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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고종 16) 12월 28일∼1936년 8월 16일. 일제강점기 의병장. 다른 이름으로 김봉섭(金鳳燮)이 있다.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남면(南面) 대덕리(大德里) 989번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1907년(융희 1)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군대가 해산되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근거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휘하로 들어가서 무기와 식량 조달 등을 책임졌다. 그해 9월에는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수면(高水面)과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서삼면(西三面)의 경계에 있는 문수산(文殊山)의 산정에서 벌어진 문수산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는데, 문수산의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축성되어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던 성터가 남아 있을 정도로 지역적으로 요지이다. 12월에 일어난 김용구가 선봉장이었던 홍덕 길마선 전투 때는 무등촌에서 많은 왜적들을 죽이는 공을 세웠으나, 12월 호남창의군(湖南創意軍)이 전라남도 담양 추월산에서 적들에게 패하는 바람에 기삼연은 체포되었고, 의병장들의 희생은 매우 컸다. 이때 살아남은 그는 독립적인 의병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909년(융희 3) 12월 1일에는 그의 휘하에 있던 박태동(朴判同)과 신경태(申泰敬) 등이 총을 휴대하고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돌갈보(乭葛甫)와 평정리(平亭里), 전라북도 고부군(古阜郡) 답내면(畓內面) 장청리(長靑里) 등의 민가에 들어가 군자금과 옷가지 등을 협박해서 탈취해간 혐의로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 기소되었다. 그 역시 1910년(융희 4) 2월 18일에 전덕진(田德鎭)·이성화(李成化) 등과 함께 총기를 가지고 전라북도 고부군(古阜郡) 양덕리(兩德面) 중학리(中鶴里)에 있는 민가에 들어가서 군자금에 필요한 엽전을 겁탈해간 혐의로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 기소되었다. 그 후 김익삼은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이후로 이름을 김봉섭 바꾸고 숨어 살다 사망하였다. 1983년에는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895년(고종 32)∼1925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고양 출신.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에 와서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하여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국내전으로 혼란하여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회사의 전차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암살의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를 총독실로 오인, 폭탄을 던지고 다시 회계과장실에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이 폭발로 혼란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의열단이 입수하고 다나카암살의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3월 28일 황푸탄(黃浦灘)에 선편으로 도착한 다나카를 계획대로 저격하였다. 처음 오성륜이 배에서 내리는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발사된 총탄은 영국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자, 김익상은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그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하자 현장을 탈출하려 할 때 중국경찰이 추격하므로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그때 즉사한 영국여인의 남편이 앞을 가로막고 쏜 권총을 맞고 쓰러져 붙잡혔다. 4월 1일 상해 일본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뒤 이른바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누차 감형되어 출옥하였으나 뒤를 쫓던 일본형사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1521년(중종 16) 세자시강원설서에 이어 지평을 거쳐, 1529년 경기도재상어사(京畿道灾傷御史)로 파견되었다. 153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장령·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해 부인의 투기로 첩을 독살한 사건이 있어 체직(遞職)되었으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3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직사(職事)에 힘쓰지 않았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546년(명종 1) 우승지·경연참찬관·도승지로 지방의 자제를 훈도할 방법을 진언하여 〈외방학교신명절목 外方學校申明節目〉이 마련되자 이를 전국에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형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다시 충청감사가 되어 여러 읍의 수재(水災)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 1548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가 되었다. 1549년 온성(穩城)에서 야인들이 노략질하는 일이 발생하자, 함경도 비변대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미상∼1436년(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803년(순조 3)∼1879년(고종 16).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정구(定九), 호는 하전(夏篆).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기장(基長)이며, 아버지는 만선(萬善)이다. 1834년에 제관인 재랑(齋郞)이 되었으며, 그뒤에 내외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받지 않았다. 공문서를 결재할 때는 항상 신속히 처리하는 재완을 보여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다. 1872년 나이 70에 왕에게 시종하는 은혜를 받아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1876년에는 세 아들과 두 손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영광으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뒤에 다시 청은군(淸恩君)에 봉해져 유유하게 살다가 죽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후기의 화가. 호는 경암(鏡巖). 생애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작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한산귀어도 寒山歸漁圖〉와 간송미술관 소장의 〈소림택반도 疏林澤畔圖〉, 개인소장의 〈산수도〉와 〈화조도〉,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응수도 鷹狩圖〉 등이 전한다. 이 그림들은 필묵이 강하고 흑백대비가 두드러진 조선 중기의 화풍을 토대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부분적으로 가미하여 이루어졌다.
