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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고려 숙종 때의 무신. 1103년(숙종 8)에 대장군 고문개(高文蓋)·장홍점(張洪占)·이궁제(李宮濟) 등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최사추(崔思諏)에게 적발되어 유배당하였다.
1412년(태종 12)∼1489년(성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안이(安而). 서운관정(書雲觀正) 김완(金緩)의 손자이며 집의(執義) 김질(金晊)의 아들이다. 1429년(세종 11)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소문전직장(昭文殿直長)에 특배(特拜)되고 이어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지평(持平)·병조정랑(兵曹正郞)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영흥(永興)·정평(定平) 양도호부사(兩都護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외직인 성주(星州)·나주(羅州)·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이어 강원도(江原道)·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에 서울 사직단(社稷壇) 북쪽 도성(都城)이 무너진 것을 보고 이명민(李明敏)과 함께 도성수축(都城修築) 감독관이 되어 경기(京畿)·충청(忠淸)·전라도(全羅道)의 선군(船軍)을 1회에 1,000∼2,000명씩 동원하여 도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1481년(성종 12)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태사묘(太師廟)의 묘우(廟宇)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07년(융희 1)∼1977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자형(自衡)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증조부는 김경의(金景宜)이고, 조부는 매계(梅溪) 김명규(金明圭)이며, 아버지는 지남(智南) 김상우(金祥宇)이다.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경사(經史)에 관한 서적을 두루 탐독하고 성리학에 힘썼다. 그의 문집으로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에 귀화한 야인(野人). 본명은 소소(少所). 본래 평안도 강계에서 살다가 1433년(세종 15) 임하라(林哈刺)에게 잡혀갔다. 그러나 파저강(婆猪江)에서 처자를 데리고 도망하여 조선에 입국하자 세종이 기뻐하여 김자환이라는 성명을 주고, 그해 6월에 여진통사(女眞通事)에 임명하였다.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 최윤덕(崔閏德)을 따라 평안도 지방에서 여진족의 침략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246년(고려 원종 5)∼1323년(고려 충숙왕 10). 부친은 김혼(金琿)이다. 벼슬은 1303년(충렬왕 29)에 음관(蔭官)으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김원상(金元祥). 오현량(吳賢良)과 함께 간신 송방영(宋邦英) 일파를 제거하였다. 1312년(충선왕 4)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1316년(충숙왕 3)에 의흥군(義興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김자흥(金子興)은 수염이 멋있고, 몸집은 넉넉하고 하얀 피부를 가졌다. 원(元)나라에서 사신 백백(伯伯)을 보내어, 1303년에 밀직부사로, 1305년에는 지밀직사사로 원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갔던 송방영(宋邦英)의 사건을 물어왔다. 송방영이 예전에 원나라에 들어가 있을 때 충선왕(忠宣王)의 귀국을 방해하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에게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개가시키려 했던 죄목으로 당시 그 일에 협조했던 서흥후 전·김충의(金忠義)·최연(崔涓) 등을 원나라의 수도에서 참형을 처했던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김자흥은 김원상(金元祥)·오현량(吳玄良) 등과 함께 계략을 짜서 원나라 사신을 설득시켜 사직을 안정시켰다.
1427년(세종 9)∼1488년(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 증조부는 좌의정 사형(士衡), 할아버지는 승(陞), 아버지는 종숙(宗淑)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이 되고, 1454년(단종 2) 문음으로 선공감녹사가 되고, 곧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1458년(세조 4) 통례문봉례랑으로 승진하고, 1462년 종부시소윤이 되었다. 1464년 경차관으로서 경기도에 파견되어 여러 읍의 옥사(獄事)에 대한 관리실태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데 공헌하고, 행사헌장령이 되었다. 1477년(성종 8) 첨정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는 등 관료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학문에도 힘썼다. 그뒤 동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482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경기관찰사를 거쳐 1484년에 병조참판·수지중추부사, 1487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딸이 후궁이 되자 권력을 누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 때의 문신. 1013년(현종 4) 정월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고, 곧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제수받았다. 그해 6월에 거란이 연호를 통화(統和)에서 개태(開泰)로 바꾼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요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028년에도 대부경(大府卿)이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다.
