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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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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사행(士行)

    시호
    문익(文翼)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70(공민왕 19) - 1425(세종 7)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여지(金汝知)에 대하여

    1370년(공민왕 19)∼1425년(세종 7).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사행(士行). 고려 밀직제학(密直提學) 도(濤)의 아들이다. 1389년(창왕 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제수되었으나, 곧 언사(言事)로 전라도에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소환되어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다가 파면되었고, 뒤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으로 재직할 때 함창군으로 유배되어 온 좌주(座主) 이종학(李種學)을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손흥종(孫興宗)이 해치려는 것을 구하였다. 곧 소환되어 간관(諫官)으로 근무하던 중 정도전이 “공양왕 2년에 나를 탄핵한 성랑(省郞)은 모두 파직되었는데 오직 김여지만이 관직에 있다.”고 한 말을 전해 듣고 사직하였다. 정도전이 실각한 뒤에 복직, 1402년(태종 2) 우헌납(右獻納)에 재직중 언사로 원평(原平)에 안치되었다. 다시 소환되어 병조·이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403년 장령으로 승진하였으나, 언사로 순금사(巡禁司)에 수금되었다가 방환되면서 지봉주사(知鳳州事)로 쫓겨났다. 이듬해 예문관직제학, 집의로 옮겼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408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승정원우대언·좌대언을 거쳐 1410년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13년 지신사 재직중에 고려 종실의 후손인 왕걸오미(王乬吾未)의 동정을 알고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이듬해 예문관제학으로 복직되어 남재(南在) 등과 문과회시(文科會試)를 주관하고, 충정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16년 대사헌으로 입조하였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폐세자되기까지 세자좌빈객을 겸임하였다. 1417년 어머니의 시병을 위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예문관제학이 되었고, 이어 공조판서·예조판서·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 형조판서로서 하정사(賀正使)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병으로 일시 사직, 1422년 예조판서로 복직되었다. 이듬해 의정부참찬으로 발탁되었으나 병으로 재차 사직하였다. 성품이 충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태종·세종 성세의 일익이 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여탁(金如琢)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다. 고려 덕종 때 수사공(守司空)이 되었다. 아들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김약진(金若珍)이다. 4세는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신련(金臣璉)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역기(金力奇)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애장왕 때 당나라에 간 사신. 808년(애장왕 9) 2월 당나라에 조공을 하러 갔다. 이때 당나라 덕종(德宗)에게, 800년(소성왕 2)에 김준옹(金俊邕: 소성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지녔던 책봉사 위단(韋丹)이 도중에 왕의 죽음을 듣고 돌아갔으므로, 당시 중서성에 보관되어 있는 책봉서를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덕종은 김준옹 등의 책봉서를 홍려시(鴻臚寺)로 하여금 중서성에서 수령하여 전할 것을 명하고,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과 그의 아우 김중공(金仲恭)에게 문극(門戟)을 하사하고 본국으로 하여금 예에 의거하여 주도록 하였다.

  • 장원(長源)
    도촌거사(陶村居士)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96(선조 29) - 1661(현종 2)
    본관
    부안(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연(金沇)에 대하여

    1596년(선조 29)∼1661년(현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장원(長源), 호는 도촌거사(陶村居士). 고려시대 명현(名賢)인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진사(進士) 김석량(金錫良)의 증손이고, 찰방(察訪) 김광(金光)의 손자이며, 도사(都事) 김익복(金益福)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명신(名臣) 안처순(安處順)의 손녀이자, 처사(處士) 안전(安瑑)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증광사마시(戊午增廣司馬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이후부터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 속에서 시를 읊조리고 살며 스스로 자신의 호를 도촌거사(陶村居士)라 하였다. 1661년 10월 7일 향년 65세로 죽어 남원부(南原府) 풍곡리(風谷里)에 장사지냈다.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현감(縣監) 송처중(宋處中)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김지명(金之鳴)은 1639년(인조 17)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 부장원으로 합격하였고 김지성(金之聲)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문과(戊子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지중(金之重)은 1651년(효종 2)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김지백(金之白)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사마시(戊子式年司馬試)에 생원 부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딸은 사간(司諫) 이상형(李尙馨)의 아들 이문원(李文源)과 혼인했다.

