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여해(汝該)
    만은(晩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64(현종 5) - 1722(경종 2)
    본관
    부안(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일좌(金日佐)에 대하여

    1664년(현종 5)∼1722년(경종 2).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여해(汝該)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출신지도 부안(扶安)이다. 고조부는 진사(進士) 김응별(金應鱉)이고, 부친은 김근(金瑾)으로, 삼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형은 김석좌(金碩佐)와 김익좌(金益佐)이다. 1690년(숙종 16) 경오식년생원시 3등에 13위로 합격하였으며, 1693년(숙종 19) 계유식년문과시 을과 7위로 급제한 후, 관직은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공조좌랑(工曹佐郞)·이조좌랑(吏曹佐郞)·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외직으로 운봉현감(雲峰縣監)·회덕현감(懷德縣監)·횡성현감(橫城縣監)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그는 눈부신 공적을 많이 쌓았다. 타고난 기개와 도량 또한 매우 넓었으나, 어려서는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공부에 마음을 두기로 결심한 후에는 학문에 깊이 정진하여 문장 또한 뛰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과도 서신으로 문안 인사를 나눌 정도의 교유 관계를 가졌다. 사돈 박광일의 문집 《손재집(遜齋集)》에는 김일좌에 대해 ‘문덕과 재능을 겸비하였다.(文德兼才能)’는 내용이 담긴 만시(輓詩)가 실려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699년(숙종 25) 3월 19일 기사에는 호남(湖南)의 감시(監試) 때에 운봉현감 김일좌가 같은 고향의 유생(儒生)들을 시험장소로 데리고 가서 4명이나 합격시켜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킨 죄를 물어 감옥에 가뒀는데, 당시 가뭄이 심함을 안타깝게 여겨 처벌받지 않고 석방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자식으로 순천(順天) 박광일(朴光一)의 아들 박중거(朴重擧)에게 시집보낸 딸이 있다.

  • 진삼(晋三)
    우금당(友琴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59(효종 10) - 1703(숙종 29)
    본관
    의성(義城)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일진(金日晋)에 대하여

    1659년(효종 10)∼1703년(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진삼(晋三), 호는 우금당(友琴堂). 할아버지는 지평 지남(地南), 아버지는 통덕랑 팔주(八柱)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숙하였으며, 특히 변려체(騈驪體)에 재능이 뛰어났다. 1692년(숙종 18) 상경하여 폐비되어 있던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예를 표하고, 과거에서의 부정을 비롯한 폐정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에 의하여 무산으로 유배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그뒤로 교유를 끊고 거문고와 책을 벗하며 살았다.



  • 시호
    양평(良平)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1340(충혜왕 복위 1) - 1396(태조 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입견(金立堅)에 대하여

    1340년(충혜왕 복위 1)∼1396년(태조 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복산(福山)사람으로, 아버지는 원나라의 순방만호(巡訪萬戶)를 지낸 어진(於珍)이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할 때, 대호군으로 어가를 호종한 공이 있어 이등공신이 되었다. 1371년에 왜구가 예성강에서 병선 40여척을 태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안산(安山)에 장류(杖流)되었다. 1383년(우왕 9)에 원수가 되어, 평창·원주·영주·순흥·횡천 등지에서 왜구행세를 하며 약탈을 하던 화척·재인 등 50여명을 죽였다. 또 홍천현을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으며, 1388년 왜구의 침입이 점점 심해지자 왕의 명령으로 한양에 가서 세자와 비(妃)들을 호위하였고, 1391년(공양왕 3)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명나라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를 거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평(良平)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생
    김입지(金立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신라의 유학생·문장가. 〈창림사무구정탑원기 昌林寺無垢淨塔願記〉와 〈성주사비문 聖住寺碑文〉의 찬자(撰者). 825년(헌덕왕 17)에 입조사(入朝使) 김흔(金昕)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한 김윤부(金允夫)·박양지(朴亮之) 등 12인의 유학생 중 한 사람이다. 이들은 당나라의 수도에 머물면서 숙위하고 국자감에 입학하면 홍로사(鴻臚寺)에서 양식을 대줄 것과, 먼저 유학하고 있던 최이정(崔利貞)·김숙정(金叔貞) 등을 돌려보내주기를 청하니 당나라에서 들어주었다. 855년에는 한림랑(翰林郞)으로 추성군태수(秋城郡太守)에 있으면서 〈성주사비문〉을 제찬(制撰)하는 등, 9세기 중엽에 문한(文翰) 계통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그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간 김윤부·박양지와 더불어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 현석(玄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0(광무 4) - 1965()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잉석(金芿石)에 대하여

