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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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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4(광무 8)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연극/영화인
    김영팔(金永八)에 대하여

    1904년(광무 8)∼미상. 신극 초창기의 연극인. 좌경색채를 띤 희곡과 소설을 발표한 작가이다. 1920년 동경유학생들의 연극서클인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의 창립동인이다. 1923년 형설회순회극단(螢雪會巡廻劇團)의 일원으로서 전국을 누비며 학생배우로도 활약하였다. 개성에 본거지를 둔 송경학우회(松京學友會) 연극에 찬조출연도 했다. 형설회가 해산된 후 1925년에는 김영보(金泳俌)·안석주(安碩柱)·고한승(高漢承) 등과 연극연구단체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으나 무산되었다. 신문학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문화단체인 염군사(焰群社)의 창립동인이 되었고 카프조직의 창립회원으로도 활약했으나, 1930년대초에는 경성방송국에 취직했다는 이유로 카프로부터 제명당하였다. 1924년 가을에 〈미쳐가는 처녀〉라는 단막극으로 처음 등단했고, 그가 주로 활동한 1930년대초까지 희곡 10여편과 소설 10여편을 남겼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을 하기는 했으나 프로문학의 맹장은 못 되었고, 다만 프로문예시대에 있어서 시류를 좇아 좌경했던 작가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근대희곡사의 두 흐름이라 볼 수 있는 전통적 인습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과 식민지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연결된다. 그러한 사회의식은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초점을 맞추었던 빈궁문제와 사회개혁의 문제에 직결되는 것이다. 전통인습에 대한 비판을 다룬 작품이 〈미쳐가는 처녀〉·〈여성〉 등이며, 존재의 고통을 저항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싸움〉·〈부음〉·〈곱창칼〉·〈마작〉 등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처지에서 인습타파와 생존권 확보를 주장하는 저항적 희곡의 첫번째 작품이 〈싸움〉이며, 1927년에 발표한 〈부음〉부터는 이데올로기작품의 한 전형을 만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즉, 주인공을 가난한 하급노동자로, 또는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격렬한 투사로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카프로부터 제명당한 뒤부터는 작품도 세태극으로 변모하여 〈그후의 대학생〉·〈우는 아내와 웃는 남편〉을 발표하였다. 〈그후의 대학생〉은 우리 희곡사상 최초의 모노드라마이다. 10여년 동안에 프롤레타리아극의 선구로 활약하다가 곧바로 전향한 최초의 극작가로서, 식민지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향극(傾向劇)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 달중(達中)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75()
    본관
    광산(光山)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필(金永弼)에 대하여

    1896년(고종 33)∼1975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현대 반공주의자. 호는 달중(達中)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주천면(朱川面) 신양리(新陽里) 298번지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주천면 주양리(朱陽里) 414번지이다. 6세에는 김대현(金大絃)·김태현(金泰鉉)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2세에는 화동학교(華東學校: 현 주천초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후배들을 가르치다 동경으로 건너갔다. 1919년 초, 당시 와세다[早稻田] 실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최팔용(崔八鏞)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한 후, 1919년 4월 25일부터 다음 해 3월 7일 사이 총 5회에 걸쳐,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獨立新聞)》 및 기타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들을 모아서 전라도(全羅道) 무주군(茂朱郡) 무주면(茂朱面) 용포리(龍浦里)에 살고 있던 국내의 독립운동가 송병두(宋秉斗)에게 보내주었다. 5월 17일에는 독립선언서 및 독립 결의문 등을 보내주었다. 또 1920년 4월 25일에는 동경부 호총정(戶塚町) 앵정운송점(櫻井運送店)에다 조선 전 지역에 많은 하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의뢰서를 첨부하여, 《대한민보(大韓民報)》, 《독립신문》 등 기타 독립에 관련된 문서들을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영동역(永同驛)으로 소포로 붙이는 등 독립운동 고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1년 2월에 그는 국내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을 하였다. 그 후 고향 진안(鎭安)에서 애향계(愛鄕契)를 조직한 후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재판비용을 부담하는 동시에, 제령(制令)7호 등을 위반한 혐의로 1년형의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15 광복이 된 후에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공산주의 배격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러다 1950년 6·25사변 때에는 북한 공산군에게 납치되었으나 죽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후, 북한에서 남파시킨 공비들을 토벌하는 데 더욱 앞장서게 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사회생활에 열심히던 그는 1975년 2월 10일 79살에 대구 형무소시절 발병했던 동상이 도져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977년 12월에 대통령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8(고종 15) - 1920()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하(金榮夏)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20년.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화순 출신. 1917년 5월경 광복단 동지 정동근(鄭東根)·양재홍(梁在鴻)·김교락(金敎洛)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군자금을 모금하여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같은해 7월 동지들과 함께 전라남도 나주·함평에서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뒤, 1918년 5월 일본헌병에게 잡혀 광주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7(고종 14) - 193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학(金永鶴)에 대하여

