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영(金穎){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학자. 관등은 급찬(級飡). 창부시랑(倉部侍郞)으로 있던 897년경에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갔다. 이때 최언위(崔彦撝) 등 유학생 8인을 데리고 갔으며, 10년 기한이 다 된 학생 김의선(金義先)·최광우(崔匡祐) 등 4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도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음을 그의 관직이 조청랑 수정변부사마 사비어대(朝淸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인 데서 알 수 있는바, 이는 당나라의 관직이기 때문이다. 그뒤 수금성군태수(守錦城郡太守)를 지냈으며, 장흥의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명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銘〉 및 제천의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명 月光寺圓郞禪師大寶禪光塔碑銘〉은 모두 왕명을 받들어 그가 지은 것이다. 운봉의 〈심원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深源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의 비문도 그가 지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영지(英之)
    삼당(三塘)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75(성종 6) - 1528(중종 23)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金瑛){3}에 대하여

    1475년(성종 6)∼1528년(중종 23). 조선 중종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장령 영수(英銖)의 아들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에는 대교에 올라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樑) 등과 더불어 사신의 정도를 내세우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빚어졌던 무오사화의 피화인(被禍人)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그뒤 수찬·정언·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 청요직을 지냈으며, 1518년(중종 13)에는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었다가 곧 김제군수로 외직에 나갔다. 1522년에는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527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곧 개체되었다. 조광조 등 중종 때의 사림파와 언로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등 정치적 성격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문집으로 《삼당집》이 있다.

  • 자심(子尋)
    죽교(竹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02(선조 35) - 1674(현종 15)
    본관
    예안(禮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金詠){4}에 대하여

    1602년(선조 35)∼1674년(현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자심(子尋), 호는 죽교(竹橋). 할아버지는 목사 현도(玄度)이며, 아버지는 예조정랑 정후(淨厚)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올라 1651년(효종 2)에 사옹원참봉이 되고,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으로 옮겼다. 평소 정직한 발언과 높은 지기(志氣)로 인해 이경석(李景奭)과 김육(金堉) 등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높은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영(金泳){5}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정조 때의 역관(曆官). 천문관측기기의 제작기술이 뛰어나고 역산(曆算)에 밝았다. 그는 1789년(정조 13)에 그 당시 사용하고 있던 각 절기의 중성(中星)위치가 1744년(영조 20)에 측정된 값으로서 0.5° 정도 어긋나 있으므로, 이를 보정하기 위하여 역관 이덕성(李德星)과 함께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와 지평일구(地平日晷)를 제작하였다. 또한, 《신법중성기 新法中星紀》와 《신법누주통의 新法漏籌通義》 등을 편찬하였으며, 성주덕(成周悳)과 함께 《국조역상고 國朝曆象考》 4권을 엮어내었다.

  • 성원(聲遠)
    춘방(春舫)
    시호

    이칭
    종대(鍾大)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7(헌종 3) - ?
    본관
    분성(盆城)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영(金瑛){6}에 대하여

    1837년(헌종 3)∼미상. 조선 말기의 화가. 본관은 분성(盆城). 초명은 종대(鍾大), 자는 성원(聲遠), 호는 춘방(春舫). 산수화와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생애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존하는 유작들을 보면 문기(文氣)어린 격조보다는 정형화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충실히 따랐던 듯하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십곡병풍 山水十曲屛風〉도 명대오파(明代吳派)이래의 전형적인 남종화풍을 성실히 모작(模作)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화풍은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장승업(張承業)과 안건영(安健榮)의 화풍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그뒤의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 등으로 이어졌다. 유작으로 〈우후산수도 雨後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 연지(挻之)
    남강(南岡)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468(세조 14) - 1534(중종 29)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간(金永幹)에 대하여

