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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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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94(성종 25) - 1581(선조 14)
    본관
    남양(南陽)
    분류
    왕실 > 왕비
    희빈홍씨(熙嬪洪氏)에 대하여

    1494년(성종 25)∼1581년(선조 14).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후궁. 본관은 남양(南陽). 중종반정 때 공로를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 홍경주(洪景舟)의 딸이다. 처음에는 정국공신들의 신분보장을 위하여 정략적인 뜻에 따라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뒤에도 왕의 총애를 사서 아버지의 권세를 뒷받침하고 궁중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사건까지도 탐사하여 아버지에게 알림으로써 사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특히, 훈구파인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새로이 정계에 등장하는 사림파(士林派)의 제거에 앞장섰다. 특히, 혁신정책을 주장하여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고집하면서 전국 사림의 영수가 되어 국가의 기강을 진작시키려는 조광조(趙光祖) 일당 제거의 배후활동에 앞장섰다. 훈구파는 사림파들이 곧고 바르게 행동하면서 정치의 혁신을 추구하고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등 제거할 구실을 제공하지 않자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네 글자를 꿀로 써서 벌레가 먹게 해서 모함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여해(尹汝諧)·유희령(柳希令)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대간들로부터 심한 탄핵을 받았으나 선왕의 총애를 생각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소생으로는 금원군(錦原君) 영(嬰)과 봉성군(鳳城君) 완(岏)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희안(希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모시던 시녀(侍女)이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죽어 정순왕후가 정업원(淨業院)에서 여승이 될 때 지심(智心)·계지(戒智) 등의 시녀와 함께 여승이 되었다.


  • 고한(孤閑)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1(명종 16) - 1647(인조 25)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희언(熙彦)에 대하여

    1561년(명종 16)∼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이씨(李氏). 호는 고한(孤閑). 함경북도 명천 출신. 승려가 의발과 가사를 주는 태몽이 있었다. 17세에 칠보산 운주사(雲住寺)에 들어가 이듬해 중이 되었고 18년 동안 경론(經論)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일대사(一大事)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모든 경론공부를 폐하고 덕유산으로 선수(善修)를 찾아갔다. 그에게 ‘법성원융(法性圓融)’의 뜻을 묻고 느낀 바가 있어 3년 동안 머무르면서 깊은 뜻을 터득하였다. 그뒤 언제나 누더기옷을 걸치고, 눈이 오는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가 길어도 개의치 않고 음식을 폐한 채 10여일씩이나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였다. 하루는 서울로 올라와 돈의문(敦義門)앞을 지나는데 10여명의 불량한 아이들이 “너는 도승이냐 걸식승이냐.”고 조롱하면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묻었다. 우연히 신자가 지나다가 구해주었으나, 조금도 성내는 얼굴을 하지 않고 합장하며 “성불! 성불!”이라고만 하였다. 이를 본 아이들은 진짜 도승이라 감복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면 역시 합장하고 돌아가라고만 하였으며, 돌아가지 않을 때 몽둥이를 들어 내쫓고는 방문을 닫아걸고 앉아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주면 좋은 공양을 받을만한 덕이 없다고 하며 물리쳤고, 큰스님으로 떠받들면 존경받을만한 행적이 없다 하며 거절하였다. 다만 간절하게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법성원융’의 뜻을 설명하여 주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왕이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재를 베풀고 그를 증사(證師)로 삼아 금란가사(金襴袈裟)를 내렸으나 재가 끝난 뒤 가사를 벗어놓고 몰래 도망하였다. 1642년(인조 20) 팔공산에 있을 때 왕명으로 서울로 가던 각성(覺性)을 만나 형제처럼 지냈고, 다시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1646년 각성과 함께 속리산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647년 11월 22일에 유해를 산속에 방치하여 짐승의 밥이 되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특별히 지옥의 찌꺼기만 남겼구나(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를 엄중히 가려 전법(傳法)하였기 때문에 제자로는 각원(覺圓)·영주(永周)·종열(宗悅)의 3명만 있었다. 제자들이 유언을 어기고 다비하였는데 정골(頂骨)이 튀어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고 한다. 그의 정골을 팔공산과 가야산에 나누어 탑을 세웠고, 이듬해 봄에는 속리산에도 탑을 세웠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발해
    생졸년
    ? - 817(주작 5)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희왕(僖王)에 대하여