1851년(철종 2)∼1907년. 의병장. 본관은 울산. 자는 봉거(鳳擧). 전라남도 장성 출신. 인후(麟厚)의 후손이다. 1896년에 의병의 격문이 돌자, 포사(砲士)들을 끌어들여 전라남도의 금성·광산지역에서 거의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뒤 기삼연(奇參衍)이 의거를 서두르자, 포사와 보부상들이 의병항쟁에 가담하도록 주선하였다. 1907년 9월 장성에서 기삼연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결성되자, 종사(從事)가 되었다. 그리고 장성·영광 등지에서 순사주재소, 일본인의 상점, 일진회(一進會)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그해 9월 23일 전라북도의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야습해온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북문루(北門樓)에서 전사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미상∼1592년(선조 2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뢰(廷賚), 국간(國幹). 증조부는 김양진(金揚震), 조부 김순정(金順貞), 외조부 정세신(鄭世臣)이며, 처부는 노개(盧塏)이다. 아버지는 행 경기도도사(行京畿道都事) 통덕랑(通德郞) 김진(金鎭)이다. 동생 김수현(金壽賢)은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우참찬(右參贊) 등의 벼슬을 지냈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1위에 합격했고, 1582년(선조 15)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등으로 급제했다. 관직은 지평(持平)에 올랐고, 임진란 때 졸하였다.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있을 때, 다른 도의 기생을 데리고 살며 구설수에 올라, 간원(諫院)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생몰년 미상. 호는 독성재(篤誠齋) 또는 만학재(晩學齋). 평안도(平安道) 지방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우가 있었고, 만년에 성리학(性理學)을 배운 후, 세상을 피해 산림에 은거하였다. 어버이에게 효성스럽고 우인들과 우애가 있었으며, 배움에 독실했던 까닭에 삭주(朔州) 김창서원(金昌書院)에 배향되고, 또 태천(泰川) 둔암서원(遯庵書院)에 선우협(鮮于浹)과 함께 배향되었다. 독성(篤誠)은 선생의 사시(私諡: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이 주는 시호)이다.
1625년(인조 3)∼1649년(인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명(仲明). 증조는 대사헌(大司憲) 김계휘(金繼輝)이고, 조부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며, 아버지는 허주(虛舟) 김반(金槃)이다.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로, 병자호란 때 절개를 지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1646년(인조 24) 병술식년사마시(丙戌式年司馬試) 진사(進士) 3등에 합격하고, 1649년(인조 27) 기축정시문과(己丑庭試文科)에 병과(丙科) 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올랐으나, 그해 12월 23일에 2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능(幼能) 이단상(李端相)과 교분이 깊었다. 부인 심씨(沈氏)는 청성군(靑城君) 심정화(沈廷和)의 딸로, 한림(翰林) 심흔(沈忻)의 손녀이다. 심씨는 남편 김익후가 세상을 떠나자 따라 죽기를 맹세를 하여 이듬해 1650년(효종 1) 11월에 죽었다. 슬하에 강춘도관찰사(江春道觀察使) 김만길(金萬吉)를 두었다.
