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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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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9() - 1983()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용한(金容瀚)에 대하여

    1929년∼1983년. 행정관료.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하여 1956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군산남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57년 국무원의 수습행정원을 시작으로 행정관료의 길을 걸어 1982년 과학기술처 차관으로 발탁될 때까지 줄곧 경제기획업무를 맡았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재무부 예산국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계속 경제기획원에 몸담아왔는데,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예산국 사무관, 같은해 기업예산과장, 1969년 예산총괄과장, 경제기획국 투자과장, 1970년 경제협력국 경제협력2과장, 1971년 경제조정관실 서기관, 1973년 부이사관, 1974년 예산국 예산심의관, 1977년 물가정책국장, 예산국장, 1979년 예산실장 등을 맡았다. 그리고 20여년에 걸친 경제기획원에서의 실무경험과 기여가 인정되어 1982년 과학기술처 차관으로 발탁되었다. 차관 재직중 과학기술처의 예산편성 및 확보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으나 1983년 버마 아웅산폭발사건 때 순직하였다.

  • 순필(舜弼)
    석파(石坡)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53(영조 29) - 1778(정조 2)
    본관
    안동(安東)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용행(金龍行)에 대하여

    1753년(영조 29)∼1778년(정조 2).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안동. 자는 순필(舜弼), 호는 석파(石坡). 창업(昌業)의 서출인 선비화가 윤겸(允謙)의 둘째 아들이다. 남공철(南公轍)의 《김순필용행전 金舜弼龍行傳》에 의하면 아주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아버지가 직접 지도를 했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과 더불어 시문서화(詩文書畵)를 즐기며 각별히 교유했으나 어려서부터의 지병으로 26세로 요절했다고 한다. 성격이 기괴하고 강개하여 집안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산천을 유람하며 다녔으며, 그가 퉁소를 불면 그 소리가 너무 비장하여 듣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작으로는 심사정(沈師正)과 이인상(李麟祥)의 남종화풍이 엿보이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노송궁천도 露松窮泉圖〉와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위암박주도 危巖泊舟圖〉 등이 전한다. 세그루의 소나무와 주변의 계곡을 소재로 삼아 그린 〈노송궁천도〉에는 강세황(姜世晃)과 서직수(徐直修)의 화평이 적혀 있다.


  • 학산(鶴山)/야돈(野豚)/추강(秋江)
    시호

    이칭
    김만석(金萬石)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2() - 1973()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학 > 시/시조인
    김용호(金容浩)에 대하여

    1912년∼1973년. 시인. 본관은 김해. 호는 학산(鶴山)·야돈(野豚)·추강(秋江). 아명은 만석(萬石). 마산 출신. 아버지는 치완(致琓)이며, 어머니는 박경포(朴敬布)이다. 1928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같은 대학 신문고등연구과(新聞高等硏究科)를 수료한 뒤 귀국하여, 선만경제통신사(鮮滿經濟通信社) 기자로 근무하였다. 광복 후에는 예술신문사(藝術新聞社) 주간, 건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3년 같은 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광복 후 한때 좌익문학단체에 관여한 일도 있었으나 완전히 전향하여 한국자유문학가협회에 가담하였고, 1962년 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시작활동은 1930년 4월 14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춘원 春怨〉을 비롯하여, 1935년 10월 14일 같은 신문에 〈선언 宣言〉, 그리고 같은해 《신인문학 新人文學》에 〈첫 여름밤 귀를 기울이다〉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8년 ‘맥(貘)’ 동인으로 참가, 〈시그넬〉·〈역설〉 등을 발표하였고, 같은해 장시 〈낙동강 洛東江〉을 발표하여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시세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변모과정을 추적해볼 수 있다. 1941년대에 간행된 첫 시집 《향연 饗宴》(일본 동경 興亞社刊)과 제2시집 《해마다 피는 꽃》(詩文學社, 1948)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시세계는 일제치하를 배경으로 한 어두운 시대상과 피압박민족의 서러움을 노래하는 절망과 비애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기는 향수를 바탕으로 한 회고와 순수 서정, 그리고 6·25사변과 같은 현실의 충격에 기인한 구국의 의지와 민족정기를 노래하던 시기로서, 그의 시작활동 가운데 절정기에 해당한다. 1950년대에 간행된 제 3시집 《푸른 별》(1952), 제 4시집인 서사시집 《남해찬가》(1952), 제 5시집 《날개》(1957)가 이 시기에 속한다. 말기는 1960년대 이후로 시작활동이 다소 침체된 느낌을 주는 가운데, 서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생활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제6시집 《의상세례 衣裳洗禮》(1962)와 유작시집 《혼선 混線》(1974)이 여기에 속한다. 그밖에 저서 및 편서로는 《시문학입문 詩文學入門》(1949)·《세계명작감상독본 世界名作鑑賞讀本》(1953)·《한국애정명시선 韓國愛情名詩選》(1954)·《항쟁의 광장》(1960)·《시원산책 詩園散策》 등이 있다. 1983년 사후 10주기를 맞이하여 제자들이 《김용호시전집》을 간행하였다. 1956년 제4회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 시호