    1468년(세조 14)∼1534년(중종 2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연지(挻之)이고, 호는 남강(南岡)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운백(金雲百)이다. 어머니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경주이씨(慶州李氏) 이문형(李文炯)의 딸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6년(연산군 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지낸 뒤 은거하였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 뒤에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제수(除授)되었고, 이후 평해군수(平海郡守)·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호조참의(戶曹參議) 등을 지냈다. 1515년(중종 10)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 된 후 전라남도 장흥(長興) 벽사(碧沙)에 유배되었다. 이후 장흥읍 건산리에 낙육재(樂育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남강유집(南岡遺集)》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견(金永堅)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증호조판서 진손(震孫)의 아들이며, 대사헌 영정(永貞)의 형이다. 1454년(단종 2) 수의(修義)로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고, 1457년(세조 3) 대교(待敎)로서 문과중시에 정과에 다시 급제하였다. 1455년 기사관 행예문관검열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세조 즉위시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전통례원상례(前通禮院相禮)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여러 읍의 실농(失農)을 살펴 흉년을 구제하고 도둑들의 유무와 농민들의 질병을 보살폈다. 또, 경차관으로 나아가 농민 가운데 배고파 죽는 자, 종기가 난 자, 떠돌아다니는 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수령을 죄줄 것을 청하였다. 같은해 사간이 되었고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 향표리 1습이 하사되었다. 1472∼1473년 사간·시강관을 역임하고 이듬해 우부승지가 되어 여러 역사서들을 인쇄, 반포하라는 명을 받았다. 1475년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어머니의 병으로 사직할 뜻을 아뢰었으나 도리어 계급이 승진되어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478년 행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전(箋)을 받들어 북경(北京)에 가서 천추절을 축하하고 왔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고(金永固)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 증조부는 평장사를 지낸 양신공(良愼公) 의진(義珍)이며, 평장사 인경(仁鏡)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흥교도관역사(興郊道館驛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크게 얻었다. 1173년(명종 3)에 구주에서 재임중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영주(寧州)옥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흥교의 이민(吏民)들이 처치사(處置使)에게 애원하여 처형을 면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뒤, 친분이 있던 승선 이준의(李俊儀)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며, 그뒤에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祗候)에까지 이르렀다.



  • 시호

    이칭
    김삼현(金三鉉)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9() - 1974()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영곤(金映坤)에 대하여

    1919년∼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본명은 삼현(三鉉).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6·25사변 때 월남하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본동에서 살았다. 1933년에 북청 양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에 북청농업학교를 수료하였다. 16세 때 함경남도 안곡에서 2년 동안 장문진(張文鎭)으로부터 퉁소를 배웠으며, 25세 때부터 〈북청사자놀음〉에서 퉁소를 배웠다. 월남 후에는 재경 북청사자놀음 회원이 되어 제1회 전국민속경연대회 때부터 출연하였고, 1965년에 전국예술민속경연대회에서 개인상을 받았다. 1973년 11월에 〈북청사자놀음〉 칼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후계자로는 한광희(韓光熙)·최홍길(崔洪吉)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영공(金永恭)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진골귀족·정치가. 민애왕의 장인. 관등은 각간(角干)이다. 821년(헌덕왕 13) 시중이었던 충공(忠恭)이 죽자 그뒤를 이어 시중이 되었다가 827년(흥덕왕 2) 8월에 천변재이를 이유로 시중직을 물러났다. 딸은 민애왕의 비 윤용왕후(允容王后)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강릉(江陵)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관(金永寬)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강릉. 신라의 종실인 각간(角干) 주원(周元)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시중(侍中)을 지낸 인존(仁存)이다. 영석(永錫)·영윤(永胤)과 함께 삼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1134년(인종 12) 원외랑(員外郞)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4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박언유(朴彦猷) 등을 뽑았으며, 1147년(의종 1) 이부상서추밀원사(吏部尙書樞密院使)가 되었고, 이듬해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김자의(金子儀)와 함께 진사 이유창(李愈昌) 등을 뽑았다. 이듬해 지문하성사 판공부사(知門下省事判工部事)에 이어, 참지정사 판공부사(參知政事判工部事)를 지냈으며, 1149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판리부사(判吏部事)에 이어, 감수국사 지서경유수사(監修國史知西京留守事)가 되었다. 1151년 수사도 판국자감사(守司徒判國子監事)에 올랐다.

  • 치화(穉華)
    청연(淸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5(순조 5) - 1885(고종 22)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근(金英根)에 대하여

    1805년(순조 5)∼1885년(고종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화(穉華), 호는 청연(淸淵). 증조부는 승지(承旨) 김문행(金文行)이고, 조부는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이탁(金履鐸)이며, 부친은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낸 김면순(金勉淳)이다. 어머니는 이희갑(李羲甲)의 딸이고, 부인은 의령남씨(宜寧南氏)로 군수(郡守) 남준성(南駿聲)의 딸이다. 1835년(헌종 1) 을미증광문과(乙未增廣文科)에 병과(丙科) 7등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에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 되었고, 1845년(헌종 11)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1848년(헌종 14)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등을 거쳐 다음해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묘는 남양주 가운동에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근(金泳根){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1852년(철종 3) 황주목사(黃州牧使)·승정원동부승지·규장각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연안부(延安府)에 있는 남지(南池)의 바닥을 깨끗이 쳐낸 공로로 품계가 올랐다. 1856년 강화부유수로 있으면서 장녕전(長寧殿)의 개수를 감독한 공로로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고, 1858년 공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 남전(南殿)을 증건한 공로로 가자되었다. 1859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있을 때 인릉(仁陵)을 보수한 공으로 이듬해 가자되었으며, 1861년 수원유수를 지냈다.


