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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태종 18)∼1494년(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택부(澤夫).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김점(金漸)의 손서(孫婿)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사선주부(司膳注簿)로 재직중에 진하사검찰관(進賀使檢察官) 유자문(柳子文)이 경천참(敬天站)에서 병으로 죽자, 감찰이 되어 그의 후임으로 연경을 다녀왔다. 이듬해 우정언이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판관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곧이어 가자되고, 1457년(세조 3) 평양소윤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자산(慈山)사람 임유기(任有紀) 등의 무고로 의금부에 압송중인 자산읍 수령을 전송하며 위로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성균관사예에 복직되었다. 1465년 승문원판사로서 경차관의 임무를 띠고, 황해도에 파견되어 포로된 적을 치죄하였다. 1466년 성균관대사성·호조참의를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황해도관찰사·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3년(성종 4) 예조참판으로서 성종의 생부의 것인 의경왕묘(懿敬王廟)의 조성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 겸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왜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476년 공조참판으로 사은사 판중추부사 박중선(朴仲善)의 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헌·예조참판·전라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개성유수로 파견된 뒤 2년간에 걸쳐 개성부의 유학(儒學)을 크게 진흥시켰다. 1487년 70세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오히려 형조참판에 중용되었다. 1490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자(陞資)하면서 행첨지중추부사에 개수(改授), 이후 수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순근(醇謹)하고 부지런하면서도 공평한 직무수행으로 칭송이 있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미상∼684년(신문왕 4). 신라 신문왕 때의 무관. 김유신의 동생인 흠춘(欽春)의 손자이며,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釜山)에 안치된 고구려 유민들이 684년 신라에 항거하여 봉기하자, 이를 평정하는 전투에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고구려 유민들이 진영을 갖추고 신라군에 대항하고 있음을 보고, 신라군중에서는 궁지에 몰린 적을 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물러나 적이 피로해진 뒤에 공격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 의견에 따라 함께 출전한 다른 장수들은 잠시 물러났으나, 홀로 그 의견에 반대하고 군인은 전투에 임하여 용맹해야 하며 진격만이 있을 뿐 후퇴가 있을 수 없다 하여, 휘하의 부대만으로 나아가 분투하다 전사하였다. 신라의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며, 그의 선조는 금관가야 왕족으로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해와서 진골로 편입되었다. 또, 고조부인 무력(武力) 때부터 대대로 무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쳐오고 있었다. 무력은 백제의 성왕을 전사시키고 백제의 대군을 전멸시켜 대승리를 거둔 554년(진흥왕 15)의 전투 등에서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증조부 서현(舒玄)도 진평왕 때에 대장군으로 활약하였다. 할아버지 흠춘은 그의 형 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전쟁에서 중심적인 구실을 한 인물로서, 문무왕은 김유신·김흠춘·김인문 세 사람을 나라의 보배라고까지 말하였다. 이같이 집안은 무인으로서의 정신을 목숨보다도 중하게 여기는 가통(家統)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반굴은 660년에 백제 장군 계백의 군대와 전투할 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라.”는 아버지 흠춘의 명을 받고 즉시 적진으로 돌격하여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신라군의 투지를 북돋우고 산화한 인물이었다. 당숙(堂叔)이자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元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도 살아돌아왔을 때, 김유신은 왕에게 “원술이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훈을 저버렸으므로 참형(斬刑)에 처해야겠읍니다.”라고 하였으나, 문무왕이 “원술은 비장(裨將)인데 혼자에게만 무거운 벌을 내림은 불가하다.”고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원술을 끝내 용서하지 않았고, 원술의 어머니도 김유신이 죽고 나서까지 “원술은 이미 선친에게 아들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머니가 되겠느냐?” 하며 그를 만나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무인정신을 목숨보다도 중하게 여기는 가통 속에서 자라 명예와 절개로써 자부심을 삼았다고 한다. 684년의 전투에 출전할 때,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번의 출정에 종족과 붕우들로 하여금 오명을 듣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은 가통에 따른 그의 단호한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가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당시 신라 귀족들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장렬한 전사를 하자, 그 소식을 듣고 신문왕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반굴과 영윤 부자의 의열(義烈)을 칭송했다 한다.