    1877년(고종 14)∼1933년. 독립운동가. 황해도 금천 출신. 1917년 서울 광희문교회(光熙門敎會)·수표교회(水標敎會) 목사로 있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신도들에게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해 10월 철원에서 김상덕(金相德)·신현구(申鉉九)·조종대(趙鍾大) 등과 애국단(愛國團) 철원군단(鐵原軍團)을 조직하고 이근옥(李根玉) 등 청년들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파견,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하는 한편, 구국활동을 위한 자금조달에 진력하다가 1920년 3월에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그해 12월 경성 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령·보안법 및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2년 출옥 후 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선교사를 자원하여 그곳에서 전도사업과 순회강연으로 동포들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독립투사들과의 연락을 꾀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체포되어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사망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기오(箕五)
    급우재(及愚齋)/동강(東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78(고종 15) - 1950()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한(金甯漢)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50년. 조선 말기 문신. 자는 기오(箕五)이고, 호는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공암리(孔巖里)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5세손으로, 고조부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간근(金澗根), 증조부는 순조의 3녀 복온공주(福溫公主)와 혼인하여 창녕위(昌寧尉)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김병주(金炳疇), 조부는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 증 참정(贈參政) 김도균(金道均)이다. 아버지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錫鎭)이고, 생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김홍진(金鴻鎭)이다. 외조부는 해평(海平) 윤치보(尹致輔)이고, 처부는 좌부승지(左副承旨) 반남(潘南) 박가양(朴嘉陽)이다.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게 총명하여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7세에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09위로 합격하였다. 1898년(광무 2)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가지 않아 영릉참봉(寧陵參奉)으로 옮겼다. 효종 승하 180년 작헌례 때 승륙(陞六)으로 승전되어 영릉령(英陵令)에 제수(除授)되었다. 1900년(광무 4)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1년(광무 5) 용인군수(龍仁郡守), 이듬해 양근군수(陽根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며, 1903년(광무 7) 어진을 서경(西京)까지 봉안하였다. 그해 9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除授)되고, 헌종 계비 효정왕후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혼전(魂殿:왕족의 국상(國喪) 이후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기 전까지 3년간 신주와 혼백(魂帛)을 모시는 방)인 효혜전(孝惠殿)의 향관(享官)에 차정되었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나가지 않았다. 묘소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효정공(孝貞公) 김병주와 복온공주(福溫公主) 묘 남쪽이다. 그는 아버지 김석진 이래로 후손들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저서로 문집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 자유(子裕)
    필운옹(弼雲翁)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73(현종 14) - 1755(영조 31)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행(金令行)에 대하여

    1673년(현종 14)∼1755년(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유(子裕), 호는 필운옹(弼雲翁). 아버지는 관찰사 시걸(時傑)이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현감이 되었다가 1723년(경종 3)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에 의해 노론 김창집(金昌集)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 기장현(機張縣)에 유배되었다. 그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우사어(右司禦)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서 임천군수(林川郡守)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은 《필운유고 弼雲遺稿》가 전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7(융희 1)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현(金寧炫)에 대하여

