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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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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자범(子范)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강릉(江陵)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엄(金友淹)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자는 자범(子范).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김행(金行)이다. 완산이씨(完山李氏)와 결혼하였고, 형제로 김충엄(金忠淹: 1581∼?), 김효엄(金孝淹)이 있다. 40세 무렵에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 50세 무렵에 고을 수령이 되었고 부정(副正)에 이르러 80세 무렵에 죽었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문인이다. 묘는 공주(公州) 견산(見山) 유향(酉向)에 있다.

  • 숙부(肅夫)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
    문정(文貞)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0(중종 35) - 1603(선조 36)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옹(金宇顒)에 대하여

    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성주(星州) 출신.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다. 1. 관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2. 재직시 활동 처의 외할아버지인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평소에 몸이 약한 관계로 선조로부터 내의원을 통한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573년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이념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 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의 실현을 보았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의 〈학제칠조 學制七條〉를 손수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도 청하였다. 또한,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생활중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 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3. 사후상황·저서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 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지임(之任)
    용만(龍灣)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597(선조 30)
    본관
    오성(筽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윤(金友尹)에 대하여

    미상∼1597년(선조 30).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오성(筽城). 자는 지임(之任), 호는 용만(龍灣). 효검(孝儉)의 아들이다. 1572년 별시에서 병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으나 어떤 일에 연루되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뒤 세상의 일을 잊고 독서에만 열중하여 당송팔대가의 문집이나 중국의 역대사서를 섭렵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면학에만 힘써 저서 30여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적병이 쳐들어와 어머니가 적에게 잡히자 어머니를 구하려다 함께 피살되었다. 생전에 노(奴) 정세(正世)가 영광에 거주하면서 강상(綱常)의 죄를 범했으나 이를 비호하여 해당 지방관·향소(鄕所)·색리(色吏) 등이 모두 처벌받았고 자신도 탄핵받았다.

  • 성래(聖來)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54(영조 30) - ?
    본관
    강릉(江陵)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진(金宇鎭){1}에 대하여

    1754년(영조 30)∼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성래(聖來). 아버지는 영의정 상철(尙喆)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에 기용되어 1772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779년(정조 3)에 부수찬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이때 내의원 액예(掖隷)들이 약재를 징발하고 의관들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등의 작폐를 논하고 엄히 치죄할 것을 건의하였다. 1780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역임하고 1782년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승지를 거쳐 1783년 대사성·이조참의·광주유수(廣州留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뒤 1786년까지 이조참의와 대사성을 지냈다. 1779년에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은 정조가 후사가 없자,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아들 완풍군(完豊君) 담(湛)을 후사로 삼으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반역죄로 몰아 살해하게 하였는데, 평소 담과 친하여 그의 혼인 때 혼수를 보내 도운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어 담의 역모와 관련, 추국(推鞫)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791년(정조 15) 부친상을 당하여 풀려났다가 치상(治喪) 후 교동(喬桐)으로 이배되었다. 1830년(순조 30) 손자 긍창(兢昌)의 탄원으로 신원되어 그 관작이 회복되었다.


  • 초성(焦星)/수산(水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7(광무 1) - 1926()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극작가
    김우진(金祐鎭){2}에 대하여