미상∼1169년(의종 23). 고려의 문신. 본관은 명주(溟州). 신라의 종실인 각간 주원(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시중 인존(仁存)이며, 형제인 영석(永錫)·영관(永寬)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1151년(의종 5)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고영근(高英瑾)·하정재(河挺材) 등을 뽑았다. 1156년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이 되고, 1162년 추밀원부사로 김순부(金淳夫)와 함께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금나라 세종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1163년 동지추밀원사 판삼사사(同知樞密院事判三司事)로 지공거가 되어 이순우(李純祐) 등을 뽑았고, 이듬해에도 지공거로서 장영재(張令才) 등을 뽑았다. 이해에 이부상서 추밀원사(吏部尙書樞密院使), 1165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와 지문하성사 판상서병부사 태자소부(知門下省事判尙書兵部事太子少傅)를 지냈으며, 1169년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죽었다.
1911년∼1972년. 가야금의 명인. 호는 성재(誠齋). 서울 출신. 192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의 제3기생으로, 정악과 가야금을 전공하였다. 1931년 졸업과 함께 아악수보(雅樂手補)로 임명되었으며, 그뒤 아악수·아악사·국악사를 거치면서 후배양성에 힘썼다. 광복 후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의 창립 때 창립위원의 일원이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립국악원 개원초부터 가야금 주자 겸 국악사로 활약하였고, 국악사양성소의 가야금교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가야금교본》이 있다.
1908년∼1987년. 피아노 연주가·교육자. 인천의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미국 여선교사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이화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퍼시픽음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래 후진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피아노연주 또는 독주회를 많이 가지지는 않았으나, 엄격한 성격으로 학생들의 실력양성에 공이 컸다. 또한, 사무적이어서 학장을 위시하여 이화여자대학교의 한림원장, 학교법인 상무이사,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56년 이래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이사 및 서울특별시 음악분과 문화위원, 문교부 교육과정음악분과위원장,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부회장을 역임하였고 예술원 원로회원이었다. 우리나라 여성음악교육에 진력한 큰 교육자로 평가된다.
1914년∼1984년. 아동문학가. 황해도 신천 출신. 1938년 니혼대학(日本大學)예술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중인 1937년 동경에서 아동지 《고향집》을 발행했고, 대학을 나온 뒤 만주를 유랑하기도 했다. 1941년에는 이구조(李龜祚)와 함께 서울 신촌상업학교에 근무했다. 광복 뒤 최병화(崔秉和)·연성흠(延星欽) 등과 같이 아동극단 ‘호동(好童)’을 조직했고, 6·25남침 뒤 1951년 부산에서 학생잡지 《중학시대》를, 1953년 태양신문사에서 발행한 주간지 《소년태양》을 편집했고, 환도 후에는 주간지 《건아시보 健兒時報》의 주간을 맡았다. 196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자유문학가협회·한국문인협회의 간부를 역임했다. 1962년에 한국문인협회의 아동문학분과위원장, 문교부 우량아동도서 선정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71년 한국아동문학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4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요 〈반딧불〉이 당선된 데 이어, 1935년 《아이생활》에 동요 〈방울새〉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아이생활》·《가톨릭소년》·《소년》·《동아일보》·《매일신보》·《만선일보》 등을 통하여 계속 작품활동을 했다. 1939년 《아이구락부》에 동화를 발표한 뒤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였다. 동시는 단시적(短詩的)간결성, 감각적 참신성 및 집중조명(集中照明)에 의한 결구(結句)의 묘를 살렸으며, 동심의 발견과 자유시론을 주창하였다. 동화에서는 허무주의를 저변에 깔고 있으나 대화에 의한 인물 부각의 사실성으로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1979년 제1회 대한민국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꿈을 낚는 아이들〉로 이주홍문학상(李周洪文學賞)을 받았다. 작품집에는 동시집 《다람쥐》(1950), 동요집 《소년기마대》(1951)와 《푸른 동산의 아이들》(1963), 3인 공저의 동화집 《밤톨 삼형제》(1963), 《별 하나 나 하나》(1975)와 《미워 미워 미워》(1979), 동요동시집 《봄동산에 오르면》(1979), 동화집 《나팔꽃 병정》(1980), 장편동화집 《꿈을 낚는 아이들》(1982)외에 어린이 미담집 《착하고 아름답게》(1964)와 《글짓기를 위한 어린이 문학독본》(1962) 등이 있다.
