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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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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인수(仁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로(金榮老)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세조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인수(仁叟). 직장(直長) 첨언(添彦)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향리인 함경도 영흥에서 이름이 높아 1455년(세조 1)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영흥에 있는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을 제수받았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67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함경도일대가 이에 호응하였는데, 영흥에서도 난민(亂民)이 영흥부사 김을손(金乙孫)을 포위, 살해하려는 등 소요를 일으켰다. 그때 거짓으로 난민과 합세하는 척하면서 김을손을 숨겨 도망치게 하여, 이 공로로 난이 진압된 뒤 도총사(都摠使)인 구성군(龜城君) 준(浚)의 천거를 받아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가자(加資)되었으며, 거산찰방(居山察訪)에 보임되었다. 그뒤 수성찰방(輸城察訪)·고산찰방(高山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며, 1469년(성종 1) 향리인 영흥이 부(府)에서 강등되어 도호부(都護府)가 되고, 함흥군이 부로 승격, 계수관(界首官)이 되는 행정상의 통속관계가 뒤바뀌게 되자, 영흥은 태조가 탄생한 곳이라는 점을 들어 상언(上言)하여 영흥부를 그대로 존속하게 하였다. 숙종조에 남구만(南九萬)이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공훈을 추계하여 예조정랑에 추증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리(金永利)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1347년(충목왕 3) 2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면서 각 도 및 강릉·평양 등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측량하고 폐정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이원구(李元具)와 함께 전라도에 파견되어 안렴(按廉)·존무사(存撫使)를 겸했다. 당시는 전정(田政)이 극도로 문란하였으므로 이러한 조처에 대해 불평하는 무리도 많았다. 1354년(공민왕 3) 4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다.

  • 주경(周卿)
    단계(丹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분성(盆城)
    분류
    문학 > 문필가
    김영면(金永冕)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주경(周卿), 호는 단계(丹溪). 정조 연간에 활동하였다. 시(詩)·서(書)·화(畵)·금(琴)에 모두 뛰어나 사절(四絶)로 일컬어졌던 위항문인(委巷文人)으로 30세에 요절하였다. 조희룡(趙熙龍)은 그를 가리켜 “얼굴 모습은 부인과 같고 숨을 내쉬면 난초의 향기와 같다.”, “하늘이 재주를 주는 것은 풍부히 했으나 수명을 주는 것은 인색했다.”고 말했다. 유작으로는 개인소장의 〈행려도 行旅圖〉와 〈강촌추사도 江村秋事圖〉 등이 전하는데, 짧은 필치와 선염(渲染)이 혼용된 남종화법(南宗畵法)으로 다루어져 있으며, 이유신(李維臣)의 화풍과 유사하다. 《풍요삼선 風謠三選》에 그의 시가 실려 있다.

  • 청우(淸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5(헌종 1) - 1910(융희 4)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목(金永穆)에 대하여

    1835년(헌종 1)∼1910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청우(淸友). 아버지는 증현(曾鉉)이며, 주현(周鉉)에게 입양되었다.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김명진(金明鎭)과 같이 1870년(고종 7) 경과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2년 홍문관부수찬으로 관직에 올라 1876년에 우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12월에 대사성이 되었다. 1885년에는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그해 4월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889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가 1891년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1896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이듬해에는 비서원경(祕書院卿)에 올랐으며 그해 10월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898년에는 홍문관학사를 겸임하고, 그해 11월에는 궁내부특진관에 칙임관 3등으로 올랐으며 홍릉제조(洪陵提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전주 오목대비문(梧木臺碑文) 서사관(書寫官), 인조대왕옥책문(仁祖大王玉册文)의 악장문제술관(樂章文製述官)이 되었다. 1900년부터 2년 동안은 산릉도감(山陵都監) 및 천릉도감(遷陵都監)을 지냈으며, 1902년 9월에는 칙임관 2등에 올랐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6(고종 23) - 1943()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영배(金永培)에 대하여