    이칭
    조자룡(趙子龍)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12() - 194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김용환(金龍煥)에 대하여

    1912년∼1948년.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대중가요 가수이자 작곡가. 예명은 조자룡(趙子龍). 원산 출생. 인기 대중가요가수인 김정구(金貞九)의 형이며, 김안라(金安羅)의 오빠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교회음악에 심취하였고, 노래 잘 부르는 소년으로 동극(童劇)에서 솜씨를 발휘해 당시 어린이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건장한 체구로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역사(力士)의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22세 때 순회공연중이던 연극단 금성좌(金星座)에 입단하여 무대가수로 활약하였다. 그뒤 〈숨쉬는 부두〉·〈낙동강〉을 불러 인기가수로 성장하였다. 노래를 부르는 한편, 신민요풍의 노래를 많이 작곡하여, 본인이 부르거나 다른 가수들이 부르게 하여 발표하였다. 1943년 나운규(羅雲奎)의 극영화 〈아리랑〉을 악극으로 꾸며 주연으로 활약하였고, 합창과 이중창 등 23곡의 극 중 노래를 작곡하여, 특징 있는 무대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뒤, 악극 〈심청전〉에서는 심봉사의 명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아세아악극단을 직접 운영하며 〈심청전〉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44년 태평양가극단을 조직하여 만주지방까지 활동무대를 넓혔고, 무대에 다양한 변화를 주기 위해 연쇄극을 도입하였으며, 한때 영화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해방가요 제1호 〈사대문을 열어라〉를 작곡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하여 방송하였다. 1934년 이후의 대표작으로는 〈석양산조〉·〈노다지타령〉·〈장기타령〉·〈정어리타령〉·〈수박타령〉·〈홍어타령〉·〈심봉사탄식〉·〈꼴망태 목동〉·〈초립동〉 등이 있다.

  • 화형(和炯)
    경재(敬齋)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0(고종 7) - 1938()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용환(金容桓)에 대하여

    1870년(고종 7)∼1938년. 일제강점기 관리. 자는 화형(和炯)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14세손이며, 증 교관(贈敎官) 김문두(金文斗)와 반남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정동윤(鄭東潤)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이고, 둘째 부인은 원주원씨(原州元氏)이고, 셋째 부인은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그는 1893년(고종 30) 9월에 정인상(鄭璘祥)·이돈승(李敦昇) 등과 함께 친군무남영서기(親軍武南營書記)에 임용되어, 1894년(고종 31) 12월에는 25세의 나이로 전주 감영군의 일원이 되어 황토현 전투에 참가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을 제압하는 일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군의 매서운 기세에 놀란 전주 감영군은 그 전투에서 패하고 달아났는데, 그 또한 가족들을 데리고 신기리(新基里)·진안(鎭安) 및 부모 묘소가 있는 곳 등으로 도망을 다니기도 하였다. 뒤에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아서 사회사업가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문장가이자 서예가이며, 학교설립자이기도 한 김용태(金溶泰)와도 나이를 초월한 교유 관계를 맺었다. 슬하에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이천서씨(利川徐氏)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행장에는 5남 김기곤(金琪坤). 김이곤(金珥坤). 김숙곤(金璹坤). 김경곤(金瓊坤). 김임곤(金琳坤)을 두었다고 하는데, 한 아들은 누구의 소생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측실의 소생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유고(遺稿)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 1책이 있는데, 한정석(韓楨錫)의 서문(序文)과 이홍식(李弘植) 및 맏아들 김기곤의 발문(跋文)을 붙여 1940년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경재유고》는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문집에는 앞부분에 김용환의 초상 사진을 비롯해서 완주군(完州郡) 서면(西面) 이성리(伊城里) 행적비(行蹟碑) 사진 및 유족(遺族)들 촬영 사진 등 총 5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그의 문집 안에서 특히 주목할 작품으로는 금강산을 비롯해서 일본·만주·몽고 등을 유람하고 쓴 〈여유수초(旅遊收草)〉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88(우왕 1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용휘(金用輝)에 대하여