    1900년∼1965년. 불교학자. 호는 현석(玄石). 전라남도 승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순천 송광사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고, 중앙중학(中央中學)을 졸업한 뒤 일본 동경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예과에 들어가서 1928년에 수료하였다. 1931년 경도(京都)의 류고쿠대학(龍谷大學) 문학부를 졸업 한 뒤 귀국하여 보성중학과 혜화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부터 동국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서무처장·도서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이 되었고, 1963년에는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생을 불교학연구에 몰두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특히 화엄학(華嚴學)과 삼론학(三論學)의 교리에 밝았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불교학개론》·《화엄학개론》이 있으며, 논문은 〈현수교학(賢首敎學)에 있어서의 연성이기론(緣性二起論)〉·〈삼론학의 진리성과 그 역사성〉·〈불타와 불교문학〉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자(金資){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권신. 1322년(충숙왕 9) 정월 밀직사(密直使) 임서(任瑞)와 함께 대호군(大護軍)으로 성절부사(聖節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밀직사가 되었다. 이듬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순제(順帝)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1339년 조적(曺頔)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가자 국정이 공백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때 순제에 의하여 김지겸(金之謙)과 함께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임시로 나라 일을 맡게 되고, 이어 경화공주(慶華公主: 충숙왕비)에 의해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28(세종 10)
    본관
    언양(彦陽)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金赭){2}에 대하여

    미상∼1428년(세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 수문하(守門下) 위열공(威烈公) 취려(就礪)의 후손, 좌정승 부원군 윤(倫)의 증손이고, 부사 가기(可器)의 손자이다. 고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조선이 개국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서훈된 수익(受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홍의(鄭弘義)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진사시에 급제, 부교리를 제수받고, 1416년 이조정랑으로 문과중시에 장원, 직예문관(直藝文館)이 되었다. 1422년 부대언(副代言)이 되고 누천하여 1426년 우대언(右代言)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인정전(仁政殿) 문과전시 때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뒤에 관직이 좌대언에 이르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성주(星州)
    분류
    기타 > 의열
    김자강(金自强)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성주(星州) 화원현(花園縣) 사람이다. 나이 3세에 그 아버지를 여의고, 자라면서 어머니를 받들어 순종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의 묘를 옮겨 합장하고, 3년간 묘막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을 더 아버지를 위해 묘막에 거하고자 하니 친척들이 굳게 말리며 묘막을 불태워 버리자, 무덤 아래 엎드려 3일을 통곡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인척들이 지성스런 효도에 감동이 되어 다시 움막을 지어 주니 예전처럼 3년을 지냈다. 1413년(태종 13)에 경상도도관찰사가 그 효행을 보고하여 정표되었다.

  • 맹견(孟堅)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90(공양왕 2) - 1472(성종 3)
    본관
    강릉(江陵)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갱(金子鏗)에 대하여

    1390년(공양왕 2)∼1472년(성종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맹견(孟堅). 증조부는 김후(金珝)이고, 조부는 김탄지(金坦之)이며, 부친은 현감(縣監) 김지(金輊)이다. 모친은 전공총랑(典工摠郞) 고첨(高瞻)의 딸이고, 처는 신주감무 경주최씨 최청(崔淸)의 딸이다. 1411년(태종 14) 갑오식년문과(甲午式年文科)에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1421년(세종 3)에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와 춘추관 관직을 겸대(兼帶)하였다. 1422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는데, 당시 큰비가 내려 성안의 내와 개천이 흘러 넘쳐 물가의 인가가 표류한 것이 많으므로, 임금의 명을 받아 표류 침몰한 상태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았다. 1425년 다시 검찰에 제수되었고 예조좌랑(禮曹佐郞)·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를 거쳐 1426년에 이조좌랑(吏曹左郞)이 되었고, 그 후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사헌부우헌납(司憲府右獻納)·지제교(知製敎)·하정서장관(賀正書狀官)·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호조(戶曹)·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부모의 노환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정선군수(旌善郡守)로 나갔다. 1430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녕대군(永寧大君)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것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해 성개(成槪)의 노비사건을 오래도록 보고하지 않았던 관계로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1436년 다시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복직되어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직보문각(直寶文閣)·평안도경력(平安道經歷)·한성부(漢城府)와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직예문관(直藝文館)을 역임하고, 1445년에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가 학교를 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460년(세조 6)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양주(楊州) 풍양(豊壤)에 퇴거하였다. 1462년 8월 어가가 양주 유포(柳浦)에 이르자 임금에게 홍시를 올리고 옷 1령, 어육 등의 물건을 하사 받았다. 성품이 엄정하고 청렴 신중하여 명망이 높았다. 신도비와 묘는 남양주(南楊州) 진건면(眞乾面) 배양 1리에 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김백형(金伯衡)은 1447년(세종 29) 정묘식년사마시(丁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기축추장문과(己丑秋場文科)에 을과 3등으로 급제, 김중형(金仲衡)은 1457년(세조 3) 정축별시문과(丁丑別試文科)에 정과 1등으로 급제, 김계형(金季衡)은 1466년(세조 12) 병술고성춘시문과(丙戌高城春試文科)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 이계(而啓)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00(선조 33) - 1671(현종 12)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학 > 문필가
    김자건(金自鍵)에 대하여