    1886년(고종 23)∼1943년. 총독부 관리. 경상북도 문경 출신. 1907년에 경달학교(慶達學校)를 졸업하고 봉양학교(鳳陽學校)·연명학교(延明學校)교사를 지냈다. 그뒤 군서기가 되어 충청북도 청봉군 재무과·서무과 등에서 일하다가 1916년 6월 부서기, 같은해 11월 도서기가 되었다. 1920년 도경부(道警部)가 되어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에서 근무하던 중, 능력을 인정받아 1923년 경시로 보직되는 경무과장을 맡았다. 1925년에 경시로 승진하여 경상북도경찰부 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10월 평안북도 운산군수로 전출한 뒤 박천·강계·용천 등 각 군 군수를 거쳤다. 1939년에 황해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어 미곡통제조합연합회장·도농회장·방공위원 등을 겸직하였다. 1941년 충청북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1942년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고, 1943년부터 광주사상범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을 맡았다. 1943년 10월 전라남도 참여관에서 물러나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으나, 11월에 종4위 훈4등으로 죽었다.


  • 소암(蘇巖)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0(광무 4) - 1962()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극작가
    김영보(金泳俌)에 대하여

    1900년∼1962년. 극작가·언론인. 호는 소암(蘇巖). 개성 출신. 1912년 3월에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초등과를 졸업하고, 곧 중등과와 고등과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웠다. 한영서원 고등과 시절에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1921년 2월부터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이기세(李基世)가 주도한 극단 예술협회(藝術協會)와 관련을 맺게 되었고, 이것이 희곡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술협회의 요청으로 〈정치삼매 情痴三昧〉·〈시인의 가정〉 등을 썼고, 계속해서 〈나의 세계로〉·〈연(戀)의 물결〉·〈구리십자가〉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이 5편을 묶어서 우리나라의 첫 희곡집인 《황야에서》를 발간하였다. 그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면서 불교조선협회 주사 겸 여자동포원 주간으로 일했다. 1925년 고한승(高漢承)·김영팔(金永八)·이경손(李慶孫)·안석주(安碩柱) 등과 극문회(劇文會)라는 연극연구단체를 창립했으나, 이 단체가 흐지부지됨으로써 그는 언론계로 옮겼다. 1927년 경성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했고, 매일신보의 통신부장·오사카지사장 및 경북지사장 등으로 일했다. 광복 이후에는 대구 영남일보 초대편집국장에 이어 사장을 10여년간 역임했다. 주로 언론인으로서 활약했으나, 그의 5편의 희곡은 우리나라 근대희곡작가가 추구한 두가지 테마 중 하나인 전통인습 타파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작품내적인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도덕관을 제시하였으나, 작품내용은 통속극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1096(숙종 1) - 1172(영종 2)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부(金永夫)에 대하여

    1096년(숙종 1)∼1172년(영종 2). 고려 중기의 문신. 1148년(의종 2) 이식(李軾)과 함께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서 책봉을 사례하였다. 1151년에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재상 최유청(崔惟淸)·문공원(文公元) 등과 함께 의종의 아우인 대녕후 경(大寧侯暻)과 태후(太后)의 매서(妹婿)인 내시낭중(內侍郞中) 정서(鄭敍)가 서로 결탁하여 연락유희(宴樂遊戱)한다고 탄핵하였다. 대녕후 경은 인종의 둘째아들로서 도량이 있어 중심(衆心)을 얻었으므로 당시 일부에서는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었다. 환자(宦者) 정함(鄭諴)과 간신(諫臣) 김존중(金存中)은 대녕후와 친한 정서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대녕후와 정서를 모함했던 것인데, 재상 최유청, 간관 김영부 등이 이 모함을 그대로 탄핵하여 결국 정서는 동래로 귀양가고 대녕후는 파하게 되었다. 1157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1160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지심(李知深)과 함께 최효저(崔孝著) 등 진사 33인과 명경(明經) 3인을 뽑았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다시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1164년 중서시랑(中書侍郞)·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가 되었다.



