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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년(중종 9)∼1583년(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경유(景裕). 아버지는 호조참의 헌윤(憲胤)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동지중추부사 안세(安世)의 딸이다.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하여 1522년(중종 17)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졌다. 1527년 기묘사화 때 피해자인 사림파의 김안로(金安老)가 기묘사화의 주동자였던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며 중종의 맏사위인 희(禧)를 사주하여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처음 누구의 처사인지 모르다가, 결국 무격을 좋아했던 그의 장모 혜빈 박씨(惠嬪朴氏)가 용의자로 지목을 받아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와 함께 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이때 그도 연좌되어 상주로 장배(杖配)되었고, 1533년에는 부인 혜순옹주마저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 같은해 앞과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 경빈 박씨가 사사(賜死)된 뒤 서인으로 폐출된 부인과 함께 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공주로 양이(量移)되었다. 그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횡포가 자심했던 김안로가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된 뒤 혐의가 풀려 1537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뒤 원종공신에 봉해졌고, 종실과 부마들만이 모여 벌인 백일장에서 장원, 통헌대부(通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중기의 화가. 자는 복야(福也), 호는 월봉(月峯). 출신이나 생애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 어해(魚蟹)를 특히 잘 그렸다 한다. 현존하는 작품으로 〈어해도 魚蟹圖〉·〈화훼도 花卉圖〉·〈초충도 草蟲圖〉 등을 그린 권축(卷軸)과 〈조어도 藻魚圖〉가 있다. 주로 화보(畵譜)를 보고 그린 작품들로 원체풍(院體風)의 정교하고 능숙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다.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 김해지방의 호족.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 의하면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호족으로서 김해읍에서 35리 가량 서쪽으로 창원의 경계지대에 진례성을 쌓고 그 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병(私兵)의 지휘자로서 인근지방을 지배하였다. 그는 상당히 교양이 높은 가문에서 성장하여 신라왕실에 충성을 다한 김해소경(金海小京)의 관리였거나, 아니면 신라 말기에 새로 대두한 구가야왕족의 후예 신김씨(新金氏)로서, 세력을 떨치다가 907년(효공왕 11) 소충자(蘇忠子)·소율희(蘇律熙) 형제가 등장하기 이전에 몰락하였다.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삼척(三陟). 대장군 김윤성(金允成)의 아들로, 관직은 전법총랑 호군전객령(典法摠郞 護軍典客令)이고 관계(官階)는 조현대부(朝顯大夫)이다. 원래 가야향(伽倻鄕) 사람으로 호군(護軍) 벼슬에 올랐다. 1284년(충렬왕 10) 왕을 호위하여 경상도(慶尙道) 가야(伽倻)에 내려가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로로 가야향(伽倻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후에 가야향(伽倻鄕)은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된다. 공양왕(恭讓王) 때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太祖)가 공양왕(恭讓王)을 폐하자 벼슬을 버리고 삼척(三陟)으로 낙향하였고, 공양왕(恭讓王)이 유폐된 근덕(根德)까지 찾아가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선왕에게 충절을 지켰다. 태조가 삼정승(三政丞)의 직을 제수하며 회유를 하였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근왕병을 모집하여 고려 왕권을 회복하려다 참형을 당했다. 1393년(태조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되었고, 왕이 서대(犀帶)를 하사하였다.
생몰년 미상. 신라 시대의 문신. 출신이나 경력은 잘 알 수 없으나, 884년(헌강왕 10) 당시의 관작은 검교원외랑수한림랑사비은어대(檢校員外郞守翰林郞賜緋銀魚袋)였다. 이해 헌강왕 명령을 받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막하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활약 하고 있던 최치원(崔致遠)을 귀국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입회남사(入淮南使)로서 당나라에 파견되 었다. 당시 사절단에는 최치원의 동생인 서원(棲遠)이 녹사(錄事)로서 동행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양주(揚州)에 도착하였다.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을 보면 이때 김인규·최치원일행의 귀국길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양주에서 회남운하를 따라 초주(楚州) 산양현(山陽縣)으로 향하였고, 그런 다음 초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서 산둥반도(山東半島) 끝 등주(登州) 등모(登牟)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참산(讒山, 현재 이름은 罘山)에 올라 산신에 제사한 뒤 황해를 건너 귀국하였다.
