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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만중(萬重)이며, 호는 신정거사(新亭居士)이다. 본관은 남해(南海)이며, 전라남도 담양(潭陽)의 무이동면(無伊洞面) 출신이다. 고조부는 직장(直長)을 지낸 김종정(金從貞)이고, 증조부는 만덕(晩德) 김대기(金大器)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서 수학한 증조부 김대기 등 가학의 학풍을 영향 받아 어려서부터 학문에 심취하였다. 자라서는 배운 것을 바탕으로 성현을 본받아 언행에 있어서 조금도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으며, 평생을 책을 벗 삼아 지냈다. 이런 그의 학식과 덕행을 높이 산 선비들이 1607년(선조 40)에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취영 에 세운 의암서원(義岩書院) 원장으로 취임하여 후학들의 교육에 힘써 주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한사코 사양을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자신은 중임을 맡을 그릇이 되지 못하고, 성현의 발자취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준으로 다른 유생들의 본보기가 될 수 없으므로, 자신 말고 학덕을 겸비한 다른 선비를 찾아서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옳겠다는 말로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은 선비들이 정중하게 의복을 갖춰 입고 찾아가서 한 사람의 명예 때문에 취임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을의 도의(道義)를 위해서 후진들을 지도해 달라며 간곡히 요청을 하였다. 이처럼 그는 겸손하고 청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한 번 만나보고 오래 사귄 친구처럼 빈번하게 서신왕래 하기를 늙어서까지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며 슬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두 아들이 있는데, 1680년(숙종 6) 생으로 36세의 나이에 1715년(숙종 41) 을미식년생원시 3등 27위로 합격한 김팔화(金八華)와 김팔형(金八亨)이다.
1767년(영조 43)∼1847년(헌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공후(公厚), 호는 강우(江右). 아버지는 방행(方行)이며, 우의정 이교(履喬)의 동생이다. 1789년(정조 13)에 진사가 되고, 179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검열(檢閱)·지평을 거쳐, 1799년에 수찬으로 있을 때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죄인이던 정처(鄭妻)의 석방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네번이나 상계(上啓)하였고, 이듬해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의 사직상소가 마땅치 못하다고 논한 소를 올려 언양현(彦陽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 1805년에 풀려나와 대사간·이조참의·경상도관찰사·대사성·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풍덕부(豊德府)를 개성에 통합시켜 지계(地界)를 확장, 정비하고 《중경지 中京誌》를 편찬하였다. 이어 행호군·대사헌·공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좌참찬·예조판서·이조판서까지 이른 뒤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그뒤에도 계속 좌부빈객(左副賓客)·대사헌·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했다. 1839년(헌종 5)에 시파와 벽파간의 논쟁으로 기연(畿沿)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 상호군·공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당시 시파로 역량이 있는 중신이었으나, 시파와 벽파간의 파쟁으로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하였으며, 판서로 있을 때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에 실린 금고조(禁錮條)를 산개(删改), 이혁(釐革)하여 백성의 신원안(伸寃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하여 노력한 일도 있다. 편서로는 《중경지》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735년(영조 11)∼1792년(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방(君方), 호는 벽산거사(碧山居士). 증조부는 호조정랑(戶曹正郞) 김성후(金盛後)이고, 조부는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추증된 김시민(金時敏)이며, 부친은 참판(參判) 김면행(金勉行)이다. 1765년(영조 41)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신묘정시문과(辛卯庭試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숭릉참봉(崇陵參奉)을 거쳐 1783년(정조 7)에 수찬(修撰)으로 초야의 선비를 초빙하여 다스림의 바탕으로 삼자는 상소를 하니 정조(正祖)가 “그대의 말이 절실하다. 지금 마음을 쏟아 초빙하려고 한다.”하였다. 다음해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다. 그 후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禮曹參議)을 거쳐 1790년(정조 14)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활동하다가 1795년(정조 19)에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묘는 남양주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
미상∼1797년(정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월성위(月城尉) 한신(漢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이다. 금석학의 대가인 정희(正喜)의 할아버지이다. 1771년(영조 47) 지평을 거쳐, 이듬해 승지가 되었고, 1773년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상소에 의하여 광주부윤이 되었다. 1784년(정조 8) 독옥책관(讀玉册官)으로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뒤 승진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1785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교체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을 지낸 뒤 계속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90년 행부사직·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죽은 직후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1875년(고종 12)∼1920년. 독립운동가. 일명 이직(利稷). 서울 출신. 1900년 고향에서 명신학원(明新學院)을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1904년 한국군관으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독립운동 근거지의 하나인 노령 연해주(露領沿海州) 니콜라예프스크로 망명하였다. 니콜라예프스크에 정착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출신인 나성오(羅成五) 등을 초빙하여 동포들의 보건을 위한 자선사업을 실천하는 한편, 그의 아들 인성(麟聲)으로 하여금 젊은 독립운동가와 혈맹을 맺어 항일무력항쟁에 정진하도록 하였다. 군자금 모금과 무기입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를 뒷받침해준 사람이 최재형(崔在亨)이었다. 또한, 니콜라예프스크재류 한인민단(韓人民團)의 초대단장을 역임하면서 교육구제사업에 힘을 다하는 한편, 민족사상고취에도 진력하였다. 그러나 1918년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대에 의해 최재형·엄주필(嚴柱弼)·황경섭(黃景燮) 등과 함께 붙잡혀서 1920년 4월 7일 총살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화가. 호는 화은(花隱). 생애와 행적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작으로 1803년(순조 3) 김홍도(金弘道)·김득신(金得臣)·이인문(李寅文)·윤제홍(尹濟弘) 등과 함께 그린 〈고산구곡담총도 高山九曲潭摠圖〉와 김광국(金光國)의 제문(題文)이 있는 〈산수도〉(개인 소장)가 전한다. 예리한 필치와 담박한 담채(淡彩)로 다루어진 이들 그림에는 짙은 문기(文氣)가 풍기고 있어 그의 기량이 출중했음을 알려준다.