  • 시호

    이칭
    김광오(金光五)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9(고종 26) - 195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서(金永西)에 대하여

    1889년∼1959년. 독립운동가. 일명 광오(光五). 경기도 안성 출신. 1919년 4월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외가천리에 있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명의 만세시위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을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고,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밤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해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오후 10시경 재차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때 돌과 짚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이유석·남현서·조경수·김봉현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등 다른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를 방화하였다. 이처럼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1079(문종 33) - 1167(의종 21)
    본관
    강릉(江陵)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석(金永錫)에 대하여

    1079년(문종 33)∼1167년(의종 21).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문하시중 인존(仁存)의 아들이다. 예종 때 음보로 양온서승동정(良醞署丞同正)이 되었고,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첨사부주부(詹事府注簿)를 거쳐 인종초 합문지후(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33년(인종 11) 낭중(郞中)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148년(의종 2)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가 되었고, 이듬해 삼사사(三司使)가 되었으며 1151년 정당문학(政堂文學), 그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153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유석(劉錫)과 함께 곽원(郭元) 등 진사 30인과 명경(明經) 3인을 뽑았다. 1154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했다.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를 세번, 북로원수(北路元帥)를 한번 역임하면서 잘 다스려 신망을 얻었으며, 일찍이 송나라와 신라의 의서(醫書)에서 기이하고 중요한 것을 뽑아 손수 편찬한 《제중입효방 濟衆立과方》이 전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8() - 1986()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영선(金永善)에 대하여

    1918년∼1986년. 정치인. 충청남도 보령 출생.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1944년 전라남도 진도군수로 부임한 뒤 전라남도 수산과장으로 재직중 8·15광복을 맞았다. 1948년 상공회의소 전문위원을 거쳐 1950년 5월 제2대국회의원으로 보령에서 당선되었으며, 제3·5대에도 국회의원으로 계속 당선되어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민주당(民主黨) 소속 경제통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58년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2년간 경제논설을 집필하였다. 또, 이때 경제정책의 청사진을 마련하려고 흥한경제연구소(興韓經濟硏究所)를 세워 경제부흥의 대비책을 연구하였다. 4·19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하자 장면(張勉) 내각의 재무부장관으로 입각하여 경제발전5개년계획을 세워 추진하던 중, 이듬해 1961년 5·16으로 좌절되었다. 한때 투옥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박정희(朴正熙) 정부에 발탁되어 1970년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을 거쳐 그해부터 1973년까지 국토통일원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주일대사로 외교일선에 나서서 5여년간 활약하였다. 1979년 5월 제12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이듬해 9월까지 경제계의 발전적 단합에 내실을 거두었다. 서독 성수공로훈장(星綬功勞勳章)을 받았다.


  • 탁오실(濯悟室)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8(고종 25) - 1950()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독교인
    김영섭(金永燮)에 대하여

    1888년(고종 25)∼1950년. 기독교 감리교 목사. 호는 탁오실(濯悟室). 경기도 강화 출신. 한성육군무관학교(漢城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여 무관이 되려고 하였으나, 을사조약으로 폐교되자 강화 사립 보창학교(普昌學校)사범과에 입학하였다. 그뒤 연안의 사립 봉남학교(鳳南學校)에 재직중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한 뒤 인천 지방에서 전도사로 잠시 활동하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귀국하여 인천내리교회의 부목사로 일하면서 북경의 감리교 동아총회, 미국 아이오와주의 미국감리교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 동부의 하트포드(Hartford)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미국감리교 뉴욕동부연회의 감독 니콜슨(Nicolson, B.)에게서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한인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귀국 후 서울 중앙감리교회·정동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자금을 둘러싼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잠시 하와이주재 총영사를 지내다가 다시 서울 중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7(고종 4) - 195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영성(金永聲)에 대하여

    1867년(고종 4)∼1959년. 한말의 의병장. 전라남도 흥양 출신. 1909년 3월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 휘하에 3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3월부터 5월 사이에 흥양군 대강면·남양면·남면·서면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4월에는 사창호곡(社倉毫谷)에서, 8월에는 과역(過驛)에서, 12월에는 유둔만(油屯萬)에서, 1910년초에는 돌산(突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돌산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1910년 1월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12년 12월에 7년으로 감형되었고, 1914년 5월 칙령으로 5년8개월의 징역이 확정되어 석방되었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나주(羅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손(金永孫)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나주(羅州). 1472년(성종 3) 도형으로 1년 동안 정역(定役)하다가 풀려났고, 1490년(성종 21) 직첩(職牒)을 환급(還給) 받았다. 벼슬은 정로위(定虜衛)에 이르렀다. 아들 김득문(金得文)이 있다.