미상∼1142년(인종 20). 고려시대의 문신. 아버지는 문하시중 경용(景庸)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117년(예종 12) 급사중(給事中)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 겸 태자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었고, 1122년 좌간의대부가 되었다. 이해에 지주사(知奏事)로서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 나경순(羅景純) 등 31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1123년(인종 1) 동지추밀원사, 1124년 검교사공(檢校司空) 이부상서(吏部尙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1125년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이 패하자 이자겸의 아들 언(彦)이 사위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그뒤 복직되어 1135년에 호부상서로서 예부낭중 왕창윤(王昌胤)과 금나라에 가서 희종(熙宗)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뒤에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1899년∼1970년.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강서 출신.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서의 봉암보통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19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그해 5월 중퇴 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지시에 의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서약하고, 약 2개월간 비밀교육을 받은 다음, 제2차 독립운동대조직 임무를 띠고 평양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활약하였다. 그뒤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가 2차로 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내한 때 의원단에게 제출할 대한민국 인민대표의 청원서 및 대한여자계대표의 청원서 백수십통과 안창호로부터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앞으로 보내는 서신을 휴대하고, 오희문(吳凞文)과 같이 국내에 몰래 들어와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해 8월 14일 일본경찰에 의해 평양에서 붙잡혔다. 평양경찰서 및 서울헌병대 등지에서 8개월여에 걸친 구금생활을 하다가 강서경찰서로 이첩, 석방되었다. 1927년 만주로 이주하여 곡물상을 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북한에서 강무학(姜無鶴)과 같이 조만식(曺晩植)영도하에 치안대에서 공산당과 항쟁하다가, 1945년 9월 강무학과 같이 월남하였다. 1947년 서북신문사(西北新聞社)의 이사로 취임하였다. 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603년(선조 36)∼1678년(숙종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천(代天). 조부는 지평(持平) 김정일(金鼎一)이고, 아버지는 행 의영고직장(行 義盈庫直長) 봉직랑(奉直郞) 김경(金坰)이다. 1627년(인조 5)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0위로 급제했다. 어려서부터 글에 능했고, 커서는 일대의 명인들과 교유하였다. 광해조(光海朝)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동지들과 항소하는 글을 올려 논척당하고, 1627년(인조 5)에는 선비들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를 문묘에 종향토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려 물의를 일으켰다. 얼마 뒤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1636) 때, 헌릉(獻陵)의 제기(祭器)를 땅에 묻은 뒤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난을 피했다. 후에 예관(禮官)이 헌릉의 제기를 땅에 묻은 일로 상언(上言)하여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제수되었으며, 정랑(正郞)과 지방 수령(守令)을 거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에 이르렀다. 1678년(숙종 4) 76세의 나이로 졸했다.