미상∼1373년(공민왕 22). 고려 말기의 문신. 1371년(공민왕 20)에 과거에 급제하고 1373년에 송문중(宋文中)·권근(權近)·조신(曺信)·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응거시(應擧試: 명나라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때 마침 명나라에 진정사(陳情使)·사은사로 가던 밀직부사(密直副使) 주영찬(周英贊)을 따라 명나라에 과거를 보러가는 도중, 영광(靈光)의 자은도(慈恩島) 근해에서 풍랑으로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었다.
생몰년 미상. 신라 중기의 진골. 김장(金將)으로도 쓴다. 혜공왕의 후비 창창부인(昌昌夫人)의 아버지이다. 관등은 각간(角干)에까지 이르렀다.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에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의 문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관직을 제수받아 해주현(海州縣)의 자사(刺史)를 역임하고 당에서 일생을 마쳤다. 아들 김곡(金鵠)은 당에서 출생하여 신라 말기의 명유 최언위(崔彦撝)와 함께 당의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의종 때의 문신. 1162년(의종 16)에 병부낭중을 지냈다. 이때 이천·안협(安峽)·동주(東州)·평강(平康)·영풍(永豊)·의주(宜州)·곡주(谷州) 등지에 도둑이 횡행하였으므로, 합문지후(閤門祗候)인 노영순(盧永淳)과 함께 파견되어 이를 토벌하였다. 1164년에는 금나라가 대부감(大府監) 오골론수정(烏骨論守貞)을 사신으로 보내 의종의 탄일을 축하였으므로, 이를 사례하기 위한 사신으로 금나라에 다녀와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문제가 있던 국경지대의 둔전을 철수하도록 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충혜왕 때의 무신. 1339년(충숙왕 복위 8)에 충혜왕을 제거하고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왕으로 옹립하려던 조적(曺頔) 등의 음모가 실패하고, 조적 잔당의 참소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왕을 시종하였다. 이 시종의 공로로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이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토지 70결과 노비 5구를 받았다. 벼슬은 대호군에 이르렀다.
생몰년 미상. 신라 헌덕왕의 왕자. 817년(헌덕왕 9) 10월 조공사(朝貢使)로 당나라에 파견됐는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명주(明州: 浙江省 寧波縣) 해안에 도착하여 절동(浙東) 관리의 도움으로 당나라 서울까지 갔다.
1548년(명종 3)∼1631년(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집(集)은 그의 아들이다. 1. 가계·관력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령부참봉이 되었다. 그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의 직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에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고, 집의의 직을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여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고,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2. 학문·교육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그리고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 예학(禮學)분야는 송익필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3. 저술 인조 즉위 뒤 서얼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을 뿐더러 1만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 성덕왕 때 일본에 파견된 사신. 관등은 대나마(大奈麻)였다. 732년(성덕왕 31) 3월 쓰쿠시(筑紫)의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하였으며, 5월에는 김장손 등 40인이 일본의 도읍에 입경하여 각종 재물과 함께 앵무새·구욕새·촉구(蜀狗)·엽구(獵狗)·당나귀·노새 등의 새와 짐승을 전해주고 사신의 파견횟수에 관하여 물었다. 일본조정은 조당(朝堂)에서 향연을 베풀고 3년에 한 차례 사신을 파견하도록 하였으며, 신라왕과 사신에게 물품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6월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같은해 1월 22일에 김장손 일행이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40여일 동안 대재부에 머물러 있었던 셈인데, 이는 일종의 억류상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전해인 731년에 일본 병선 3백척이 신라의 동쪽 변방을 기습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본조정으로서도 방문목적이나 사신 일행의 인원수를 확실하게 파악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장손이 사신의 파견횟수에 관하여 물은 것도 722년에 발해가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한 사건과 동쪽 해안에 일본 병선이 출몰한 사건 등으로 표현된 당시의 정세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기적인 사신파견을 통해서 안정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1820년(순조 20)∼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의 주동인물. 아버지는 종득(宗得), 어머니는 김소사(金召史)이다. 서울 왕십리에서 출생하였고, 신촌에서 살았다. 1882년 6월 5일 도봉소(都捧所)에서 일어난 군료분쟁사건(軍料紛爭事件)으로 아들인 무위영포수(武衛營砲手) 춘영(春永)이 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과 함께 포도청에 수감되었고 곧이어 처형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6월 8일 유복만의 동생인 춘만(春萬)의 제안에 따라 무위영 군병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작성, 왕십리 행수(行首) 송창갑(宋昌甲)에게 전달하여 임오군란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그러나 7월 13일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해 피납되고 군란은 실패하였다. 군란 주모자로서 정의길·강명준·유복만·홍천석(洪千石)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8월 23·24일 양일간에 있었던 금위영(禁衛營)의 추고(推考)에서 발통수창(發通首唱: 통문을 발송하는 일을 우두머리가 되어 주창하는 것.)의 동기가 아들을 구하고자 함에 있었음을 밝혔으나, 대궐을 침범하였다고 주장한 자의 지출(指出)을 끝내 거부하면서 마침내 군란의 주동자였음을 시인하였다.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로 결안(結案)되어 8월 25일 군기시(軍器寺)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되었다.