    미상∼1388년(우왕 14). 고려 후기의 무관. 1372년(공민왕 21)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1379년(우왕 5)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양광전라경상도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가 되어 왜구격퇴에 힘썼다. 같은해 5월에 왜구가 다시 기병(騎兵) 7백, 보병 2천명으로 진주에 침입하자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양백연(楊伯淵)·우인열(禹仁烈) 등과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고 적 13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왜구가 다시 광주(光州) 및 능성·화순 등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이를 방어하였다. 또, 8월에는 왜구가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진을 치자 지용기(池湧奇)·정지(鄭地)·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과 함께 적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죽은 군사가 5백여명이나 되었으며 왜구는 함양까지 침입하였다. 1382년 도안무사(都安撫使) 겸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되어 정요위(定遼衛)의 군사를 대비시켰고, 다음해 명나라가 고려에 대해 자기들을 섬기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다 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여 왔으므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에 임명되어 이를 방어하였다. 1388년 임견미(林堅味)의 반역사건에 연좌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金祐){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 문신. 사간을 거쳐, 1298년(충렬왕 24) 8월 왕이 복위하자 선법(選法)을 주재하는 임무를 맡았다. 1303년 6월 비서윤(祕書尹)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인 밀직사사(密直司使) 김태현(金台鉉)과 함께 진사를 선발하고 박리(朴理) 등 33인을 뽑아 급제시켰다.



  • 시호
    양정(襄靖)
    이칭
    도길(都吉)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18(태종 18)
    본관
    희천(熙川)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우(金宇){2}에 대하여

    미상∼1418년(태종 18).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희천(熙川). 초명은 도길(都吉). 아버지는 강계만호(江界萬戶) 영비(英庇)이다. 무재가 뛰어나 이방원(李芳遠)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시종으로 총애를 받았다. 1400년(정종 2) 대장군으로 있을 때, 이방원을 도와 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희천군(熙川君)에 봉해졌다. 1407년에는 좌군총제, 1409년에는 평양도첨절제사에 이어 안주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1415년에 우군도총제가 되었다가, 1417년에 좌군도총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 시호

    이칭
    영백(永伯)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0(고종 7) - 1910(융희 4)
    본관
    안동(安東)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우(金佑){3}에 대하여

    1880년(고종 7)∼1910년. 의병장. 본관은 안동. 초명은 영백(永伯). 전라남도 장성 출신. 명기(命基)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춘흠(春欽)의 딸이다. 1907년 10월 장성에서 형 준이(俊伊)와 함께 거의(擧義)하여 의병 1천여명을 규합, 2백정의 총으로 무장한 부대의 의병장이 되었다. 휘하에 선봉장·중군장·후군장 등을 두고 장성·광주·고부·순창·증읍·태인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뒤 1908년 3월에 정읍군 원곡(圓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9월 흥덕군 방장산(方丈山)에서 일본군 헌병기병 및 순사대와 교전,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10월에는 장성군 북이면에서 수비대 소속 기병과 교전하였으며, 11월 상순에는 북이면 오현(鰲峴)에서 일본헌병과 교전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09년 1월 장성군 북이면 상곡리, 북일면 동산리, 흥덕군 세곡리, 일동면 구수교(九水橋), 남면 유점리 등지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전투, 수명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1909년 12월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198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경부(敬夫)
    개암(開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24(중종 19) - 1590(선조 23)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굉(金宇宏)에 대하여

    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 경상북도 성주 출신. 아버지는 부사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곽씨(郭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역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우옹(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상주 속수서원(凁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개암집》이 있다.