1462년(세조 8)∼1504년(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수옹(壽翁). 아버지는 봉상시정 치운(致運)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가 되고, 14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봉상시주부를 거쳐 예조좌랑·시강원문학·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 유생들이 말을 타고 가벼운 비단옷을 입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예가 많음을 지적하여 교정시키도록 하고, 언관의 보호도 주장하였다. 같은해 사헌부에서 숙원 장씨(淑媛張氏)의 이웃집 철거문제를 간언한 일에 관련되어 이자건(李自健)·박의영(朴義榮)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임실에 유배된 뒤에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629년(진평왕 51)∼694년(효소왕 3). 신라 삼국통일기의 장군·외교관. 자는 인수(仁壽). 무열왕의 둘째 아들,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1. 가계·인품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유가서(儒家書)를 많이 읽고, 또 장자·노자·부도(浮屠: 불교)의 책도 섭렵하였다. 특히, 예서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으며, 향악(鄕樂)을 잘하여 넓은 식견과 훌륭한 기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고구려정벌에 힘썼고, 여생을 당나라에서 보내면서 양국간의 정치적 분규의 해결과 중재에 많은 공을 세웠다. 2. 출생 당시의 정세 그가 태어난 7세기 전반기는 안으로 진평왕이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라왕권이 안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나, 밖으로는 신라의 팽창에 대항하여 백제·고구려의 결속이 촉진되면서 이들의 신라공격이 적극화되고 있어 신라는 국가적 어려움을 받고 있었다. 그때, 김춘추는 김유신계열과의 결속으로 신흥세력을 이끌면서 선덕왕·진덕왕을 세워 구귀족의 반발을 무마시켜갔다. 특히, 642년(선덕여왕 11)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함락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결속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고, 이를 전기로 김춘추의 정치·외교활동에 새로운 방향을 맞게 되었다. 특히, 김춘추가 고구려원병에 실패하였고, 또 일본방문결과도 아무런 결실이 없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꾀하게 되었다. 먼저 648년(진덕여왕 2)에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대동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원조의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김문왕을 숙위(宿衛)로 머물게 하였다. 그뒤 신라와 당나라의 원활한 관계와 군사적 협조 등 여러가지 문제해결에 주역을 맡기도 하였다. 3. 백제 정벌 651년에 김문왕과 교대하여 숙위로 파견되어 당나라 조정에 머물면서 양국간의 현안문제에 있어서 중개임무를 맡게 되었다.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라는 직함으로 5년간 머물면서 백제정벌에 따른 구체적 문제를 협의하였다. 656년(무열왕 3)에는 그에 대한 준비를 위해 한번 귀국하였으나, 실제로는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따른 인사와 아울러 국내의 전략점검을 위한 태종무열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숙위는 다시 김문왕으로 교대되었고, 귀국과 동시에 압독주(押督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장산성(獐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는데, 이러한 군주생활은 유일한 국내정치활동이었다. 따라서, 그의 군주임명은 백제정벌의 군사작전이나 진격로의 최종점검이라 할 수 있다. 658년에 다시 당나라에 가서 660년 백제정벌의 당나라측 부사령관인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을 도와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정벌군을 지휘하였다. 백제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아는 작전수행의 이점이 있어 당군의 선봉을 이끌고 덕물도(德勿島: 지금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기벌포(伎伐浦: 지금의 장항)에서 백제군을 무너뜨린 뒤, 7월에 김유신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4. 고구려 정벌 이에 소정방이 의자왕, 태자 융(隆) 및 고관 93인과 1만2천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가자, 김인문도 사찬(沙飡) 유돈(儒敦)·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과 함께 숙위를 계속하였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귀국하여 고구려정벌의 시기와 방법 등을 통고하였고, 이어 7월에는 고구려정벌의 임시군을 편성하여 진주(眞珠)·흠돌(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이 되었다. 8월에 김유신의 진두지휘하에 고구려정벌을 떠나 평양근교까지 이르렀으나 일기의 불순과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당군이 퇴각하였고, 신라군도 후퇴하였다. 