    1907년∼1944년. 독립운동가. 전라북도 군산 출신. 수원고등농림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28년 9월 사상이 불온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배일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같은해 1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투신한 뒤 군자금 200원을 모금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1932년 7월 권총 등의 총기를 휴대하고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33년 12월 청진지방법원 예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죄로 무기징역이 구형되고, 다시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되어 대전·마포·서대문·함흥 등지의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4(광무 8) - ?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호(金永鎬)에 대하여

    1904년(광무 8) 4월 23일∼미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으로 김정기(金正基)가 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인덕면(仁德面) 인서리(人西里)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지도 동일하다. 부친은 참봉(參奉) 김찬주(金贊柱)이다. 1919년 당시 학생신분이던 16세의 소년은, 일반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1919년 3월 29일 자신의 집에서 종이 태극기 3본을 손수 만들어 인동리(仁東里) 이재갑(李在甲)의 방으로 직접 찾아가서는 박용수(朴瑢洙)·김석용(金錫瑢) 등에게 자신이 만든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4월 1일 광양읍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들 모두 대찬성을 하였다. 그들은 곧 그가 만들어온 태극기에 ‘대한독립만세’와 ‘대한독립회복(大韓獨立回復) 호창억만세(呼唱億萬歲)’ 등의 글귀를 써 넣고, 다른 백지에다가는 ‘4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므로 뜻있는 사람들은 성내로 모이고, 만약 모이지 않은 사람의 집에는 불을 지를 것이다.’ 또는 ‘모든 군민들은 모두 모여라. 광양(光陽) 유지 청년’ 등의 내용을 적은 종이 11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함께 있던 김행진(金行鎭)·김태성(金泰星)·김태훈(金泰勲)·박용완(朴用完) 등에게 그날 밤 안으로 그 종이들을 읍내 곳곳 군민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다 붙이게 하는 등 구체적인 방법까지 의논을 마쳤다. 그러나 이미 3월 27일에도 광양군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들은 무슨 일이 다시 일어나지나 않을까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 경찰에 의해 그들의 계획은 실행 전에 발각되어 전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에 대해 법원에서는 3월 27일 만세운동으로 지역 군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든 것도 모자라 4월 1일 장날 광양읍내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을 세워 군민들을 공포심에 떨게 만드는 바람에 군내 치안에 방해가 되었다며 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시켰다. 결국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징역 8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3(고종 30) - 197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영환(金永煥){1}에 대하여

    1893년(고종 30)∼1978년. 피아노 연주가. 평양 출신. 숭실중학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오르간 연주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숭실중학 시절 선교사로부터 이를 배웠다. 숭실중학을 졸업하기 1년 전 도일하였다. 뒤에 동경의 우에노(上野)음악학교 본과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입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1918년 졸업한 뒤 귀국하여 음악과가 없는 연희전문학교의 음악부장으로 시무하면서 학교에 그랜드피아노를 기증하였고, 합창단을 조직하여 초기 우리나라 합창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피아노 연주가로, 독창자의 반주자로 전국을 두루 다니며 활약하였고, 외국 노래의 우리말 번역에도 힘썼다. 현재 부르고 있는 베르디 작곡의 오페라 〈리골렛토〉 가운데 〈여자의 마음〉은 그의 번역이며, 슈베르트의 〈월계꽃〉, 포스터의 〈스와니 강〉은 그의 권고에 따라 제자들이 번역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 양성에도 주력해 이애내(李愛內)·김원복(金元福) 등 훌륭한 피아노 연주가를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음악교사였던 김인식(金仁湜)이 정규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데 반해 그는 최초의 정규음악학교 출신이며, 또한 최초의 피아노 연주가로 초기 우리나라 서양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 시호