  • 자적(子迪)/자유(子裕)
    운암(雲巖)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87(성종 18) - 1544(중종 39)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연(金緣){1}에 대하여

    1487년(성종 18)∼1544년(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자적(子迪) 또는 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 성균관생원 효로(孝盧)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시·진사시의 양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52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당시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양(歸養)을 요청하여 근읍의 수령으로 나갔다. 그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는데 이때 김안로일당인 심언광(沈彦光)·채무택(蔡無擇) 등이 김안로를 복직시키려 하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샀다. 1531년 김안로가 다시 실권을 잡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할 때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주살되고, 그 일당이 축출되면서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어 1542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특히 농정(農政)에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당시 한발이 심해 폐단이 많았던 영동 지방에 대한 구황사업(救荒事業)에 힘써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그의 치적에 감복하였다. 1544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죽었다.

  • 언홍(彦洪)
    노암(魯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2(명종 7) - 1592(선조 25)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연(金演){2}에 대하여

    1552년(명종 7)∼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경주. 자는 언홍(彦洪), 호는 노암(魯庵). 영천 출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카 대해(大海), 유생 최인제(崔仁濟)와 이일장(李日將)·정세아(鄭世雅)·정의번(鄭宜蕃)·이영근(李榮根)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수복하고, 이어서 경주를 수복하기 위해 경상좌병사 박진(朴晋) 휘하의 부대와 연합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로 그 자손에게 공역을 면제하였다. 밀양의 고천사(古川祠)에 제향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연경(金延慶)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무신. 1009년(목종 12) 권신 김치양(金致陽)의 역모계획을 전해들은 목종이 선휘판관 황보 유의(皇甫兪義)와 별장 이성언(李成彦)으로 하여금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피신해 있던 태조의 손자 대량군(大良君) 순(詢: 현종)을 세우려 할 때 개성부참군으로 군사 1백명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아가 영입해오는 대량군을 도성 안까지 호위하였다. 뒤에 고려에 침입한 거란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공으로 1032년(덕종 1) 전사자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군기감에 추증되었다.

  • 인수(仁叟)
    화산(華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85(숙종 11) - 1776(영조 52)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연계(金延季)에 대하여

    1685년(숙종 11)∼1776년(영조 52).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화산(華山)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시조는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839)의 셋째 아들 김흥광(金興光)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학문에 욕심이 있었고 점점 천인성명(天人性命)과 음양이기(陰陽理氣)의 이치 및 학업에 정진하여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배우고자 하니 강론하면서 예학(禮學)에 더욱 힘썼다. 1743년(영조 19) 어사(御使) 창하(蒼霞)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영조에게 그를 추천하였으나 남인들의 반대로 벼슬하지 못하였다. 이후 영조는 다시 그를 특별히 여겨 관직을 내려주길 원했으나 나이를 고려하여 실행하지 못했고 다만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내려주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하였다.

  • 언정(彦精)
    송암(松巖)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24(중종 19) - 1592(선조 25)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연광(金練光)에 대하여

    1524년(중종 19)∼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언정(彦精), 호는 송암(松巖). 영원군수(寧遠郡守) 이상(履祥)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 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5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리·제용감첨정·평양판관 등을 거쳐 부여현감·평창군수가 되었다. 1592년 회양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강원도로 침범하게 되므로 군사와 관리들이 모두 도망치고 말았는데, 홀로 회양성 문앞에 정좌한 채 왜적에게 참살당하였다. 처음에 회양부사로서 왜적의 침범을 당하게 되자, 군사와 무기 등이 없었으므로 대적하기 어려움을 알고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맹세하여 절명시 한 수를 써놓았다. 또, 왜적이 경내에 쳐들어오는 것이 임박하자 조복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왜적이 위협하려고 먼저 손가락을 찍었으나, 분연히 꾸짖으며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뒤에 조정에서는 김연광이 나라를 위하여 죽은 절개를 기리고자 정표(旌表)하게 하였고, 성혼(成渾)과 유성룡(柳成龍) 등이 그 충절을 포증(褒贈)하기를 청하여 예조참판을 증직하였다. 평소 재상 윤두수(尹斗壽)는 사람됨을 경탄하여, 그 어머니를 찾아 절하고 형제의 의를 맺기도 하였다. 개성의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박학하였으며 강직하고 염결(廉潔)한 풍모를 지녔다. 저서로는 《송암유고》 한권이 남아 있다.