그때,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1만여급을 목베는 대전과를 올려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전장(田庄)·노복을 김유신과 더불어 받게 되었다. 662년 7월 제4차로 입당하여 고구려정벌의 실패를 검토하고, 먼저 시급한 백제잔적의 토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664년에는 납치해갔던 백제의 왕자 융과 함께 귀국하여 백제 구귀족의 회유 및 포섭에 나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된 융과 웅진에서 만나 천존(天存)·유인원(劉仁願)과 함께 화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은 신라의 고구려정벌을 보다 쉽게 하여, 그해 7월 군관(軍官) 품일(品日)과 함께 일선(一善)과 한산(漢山)의 군대와 웅진성의 병마를 이끌고 고구려정벌을 꾀해, 그 첫번의 전과로서 돌사성(突沙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665년에 숙위하던 김문왕이 죽자, 제5차로 당나라에 가서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을 따라 태산에 가서 봉선을 하였으며, 그때 우요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이 되었다. 666년에 그는 삼광(三光)·한림(漢林)과 숙위를 교체하고 귀국하여 이적(李勣)의 고구려정벌에 따른 신라측 협조사항을 전달하였다. 668년 6월 당나라 고종의 칙지를 가지고 당항진에 닿은 유인궤(劉仁軌)와 삼광을 맞아들여 고구려정벌의 최종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때 흠순·천존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북진을 시작하였으며, 김유신이 풍병(風病)으로 출정하지 못하자 신라군의 사령관으로서 이적의 당군과 함께 9월에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5. 대당 항쟁후의 여생 이적의 당군이 고구려의 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 20여만명과 함께 귀환할 때,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와 함께 다시 당나라에 갔다. 그때, 문무왕에게서 대각간(大角干)의 벼슬을 받고, 계속 당나라에서 숙위로 머물면서 양국의 분쟁을 조정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영토적 야욕을 목도한 신라는 백제·고구려 잔민을 앞세워 당군을 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배당운동(排唐運動)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양국간의 대립은 671년의 설인귀(薛仁貴)의 항의문과 왕의 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674년 신라가 고구려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고토를 잠식하면서 노골적인 대당항쟁을 계속하자, 당나라는 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관으로 하여 쳐들어왔다. 이에 왕은 형식상 사죄사를 보내어 김인문도 도중에서 돌아가 임해군(臨海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양국간의 정치적 분쟁도 거의 없어져 대우를 받았다. 679년 진군대장군행우무위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에 전임되고, 690년(신문왕 10) 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을 제수받았다. 694년(효소왕 3) 4월에 당나라 수도에서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유해를 사례시대의서령(司禮寺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의 호송으로 본국으로 옮겼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다음해에 서악(西岳)에서 장례를 치렀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1894년(고종 31)∼1964년.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정평 출생. 1919년 회령학교(會寧學校) 교사로 재직중에 3·1운동을 맞아 동교생을 이끌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연통제(聯通制) 조직을 지령받고 함경북도 회령에 연통제를 조직, 참사(參事)에 취임하여 군자금모금 및 정보수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8월 10일 세칭 함경북도 연통제사건의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송치,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예종 때의 문신. 1105년(예종 즉위) 여진 정벌준비가 한창일 때 동계(東界)의 장주분도(長州分道: 장주는 함경남도 정평 장곡현의 옛 이름)가 되어 활약하였다. 1112년 상서우승(尙書右丞)의 관직에 있었으나, 문종의 왕자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도생승통(道生僧統) 탱(竀)을 받들고 정변을 모의한다는 혐의를 받아 유배되었다.