    이칭
    김서정(金曙汀)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8(광무 2) - 1936()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연극/영화인
    김영환(金永煥){2}에 대하여

    1898년∼1936년.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무성영화 변사. 일명 서정(曙汀). 서울 출신.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소년시절부터 신흥예술인 활동사진에 감명을 받아 영화계에 뛰어들 결심을 하고 각색을 해오다가, 1924년에 단성사(團成社)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의 각색·감독을 맡아서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그뒤에도 주로 각색·감독을 맡았다. 1927년에는 이구영(李龜永)이 감독한 〈낙화유수 落花流水〉의 각본을 썼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1938년의 조선일보영화제에 무성영화부문의 10대 우수영화 중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28년부터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조선극장에서 무성영화 변사로 종사했는데, 장안 일류의 이름난 변사로 꼽혔다. 1928년에 제작된 〈세 동무〉 또한 조선일보영화제 무성영화부문에 선정된 우수작인데, 이 영화의 각본을 맡았고, 1929년에 자신이 각본·감독을 맡은 〈약혼〉을 발표하였다. 같은해 젊은 피아노 연주자의 비련의 사랑을 그린 극영화 〈젊은이의 노래〉의 대본을 쓰고, 감독하였다. 이 두 작품은 카프파(KAPF派) 영화의 목적의식에 저항하여 만들어진 순수극영화이다. 1931년에는 박정현(朴晶鉉)·나운규(羅雲奎)·이필우(李弼雨)·이창용(李創用) 등과 함께 카프파 세력에 대항하는 영화동호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같은해 자신의 각본·감독으로 〈연애광상곡 戀愛狂想曲〉을 만들어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그는 무성영화시대에 각본·감독·변사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선구자적인 영화인이다. 〈李重巨〉 한편, 그는 대중가요 작사가·작곡가로도 큰 활약을 하였다. 1929년에는 〈낙화유수〉의 해설집 음반의 삽입곡으로 동명의 주제가를 작사, 작곡하여 이정숙(李貞淑)에게 취입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졌다. 1930년 최초의 본격적 직업가수라 할 수 있는 채규엽(蔡奎燁)에게 자신이 작사, 작곡한 〈봄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곡은 곧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노랫말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규제를 받았다. 같은해 극영화 〈암로 暗路〉의 주제가를 작사, 작곡하여 음반으로 발표하였다. 1930년대 대중가요의 초창기에 비전문음악인으로서 한국적인 서정적 대중가요의 방향제시를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대표곡으로는 〈낙화유수〉·〈암로〉·〈세 동무〉·〈봄노래〉·〈강남제비〉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20() - 1957()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군인
    김영환(金英煥){3}에 대하여

    1920년∼1957년. 군인. 공군준장 겸 전투조종사. 일본육군장교출신인 준원(埈元)의 아들이며, 초대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정렬(貞烈)의 동생이다.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1931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간사이대학(關西大學) 법과에 재학중 징집되어 일본육군예비사관학교를 수료하였으며, 일본군 육군소위로 함흥지구에 주둔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총위부 정보국장대리를 역임하였으며, 항공부대 창설을 역설하다가 여의치 않자 1947년 직책과 부위(副尉)의 계급을 내놓았다. 공군창설 7인의 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48년 5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 항공부대 간부로 일하였다. 1949년 공군이 독립되면서 공군으로 전출하여 공군비행단 참모장에 보임되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미공군대학에서 항공작전에 관한 교육을 이수한 뒤 귀국하여 1953년 공군10전투비행단 초대단장에 취임하여 동부전선의 한국지상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과 후방차단작전을 지휘하였다. 1953년 준장으로 승진하여 제1전투훈련비행단장이 되었으며, 1954년 3월 5일 F-51(무스탱)기로 사천기지(泗川基地)를 이륙하여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기상악화로 동해안 묵호상공에서 실종되었다. 6·25남침 때 을지훈장·금성충무훈장·금성을지무공훈장·미비행훈장(美飛行勳章) 등을 받았으며, 1954년 대통령수장·미공로훈장(美功勞勳章) 등이 추서되었다.