1802년(순조 2)∼1868년(고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덕수(德叟), 호는 소정(邵亭). 충주목사 사직(思稙)의 아들이며, 영의정 홍집(弘集)의 아버지이다. 1838년(헌종 4) 음보(蔭補)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이 되었고, 1843년 식년문과에 갑과(甲科: 探花)로 급제, 이조·호조·예조·병조참판 및 한성부좌윤·한성부우윤·사헌부대사헌·홍문관제학·목사(牧使) 등을 역임한 뒤 고종조초에는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지방민의 칭송을 받았는데, 특히 정주·청주목사로 재임시에는 폐단이 많던 대동미(大同米) 조운제도의 개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경사(經史)에도 밝았으며 시문에 더욱 능하였다. 저술로는 《소정고 邵亭稿》 6권과 《청묘의례 淸廟儀禮》 10권이 있다.
1911년∼1965년. 독립운동가. 별명은 왕영재(王英哉).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31년 상해로 망명, 1932년 상해에서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을 조직하여 항일특무공작활동을 하였다. 같은해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투탄의거(虹口公園投彈義擧)때, 윤봉길이 사용한 폭탄제조작업에 참여하였다. 원래 이 폭탄은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金九)의 부탁을 받은 김홍일(金弘壹)이 상해병공창장(上海兵工廠長) 송식마(宋式馬)와 교섭하여 제조한 일본군의 도시락 및 물통 모양의 폭탄이었는데, 재료가 된 일본군의 물통 및 도시락 10개를 구입하여 제공한 것이다. 1935년 중국 공군에 들어가 1941년까지 근무하면서 항일전쟁에 참전하였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경호원 및 비서로 근무하면서도 계속 대일비밀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60년(철종 11)∼미상.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혜길(惠吉).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지낸 구현(九鉉)의 아들이다. 1880년(고종 17) 경과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에 홍문관박사가 되었고, 이듬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거쳐 그해 9월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1888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891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1893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을 받았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99년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으며,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비서원승(祕書院丞)을 거쳐 이듬해에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고 1901년에는 장례원소경(掌禮院小卿)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에는 다시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에 임명되었다. 1899년부터 1902년에 이르기까지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
1837년(헌종 3)∼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공현(公鉉)이다. 1870년(고종 7)에 판부사(判府事) 이유원(李裕元)의 천거를 받았으며, 1889년에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에 오른 뒤로 1901년에 황태자의 장례비서승(掌禮祕書丞)을 지냈다. 1902년에는 궁내부특진관 및 칙임관4등에 올랐다. 1903년에는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 1906년에는 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에 임명되었다가 이해에 칙임관3등으로 올랐다. 1909년에는 정2품직인 종묘전사(宗廟殿祀)가 되었다. 국운이 기울던 한말에 주로 왕실의 의전(儀典)을 담당하는 관서에 봉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까지 보필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증호조판서 진손(震孫)의 아들이며, 이조참판 영견(永堅)의 동생이다. 1475년(성종 6) 봉사(奉事)로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8년 목천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성절사검찰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1481년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을 역임하고, 1484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1492년 행사헌부집의가 되고 1494년 봉상시정으로 백악·삼각산행향사(白岳三角山行香使)를 맡았다. 1497년(연산군 3) 대사간, 1498년 우부승지·대사헌을 거쳐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1499년 지돈령부사로 하정사에 발탁되어 다시 북경에 다녀왔으며, 1500년에도 도총관을 거쳐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1502년 지돈령부사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겸하였다. 1505년 사노비를 내수사에 소속시켰다 하여 비판을 받았으나 정조사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 시호는 안경(安敬)이다.