1619년(광해군 11)∼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할아버지는 산림(山林) 장생(長生), 아버지는 참판 반(槃), 어머니는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딸이다. 음보로 등용되어 의금부도사·남원부사·사복시첨정 등을 역임하고, 1667년(현종 8) 사도시정이 되었다. 조카인 만기(萬基)의 딸이 숙종비로서, 숙종이 즉위한 뒤 어영대장 등 군권(軍權)의 요직을 지내면서 권력을 누렸다. 1680년(숙종 6) 김석주(金錫胄)의 주도로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조정에서 남인들을 숙청하는 데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이후 숙종의 깊은 신임에 힘입어 광주부윤·좌윤·형조참판·어영대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김석주 등과 함께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1689년 어영대장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에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죄명으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죽었다. 일찍부터 성품과 행실이 방자하며 부정축재를 많이 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1682년 남인 허새(許璽)의 모역사건 당시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서인 내부 소장파의 반감을 부채질하여, 훈척과 서인 노장과의 협력에 소장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결국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1724년(경종 4)∼1802년(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형보(衡甫). 아버지는 대연(大演)이다. 1761년(영조 3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지평·부교리·사간 등을 거쳐 1786년(정조 10) 대사간이 되었다. 10년간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1790년에는 대사간으로서 제주에 위리안치된 판중추부사 유언호(兪彦鎬)의 방면을 상소하였다가 순흥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는 소론과 노론의 파쟁이 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들의 행위도 정쟁의 한 결과였다. 즉, 유언호는 1736년(영조 12)에 서원남설의 폐단을 상소하였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갔던 소론 조덕린(趙德隣)을 신원하려다가 파직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고, 이어 행호군·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1656년(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할아버지는 장생(長生), 아버지는 반(槃)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같은해 검열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35년 수찬·사서를 거쳐,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자로서 청나라와의 화평을 반대하며, 왕을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1637년 교리·집의를 거쳐 1639년 이조좌랑이 되고, 1642년 사간이 되었다. 1653년 부제학으로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듬해 그의 주장으로 사학(四學)에 교수 각 1인을 겸교수라 일컫고 시종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1655년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대제학이 되었다. 1708년(숙종 34) 손자 진옥(鎭玉)이 그의 글을 모아 《창주유고》를 간행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 경문왕 때 숙위학생(宿衛學生). 관등은 사찬(沙飡). 870년(경문왕 10)에 당나라에 가 숙위하였다. 이는 전년에 왕자 김윤(金胤)을 보내어 국학(國學)에 입학요청을 하는 등, 쇠락하는 국력의 회복에 새로운 노력을 꾀하는 과정에서 파견된 외교사였으며 또, 신라의 마지막 숙위파견이었다. 한편, 그의 신분이 경문왕의 왕자라고 보는 설도 있다.
1917년∼1945년.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 출생. 아버지는 구(九)이다. 1920년 할머니 곽낙원(郭樂園)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여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5년 11월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이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독립군 특무대예비훈련소의 감독관으로 나가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1937년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의 조직에 참여하고 다시 상해로 들어가 한국국민당청년단 상해지구 기관지 《전고 戰鼓》를 발간하면서 독립사상 고취와 전쟁의욕을 촉진시켰다. 1938년 5월 창사(長沙)에서 주석 김구의 명령에 따라 상해에 재차 잠입하여 당(黨) 재건을 기도함과 동시에 일본의 중요관공서를 폭파할 것과 일본의 현관(顯官)들을 총살할 계획을 지휘 감독하였다. 또한 일본전투군함 이즈모(出雲)를 폭파, 격침할 만반의 준비를 진행하다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39년 10월 광시성 류저우(廣西省柳州)에서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간의 유대를 강화하였고 첩보활동에 참가하였다. 1940년 충칭(重慶)에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기관지 《청년호성 靑年呼聲》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564년(명종 19)∼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 무신·의병·공신. 자는 춘경(春卿) 또는 춘유(春逾)이고, 호는 오재(梧齋)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주부(主簿) 김진손(金震孫)의 7세손이고, 부친은 현감(縣監) 김조언(金朝彦)이다. 