1727년(영조 3)∼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치응(稚膺). 문충공 상용(尙容)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경행(景行), 어머니는 이정상(李鼎相)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769년 홍문관부수찬으로 재임시 박세채(朴世采)의 문묘(文廟) 출향(黜享)을 상소한 중학유생(中學儒生) 김정렬(金鼎烈)을 힘써 옹호한 것이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깎이고 귀양을 갔다. 곧 이어 풀려났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그뒤 김해부사로 있을 때 흉년이 들자 백성의 구휼에 힘썼으며, 경직에 복귀한 뒤 성균관대사성·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1792년(정조 16) 동의금부사로 죄인 홍명호(洪明浩) 등을 미온적으로 다스린다고 고신(告身)을 추탈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회복되어 대사헌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군 10)∼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재청(載淸), 호는 북일(北逸). 아버지는 양준(良俊)이다. 1540년(중종 35)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44년 주서가 되었다. 1545년(인종 1) 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검열이 되자, 대간 이화종(李和宗) 등이 사관(史官)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 지평이 되어 당시 민생고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실시되고 있던 금주령에 대해 일부 인사들이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이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더욱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57년 암행어사의 직무를 띠고 함경도에 파견되기도 하였고, 1563년 정론(正論)으로 표창을 받았으며, 이듬해 승문원판교를 거쳐 1566년에 첨지중추부사로 활약하였다.
1723년(경종 3)∼1790년(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광중(光仲), 호는 죽하(竹下)·약현(藥峴). 제남(悌男)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판돈령부사 상석(相奭)이다. 1763년(영조 3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仁元王后: 肅宗繼妃)의 제삿날을 맞아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어 응교에 제수된 뒤 1769년에 세자시강원 겸 필선에 임명되었고, 1778년(정조 2)에 대사헌이 되었다. 1782년 강화유수를 거쳐 이듬해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임명되었다. 1784년 우의정으로 진주 겸 주청사의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86년에 또다시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9년 우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바로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86년(성종 17)∼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군거(君擧). 경력(經歷) 언홍(彦弘)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었으며,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언이 되어, 이른바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언사(言事)를 담당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이 투옥되자, 유인숙(柳仁淑)·공서린(孔瑞麟)·홍언필(洪彦弼) 등과 함께 대궐에 나가 조광조와 같이 옥에 갇히겠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안당(安塘)·안처겸(安處謙)부자 등이 처형된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었다. 중종 말년에 김안로(金安老) 등이 다시 등용됨에 따라 유배에서 풀려났고,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었다.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거쳐 용담현령이 되었다. 그의 인물됨은 현량과 천목(薦目)에 순후 방정하고, 학식과 재행이 있었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여남(汝南). 할아버지는 장생(長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반(槃)이며, 어머니는 서씨이다. 익희(益熙)의 아우이다. 1635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6년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춘신사(春信使)로 파견된 나덕헌(羅德憲)·이곽(李廓) 등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청나라의 경축행사에 참가한 사신과 용골대의 주살(誅殺)을 주장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나라의 사신이 급히 서둘러 돌아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가서 섬을 사수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고 고전을 하는 중에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將)인 김상용(金尙容)이 남문에 화약궤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자분(自焚)하려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을 지냈던 윤방(尹昉)이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애써 만류하였으나, 김상용·권순장(權順長)과 함께 끝내 자분하고 말았다. 이때 강화에서 순절한 사람은 모두 30명이 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1629년(인조 7)∼1675년(숙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계명(啓明). 서울 출생. 아버지는 참판 반(槃)이고, 어머니는 연산서씨로 주(澍)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집의가 되고 1664년 형조참의·동부승지, 1666년 호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와 1672년 대사헌을 지냈다. 이조참의를 거쳐 1674년 예조참판 때,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리(田里)로 풀려나와 일생을 마쳤다.