    1600년(선조 33)∼1671년(현종 12).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계(而啓). 좌찬성(左贊成) 김극복(金克福)의 후손이며, 부친 김덕린(金德麟)의 아들로 태어났다. 1656년(효종 7) 재학(才學)으로 추천을 받아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으며, 후에 빙고별검(氷庫別檢)이 되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성주(星州) 사람 이명진(李名鎭)이, 자신의 처형(妻兄)인 김고(金杲)가 김고의 형 김영(金榮)과 김고의 처형제인 변탄(卞䋎) 형제와 김자건·유여성(兪汝成)·유성하(柳成廈)·정덕승(鄭德升)·조성(曺成) 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며 본도(本道)의 감사에게 밀고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은 왕에게까지 감사가 치계하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18일 인조(仁祖)는 도사(都事)를 직접 보내서 잡아들이게 하고는 추국청까지 설치하고 심문을 하였으나, 모든 사건이 거짓밀고였음이 밝혀져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제18권 부록(附錄) 〈문인록(門人錄)〉에 의하면 김자건은 학자이자 문신(文臣)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김집을 사계 선생처럼 섬겼던 문인(門人)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재되어 있는 《기기재집(棄棄齋集)》은 김자건의 증손 김상연(金尙埏)의 시문집(詩文集)으로, 〈증조고빙고별첨부군행장(曾祖考氷庫別檢府君行狀〉에는 김자건의 행장이, 〈증조고빙고별첨부군유사(曾祖考氷庫別檢府君遺事)〉에는 김자건의 옛 일들을 적은 글이 실려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류(金子槱)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때의 문신. 1126년(인종 4) 위위경(衛尉卿)으로 형부낭중(刑部郞中) 유덕문(柳德文)과 함께 금나라가 고려의 보주(保州)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한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수행원이 금인(金人)과 싸워 도부서(都部署)에 잡혀 문책받음으로써 이듬해 귀국하여 면직되었다.

  • 순중(純仲)
    상촌(桑村)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1351(충정왕 3) - 1413(태종 13)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수(金自粹)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오(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받았다. 우왕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시(金自視)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부친은 목사(牧使) 김대(金玳)이다.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이 되었으나, 박습동(朴習同)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하나, 죽임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25(세종 7) - 1457(세조 3)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완(金自琓)에 대하여

    1425년(세종 7)∼1457년(세조 3).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출신이다. 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高麗椎忠靖難定遠功臣) 삼중대장첨의(三重大匡僉議) 중찬세자사(中贊世子師) 상락군(上洛君) 개국공충열공(開國公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8세손이다. 고조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평장사(平章事) 상락군(上洛君) 김앙(金昻), 증조부는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김구용(金九容), 조부는 성천부사(成川府使) 김명리(金明理)이고, 부친은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중서(金仲舒)로 중훈대부(中訓大夫) 합천군사(陜川軍司) 김초(金礎)의 딸 김씨(金氏)와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초(金礎)이다.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좌의정(左議政)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壤節公) 한확(韓確)의 딸이다. 덕종의 비(妃)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처제이며, 성종대왕(成宗大王)이 처조카이다. 관직은 음직(蔭職)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공조좌랑(工曹佐郞)·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역임하였다. 1484년(성종 15) 그의 처 청주한씨가 죽자, 부조로 쌀·콩 아울러 40석, 관곽(棺槨)과 초둔(草芚) 10번(番), 송지(松脂) 3두(斗), 종이 100권, 석회(石灰) 40석, 정포(正布) 20필, 공석(空碩) 60번, 연육폭 유둔(連六幅油芚) 3장, 청밀(淸蜜) 10두, 진말(眞末) 3석, 기름 20두를 그 도(道)에서 보내어 주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다. 또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전라감영(全羅監營)에 명을 내려 장례부의(葬禮賻儀)를 보내주었다. 아들 김윤강(金允崗)·김윤정(金允精)·김윤경(金允勍) 삼형제를 두었다. 묘소는 전라도(全羅道) 완주군(完州郡) 고산면(高山面) 서봉리(西峰里) 소농골에 있으며, 묘소 앞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승 원임 규장각직각(秘書院丞原任奎章閣直閣) 송규헌(宋奎憲) 짓고,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이우면(李愚冕)이 글씨를 쓴 비석이 있다.