  • 적옹(積翁)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46(세종 28) - 1502(연산군 8)
    본관
    안동(安東)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영수(金永銖){1}에 대하여

    1446년(세종 28)∼1502년(연산군 8).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적옹(積翁). 아버지는 한성판관 계권(係權)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숙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성품이 민첩하고 사무에 숙달되어 옥사를 잘 다스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나서 사헌감찰에 제수되고 상주판관이 되었다. 또,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도감랑(都監郞)이 되어 잘 접대하여 명예를 드날리고 의금부·경력·도총부사·중추원도사가 되었다. 이어 영덕현령으로 나아가 벽지와 해지(海地)의 수령들이 부지런히 다스리지 않자 이를 징계하고 엄징하게 하여 기민을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였다. 이어 선공첨정·장령·상의원옹·통례원봉례를 거쳐 영천군수·금교도찰방에 임명되었다. 사어위기음률(射御圍棋音律)을 잘하였고, 팽임공장(烹飪工匠)이 되어 음식을 삶는 일에 종사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 복여(福汝)
    하정(荷亭)
    시호
    문헌(文獻)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29(순조 29) - 1899(광무 3)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수(金永壽){2}에 대하여

    1829년(순조 29)∼1899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복여(福汝), 호는 하정(荷亭). 우현(宇鉉)의 아들이다. 1870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76년 성균관대사성, 1878년 이조참의, 1879년 강화부유수, 1881년 이조참판을 거쳐, 1882년 예조판서·경상도관찰사, 1883년 평안도관찰사, 1884년 호조판서를 역임하였고, 그뒤 1890년까지 예조·이조·호조·병조·공조의 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1891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892년 홍문관대제학, 1895년 궁내부특진관, 1896년 의정부찬정, 1897년 장례원경(掌禮院卿)·홍문관대학사, 1898년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 등을 지냈다. 특히 문재에 뛰어나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1() - 197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극작가
    김영수(金永壽){3}에 대하여

    1911년∼1977년. 극작가. 서울 출신.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을 수료한 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광범한 독서와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관람으로 문학과 연극에 눈뜨게 되었다. 대학 재학중인 1934년에 단막극 〈광풍 狂風〉과 〈동맥 動脈〉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었다. 대학을 수료한 뒤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창립동인으로 활약했고, 귀국 후엔 문학수업에 전념하여 1938년에는 단편소설 〈용녀 龍女〉(뒤에 素服으로 개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으며, 신문이 폐간되자 동양극장(東洋劇場)전속극작가가 되어 신파극본을 쓰면서 소설도 발표했다. 민족항일기 말엽에는 생활을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 선전부장, 유한양행 사원 등으로 근무했다. 광복을 맞아 어린이신문사 주간을 맡았고, 또 라디오드라마도 쓰기 시작했으며, 상업극단들과 연결을 맺고 대중적 작품을 많이 썼다. 1947년 10월에는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하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전속작가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연 6, 7편의 장막극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6·25남침 중에도 피난지에서 작품을 발표하다가 195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나와(冲繩)의 유엔군방송국에서 8년간 근무하는 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했다. 1960년에 귀국하여 방송드라마를 썼다. 그는 극작가·소설가·방송작가로 변신한 대중작가로서, 희곡·소설·방송극을 각각 20여편이나 남겼다. 작품세계는 비극적 세태를 사실적 기법으로 대담하게 묘파한 것이 특징이다. 즉, 민족항일기에는 일본 통치가 빚은 우리 민족의 궁핍을 묘사했고, 광복 직후에는 식민지가 남긴 유산과 그 후유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희곡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 계열이며, 후기에는 낭만주의적 색채도 띠었다. 특히, 그는 쓰키지소극장에서 관람한 하우프트만이나 고리키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데다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민족의 궁핍화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로 하여금 우리나라 근대연극사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환경극작가(環境劇作家)가 되게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혈맥 血脈〉·〈단층 斷層〉·〈돼지〉와 소설 〈파도〉등이 있다.