1880년(고종 17)∼1956년.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그해 7월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의 국내특파원으로 김창곤(金昌坤)·한철수(韓哲洙)·정치민(鄭致敏) 등과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모금, 일제의 주요관청 습격, 친일배 암살 등의 애국활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당하여,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12년을 복역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596년(선조 29)∼미상.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원(而遠), 호는 봉서(鳳棲). 김몽백(金夢伯)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기는데 효를 다하였고, 돌아가셨을 때는 예를 다하여 매일 새벽 가묘에 배알하였다. 유가(儒家) 경전(經典)을 비롯하여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탐독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 대하듯 하였고, 의가 아닌 것은 풀 한 포기도 갖지 않았다. 1621년(광해 13)에 이이첨(李爾瞻)과 윤인(尹訒)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후 청주(淸州) 오근(梧根)에 봉서대(鳳棲臺)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생을 보냈다. 사후 162년 뒤에 도내(道內) 선비들이 사당을 지어 제향하였다.
1916년∼1985년. 출판인. 경상북도 상주 출생.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상업과를 2년 수료하였다. 1945년 대양출판사를 설립, 1952년 학원사로 개칭하고, 그해에 학원장학회를 설립했으며, 중·고등학교학생 교양잡지 《학원》, 1955년 여성잡지 《여원》, 1956년 고등학교학생을 위한 수험지 《진학》을 창간하였으며, 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세계대백과사전》(전6권)과 《가정의학대전》·《과학대사전》(전8권)을 발행하였다. 1960년에는 초·중학생을 위한 교양일간신문 《새나라신문》을, 1964년 농촌·농민계몽을 위한 잡지 《농원》을, 이듬해에는 《주부생활》을 창간하였다. 1969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발행한 《독서신문》의 초대사장에 취임하고, 1973년 《세계대백과사전》을 증보하여 전 20권으로 발행하였으며, 1974년 지성인을 위한 잡지 《현대인》을 창간하였다. 이밖에 1945년부터 1985년까지 40년간 《의학사전》·《농업사전》·《철학사전》 및 《고사성어사전 古事成語辭典》 등을 비롯한 약 3천여종의 단행본을 발행하였다. 이러한 출판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에 ‘대한민국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1968년 ‘문화공보부장관 잡지공로상’, 1968년 ‘국무총리 출판공로상’, 1969년 ‘소파상’, 1969년 ‘대통령 잡지공로상’, 1970년 ‘국민훈장동백장’ 등을 받았다. 출판계에서 양심적인 출판인의 모범으로 추앙받으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및 농촌을 위한 도서·잡지출판에 기울인 노력은 우리나라 출판의 역사에 큰 기록을 남겼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그가 설립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장학사업은 출판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사업가로서도 크게 평가받는다. 그가 설립한 학원장학재단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장학재단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출판인·사회사업가로서 쌓은 업적은 우리나라 출판계의 모범이 되었다.
1793년(정조 17)∼1860년(철종 1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자익(子翼), 호는 직재(直齋). 아버지는 용(溶)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로 시린(時麟)의 딸이다. 하양현(河陽縣)에서 출생하였으며,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1806년(순조 6) 안동향시(安東鄕試)에 급제하였다. 1812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모두 피난하기에 분주하였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여 1819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에 정시(庭試)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노은정사(老隱精舍)·구연정(龜淵亭) 등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한때 고을의 장학임무(奬學任務)를 수행하였는데, 《소학》의 가르침을 인재육성의 기본지침으로 삼고 풍속을 교화하는 방법으로 향약(鄕約)의 규정을 제시하였다. 한편, 배극소(裵克紹)와 함께 고금의 상제의(喪祭儀)를 채집하여 《상제의집록 喪祭儀輯錄》 4책을 편집하였으며, 저서로는 《직재문집》 6권이 있다.