    1897년∼1926년. 극작가·연극이론가.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水山). 장성군수 성규(星圭)의 아들로, 할아버지도 헌관이었으며 지주였다. 1. 학력·연극활동 장성군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당초부터 시인을 꿈꾸어 구마모토농업학교 시절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하였고,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을 꿈꾸어 1920년에 조명희(趙明熙)·홍해성(洪海星)·고한승(高漢承)·조춘광(趙春光) 등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국내순회공연을 했는데, 이때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던세니의 〈찬란한 문〉(단막)을 번역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해서는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에 시·희곡창작·평론에 몰두해서 48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편의 평론을 썼다. 그러나 가정·사회·애정문제로 번민하다가 1926년에 출분(出奔)하여 동경으로 갔고, 그해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尹心悳)과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情死)했다. 2. 사상적 성향 그는 보수적인 유교적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서구 근대사상에 철저하게 탐닉했다.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니체라든가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는 물론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급진적 사상은 연극에서 스트린드베리(Strindberg. J. A.)의 표현주의와 전통부정정신, 또 쇼(Shaw, G. B)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그에게 있어 전통인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의 자살원인이라든가 작품세계도 이러한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될 수가 있다. 시 〈죽엄〉·〈사와 생의 이론〉·〈죽엄의 이론〉 등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시세계는 철저한 현실부정과 개혁의 세계를 보여준다. 희곡세계 또한 시대적·가정적 고통을 담은 자전적 세계를 보여준다. 〈두덕이 시인의 환멸〉(1막)은 제목에서도 풍기는 것처럼 전통윤리와 새로운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갈등을 그린 것이고, 〈이영녀 李永女〉(3막)는 그가 살던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자연주의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꼽히는 〈난파 難破〉(3막7장)와 〈산돼지〉(3막)는 우리나라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다. 〈난파〉는 자살한 해인 1926년 봄에 쓴 작품으로서,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매우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이 작품은 그대로 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잘 보여주며, 지극히 몽환적으로 끌고간 것이 특징이다. 그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신의 ‘생의 행진곡’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3. 평론활동·평가 그는 또한 뛰어난 평론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자유극장(自由劇場)이야기〉·〈사옹(沙翁)의 생활〉·〈구미(歐美)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이다. 그리고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인조인간(人造人間)을 보고〉라는 글은 연극평의 한 예범을 보여준다. 또 〈창작을 권합네다〉라는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 인습타파를 작품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는 대단히 진실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이광수류(李光洙類)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我觀) 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함〉이라는 평론에서는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 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동요의 수집을 촉구했고,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 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고를 적절히 희곡 속에 투영함으로써 당시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특히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는 유일한 극작가이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 은규(殷圭)
    기암(起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0(순조 30) - 1906(광무 10)
    본관
    함창(咸昌)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우창(金禹昌)에 대하여

    1830년(순조 30)∼1906년(광무 10).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은규(殷圭), 호는 기암(起菴). 아버지는 진필(鎭泌)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방도(昉度)의 딸이다. 외삼촌 권재정(權載珽)을 사사하였다. 1883년(고종 20) 도내 유생들이 정경세(鄭經世)의 문묘배향을 주장하여 소를 올릴 때 소두(疏頭)가 되었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자 영주지방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사 箕史》 22책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으로부터 조선 인조에 이르기까지의 선원보(璿源譜)인 〈기사국조통기 箕史國朝統紀〉와, 우리나라 각 성의 내력과 시조들의 간략한 전기인 〈기사성씨운휘 箕史姓氏韻彙〉, 부록인 〈팔역지 八域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밖의 저술로는 《예설간요 禮說簡要》와 《기암문집》 3권 등이 있다.

  • 홍교(鴻喬)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54(효종 5) - 1726(영조 2)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우천(金羽遷)에 대하여

    1654년(효종 5)∼1726년(영조 2). 조선 후기 무신. 자는 홍교(鴻喬)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남원읍(南元邑) 출신이다. 증조부는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이고, 부친은 김반(金磻)이다. 1680년(숙종 6)에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 이증(李增)이 제주도에 와서 문과와 무과를 시취(試取)할 때 합격하였다. 그 후 전시(殿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거쳐 만호(萬戶)에 이르렀다. 제주도에는 1681년(숙종 7)부터 1682년(숙종 8)까지 두 해에 걸친 극심한 흉년으로 도민들의 생활이 몹시 궁핍해졌다. 그러자 그는 도민들을 진휼(賑恤)하기 위하여 비축해두었던 곡식 140섬을 내놓아 도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는데, 조정에서 그의 선정(善政)을 가상히 여겨 부호군(副護軍)으로 품계를 올려 주었다. 1720년(숙종 46)에는 김여강(金汝江)·양유성(梁有成)·김우달(金羽達) 등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해둘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마침내 《급제선생안(及第先生案)》을 만들게 되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선비가 영달하게 되는 것은 출신의 발탁에서부터 비롯되는데, 오직 훈련원(訓鍊院)에서는 선생안은 물론이거니와 출신의 본원 등에 대해서도 기록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기에 이제 선생안을 처음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이지발(李枝發)의 발문(跋文)과 무과 출신들이 지켜야 할 6개 조항의 절목(節目)이 들어있으며, 1588년(명종 13) 무오방(戊午榜)에서부터 총 388명의 무과 급제자들의 이름과 급제한 해를 알 수 있는 간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명단은 추후에 계속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의 무과 출신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 가치가 있는 32책 1본의 필사본인 이 책은 현재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주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에 위치한 '고양부삼성사재단(高梁夫三姓祠財團)'에 소장되어 있다.