  • 구암(龜菴)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7(철종 8)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타종교인
    김연국(金演局)에 대하여

    1857년(철종 8)∼1944년. 상제교(上帝敎)의 교주. 호는 구암(龜菴). 동학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수제자로 손병희(孫秉熙)·손천민(孫天民)과 더불어 ‘삼암(三菴)’의 한 사람이다. 1892년말부터 전개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894년 11월 제2차 동학농민봉기 때에는 동학의 대도소장(大都所長)으로 보은에서 황하일(黃河一)·권병덕(權秉德) 등과 함께 기병하여 북접(北接)에 가담하였으나, 공주에서 패퇴한 뒤 체포되어 종신징역에 처하여졌다. 1905년 일진회의 도움으로 석방된 뒤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를 창건하였다. 1907년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었으나, 손병희와의 불화로 1908년에 탈퇴, 이용구(李容九)가 조직한 시천교(侍天敎)의 대례사(大禮師)가 되었다. 1912년 이용구가 죽은 뒤에는 송병준(宋秉畯)의 조종을 받은 박형채(朴衡采)와 대립하여, 시천교총부(侍天敎總部)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1925년에는 충청남도 계룡산에 들어가, 신도안〔新都內〕에서 새로운 종파를 세워 상제교라 칭하고 그 교주가 되었다. 상제교는 천도교와 교리가 대동소이하며, 교도수는 약 4만∼5만명이었다. 저서로는 《상제교대헌 上帝敎大憲》 등이 전하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연보(金延保)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1010년(현종 1)에 좌사월의랑으로 있을 때 거란과 화호(和好)하기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어 가을철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거란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모두 구속하였다.

  • 서천(瑞千)
    나재(懶齋)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4(고종 11) - 1955()
    본관
    강릉(江陵)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연선(金演善)에 대하여

    1874년(고종 11) 1월 2일∼1955년 1월 14일. 일제강점기 유학자이다. 자는 서천(瑞千), 호는 나재(懶齋), 본관은 강릉(江陵), 출신지는 강원도 동해시(東海市) 송정동(松亭洞)이다. 매월당(梅月堂) 청간공(淸簡公) 김시습(金時習)의 후손이며, 증조는 송계(松溪) 김정한(金正漢), 조부는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 송고(松皐) 김학묵(金學黙), 부친은 연파(蓮坡) 김병해(金秉諧)이다. 외조부는 영일(迎日) 정익남(鄭翼南), 증 참의(贈參議) 최윤붕(崔允鵬)이다. 처부는 남양(南陽) 홍달현(洪達鉉)이다. 나면서부터 순수하고 기골이 범상치 않았다. 5세에 부친을 여의고 유인(孺人) 최씨를 극진히 섬겼다. 어려서부터 소리 내어 글을 읽고, 일실(一室)에 정좌하여, 경적(經籍)을 조용히 잠심하면서 속으로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여 체험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벽소(碧巢) 홍재원(洪在元)의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만재(晩齋) 홍낙섭(洪樂燮), 강암(剛菴) 홍정현(洪政鉉)과는 뜻이 서로 잘 맞아 정의가 돈독하였으며 《주역》, 《중용》과 《대학》을 서로 윤송(輪誦)하며 만년을 보냈다. 그는 유자로써 서양교육을 하는 것을 노자나 불교보다 해악이 더 심할 것이라고 질타하고, 당우삼대(唐虞三代)의 치도(治道)를 강론하였다. 향년 82세에 사망하였다. 자녀는 1남 4녀로 아들은 김영경(金永卿)이다. 묘지는 당지산(唐旨山) 건좌원(乾坐原)이다. 시문집으로 《나재유고(懶齋遺稿)》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연수(金延壽){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1290년(충렬왕 16) 장군으로서 합단(哈丹)의 침입을 보고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1293년에는 원으로부터 서경등처 관수수군만호부 부만호(西京等處管水手軍萬戶府副萬戶)의 직함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상장군·밀직부사·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의 관직을 역임하는 한편, 1296년·1297년·1301년·1303년에 하정사(賀正使) 등의 임무를 띠고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자주 사행하였다. 충선왕의 폐위사건 이후 고려 조정이 충렬·충선의 양대세력으로 갈등하는 상황에서 충선왕의 지지세력이었다. 1305년 충렬왕이 원에 입조하게 되자 함께 종행하여 홍자번(洪子藩) 등과 함께, 국왕 부자를 이간시키려고 하는 한희유(韓希愈)·왕유소(王維紹) 등 충렬왕파의 책동을 분쇄하고 충선왕의 환국운동을 벌였다. 1307년 충렬왕측 인물들이 체포, 처형되고 충선왕이 실권을 장악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어 원나라에 사행하였다.