  • 균헌(筠軒)
    시호
    정간(貞簡)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1292(충렬왕 18) - 1361(공민왕 10)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영후(金永煦)에 대하여

    1292년(충렬왕 18)∼1361년(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1325년(충숙왕 12)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頔)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시호

    이칭
    김희경(金熙敬)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5(고종 32) - 192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영희(金永熙)에 대하여

    1895년(고종 32)∼1929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안성 출신. 일명 희경(熙敬).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양성면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4월 1일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명의 만세시위군중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횃불을 들고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 사이의 고갯길에서 이유석을 비롯한 지휘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였다. 그곳에서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독립만세시위대가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선두에 서서 투석하며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이어 양성우편소를 공격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68(경문왕 8)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족
    김예(金銳)에 대하여

    미상∼868년(경문왕 8). 신라 문성왕의 종제(從弟). 855년(문성왕 17) 4월에 건립된 경주의 창림사무구정탑(昌林寺無垢淨塔) 원기(願記)에 의하면, 당시 그의 관직은 선수조탑사종제사지(宣修造塔使從弟舍知)행웅주기량현령(行熊州祁梁縣令)으로 되어 있다. 왕의 가까운 친척임에도 신라 골품제사회에서 아주 낮은 관등인 사지(舍知)와 현령(縣令)을 행직(行職)으로 받고 있었다. 868년에는 이찬(伊飡)으로서 김현(金鉉) 등과 모반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 경보(敬甫)

    시호
    문경(文敬)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06(태종 6) - 1469(예종 1)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예몽(金禮蒙)에 대하여

    1406년(태종 6)∼1469년(예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경보(敬甫). 아버지는 사성(司成) 삭(朔)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시를 거쳐 143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정자에 제수되었다. 그뒤 저작랑(著作郞)을 거쳐 감찰에 제수되어, 144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과거의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다. 1447년 집현전교리로 승진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다. 단종 때에는 집의·집현전부제학을 지내고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호조참의에 올랐다. 그뒤 1460년(세조 6)에는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정사(謝恩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사성이 되었다. 이때에 후학들에 대한 교육에 힘써 자주 시험을 보고 제술이 우수한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뒤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가 대사성에 올랐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아들 성원(性源)과 함께 급제하여 한때 조야의 선망을 받았다. 이어 1468년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신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인 충주로 낙향하였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시관이 되어 뽑은 인재가 거의 뒷날 조정의 현직을 차지하여 빙감(氷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이칙(而則)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593(선조 26)
    본관
    나주(羅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예수(金禮秀)에 대하여

    미상∼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 의병장. 자는 이칙(而則)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대제학(大提學) 김대경(金臺卿)의 후예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돈독한데다 생각마저 매우 깊었다. 관직은 주부(主簿)에 제수(除授)되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 급제한 선전관(宣傳官) 정봉수(鄭鳳壽)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상중(喪中)으로 전라도 화순(和順)에서 지내고 있던 자형(姊兄)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그가 일으킨 의병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전주(全州)와 남원(南原)으로 향하던 왜군들을 크게 물리쳤다. 그 후 1593년(선조 26) 6월에 왜병이 진주성을 또다시 공격하자 그는 최경회,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 그리고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를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그는 현재 나주김씨(羅州金氏) 선조 9명을 모신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몽탄면(夢灘面) 사창리(社倉里)에 있는 우산사(牛山祠)에 배향되어 매년 9월 7일 충절이 기려지고 있다. 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은 총 5권 5책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은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1624년(인조 2)의 이괄(李适)의 난,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 그리고 1728년(영조 4)의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호남지방에서 활약한 의병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안에는 숭정기원(崇禎紀元) 172년(1800)이라는 연도가 적힌 고정헌(高廷憲)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고, 권1의 하(下)에는 〈임진의적(壬辰義蹟)〉이라는 제목 아래 〈최경회조(崔慶會條)〉에 김예수(金禮秀)를 비롯해서 함께 순절한 17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 시호