  • 경회(景晦)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5(고종 2) - 1934()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영근(金永根){2}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34년. 한학자·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경회(景晦). 전라남도 강진 출생. 통정대부 일엽(日曄)의 아들이다. 14세에 이르면서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김한섭(金漢燮)을 사사하였다. 김한섭은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와 교유한 석학이었다. 18세 때 최익현(崔益鉉)·홍재학(洪在鶴)과 함께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인 김평묵을 사사하였다. 김평묵은 1881년(고종 18) 영남유생들의 척사위정소(斥邪衛正疏)와 관련하여 나주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는데, 김영근은 여기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척사위정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그의 학문적 배경은 이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세상을 살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강한 저항의식이 담긴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시문집은 6·25 때 망실해버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산고를 모아놓은 〈경회유고 景晦遺稿〉가 있을 뿐이다. 이 유고에 〈억이충무공 憶李忠武公〉·〈보검편 寶劍篇〉·〈맹호사 猛虎詞〉·〈타맥행 打麥行〉·〈도달가 忉怛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망국의 울분과 저항으로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개화파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89(진성여왕 3)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영기(金令奇){1}에 대하여

    미상∼889년(진성여왕 3). 신라 진성여왕 때 정치가. 관등은 나마(奈麻)였다. 889년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사벌성(沙伐城)에 웅거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이를 쳐부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반란군의 세력을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 1052(문종 6)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기(金令器){2}에 대하여

    미상∼1052년(문종 6). 고려시대의 문신. 1025년(현종 16) 감찰어사를 거쳐 1034년(정종 즉위)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해 내사사인(內史舍人), 1036년 좌간의(左諫議)가 되었다. 1043년 병부상서에 오르고, 이듬해 동북로병마사 참지정사(東北路兵馬使參知政事)가 되어 왕총지(王寵之)와 함께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및 원흥진(元興鎭: 지금의 함경남도 定平)에 성을 쌓고 돌아와 축성시의 공로자와 그때 방비를 담당한 김원정(金元鼎)을 포상하도록 하였다. 1047년(문종 1)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 수경(樹卿)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59(철종 10) - 1910(융희 4)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덕(金永悳)에 대하여

    1859년(철종 10)∼1910년. 조선 말기의 문신·의사(義士). 자는 수경(樹卿). 서울 출신. 1877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주목사·동래부사·이조참의·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시강원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관제개혁 이후에는 탁지부협판·궁내부특진관, 경기도·충청남도·경상남도·강원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되자 자결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안도 몰락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48(충목왕 4)
    본관
    안동(安東)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영돈(金永旽)에 대하여

    미상∼1348년(충목왕 4).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가 되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 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조적(曺頔)의 난 때 시종한 공로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6년(충목왕 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폐정을 시정하던 도중, 불법행위를 하던 기삼만(奇三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 영랑(永郞)
    시호

    이칭
    김윤식(金允植)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3(광무 7) - 1950()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학 > 시/시조인
    김영랑(金永郞)에 대하여

    1903년∼1950년. 시인. 본관은 김해. 본명은 윤식(允植).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 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 학력·경력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종호(鍾湖)이며, 어머니는 김경무(金敬武)이다. 5남매 중 장남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李承萬)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 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하였다. 2. 시작활동과 시적 세계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죽었다.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 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문학》·《여성》·《문장》·《조광 朝光》·《인문평론 人文評論》·《백민 白民》·《조선일보》 등에 80여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逆情)·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독(毒)을 차고〉·〈망각 忘却〉·〈묘비명 墓碑銘〉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이다. 3. 주요저서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8월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직할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최근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 맹암(孟巖)
    시호
    양효(良孝)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04(태종 4)
    본관
    의성(義城)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영렬(金英烈)에 대하여

    미상∼1404년(태종 4).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의성. 호는 맹암(孟巖). 1394년에 전서(典書)로 있던 중 그해 경기우도수군첨절제사가 되었다. 그때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1395년에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해 1397년 파직이 되어 옹진(甕津)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에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에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작되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