  • 수당(秀堂)
    시호

    이칭
    판흥(判興)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6(건양 1) - 1979()
    본관
    울산(蔚山)
    분류
    경제/사회 > 실업가
    김연수(金埏洙){2}에 대하여

    1896년(건양 1)∼1979년. 실업가. 본관은 울산. 아명은 판흥(判興), 호는 수당(秀堂). 일제 치하인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여 농장경영을 시작한 이래, 면방직업·제당업·염업 등에 종사해왔다. 전라북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지금의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인촌마을에서 아버지 경중(暻中)과 어머니 장흥고씨(長興高氏) 사이의 십남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다. 위로 네 형과 두 누이가 있었으나 넷째형인 성수(性洙)와 맏누이를 제외하고 모두 어려서 죽었으며, 성수는 큰아버지인 기중(祺中)에게 출계하였다. 15세에 결혼한 박씨부인(朴鳳柱의 딸 夏珍)과의 사이에 상준(相駿)·상협(相浹: 전 국무총리) 등 6남7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고향에서 영신학교를 마쳤다. 그뒤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의 아사부중학교(麻布中學校)와 경도제삼고등학교(京都第三高等學校), 경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4년 삼수사를 설립하여 장성에서 농장경영에 착수한 뒤, 줄포(茁浦)·고창·법성·영광·함평 등지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다. 1931년 삼양사(三養社)라고 개칭하고, 1935년에는 김성수가 중심이 되어 세운 경성방직의 제2대사장에 취임하였다. 삼양사를 모기업으로 하여 염업·제당업·제빙업·방적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실업인이었지만 김성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육영사업에 적극적이었다. 1929년에는 중앙학교(中央學校)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 추가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재건에도 참여, 지금의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로 발전시켰다. 1939년에는 장학재단 양영회(養英會), 1968년에는 수당장학회를 설립하여 활발한 장학활동을 하였다. 1971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다.


  • 동초(東超)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7(융희 1) - 1974()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김연수(金演洙){3}에 대하여

    1907년(융희 1)∼1974년. 민족항일기를 거쳐 최근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 호는 동초(東超).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14세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고흥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상경하여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졸업 후 고향에서 농삿일에 전념하던 중 판소리에 흥미를 느껴 축음기로 7년간 독학하였다. 그뒤 당시 순천군수 집에 머물고 있던 명창 유성준(劉聖俊)으로부터 〈수궁가〉전편을 배웠고,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에게서 〈흥보가〉와 〈심청가〉 전편을, 정정열(丁貞烈)로부터 〈적벽가〉·〈춘향가〉 전편을 배웠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가입하였고, 1937년에는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조선창극좌(朝鮮唱劇座) 대표로 선임되었다. 같은해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판소리 다섯마당 중 중요대목을 30여매의 음반에 담았다. 1940년 조선창극단 설립을 비롯,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 우리국악단을 설립하였으며, 1957년 대한국악원장을 거쳐 1962년 초대국립창극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심청가〉·〈적벽가〉에 뛰어났으며 창극 〈심청가〉의 심봉사역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판소리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지식인으로 판소리 노랫말의 잘못을 고쳐 이면과 표현이 정확하고 격조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판소리 노랫말 정리에 힘썼다. 그리하여 정확한 장단과 주석을 붙인 《창본 춘향가》가 1967년 출판되었고, 죽은 뒤 1974년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김연수창본》이라는 이름으로 〈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 출판되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59년 국악공로상, 1966년 제5회 공보부국악상, 1968년 국악공로상(국무총리상), 1972년 국민포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성순종(成順鍾)·김동준(金東俊)·오정숙(吳貞淑)·박봉선(朴奉仙)·박옥진(朴玉珍) 등이 있으며, 그 중 한농선(韓弄仙)에 의하여 〈수궁가〉와 〈심청가〉가 전해지고, 성창순(成昌順)에 의해 〈심청가〉가 전해지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515(중종 10)
    본관
    안주(安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연수(金延壽){4}에 대하여