  • 성백(聖伯)
    백도(伯道)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91(숙종 17)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김우규(金友奎)에 대하여

    1691년(숙종 17)∼미상. 조선 영조 때의 가객. 자는 성백(聖伯), 호는 백도(伯道). 《청구가요 靑邱歌謠》의 김우규 작품 후서에서 김수장(金壽長)은 김우규가 자기보다 한 해 뒤인 1691년에 태어났으며[聖伯年令辛未我庚午], 당시에 그가 생존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此輩已沒 只有聖伯與我矣]. 김수장이 이 글을 쓴 해가 1764년(영조 40)이니, 그때에 김수장은 75세이고 김우규는 74세이다. 이로 보아 김우규는 74세 이후까지 살았음이 확실하다. 어릴 때부터 호방하고 창곡에 뛰어나 박상건(朴尙健)에게 노래를 배운 뒤, 세상에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며, 《고금창가제씨 古今唱歌諸氏》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으나, 《병와가곡집 甁窩歌曲集》의 작자목록에 ‘숙종조 서리(書吏)’로 소개되어 있고, 《악부 樂府》(서울대본)에도 ‘숙종조 서원(書員)’이라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수장과 같은 서리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홍씨본(洪氏本) 《청구영언》에는 한산인(閒散人)항목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로써 그의 직업생활은 한때의 일이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여항인으로서 한산한 생활 속에서 풍류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청구가요》에 11수가 실려 있고, 그밖에 가람본 《청구영언》에 4수, 《병와가곡집》에 2수가 실려 있어 모두 17수의 작품이 전한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은 널리 유포되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 17수 가운데서 11수가 단일가집에만 수록되어 있으며(청구가요 6수, 가람본 청구영언 3수, 병와가곡집 2수), 나머지 6수도 《청구가요》를 비롯한 몇 개의 시조집에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강호나 전원에서의 한정(閑情)을 내용으로 한 것이 많으며, 대체로 평이한 소재를 무난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고, 특출한 것을 볼 수 없다. 장시조 작품이 한 수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하다. 또한, 김수장과 친분이 두터워 그가 경영하던 노가재(老歌齋)에 자주 드나들며, 여러 가우들과 풍류를 즐긴 당대의 명창이었다.

  • 동욱(東郁)
    화산(華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6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우근(金宇根)에 대하여

    1896년∼1968년. 독립운동가. 자는 동욱(東郁), 호는 화산(華山). 평안남도 안주 출신.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1917년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로 가서 이탁(李沰)·김동삼(金東三) 등과 교유하고, 부민단(扶民團)에 입단하여 이주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8년 10월에 안주로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삼원보로 건너가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그 조직에 종사했으며, 그해 5월에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또한, 대한독립단의 평안남도 토벌대장으로 대원들을 파견하여 일본경찰주재소와 각 관청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동으로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자 다시 귀국하여, 창성·삭주 등지에서 일본기관을 습격하고 다수의 일본경찰을 사살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에 의해 평북독판부(平北督瓣府) 기밀경감(機密警監)에 피임되었으며, 1922년에는 환인현(桓仁縣)에서 결성된 통의부(統義府)의 제5중대 독립소대장이 되어 동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에 힘썼다. 1923년 도강두(渡江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 11명에게 전상을 입혔으며, 1924년 7월에는 강계 사서면(史西面)에서 일본수비대에게 3중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5년 참의부(參議府) 경무원(警務員)이 되었으며, 1926년에는 금천현(金川縣)에 200여호의 농장을 개설하고 동포자녀의 교육을 위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28년 조선혁명당의 지방책임위원이 되었으며, 1929년 지방순회차 해룡현(海龍縣)에 이르렀을 때 일본영사관에 매수되었던 중국경찰의 급습을 받고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출옥하였다. 1937년 4월 한중연합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의 참모가 되어 일본관청을 습격하였으며, 그해 9월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과 악형을 받다가 만주경찰로 넘겨져 석방되었다. 1945년 일본경찰의 무조건 구속으로 해룡현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가 조국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해 9월 남만주지구 한국인해방연합회 보안부장에 피선,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다가 1947년에 귀국하였다. 1949년 국민훈련원을 수료하고 농촌건설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 사익(士益)
    추담(秋潭)/추담거사(秋潭居士)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4(선조 7) - 1643(인조 21)
    본관
    광주(廣州)
    분류
    기타 > 은사
    김우급(金友伋)에 대하여

    1574년(선조 7)∼1643년(인조 21).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익(士益), 호는 추담(秋潭), 추담거사(秋潭居士). 조부는 김경우(金景遇)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대성(金大成)이고 생부는 김대진(金大振)이다. 1612년(광해군 4)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8위으로 합격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유적(儒籍)에서 삭거되고, 대책문(對策文)이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방(榜)에서 삭제 당한 이후 과거를 보지 않다. 변이중(邊以中)의 문인이고, 기처겸(奇處謙), 이익(李瀷) 등과 교유하였다. 《추담집(秋潭集)》이 있다. 목릉참봉(穆陵 參奉)으로서, 서원에 배향되었다.