  • 제중(濟仲)
    갑봉(甲峰)/좌은(坐隱)
    시호
    충정(忠靖)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49(인조 27) - 1723(경종 3)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항(金宇杭)에 대하여

    1649년(인조 27)∼1723년(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제중(濟仲), 호는 갑봉(甲峰)·좌은(坐隱). 아버지는 청송부사 홍경(洪慶)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 1675년(숙종 1) 유생들과 더불어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8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전적·지평을 거쳐 1686년 정언이 되어 궁가(宮家)에서 저수지를 만든다는 구실로 민전(民田)을 침해하고 있음을 상소하였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689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였는데, 일찍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된 이상(李翔)을 변호했던 일로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필선·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696년 회양부사, 1697년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진정(賑政)을 잘하여 칭송을 받았다. 1698년 승지에 이어 1699년 대사간, 1702년 개성유수, 이듬해 승문원제조·이조참판, 1704년 대사헌, 이어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706년에는 예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707년 한성부판윤이 된 뒤 형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1710년 호조판서가 되어 북한구관당상(北漢句管堂上)을 겸하며 산성의 축성과 행궁축조의 책임을 맡았다. 1712년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소론으로서 자기의 당여를 두둔하지 않고 엄정하게 사실을 규명하여 소론으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16년 내의도제조(內醫都提調)·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화를 입자 이의 부당함을 극력 주장하였으며, 또 김일경(金一鏡)의 사친추존론(私親追尊論)을 반대하다가 화를 입었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으며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 또는 완인(完人)이라 불렸다. 저서로 《갑봉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 자홍(子洪)
    죽포(竹圃)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7(헌종 3) - 1895(고종 32)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현(金禹鉉)에 대하여

    1837년(헌종 3)∼1895년(고종 32).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자홍(子洪), 호는 죽포(竹圃). 함경북도 명천 출신. 형학(衡鶴)의 아들이다. 1867년 함경도 도과(道科)에 을과로 합격하고, 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홍문관수찬을 거쳐 병조참의·공조참의·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여러 주·군의 수령을 지내고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재직중 사망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문집으로는 《죽포집》이 있다.

  • 도상(道常)
    기오당(寄傲堂)
    시호
    정혜(貞惠)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16(광해군 8) - 1694(숙종 20)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형(金宇亨)에 대하여

    1616년(광해군 8)∼1694년(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도상(道常), 호는 기오당(寄傲堂). 아버지는 헌(憲)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657년 정언, 1661년 헌납·사간, 이듬해 집의·홍문관교리, 1669년 좌부승지, 이듬해 도승지를 지냈다. 1672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1674년 한성부판윤, 청나라 사신인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그뒤 1687년(숙종 13) 개성유수, 1694년 형조판서를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를 정성껏 모셨고 예서에 능하여 숙종 때 보책(寶册)을 자주 썼다. 저서로는 《옥산유고 玉山遺稿》가 있다. 대구 용연사(龍淵寺)의 송파대사각민탑비(松坡大師覺敏塔碑)는 그의 글씨이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 이현(而顯)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56(효종 7) - 1727(영조 3)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우화(金遇華)에 대하여