    미상∼817년(주작 5). 발해의 제8대 왕. 재위 812∼817년. 성명은 대언의(大言義)이며, 제7대 정왕의 아우이다. 주작(朱雀)이라고 건원(建元)하였으며,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814년에는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발해 불교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이밖에 특기할 업적은 없다.

  • 불피(不陂)

    시호
    성효(誠孝)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1181(명종 11) - 1237(고종 24)
    본관
    개성(開城)
    분류
    왕실 > 왕
    희종(熙宗)에 대하여

    1181년(명종 11)∼1237년(고종 24). 고려의 제21대 왕. 재위 1204∼1211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영(韺),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 신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화태후(靖和太后) 김씨(金氏)이며, 비(妃)는 영인후(寧仁侯) 진(稹)의 딸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강화에 장사하여 능을 석릉(碩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다.


  • 경산(京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7() - 1979()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희진(喜璡)에 대하여

    1917년∼1979년. 현대의 선승(禪僧). 성은 손씨(孫氏). 호는 경산(京山). 함경북도 북청 출신. 1936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출가하여 수암화상(秀庵和尙)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다. 1940년 유점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고, 1945년 7월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동산화상(東山和尙)을 수계사로 보살계를 받았다. 그뒤로 동래의 금정선원(金井禪院),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만공(滿空), 송광사 효봉(曉峯), 통도사 극락선원 경봉(鏡峯)의 지도 아래 한철씩 참선수행하였다. 1949년 8월 경남교무원에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받고 그뒤로 금정선원에 머무르면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계획하였다. 1955년 8월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위원에 피선되었고, 1956년 불교정화운동에 참가하여 투쟁하였다. 1958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에 피임되었고, 1962년 12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에 피선되었다. 당시에 정화운동은 극한의 고비를 넘기고 비구·대처승의 양측이 통합하기로 하고 종정에 효봉, 총무원장에 기산(綺山)을 선임하여 1년 가까이 나가다가 대처승 측이 또 다시 이탈하였으므로 1963년 7월 효봉을 종정으로, 청담(靑潭)을 종회의장으로, 그를 총무원장으로 추대하였다. 1972년 5월 대구 동화사(桐華寺) 주지, 1973년 1월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종단협의회 회장, 1975년 한국불교총연합회 회장, 1976년 한국반공연맹 이사, 1977년 성북동 성라암(星羅庵) 수도원의 조실(祖室), 1978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에 피임되었다. 1979년 11월 조계종 제19대 총무원장에 피임되었고, 같은해 12월 저서인 《삼처전심 三處傳心》을 간행하였다. 그때 종단 안에는 종단의 질서와 승려의 기강이 바로잡히지 못하고 서로 파당을 지어 종권쟁탈에 혈안이 되어 많은 분규가 일어났다. 이에 종단의 화합단결을 위하여 힘쓰고 상호 불신풍조를 제거하는 한편, 대처승측을 상대로 법원에 제소하여 계류중인 소송건을 취하하는 등 종단 일에 노심초사하다가 12월 24일 총무원에서 열린 원로회의 석상에서 돌연히 입적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군인
    희필(曦弼)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태조(太祖) 원년(918)에 능혜(能惠)와 희필(曦弼)을 함께 내군경(內軍卿)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일찍부터 사무에 통달하고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었으며, 공무(公務)를 봉행함에 태만하지 않았고, 일을 처결하는데 민첩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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