    미상∼1515년(중종 10). 자는 이강(而康), 본관은 안주(安州)이다. 증조부는 김명리(金明理)이고, 조부는 김맹헌(金孟獻)이며, 부는 김자정(金自埥)이고 외조부는 김종서(金宗瑞)이다. 1480년(성종 11)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8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83년(성종 14) 계묘(癸卯)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1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매우 청백하고 굳은 절개가 있었다. 성종 때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을 때 강원도도사(都事) 유부(柳溥)와 말다툼을 하였는데 그때 뜻을 굽히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떠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만류하였지만 결국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후에 백성들이 부가 지나는 것을 보고, 말하길 “우리의 태수(太守)를 내치고 어찌 우리를 살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491년(성종 22) 종사관(從事官)을 뽑을 때 후보로 지목되었으나 발탁되지 못하였고, 1492년(성종 23) 병조의 요청으로 무재가 있는 문신으로 겸선전(兼宣傳)을 뽑을 때 역시 후보에 올랐으나 결국 발탁되지 못하였다. 후에 중종 때 내섬시(內贍寺) 등을 거쳐 충청도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 간보(幹甫)

    시호
    대경(戴敬)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96(태조 5) - 1471(성종 2)
    본관
    원주(原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연지(金連枝)에 대하여

    1396년(태조 5)∼1471년(성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간보(幹甫). 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을신(乙辛)이다. 1411년(태종 11)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형조좌랑을 거쳐, 1428년(세종 10)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에 올랐으나, 형옥관리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고신(告身)이 회수되고 귀양을 갔다. 그뒤 관직에 복귀되어 지평을 지내고, 1442년 세종이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시키고자 둔 첨사원(詹事院)의 동첨사(同詹事)가 되어 출납을 주관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조의 관원과 틈이 생겨 부평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그가 극심한 흉년을 만난 백성을 잘 진휼한 공으로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발탁되고, 이어서 상호군(上護軍)에 올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참의를 거쳐 1452년(문종 2)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대사헌·한성부윤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로서 선정을 폈다. 그뒤 대사헌·한성부윤을 재차 역임하고, 1467년(세조 1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근실하여 공무에 충실하였으며, 언행을 함에 있어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시호는 대경(戴敬)이다.

  • 보전(保全)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1132(인종 10) - 1181(명종 11)
    본관
    수주(水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열보(金閱甫)에 대하여

    1132년(인종 10)∼1181년(명종 11).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수주(水州). 자는 보전(保全). 아버지는 상서우복야 단(端)이며, 어머니는 좌사낭중을 지낸 민수(閔修)의 딸이다. 1145년(인종 23) 문음으로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이 된 뒤 임피현위를 거쳐 내궁전고(內弓箭庫)와 경령전의 판관을 지냈다.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일어나자 1175년 행영병마녹사(行營兵馬錄事)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예빈시(禮賓寺)와 위위시(衛尉寺)의 주부, 장작승(將作丞)을 거쳐 시각문지후(試閣門祗候)·전주목판관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육예(六藝)와 경전에 모두 통달하였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그의 묘지명이 전한다.

  • 회이(晦而)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8(선조 11) - ?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엽(金曄)에 대하여

    1578년(선조 11)∼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이(晦而). 아버지는 행 거창현감(行居昌縣監) 통정대부(通政大夫) 김계종(金繼宗)이다.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 38위 합격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735(성덕왕 34)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영(金榮){1}에 대하여

    미상∼735년(성덕왕 34). 신라 성덕왕 때 사신. 735년 2월 김의충(金義忠)의 하정부사(賀正副使)로서 당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그에게 광록소경(光祿少卿)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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