미상∼1363년(공민왕 12). 고려말의 무신. 본관은 염주(鹽州: 지금의 延白).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하였을 때, 검교중랑장으로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나와 있다가 스스로 만호라 일컬으며 주민을 이끌고 적병 140여명을 베어 전공을 세웠다. 홍건적의 방문을 빼앗아 최영기(崔英起)·오영경(吳永卿)으로 하여금 왕에게 바치게 하고, 상장군 겸 만호에 승진,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어 홍건적을 방어하였으며, 이어 상호군이 되었다. 1363년 김용(金鏞) 일당이 행궁을 습격하여 왕을 시해하려고 난을 일으켰을 때 밀직사 최영(崔瑩)을 따라 반도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난이 평정된 뒤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농학자.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왔으나 그 재배가 영남지역에만 그치자, 그는 9년 동안의 연구 끝에 1813년(순조 13)에 이르러 선종한(宣宗漢)과 함께 다량의 고구마 종자를 기호지방에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마는 구황식물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일반서민층에 급격히 보급되었으며, 수많은 서민들을 기아로부터 구제할 수 있었다. 뒤에 고구마재배법을 정리하여 《감저신보 甘藷新譜》를 저술하였다.
생몰년 미상. 신라 헌덕왕 때 진골귀족. 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인문(仁問)의 7세손. 할아버지는 주원(周元)이며, 아버지는 종기(宗基)이다. 822년(헌덕왕 14) 반란을 일으킨 헌창(憲昌)과는 숙질간이다. 816년(헌덕왕 8) 1월 숙부인 헌창의 뒤를 이어 파진찬(波珍飡)의 관등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817년 1월 면직되었다.
1803년(순조 3)∼1860년(철종 11).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치구(穉久)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좌명공신(佐命功臣) 재숙공(齋肅公) 김균(金菌)의 후손이다. 고조는 충의군(忠義軍) 김처호(金處豪), 증조는 김논(金碖). 조부는 김낙득(金樂得)이며, 부친은 김성훈(金星勳)이며, 외조부는 연안(延安) 이학경(李學敬)이다. 처부는 심종주(沈宗注)이며, 부인은 풍산심씨(豊山沈氏)이다. 관직은 조상들의 공덕으로 과거를 치루지 않고 음직(蔭職)으로 종묘대제 때 제향(祭香)을 받들거나 술잔을 씻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는 재랑(齋郞) 직을 받은 뒤에 봉사(奉事)·직장(直長)·별제(別提)·감찰(監察)·장녕전령(長寧殿令)을 거쳐, 회인현감(懷仁縣監)에 이르렀다. 그는 현감 직을 맡으면서 이미 관행이 되어버린 폐단을 하나둘씩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자 사사로운 청탁들이 사라지고, 관리들의 비리 또한 사라져갔다. 그가 부임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서 마을에는 교화(敎化)가 넘쳐날 정도로, 고을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베풀어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었다. 관리들 역시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깊이 존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몇몇 관리들은 그가 관리들의 비리 척결을 한다며 무리한 지휘를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거칠게 대항하였다. 그는 결국 정기적으로 집무성적을 평가 받는 고과(考課)에서 나쁜 점수를 받는 받아 현감 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아들 김기상(金基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