  • 계선(季璇)/수선(壽旋)
    식영당(息營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25(인조 3) - 1697(숙종 23)
    본관
    의성(義城)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우기(金又器)에 대하여

    1625년(인조 3)∼1697년(숙종 23).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계선(季璇) 또는 수선(壽旋)이고, 호는 식영당(息營堂)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고부면(古阜面) 도계리(道溪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지낸 오봉(熬峰) 김재민(金齋閔), 조부는 김서(金曙)이고, 부친은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김지수(金地粹)이다. 부친과 강화황씨(江華黃氏) 사이에서 2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두 부인이 있는데, 첫째 부인은 사인(士人) 김약수(金若水)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찰방(察訪) 이익신(李益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경학(經學)에 능통하였으며 언행이 의로웠다. 1599년(선조 32)에 그의 증조부는 세상을 떠났으며 그로부터 45년 뒤인 1653(효종 4)에 파평(坡平) 사람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증조부 김재민(金齋閔)의 묘갈명을 지었다. 이 묘갈명은 〈군기시정김공묘갈명(軍器寺正金公墓碣銘)〉 이라는 제목으로 김재민의 문집 《오봉선생집(鰲峯先生集)》 에 실려 있다. 묘갈명 중에서 윤순거는 김우기(金又器)에 대하여 ‘호연지기(瑚璉之器)’를 갖추어 기량이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해도 좋을 증손이라고 평가하였다. 위 묘갈명에는 김재민의 증손 김우기(金又器)가 직접 전서(篆書)를 써서 묘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로 보아 전서에도 능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승지(承旨) 김주만(金冑萬: 1632∼1717)의 문집인 《청헌집(聽軒集)》 1권에는 김주만이 지은 〈제식영당김우기(祭息營堂金又器)〉와 〈제식영당김공행장(祭息營金公行狀)〉이 실려 있다. 제문과 행장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교유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행장에는 김우기의 자(字)가 수선(壽旋)으로 기록되어 있다. 슬하에 둘째 부인 소생으로 아들 김계손(金繼孫)을 두었다. 묘소는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덕천면(德川面) 만종산(萬宗山) 선영 아래에 있다.

  • 이정(以定)

    시호
    충익(忠翼)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19(광해군 11) - 1675(숙종 1)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명(金佑明)에 대하여

    1619년(광해군 11)∼1675년(숙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정(以定). 아버지는 육(堉), 딸은 현종의 비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참봉·세마(洗馬)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16년 영돈령부사가 되고 이어 오위도총관과 호위대장을 겸직하였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서인이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 실성한 아버지 대신 손자가 상주가 된 것에 대한 대립문제)를 계기로 남인인 허적(許積)에 동조하였다. 또한, 숙종초에 복창군(福昌君) 정(楨)·복평군(福平君) 남(枏) 형제가 궁중에 드나들면서 궁녀들을 괴롭힌 사실을 들어 이들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그뒤 남인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알력이 심하여짐으로써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번(金于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1133년(인종 11) 문과에 급제하고, 1158년(의종 12)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숙(申淑),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양(金諹)·유공재(柳公材), 우정언(右正言) 허세수(許勢修) 등과 상소하여 환관(宦官) 정함(鄭諴)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상서이부낭중(尙書吏部郞中)·국학직강(國學直講)·지제고(知制誥) 등을 역임하고, 1169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 허홍재(許洪材)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이익충(李翼忠)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이듬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낭중 진역승(陳力升)과 함께 노인성(老人星)을 초제(醮祭)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별은기소(別恩祈所)를 세워서 금은화(金銀花) 및 금옥기명(金玉器皿)을 만들게 하였다.