    이칭
    김효진(金孝眞)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족
    김예영(金禮英)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시대의 왕족. 일명 효진(孝眞). 원성왕의 셋째 아들.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836년에 흥덕왕이 죽자, 그의 맏아들 균정(均貞)과 둘째아들 헌정(憲貞)의 아들인 제륭(悌隆)이 왕위쟁탈전을 벌인 끝에 균정이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후 균정의 아들인 우징(祐徵)이 장보고(張保皐)와 연합하여 민애왕을 타도하고 신무왕으로 즉위한 후 그를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신무왕 이후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속 계승하였다. 그의 아들은 균정·헌정이고, 딸은 헌덕왕의 비인 귀승부인(貴勝夫人)과 우징을 즉위시키는 데 공이 컸던 김예징(金禮徵)의 부인이다.

  • 문백(文伯)

    시호
    의헌(毅憲)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예직(金禮直)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문백(文伯). 첨정 희철(希哲)의 아들이며,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남동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범한 선비로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다음해 무과에 급제, 1604년 평안도 용천군수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616년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탐학한 정치가 많아 삭직당하였다가 이어 포도대장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광해군의 외숙으로 1618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고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임해군·영창대군의 옥사 때도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쫓겨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임금에게 죄를 청하였으나, 광해군 때에 대북파의 무고로 여러 차례 관직을 물러난 사실이 있었음을 가상히 여겨 오히려 상을 내렸다. 시호는 의헌(毅憲)이다.

  • 두칠(斗七)
    정계(正溪)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50()
    본관
    충주(忠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예진(金禮鎭)에 대하여

    1896년∼1950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충주. 자는 두칠(斗七), 호는 정계(正溪). 평안남도 대동 출신. 두연(斗淵)의 아들이다. 1916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년 동교에서 애국연설을 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정학당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로 붙잡혀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였고, 수차에 걸쳐 평안남도의 대동·중화·강서·진남포 등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0년 다시 평양에 들어와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최봉민(崔鳳敏)·박성식(朴聖植) 등과 함께 격문을 지어 시내에 유포하였다. 같은해 4월 동지 김석황(金錫璜)과 같이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다시 귀국하여 의용단평남지회를 조직하였고 그 서무부장이 되었다. 같은해 6월 강서에서 전경하(全景河) 등 20여명과 일신청년단(日新靑年團) 결사대를 조직하여 군자금의 모금과 항일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해 7월 장덕진(張德鎭)·안경신(安敬信) 등과 안주에서 일본경찰을 사살하였고, 이용목(李用穆)·표영준(表永準) 등과 일본관청의 폭파를 결의하고 김효록(金孝錄)과 함께 평안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다시 상해 프랑스조계로 망명하여 하얼빈·길림 등지를 내왕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26년 3월 동지 이수선(李秀善, 英善)과 함께 상해의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였고, 일본경찰에 붙잡혀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6년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이른바 예비검속 등으로 29회나 구금당하였다. 1950년 6·25남침 때 북한공산군에게 붙잡혀 그해 8월 경기도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49(문성왕 11)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예징(金禮徵)에 대하여

    미상∼849년(문성왕 11). 통일신라의 정치가. 원성왕의 셋째 아들인 예영(禮英)의 사위. 상대등 김균정(金均貞)의 매제.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에 벌어진 균정과 제륭(悌隆)의 왕위쟁탈전에서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과 함께 균정을 받들었다. 그러나 반대파인 시중 김명(金明), 아찬(阿飡) 이홍(利弘) 등에게 패하여, 균정은 죽음을 당하고 우징·김양순(金良順) 등과 함께 청해진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839년(민애왕 2) 김양(金陽) 등과 민애왕을 타도하고 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840년(문성왕 2) 상대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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