1827년(순조 27)∼1903년. 조선 후기의 문신. 1862년(철종 13) 단성민란(丹城民亂)의 지도자.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성부(聖夫), 호는 단계(端磎). 아버지는 해기옹(海寄翁) 영(欞)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이다. 1846년(헌종 12)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같은해 12월에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에 장녕전별검(長寧殿別檢)으로 옮겼다가, 1848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할 길이 없고, 또 조부와 부친의 권고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1851년(철종 2)에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나 귀향하였고, 1852년에 다시 전적이 되었다가 곧 이어 사간원정언에 옮겨졌다. 1854년에 다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이때 평소에 경모하던 영남 남인계의 대학자인 유치명(柳致明)을 안동으로 가서 찾아보고,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에 힘쓸 뜻을 확고히 하였다. 이해 겨울에 온릉(溫陵) 전사관(典祀官)에 차출되었으나, 다음해에 그만두었다. 이후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 단성 단계리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 탐학한 관리들이 농민을 수탈함을 목격하고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861년부터 감사와 현감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버지와 함께 농민들을 지도하여 부정한 현감과 이서들을 축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아버지는 전라도 영광의 임자도(荏子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864년(고종 1)에 다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곧 체직(遞職)되었다. 민란 이후 새로 부임한 현감과 서리들의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나 정원용(鄭元容)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하였으며, 1867년에는 어사 박선수(朴瑄壽)에 의해 무단토호(武斷土豪)로 지목되어 강원도 고성(固城)·통천(通川)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풀려났다. 그러나 1882년에는 단성 향교의 강장(講長)에 추대되었고, 1894년에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으며 1902년에는 통정에 올랐다. 또한, 박치복(朴致馥)·허훈(許薰)·허유(許愈) 등과 함께 《성재집 性齋集》을 교정하였으며, 진양군 집현산(集賢山)에 대암정사(大嵒精舍)를 짓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저술로는 《단계문집》 28권, 《단계일기》 53년분 53책, 《언행류편 言行類編》·《이동자변 異同字辨》·《기아초선 箕雅抄選》·《관동일록 關東日錄》·《유산록 遊山錄》·《대암잡지 大嵒雜誌》·《두류만록 頭流漫錄》·《회암출처편록 晦庵出處編錄》·《일월행도기 日月行道記》·《춘추대강 春秋大綱》 등이 있다.
1479년(성종 10)∼1552년(명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정서(呈瑞). 아버지는 진안현감 기(璣)이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이 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정자·성균관전적, 예조·형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1515년 의금부도사·지평을 역임하였다. 1518년에 갑산부사를 지내고 이듬해 장령이 되었고, 사간·집의·사인·정언·내섬시정(內贍寺正) 등을 거쳐 1527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어서 동부승지·형조참의를 거쳐, 1531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시 유배중인 이종익(李宗翼)의 상소문을 전달한 것이 화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기용되었고 1534년 형조판서, 이듬해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1536년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1537년에는 특진관(特進官)·병조판서·예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540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이 되었다. 1547년 경기도관찰사, 1551년 평안도관찰사·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황정(荒政)을 바로잡아 칭송이 높았다.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가까워 주위의 빈축을 받기도 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재직시 법을 엄격히 지켜 공정히 처리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문장가. 자는 중첨(中瞻)이고, 호는 유서(幽棲)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출신이다.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다. 어려서 놀 때에도 언제나 제사 지내는 것으로 놀이를 삼았으며, 공부를 시작해서는 독서에 심취하여, 13세에 이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와 사서(四書)는 물론 경서(經書)의 깊은 뜻까지도 모두 이해하였다.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한 과거시험에 뜻을 두고 학업을 해온 결과, 각양각체의 문체(文體)에도 능통하였다. 또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지역의 선비들에게 공부할 것을 깨우쳐주기도 하였다. 철종 말년인 1862년(철종 13)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시작되어 충청·전라·경상의 삼도로 번졌던 민란과 관련하여 당시 정부에서 시정 해결해야 할 부분에 대한 대책으로 삼정책(三政策)을 건의하는 등, 민심을 다스리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1879년(고종 16)∼1926년. 독립운동가. 전라북도 임실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5적을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동지의 규합 및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거사에 필요한 자료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 궁내부대신 이용태(李容泰)를 설득하여 1천7백원의 운용비를 구한 뒤 기회를 기다리다가 1907년 3월 25일 아침, 5적신이 입궐할 때 조를 나누어 길목에서 지키다가 일제히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재차 거사를 계획하던 중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동지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인영·오기호와 함께 같은해 4월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하여 자현장(自現狀)을 내었다. 