  • 문숙(文淑)
    양산(陽山)
    시호

    이칭
    김우생(金祐生)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72(공민왕 21) - 1457(세조 3)
    본관
    상산(商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생(金佑生)에 대하여

    1372년(공민왕 21)∼1457년(세조 3).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일명 우생(祐生), 자는 문숙(文淑), 호는 양산(陽山).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운보(云寶)이다. 정몽주(鄭夢周)에게 수학하였고, 사서구경(四書九經)에 통달하였다. 1388년(우왕 14) 당시 17세의 나이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崔瑩)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하자, 이성계(李成桂)에게 글을 보내어 그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1392년(태조 1)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정안군(靖安君: 芳遠)의 요속으로서, 1400년(정종 2)에 발생한 박포(朴苞)의 난에 공훈을 세웠다. 추충분의익대좌명공신(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에 책봉된 형 덕생(德生)이 동료들의 투기로 억울하게 처형되자 사직하였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교유하였다. 1454년(단종 2)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456년(세조 2)에 사육신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정인지(鄭麟趾)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1457년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 하경(夏卿)
    귀래당(歸來堂)
    시호
    정목(貞穆)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25(인조 3) - 1691(숙종 17)
    본관
    상산(商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석(金禹錫)에 대하여

    1625년(인조 3)∼1691년(숙종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하경(夏卿), 호는 귀래당(歸來堂). 아버지는 수찬 설(卨)이다. 1651년(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53년에는 정언,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1658년 사서(司書), 1661년(현종 2) 헌납, 1664년 장령을 역임하고, 이어서 집의를 거쳐 1672년 좌승지, 1675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1677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 황해도관찰사, 1682년 도승지·예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차례로 지내고, 1683년 경기도관찰사, 1684년 개성유수, 1686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어려서부터 시문을 잘하기로 이름났고, 당쟁을 염려하여 이를 극력 피하려 하였으며, 언행이 단정하였다.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 덕홍(德洪)
    돈헌(遯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7(철종 8) - 1930()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우섭(金禹燮)에 대하여

    1857년(철종 8)∼1930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덕홍(德洪)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신이다. 1906년(광무 10)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제자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6월 4일 전라북도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들을 모아 창의구국(倡義救國)을 다짐한 후, 태인읍·정읍(井邑)·순창(順敞)·곡성(谷城) 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들이 소지한 무기와 거둬들인 세금과 곡식 등을 접수하였다. 이때 각지에서 온 지원군들로 의병의 숫자는 이미 900여 명에 달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의 의병 해산 종용을 거절하자, 그날로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 지방진위대가 공격을 해와 최익현·임병찬 등 12명을 체포하여 대마도(對馬島)의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시켰다. 그 후 최익현은 그해 12월 30일 병으로 죽었고, 임병찬은 1907년(융희 1) 1월에 풀려났다. 김우섭은 이때 무성창의(武城倡義)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후 임병찬은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당해 의병 활동 재개를 도모하다가 1912년 12월에 고종의 밀조로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도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 하는 등, 의병 조직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어서 1913년 2월에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全羅南北道巡撫總將兼司令長官)에 임명되자, 임병찬은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가서 독립의군부를 재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 임병찬은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담은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세계에 일제의 병합에 대한제국국민들이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는 동시에 국민들을 국권회복에 동참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5월에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검거된 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끝까지 항거하며 거센 반발을 보이던 임병찬은 6월 1일 재차 일본 총독과 총리대신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다 체포되었다. 결국 임병찬은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죽었는데, 이때 역시 김우섭은 임병찬이 도모한 독립의군부 의거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태창리(泰昌里) 103-2에는 함벽루(涵碧樓)가 있는데, 1918년 김우섭(金禹燮)의 주도로 유지들 14명이 사재를 털어 2층 목조(木造)로 세운 단청누정(丹靑樓亭)이다. 세월이 흘러 퇴락해지자 1971년에 목조와즙(木造瓦葺) 단층 5칸(五間) 팔작(八作)지붕으로 중수하였다. 묘소는 정읍군 태인면 증산리(甑山里) 서록에 있으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비문이 있다.

  • 대빙(待聘)

    시호
    호간(胡簡)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24(세종 6) - 1510(중종 5)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신(金友臣)에 대하여

    1424년(세종 6)∼1510년(중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빙(待聘).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자지(自知), 아버지는 질(秩)이다.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성종이 세자였을 때 사부(師傅)로 발탁되어 무반으로 대우받았고, 1472년(성종 2) 사옹원직장으로 출발하여 1479년 통진현령, 1486년 단양군수 등을 지냈다. 이후 성종의 배려로 문반이 되어 호조참의를 제수받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친 뒤 관직을 떠났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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