동생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김의갑(金義甲)이 있다. 효심이 지극하여 모친상을 당해서 3년간 시묘(侍墓)를 하자, 그 마을을 금소동(金巢洞)이라고 불렀다. 1579년(선조 12)에 무과에 급제한 후, 관직은 강계군수(疆界郡守)·철산부사(鐵山府使)를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이르렀으며, 사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김의갑과 함께 호남에서 창의(倡義)하여, 진양(晉陽)에서 성(城)을 지키기 위해서 9일 낮밤 동안 온 힘을 다해서 싸워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평소에도 늘 뛰어난 병법을 익히는 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병법에 있어서는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진양 싸움에서 이긴 후, 진주 싸움이 다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갔으나, 왜적들이 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그가 새처럼 날아서 성안으로 뛰어들어가자 최경회(崔慶會)가 놀라워하며 ‘장재쾌재(壯哉快哉: 장하도다, 통쾌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때 동생 김의갑이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는데, 진주성까지 함락되고 말자, 그는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쌍봉리(雙峯里) 산80번지에 있으며, 그를 정려한 충신각(忠臣閣)은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상∼791년(원성왕 7). 신라 원성왕의 태자. 어머니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이다. 동생으로 의영태자(義英太子)와 예영(禮英)이 있다. 785년(원성왕 1)에 혜충태자(惠忠太子)로 봉해졌으나, 791년에 왕위를 잇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795년 당시 병부령이던 그의 아들 준옹(俊邕)이 태자가 되고, 798년에 원성왕이 죽고 왕위에 올라 소성왕이 되자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봉되었다. 그리고 애장왕 때에는 5묘(五廟)에 배향되었다. 특히, 이때부터 신라의 왕위계승상 인겸계와 예영계의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정치가 혼란해졌다.
1707년(숙종 33)∼1772년(영조 48). 조선시대의 문인. 본관은 안동.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退石). 상헌(尙憲)의 현손,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창복(昌復),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서주(瑞周)의 딸이다. 문벌이 혁혁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수능(壽能)은 서출이라서 과거에 급제하고도 현감에 그쳤다. 14세 때에 아버지를 사별하고, 가난에 시달려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47세 때인 1753년(영조 29)에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57세 때인 1763년에는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종사관인 김상익(金相翊)의 서기(書記)로 뽑혀 통신사 조엄(趙曮)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으로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그뒤 지평현감(砥平縣監)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술로는 역시 일본기행을 한문으로 지은 《동사록 東槎錄》이 있다.
미상∼1866년(고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김인경(金寅暻)은 강화부 규장각위장(奎章閣衛將)으로 장녕전참봉(長寧殿參奉)을 지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전관(典官)과 함께 숙종, 영조 두 왕의 영정을 모시고 남문으로 빠져 나오다 프랑스군에 피살되었다. 후에 조정에서는 좌승지경연참찬관(左承旨經筵參贊官)을 추증하고 정문을 내렸다. 정문은 강화읍 국화리에 있다.
미상∼1235년(고종 2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경주. 초명은 양경(良鏡). 양신공(良愼公) 의진(義珍)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합문지후를 지낸 영고(永固)이다. 명종 때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하여 직사관(直史官)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초 조충(趙冲)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세운 공은 원나라 장군들까지도 그의 진용이 정숙함을 감탄하여 상좌에 모시고 위로의 연회를 베풀어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예부낭중을 거쳐 추밀원우승선이 되었으며 1227년(고종 14)에는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에 동진(東眞)의 군대가 정주(定州)·장주(長州)로 쳐들어오자 지중군병마사가 되어 의주(宜州: 지금의 德源)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상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형부상서·한림학사에 오르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취하였다. 이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 1232년 강화천도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正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하였으며 일반행정에도 뛰어나 여러가지 재능을 겸비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시사(詩詞)가 청신하고 당대에 유행하는 시부를 잘하여 세상에서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칭송하였고, 서체는 예서에 뛰어났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