이때 그들은 의거동기를 뚜렷이 밝히면서 의사로서의 기개를 보였다. 이로 인하여 평리원의 재판에서 유배 5년형을 선고받아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85년(고종 22)∼1963년. 음악교육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음악교사로 불리고 있다.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의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였고, 그뒤 숭실중학교 재학 때에는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당시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이던 스눅(Snook)으로부터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그뒤 바이올린과 코넷을 배웠고, 오르간 솜씨가 특히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에는 1학년의 음악수업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가, 당시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들의 간청으로 본격적인 음악교사로 활약하게 되어 미국유학을 포기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면서,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191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발족되자 교사로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 중에는 홍난파(洪蘭坡)와 이상준(李尙俊)이 포함되어 있다. 홍난파는 바이올린을 그에게서 배우기도 하였다. 그뒤 서울 와이엠시에이(YMCA)에서 합창을 지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결성하였다. 경성합창단은 처음에는 남성을 중심으로 출발하였으나 뒤에 혼성합창단이 되었고, 본부는 종교교회(宗橋敎會)에 두었다. 그는 이밖에도 많은 찬송가를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세레나데〉, 헨델의 〈할렐루야〉 등 성가와 합창곡들을 번역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채보에도 공헌하였으니, 〈영산회상〉·〈여민락〉·가곡 등을 서양식 5선보로 채보하였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애국가〉의 후렴 전(前) 1절을 작사하였다고도 한다. 작품으로는 〈학도가 學徒歌〉·〈표모가 漂母歌〉·〈점진가 漸進歌〉·〈국기가 國旗歌〉 등이 있다. 초창기 서양음악 발전에 끼친 공이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초석을 담당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1775년(영조 51)∼미상. 조선 후기 무신·문신·효자. 자는 원식(元植)이며, 호는 노체정(老體亭)이다. 본관은 미상이며, 전라남도 영암(靈岩) 출신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사서(四書)는 물론 오경(五經)에까지 능통하였으며, 덕행 또한 맑고 높았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부친 공조참판공(工曹參判公)과 모친이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맬 때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입안으로 흘려보내자 10여 일이나 더 연명하였으며, 장례를 치를 때에는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1799년(정조 23)에는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24세의 젊은 나이에 위도첨사(蝟島僉使)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1805년(순조 5)에는 나라에서 그의 선정(善政)과 지극한 효성을 헤아려 무과 출신의 그를 문과에 봉하여 만경현령(萬頃縣令)에 제수(除授)하는 등, 그는 문무를 두루 겸한 출중한 인물이었다. 영암군(靈岩郡) 삼호면(三湖面)에는 그를 기리는 영모각(影帽閣)이 있었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후손들이 1974년 8월 29일 영암공원(靈岩公園) 내 동향(東向)에 신영모각(新影帽閣)을 세워놓고 그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학행(學行)을 기리고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화평부(化平府: 지금의 光州) 출신. 아버지는 중찬(中贊)을 지낸 지숙(之淑)이다. 충숙왕 때 호군(護軍)을 거쳐, 1324년(충숙왕 11)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밀직사로 있을 때 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대언(代言) 경사만(慶斯萬)과 함께 왕의 환국을 원나라 왕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왕과 적대관계에 있던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혔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밀직사·찬성사(贊成事) 등을 역임하였고, 충숙왕이 죽은 뒤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다시 심양왕 일파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즉위초에 시종한 공으로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장. 본관은 선산. 전라남도 보성 출신. 1592년 임진왜란 때 여도권관(呂島權管)으로서 이순신(李舜臣)의 지휘 아래 좌척후장(左斥候將)이 되어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참전하여 왜선 1척을 쳐부수고, 이어 당포해전(唐浦海戰)때는 우별도장(右別都將)으로 크게 활약하고, 제3차 한산해전(第三次閑山海戰)과 1594년 3월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때는 우척후장(右斥候將)으로 참전하는 등 항시 앞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벌이 낮고 중앙에 밀어주는 세력이 없어서 벼슬이 훈련부정(訓鍊副正)에 올랐을 뿐이었다. 이에 이순신이 조정에 장계하여 포상을 청하기도 하였다. 1597년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중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자,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뒤에 현감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