1883년(고종 20)∼1954년. 국악이론가·가야금명인. 본관은 경주. 호는 괴정(槐庭). 충청북도 괴산 출신. 한말 초대 국악사장(國樂師長)을 지낸 종남(宗南)의 종손이다. 종남은 그의 양조부요, 피리의 명인 김준현(金俊鉉)의 외숙부가 된다. 어려서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배웠고 1900년 전악(典樂)으로 악원에 들어가 국악사(國樂師)·아악사를 역임하였으며, 1929년 명완벽(明完璧)의 뒤를 이어 제4대 아악사장이 되었다. 할아버지 종표(宗杓)와 양조부 종남이 모두 가야금의 명수이었듯이 그도 가야금을 전문으로 하였는데, 특히 음악사·음악이론에도 밝아 악보를 편찬하였고, 악기개량 등에 공이 많았으며, 음악행정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피리의 최순영(崔淳永), 대금의 유의석(劉儀錫) 등과 불비한 관악보를 완성하였고, 함화진과 아악부원양성소를 개소하여 아악생을 양성함으로써 아악의 전통이 계속되게 한 공이 크다.
1577년(선조 10)∼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지평·부수찬·장령·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하였다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내용이 경망하다 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하였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하사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때 인사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이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1190년(명종 20)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냈고, 이듬해에는 지추밀원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추밀원부사로 있던 손석(孫碩)과 사이가 나빠 항시 다투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뒤에 평장사까지 승진하였으나, 아들인 황주목수 준거(俊琚)와 상주목수 준광(俊光)이 당시의 권신 최충헌(崔忠憲)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주살되면서, 그도 연좌되어 황려현(黃驪縣: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유배되었다.
미상∼740년(효성왕 4). 신라 효성왕(孝成王) 때 파진찬(波珍湌)에 이르렀다. 그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는데 왕비의 질투로 살해되자 이에 원한을 품고 740년(효성왕 4) 모반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1896년∼1950년. 장로교 목사. 호는 해암(海巖). 함경북도 명천 출신. 보신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누나의 영향에 의해 개종하였다. 그뒤 신학에 뜻을 품고 일본의 간사이학원(關西學院)신학부에 입학하는 한편, 대판(大阪)에서 교포들이 모이는 북부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1932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할 때까지 계속 시무하였다. 1933년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뒤 강도사(講道師)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934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남대문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후에 장로회 제23회총회에서는 창세기 저자 문제에 대한 그의 비평학적인 이론이 문제시되어, 결국 그는 총회의 견해에 순응하여 지론을 취소한다는 해명으로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1939년 3월 조직된 경성노회(京城老會)일부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에 가담하였으며, 1943년 3월 일제의 어용기구로 출발한 조선혁신교단을 맹렬하게 반대하여, 결국 의장인 장로교의 목사 전필순을 사임하게 함으로써 그 혁신교단을 와해시키는 일에 공을 세웠다. 1944년 새문안교회에 부임하였다. 광복 후 한국교회를 재건하려는 운동의 하나로, 일본 통치하에서 강제로 형성된 ‘조선기독교단’이라는 단일교단을 가능하면 그대로 존속시켜 보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는 이러한 뜻의 성취를 위하여 새문안교회를 회의장소로 제공하였으며, 9월 이른바 남부대회를 소집하게 하였으나 감리교·장로교에서 모두 자파 환원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광복 후 12월에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환영예배를 주관하였으며, 미군정시대에 서울시 행정의 고문격인 참사(參事)로 있었다. 1950년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1599년(선조 32)∼1682년(숙종 8). 조선 중기의 무인. 아버지는 여관(汝灌)이다. 평안도 영유현 출생. 집안은 대대로 무반(武班)으로 어릴 때부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영유현의 무학(武學)이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 後金)를 토벌하고자 우리나라에 원병을 청하여왔을 때 19세의 나이로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의 선봉으로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여 건주위의 장수 아라나(阿羅那)의 종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명나라 사람 전유년(田有年)과 탈출하여 등주(登州)에서 살다가 1631년 진하사(進賀使)의 선편으로 귀국하였다. 