  • 백주(白舟)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6(고종 23) - 1952()
    본관
    광산(光山)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숙(金永肅)에 대하여

    1886년(고종 23)∼1952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 호는 백주(白舟). 충청남도 결성군(지금의 홍성군) 출신. 191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잠시 서울 승동소학교(勝洞小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같은해 8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종교의 윤세복(尹世復)이 경영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 화룡현삼도구(和龍縣三道溝)의 청일학교(靑一學校), 동녕현(東寧縣)의 송화학교(松花學校), 영안현(寧安縣)의 여명학교(黎明學校) 등에서 10여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한편, 1914년 10월 윤세복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 다음해 2월 대종교 총본사(總本司)의 학리부장(學理部長) 및 서무부장에 취임하면서, 시교사(施敎師)가 되었으며 이어 지교(知敎)·상교(尙敎)·정교(正敎)를 거쳐 대형(大兄)이 되었다. 계속하여 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4년에 김서종(金書鍾) 등과 함께 하얼빈에 포교기관인 선도회(宣道會)를 조직하여 대종교 포교에 앞장섰으며, 1939년에는 안희제(安熙濟)·강철구(姜銕求) 등과 협조하여 대종교서적간행회를 조직, 다음해에는 《종문지남 倧門指南》 등을 번역, 발행하였다. 1942년 발해의 고도(古都)인 목단강성(牧丹江省)의 동경성(東京城)에 천전(天殿)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11월 만주경찰에 잡혀, 교주 윤세복 등 15명과 같이 목단강고등검찰청에서 19개월의 예심 끝에 1944년 2월 구속기소되어 목단강고등법원에서 1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광복 뒤 석방되어 윤세복과 함께 영안현에 대종교 총본사를 재건하였다. 귀국 후에는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를 조직, 활약하다가 6·25남침으로 남하하여 대구에서 죽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군실(君實)
    석릉(石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98(정조 22) - ?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순(金英淳)에 대하여

    1798년(정조 2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군실(君實), 호는 석릉(石陵). 아버지는 우의정 이교(履喬)이다. 1825년(순조 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한때는 함경도위유어사(咸鏡道慰諭御使)로 뽑혀 수재(水災)로 고생하는 그곳 주민을 구제하고 위로하였다. 1830년에는 통정대부에 오르고, 1837년(헌종 3)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에는 이조참의로 옮겼다. 1839년에는 충청도감사가 되었으며, 5년 뒤에 이조참판이 되면서 순조롭게 승진하여 대사헌을 지낸 다음, 1847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약(金永若)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 인종 때 우사간(右司諫)을 지냈다. 1141년(인종 19) 금나라가 황통(皇統)이라 개원(改元)한 것을 전해오자 예부시랑 권적(權適)과 함께 하례하려고 금나라 국경에 이르렀으나, 금나라에서는 농사철에 방해가 된다고 하며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9월에 다시 권적과 함께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 태진(泰進)
    임당정(林塘亭)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5(고종 12) - 1957()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영우(金永宇)에 대하여

    1875년(고종 12) 11월 18일∼1957년 8월 19일.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태진(泰進)이고, 호는 임당정(林塘亭)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부는 김기린(金箕麟)이고, 조부는 김재명(金在鳴)이며, 아버지는 김석현(金碩鉉)이다. 외조부는 이숙범(李淑範)이고, 처부는 조봉규(趙鳳奎)·권상만(權相萬)이다. 만년에 정자를 지어 완석(浣西) 이동석(李東錫)으로부터 ‘임당(林塘)’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이후 중헌(重軒) 김재수(金在洙), 가헌(可軒) 이태진(李台鎭) 등과 이곳에서 교유하였다.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신안면(新安面) 지마현(止馬縣)에 있다. 그의 문집으로 《임당정유록(林塘亭遺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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