    1656년(효종 7)∼1727년(영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현(而顯). 아버지는 시성(是城)이다. 어렸을 때부터 뜻이 원대하고 기개가 커 남에게 구속받지 않는 기풍이 있었다. 1684년(숙종 10) 진사가 되었고 1695년 황감별제(黃柑別製)에 장원하여 특별히 주택을 하사받았으며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뒤에 전적으로 승진되었으며 벼슬이 봉상시정(奉常寺正)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정치적인 대사건이 빈번하자 세상의 즐거움을 잃고 호서의 연산(連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때 조정에서는 그를 천거하여 대각(臺閣)에 취임시키려 하였으나, 당쟁으로 모함을 받게 되자 당시 사론(士論)이 매우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욱(金昱)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982년(성종 1) 시랑(侍郞)으로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왕위 계승을 알리고 송나라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운(金惲)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1286년(충렬왕 12) 상장군에서 좌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삼사사(三司使)·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고, 1288년에 지도첨의(知都僉議)에 이르렀다. 그뒤 지밀직사를 거쳐 1290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292년 첨의참리로 세자이부(世子貳傅)가 되었고, 이듬해 원나라가 제2차 일본정벌을 계획할 때 도첨의참리로 경상도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가 되어 선박·군량 등을 조달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학 > 문필가
    김운경(金雲卿)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의 문인.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서는 처음으로 821년(헌덕왕 13)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 우감문위수부병조참군(右監門衛率府兵曹參軍)과 연주도독부사마(兗州都督府司馬)를 지냈다. 841년(문성왕 3)에 선위부사(宣慰副使)로 귀국하여 왕을 책봉하였다. 이때 그의 시우(詩友)였던 주한(周翰)의 이별시가 한 수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해강(海岡)
    시호

    이칭
    김신배(金申培)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9(광무 3) - 1934()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운배(金沄培)에 대하여

    1899년(36) 3월 24일∼1934년 9월 26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해강(海岡)이고, 호적상의 이름은 김신배(金申培)이고, 가명으로 김제민(金濟民)이 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희수(金熙穗)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운 그는 일본 시추오카[靜岡]현으로 건너가서 군밤장수를 하던 중 민중 계몽운동에 힘을 쏟기로 결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1919년 3월에 있던 제주도내의 조천만세운동(朝天萬歲運動)에 참여한 후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는 부산으로 피신을 하였다가, 1920년 2월에 중국 상해로 망명을 떠났다. 그곳에서 김창숙(金昌淑), 손영직(孫永稷)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중, 같은 해 11월 초순 경에 김창숙과 손영직 등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군자금모금(軍資金募金)을 목적으로 경상남도 밀양(密陽)에 살고 있는 손종현(孫宗鉉) 등 국내의 부호(富豪) 13명에게 비밀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12월 부산 영도로 입항한 후, 부산 대창정(大倉町) 등지에서 활동 하다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비밀편지와 함께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를 함께 반입시켜 국내의 독립운동정신을 일깨우는 데도 일조를 하였다. '경남고등경찰관계적록(慶南高等警察關係摘錄)'에 의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재무총장(財務總長) 이시영(李始榮)의 명령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동 중이던 제주도(濟州島) 조천리(朝天里) 문봉기(文奉旗)와 그는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1921년 6월 2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3년 중국과 상해(上海) 등지에서의 활약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追敍) 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9(고종 16) - 192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운서(金雲瑞)에 대하여

    1879년(고종 16)∼1929년. 한말의 의병·독립운동가. 전라북도 임실 출신. 1907년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의병장 이석용(李錫庸)이 진안 석전리에서 부대를 정비, 강화할 때 의병진에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주로 무기수집 등의 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선봉장의 구실도 수행하였으며, 진안군을 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시키는 데 참여하였다. 용담전투에서 패배하여 군사가 흩어지자 이들을 수습, 11월에는 장수에서 부대를 다시 편성할 때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석용을 도와 임실·장수·남원·함평 등지를 이동하며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중추적인 구실을 하던 부장들이 점차 전사하고 무기와 인원이 부족하게 되어, 결국 1908년 9월 의병진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뒤에도 남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활동을 계속해오던 중, 1912년 10월 박보국(朴甫局)·김필수(金必洙) 등과 함께 총기 6정, 조선도(朝鮮刀) 한자루를 휴대하고 장수군내 진전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과 면서기 및 전 면장으로부터 세금 등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였으며, 같은해 12월에는 임실에서 공전영수원의 집에 돌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86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중행(仲行)
    백운헌(白雲軒)
    시호
    충정(忠貞)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73(현종 14) - 1722(경종 2)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운택(金雲澤)에 대하여