  • 경둔(敬遯)
    덕암(德庵)
    시호
    정숙공(貞肅公)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자은(金自隱)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둔(敬遯), 호는 덕암(德庵). 고려시대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운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이다. 본디 힘이 출중하였고 양궁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선조(宣祖) 때 무과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주(慶州) 문천(汶川) 진영(陣營)과 영천(永川)·울산(蔚山)·양산(陽山) 등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녹선 되었고,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제수되었다. 현종(顯宗) 때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의(金子儀)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의종 때의 문신. 1147년(의종 1)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장하였다. 1150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고, 이듬해 간관으로서 대궐에 엎드려 시국에 관한 일을 3일 동안이나 간언하였으나, 회답이 없으므로 처벌해주기를 요청하고 집무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왕이 불러 위로하고 타이르며 다시 일을 볼 것을 명하였으나 명령을 받들지 않고 물러나왔다. 1152년에는 예부상서에 올랐다. 성격이 굳세고 바른말을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왕이 금주할 것을 권고할 정도로 술을 잘하였고, 문장에도 능했다 한다.

  • 성지(成之)
    낙서(洛西)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88(선조 21) - 1651(효종 2)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점(金自點)에 대하여

    1588년(선조 21)∼1651년(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 아버지는 함()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1. 정계활동과 관력 음보로 출사하여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아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반정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하여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게 되자, 그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인의 인사들을 죽이는 일을 주장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절도정배(絶島定配)당하였다. 2. 권력기반 구축 그 이후 공신세력의 권력추구와 패전에 대하여 극심한 공격을 가하는 일반사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부분의 공신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사류들은 인조에 의하여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하여 인조의 의구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듯하며,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무리들과 결탁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3. 반(反)사림사회 행동 및 평가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하여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에서는 즉시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釴)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瀗) 등도 각자의 직에서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궁인
    김자정(金子廷){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환관·무신. 1268년(원종 9) 임연(林衍)이 권신 김준(金俊)을 살해할 때 그 모의에 가담하여 아우 자후(子厚)로 하여금 김준의 아우 충(冲)을 죽이고 그 일당들을 해산하게 하였으며, 그 공으로 벼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세자 심(諶: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온 뒤 대장군이 되었다. 1277년(충렬왕 3)에 친종장군(親從將軍)이 되어 방수군(防守軍)을 인솔하고 탐라에 부임함으로써 환관으로는 처음으로 지방에 출사(出使)하였다. 이듬해 장군 차득규(車得圭), 지후(祗候) 윤해(尹諧)와 더불어 별감이 되어 감찰별감(監察別監)과 함께 태부(太府)의 세입을 여러가지로 조사하여 경비를 줄이고자 하였으나 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1279년 사패를 사칭하여 점령한 전토를 신흥창(新興倉)에 몰수당하기도 하였다. 그뒤 1281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85년에 상장군으로 동경부사(東京副使)가 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정(金自貞){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진사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집현전권지정자에 제수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에 협조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뒤 승문원박사를 거쳐, 1470년(성종 1) 예조정랑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사헌부장령·승문원참교를 지내며 한어(漢語)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1474년 선위사(宣慰使)로서 대마도에 건너가 왜인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와, 1481년 노사신(盧思愼) 등과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이어 대사간을 역임하고, 148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대왜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그뒤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85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전라도관찰사·대사헌·개성유수를 지내고, 1492년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뇌물수뢰 혐의로 탄핵을 받고 곧 동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491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하정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7년(연산군 3) 지의금부사로 무오사화를 처리하여 논공행상되었고, 그뒤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어학, 특히 한어에 능하여 외교업무에 공이 많았다.

  • 원명(元明)
    일계(逸溪)
    시호
    문정(文靖)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67(공민왕 16) - 1435(세종 17)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자지(金自知)에 대하여

    1367년(공민왕 16)∼1435년(세종 17).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원명(元明), 호는 일계(逸溪). 밀직제학(密直提學) 도(濤)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1404년(태종 4) 집의가 되고, 1408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뒤 1418년 호조참판, 이듬해에 형조참판이 되고,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원주목사가 되고, 1423년(세종 5)에는 평안도관찰사, 1428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마침 동지총제(同知摠制) 성개(成槩)의 노비에 대한 오결사건(誤決事件)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형조의 기구확대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파직당하였다. 만년에는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가 되었다가 1434년 68세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이 뛰어나 음양(陰陽)·복서(卜筮)·천문·지리·의약·음률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배불론자(排佛論者)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상(喪)을 《주자가례》에서 따르도록 여러 아들에게 유언할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