1874년(고종 11)∼1950년. 장로교 목사. 황해도 안악 출신. 아버지는 김응선(金應善)이고, 어머니는 전익선(田益善)이다. 16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여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900년 봄에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 L.)의 ‘영생’이라는 설교에 감동하여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01년 1월에 부인 및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재령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의 지시를 받고 교역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왈렌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다시 신천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그곳에서 전도하면서 조롱도 당하고 돌에 맞기도 하였지만 참고 견디면서 겸손하고 인자하게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결국 그곳에 기도처가 마련되고 교회당도 건축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졸업 후 신천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생애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목회하였으며 11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 1907년 평양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부터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설교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와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의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이었는데 그의 신비스런 능력과 매력에 청중들이 도취되었다. 1919년 10월 강동(江東)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신유(神癒)의 능력을 갖추게 되어 그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1920년 6월 평양의 연합부흥집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고자 3천명을 수용하는 장대현교회당이 좁을 정도로 대중이 몰려들었고, 같은해 10월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열린 일곱 교회 연합집회에는 1만여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1922년 5월 9일자의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미설(迷說)기적의 촉구가 지나치다는 취지의 사설을 썼다. 그러자 황해노회에서는 이적증명회를 구성하고 그가 행한 이적 사실을 모두 망라하여 《이적증명서》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한 그는 이후로 병 고치는 이적을 삼갔다. 1943년 신의주 제1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경찰이 강제로 연행하여 신사참배를 시켰다. 일본관헌은 이것을 선전자료로 삼는 한편, 그를 황해도 은율의 어느 과수원에 가두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광복 후 북한에서는 1946년 11월에 어용기구로 기독교도연맹을 만들고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였다. 1950년 10월 14일 신천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난입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50여년 동안 그는 국내와 일본 및 시베리아 지방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150여곳에 교회당을 세웠으며, 2만8천여회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1만명을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의 《부흥회설교집》이 1940년에 간행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공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이다. 부친은 증 참판(贈參判) 김신추(金愼樞)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형 김익웅(金翼熊)이 있으며, 아들로 김태영(金泰英)이 있다. 어려서부터 용맹스럽고 담략이 있더니,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익웅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싸웠는데, 형이 웅치(熊峙) 싸움에서 전사하자, 그는 용만(龍灣)의 행재(行在)로 향하였다. 이때 선조는 그를 만나보고 수문장(守門將)에 제수(除授)하였다. 1595년(선조 28) 충청·전라·황해·강원·평안 등 도(道)의 포수·살수를 후원(後苑)에서 시재(試才)할 때 수석을 차지한 전주(全州)의 공생(貢生) 김현룡(金見龍)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으며, 차석을 차지한 그에게는 관직을 상으로 내렸다. 그는 무과(武科)로 등제(登第)한 후, 관직은 운총만호(雲寵萬戶)·여산영장(礪山營將)과 남원영장(南原營將) 등을 거쳐 체부별장(體府別將)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마무리 된 후에, 그는 적장 천기(天起)를 생포한 공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되고, 자금대(資金帶)를 상으로 받는 등 임금의 은혜를 받았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1628년(인조 6)에는 김반(金泮)이 충청우도와 전라도를 순검한 후 여산영장(礪山營將) 김익룡(金翼龍)이 나이가 늙고 재주가 졸렬하여 군사를 제대로 거느리지 못한다며 벌 줄 것을 요청하자, 전례에 의거해 벌을 내리라는 비답이 내려졌으며, 1635년(인조 13)에는 당시 삭주부사(朔州府使)인 아들 김태영이 중국의 차인(差人) 곡승은(曲承恩)에게서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다.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3권에는 1597년(선조 30) 8월 13일에 적병이 크게 성 밑으로 진군하여 오자, 우리나라의 능한 포수 부장(部將) 김익룡(金翼龍)과 겸사복(兼司僕) 양득(梁得)과 별패진(別牌陣) 정금(鄭金) 등이 일시에 총을 쏘니, 세 놈이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놈들이 시체를 운반해 물러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조경남(趙慶男)의 《속잡록(續雜錄)》 4권에는 1637년(인조 15) 당시 체부별장(體府別將)인 그가 공주(公州)에 가서 적군이 금강(錦江) 북쪽 언덕에 주둔하고 부서진 교량(橋梁)을 보수한 다음 강을 건너 성에 들어가 낱낱이 수색하다가, 한 부대는 궁원(弓院)에 머물러 도적질을 하고, 한 부대는 목천(木川)·청주(淸州) 등지로 향하여 매우 심하게 노략질을 한 것을 염탐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806년(순조 6)∼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회(公晦). 아버지는 이조참의 경선(景善)이다. 1838년(헌종 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40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됨으로써 출사하였다. 1842년에 평안도암행어사가 되어 숙천(肅川)·삼화(三和)·개천(价川)·순천(順川)·맹산(孟山) 등지의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뒤 이조참의·대사성·이조참판을 역임하고, 고종조에 들어와서는 형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 정계의 중요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1869년(고종 6)에는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한성부판윤·홍문관제학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51년(명종 6)∼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안. 자는 계응(季膺). 아버지는 찰방 광(光)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도사·군수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광군수로 현감 임계영(任啓英)과 함께 인근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결국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어려서는 노진(盧禛)으로부터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金長生)과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