    1673년(현종 14)∼1722년(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중행(仲行), 호는 백운헌(白雲軒).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인 만기(萬基)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진구(鎭龜)이다.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704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17년에 평안도감진어사(平安道監賑御史)로 나갔고, 1719년 부수찬 조상건(趙尙健)과 함께 위패사건(違牌事件)으로 파직당했다가 다시 승지로 기용된 뒤 세자의 명에 의해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가 되었다. 그뒤 부제학·호조참판·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722년에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하자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반역을 도모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무고로 노론 4대신과 함께 장살(杖殺)되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시호

    이칭
    김점석(金點錫)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7(융희 1) - 1973()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김운파(金雲坡)에 대하여

    1907년∼1973년. 범패승려. 본명은 점석(點錫)이다. 이월하(李月河)를 사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오랫동안 봉원사(奉元寺)의 주지로 있었으며, 이월하의 전통을 계승하여 짓소리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어, 1968년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무형문화재 지정자료조사차 봉원사에서 행한 영산재(靈山齋)에서 범패승들의 지휘자격인 장부(丈夫)와 재의 감독관인 유나(維那)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짓소리 녹음을 위하여 10여명의 어장(魚丈)들을 모아 기억을 되살리며 다른 어장들이 부르는 짓소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다. 만년에는 불행히도 몸이 약하여 제자를 양성할 수 없어서 대가 끊기고 말았으며, 봉원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그가 부른 영산재 전바탕 142곡과 짓소리 13곡의 녹음테이프가 남아 있다.



  • 시호

    이칭
    김강모(金彊模)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34() - 198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김운학(金雲學)에 대하여

    1934년∼1981년. 승려·불교학자·평론가. 본명은 강모(彊模). 영암 출생. 조선대학을 중퇴하고, 1954년에 출가하여 나주 다보사(多寶寺)에서 지효(智曉)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1958년에 평론 〈삼매론 三昧論〉으로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받았으며, 그뒤 승려출신으로 불교사상을 주제로 한 비평활동을 계속하였다.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66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타이 방콕에서 열린 세계불교교육자대회에 참석한 뒤,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으며, 1973년에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재일홍법원(在日弘法院)의 교무국장을 역임하였고, 동경대학 대학원 인문과정에서도 수학했다. 1974년에는 현대문학상 평론부문 대상을 수상하였고, 1973년 동국대학교 선학과 조교수로 부임한 뒤 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지내면서, 1981년 10월까지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불교문학연구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삼매(三昧)의 언어》·《신라불교문학연구》·《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유심안락도》·《금강경오가해》·《숫타니파타》·《불교성경》 등이 있다. 또, 〈향가를 통해 본 불교의 토착화〉 등의 논문을 통해서 신라향가에 비친 불교사상의 토착화를 설명하여 주목을 끌었고, 고려 균여(均如)의 문학성을 재조명하는 등 불교문학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범어사 문도의 승려로서, 종단행정뿐만 아니라 불교의식의 현대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8(철종 9)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경제/사회 > 육영사업가
    김울산(金蔚山)에 대하여

    1858년(철종 9)∼1944년. 육영사업가. 경상남도 울산 출신. 아버지 철보(哲甫)와 어머니 이봉순(李奉順)의 2자매 중 장녀. 대구사람과 결혼하여 1874년에 남편과 사별하였다는 설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술장사로 돈을 모아 순도학교(順道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10년에는 고종의 하사금과 지방유지의 기부금 및 자신의 재산으로 대구에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의 창립을 도왔다. 1925년 운영난에 빠진 명신학교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이듬해에 복명학교(復明學校)로 개칭, 건물을 신축한 뒤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도 복명(復明)으로 개명하였다. 그뒤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희도국민학교(熙道國民學校)를 설립하였으며, 대남학교(大南學校) 부속유치원을 비롯하여 여러 사회단체에 기부금을 희사하였다. 그밖에 홍수·가뭄 등으로 인한 이재민구호에 앞장섰으며, 특히 1936년의 흉년에는 많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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