遠) 등에게 살해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681(신문왕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정치/사건 > 모역/모반
    흥원(興元)에 대하여

    미상∼681년(신문왕 1). 신라 신문왕 때의 모반자.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에 이르렀다. 681년 정월 8일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과 더불어 모반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지방세력가
    흥종(興宗)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세력가. 초팔성(草八城)의 성주(城主)였다. 928년(태조 11) 정월 강주(康州)를 구원하러 파견된 고려의 군대를 격퇴시키고 그 장수 김상(金相)을 전사시켰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38(민애왕 1)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
    희강왕(僖康王)에 대하여

    미상∼838년(민애왕 1). 신라 제43대 왕. 재위 836∼838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제륭(悌隆 혹은 愷隆·悌顒).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로 익성대왕(翌成大王)으로 추봉된 김헌정(金憲貞, 일명 草奴)이고, 어머니는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된 각간(角干) 충효(忠孝)의 딸 포도부인(包道夫人, 혹은 美道·梁乃·巴利夫人)이다. 왕비는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의 딸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金氏)이다. 아들은 뒤에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봉해진 계명(啓明)이다. 왕이 되기 전 제륭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헌정이 819년(헌덕왕 11)에 병으로 다닐 수 없게 되자 왕으로부터 금장식의 자색 단장(檀杖)이 하사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 장보고)에게로 달아나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고, 김명이 상대등(上大等)에, 이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838년(희강왕 3)에 불만을 가진 김명·이홍 등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희랑(希朗)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말의 고승. 화엄학(華嚴學)의 학승(學僧)으로서 북악(北岳)을 대표한다. 신라의 화엄학은 의상(義湘)을 그 효시로 하는데, 말기에는 남악과 북악으로 나누어졌다. 그 두 학파의 창시자는 관혜(觀惠)와 희랑이었다. 희랑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 歸依를 받았다는 뜻)이 되었고, 관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이 되었다. 관혜와 그 문도들은 남악 화엄사(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으며, 희랑과 그 문도들은 북악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두 파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분파가 매우 심각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고려 때 균여(均如)는 그 조화를 모색한 인물이었다. 《균여전》에는 “이 두 사람은 신심(信心)을 받아 향화(香火)를 올리며 서원(誓願)을 맺었으나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을 수 있으랴!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더구나 법(法)의 맛을 각기 다르게 받았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가 어렵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스님(균여)은 언제나 남악과 북악의 종문(宗門)은 취지가 서로 모순되어 구분되지 않음을 탄식하여 많은 갈래를 막아 하나에로 귀환(歸還)되기를 희망하였다.” 라고 하였다. 즉, 신라 말기에 이르러 화엄학은 부석사와 화엄사의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는 폐해가 노골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는 희랑이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 시호
    이정(夷靖)
    이칭
    이타(李袉)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65(세조 11)
    본관
    전주(全州)
    분류
    왕실 > 왕자/공주
    희령군(熙寧君)에 대하여

    미상∼1465년(세조 11). 이름은 이타(李袉). 태종(太宗)의 6남으로 숙의최씨(淑儀崔氏)의 소생이다. 고종 때에 현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둘로 순창군부인 신씨(淳昌郡夫人申氏)는 찬성(贊成) 신숙생(申淑生)의 딸로서 자녀가 없다. 평산군부인신씨(平山郡夫人申氏)는 군수 신사렴(申士廉)의 딸로 3남을 두었다. 장남은 화성군(花城君) 이감(李堪)이고, 차남은 영원정(寧原正) 이배(李培)이며, 3남은 곡강도정(曲江都正) 이게(李垍)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 덕풍리(현 하남시 덕풍동) 산67 유좌(酉座) 언덕에 있다. 배위인 순창신씨는 합폄부좌(合窆附左)하고, 평산신씨는 그 계하(階下)에 있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설화인물
    희명(希明)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여자. 경주 한기리(漢岐里)사람이다. 그의 아이가 5세에 갑자기 눈이 멀자, 하루는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로 가서 왼편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千手大悲) 앞에 가서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빌게 하였더니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 부른 노래가 신라시대 향가(鄕歌)의 하나인 〈천수대비가 千手大悲歌〉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파평(坡平)
    분류
    왕실 > 왕비
    희비(嬉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제28대 충혜왕의 제2비. 파평(坡平)사람으로 찬성사(贊成事) 윤계종(尹繼宗)의 딸이며, 충정왕의 어머니이다. 파평윤씨는 예종 때 윤관(尹瓘)의 활동에 힘입어 성장하고 고려 후기에도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포함되는 명문가의 하나이다. 충혜왕이 죽은 뒤 덕녕공주(德寧公主) 소생 왕자인 충목왕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12세의 나이로 죽자, 윤씨일족은 희비가 낳은 충혜왕의 서자 저(㫝)를 왕으로 추대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충정왕 즉위 후 희비에게는 경순부(敬順府)를 설치하고 승(丞)·주부(注簿) 각 1인과 사인(舍人) 2인을 두어 지위가 격상되었으나 충정왕이 재위 3년 만에 원나라의 압력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강화도에 안치되어 있을 때는 식사공급도 충분하지 못하고 모자간의 내왕조차 끊어지는 곤경을 치렀으며, 공민왕에게 청하여 겨우 며칠간 아들을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행동 전반에 많은 규제를 받았다. 공양왕 때 와서 예관(禮官)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후의 예에 준하여 기제(忌祭)와 진전제(眞殿祭)를 거행하도록 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701(숙종 27)
    본관
    인동(仁同)
    분류
    왕실 > 왕비
    희빈장씨(禧嬪張氏)에 대하여

    미상∼1701년(숙종 27). 조선 숙종의 빈(嬪). 본관은 인동(仁同).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머니의 정부(情夫)였던 조사석(趙師錫)과 종친인 동평군(東平君) 항(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고, 1688년 소의(昭儀)로 승진되어 왕자 윤(昀: 뒤의 景宗)을 낳게 되자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자,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중로 정읍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올려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은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그런데 뒤에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과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宮人)·무녀(巫女)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게 되었다. 이것을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하는데, 이때에 장희빈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최석정(崔錫鼎)·유상운(柳尙運)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嬪)을 후비(后妃)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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