병자호란 후 1640년 청나라가 개주(蓋州)를 공략하기 위하여 원병을 청해오자 중국어를 잘한다 하여 상장(上將) 임경업(林慶業)에게 선발되어 수군(水軍) 5천명과 함께 출전하였으며, 이듬해 유림(柳琳)의 휘하로 참전하였으나 청나라 장수 아라나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유림의 대속(代贖)으로 풀려났다. 1658년(효종 9) 조정에서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수축하고 수졸(守卒)을 모집할 때 네 아들과 함께 이미 60세가 넘은 나이로 응모하여 20여년 동안 성을 지키다 죽었다.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을 때 아라나의 일족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으나, 결국 탈출하여 다시 등주에 머무르면서 전유년의 누이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조국을 떠날 때 할아버지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않고 끝내 귀국하였다.
1841년(헌종 7)∼1923년. 조선 말기의 친일정치가. 자는 문경(文卿). 서울 출신. 이조판서 보현(輔鉉)의 아들이다. 1858년 진사가 되었으며, 18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한림(翰林), 1873년 홍문관교리·사간원헌납, 1874년 규장각직각·사헌부장령·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1875년 병조정랑·사복정(司僕正), 1876년에는 승지에 이어 예조참의에 승진하였다. 1879년 대사성·이조참의 겸 보덕·돈령부도정·예모관가선(禮貌官嘉善)·예조참판·동춘추(同春秋)·부총관(副摠官)·지의금(知義禁)·동경연(同經莚)을 거쳤다. 1880년 동성균(同成均)·한성우윤, 이듬해 이조참판·병조참판, 1888년 한성부판윤, 이듬해 공조판서·형조판서·사직제조(社稷提調)·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890년 우참찬(右參贊)·지돈령(知敦寧)·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 이어 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 1892년 이조판서와 이듬해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1900년 장례원경(掌禮院卿)·홍문관학사, 1902년에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병탄을 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892년(고종 29)∼미상.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영변 출신. 일명 영철(泳喆).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 후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관전현(寬甸縣)에서 대한청년연합회의용대(大韓靑年聯合會義勇隊)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독립단과 합류하고, 다시 광복군총영에 입대하여 결사대장이 되었다. 1920년 9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국내의 일제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라는 광복군총영장 오동진(吳東振)의 명령을 받고 김성택(金聖澤)·김최명(金最明)과 같이 무기를 소지하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해 8월 16일 친일분자인 자성군수를 살해하고 곧 황해도 장연으로 가서 장연군수도 살해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일본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엄해지자 함경도로 가서 베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울에 잠입, 청진동 이승도(李昇道)의 집에 유숙했다. 1920년 8월 21일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총독부·남대문역·종로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대한 모의를 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 1929년 10월에 만기출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45년(헌종 11)∼1897년(광무 1). 조선 말기의 효자로, 자는 능만(能滿)이고, 호는 모호(慕湖)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부는 김지현(金志賢),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있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그의 호(號) 모호(慕湖)는 평생토록 유생으로써 효성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자신의 호에 드러난 결심을 지켜 평생 효를 다하였으며 인근 고을에 효자로 명망이 있었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의 벼슬이 내려졌다. 문집으로 《모호재집(慕湖齋集)》 1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