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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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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경임(景任)
    간장(間藏)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광산(光山)
    분류
    기타 > 은사
    김재형(金在亨)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임(景任), 호는 간장(間藏). 증조부는 김복택(金福澤)이다. 증조부 김복택은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소론 출신인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노론 4대신을 무고(誣告)한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로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 그후 1724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영휘전참봉(永徽殿參奉)에 임명되으나, 신임사화 때 노론파의 대다수가 죽었는데도 유배만 당하였던 사실과 신임사화를 비난하던 일로, 영조의 비위에 거슬려 1740년 투옥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죽었다가, 후에 신원(伸寃)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집안에 고통이 따르고 화(禍)가 극에 달아, 김재형(金在亨)은 과거 시험에도 응시하지 못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과재(過齋) 정만석(鄭晩錫)의 문인(門人)이다.



  • 시호

    이칭
    김호건(金胡建)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14() - 1976()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호(金在浩)에 대하여

    1914년∼1976년. 독립운동가. 일명 호건(胡建). 전라남도 나주 출생. 1933년 중국 상해에서 온 정의은(鄭義恩)과 같이 난징(南京)으로 가 의열단(義烈團)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 항일운동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 협력하였다. 1937년 7월 이후 중일전쟁 당시 동지들과 제2전구(第2戰區) 산시성(山西省) 일대에서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과 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43년 3월에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실무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한편,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의 잔무를 정리하고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2(고종 19) - 193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재홍(金在洪)에 대하여

    1882년(고종 19)∼1938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군서면(郡西面) 해창리(海倉里) 출신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기(書記)로 재직하던 중, 1919년 4월 10일에 일어난 영암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근무하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와 《독립신문》, 〈독립가〉, 〈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한 후 영암 장날에 시위대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1990년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수오재(遂吾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67(고종 4) - 1939()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재홍(金在洪)에 대하여

    1867년(고종 4) 12월 2일∼1939년 1월 13일. 조선 말기 유학자. 호는 수오재(遂吾齋)이고, 전라북도 남원(南原) 두동(杜洞)에서 출생하였다. 가은공(稼隱公)의 7세손으로, 조부는 강암공(剛庵公)과 모친 조씨(趙氏) 사이에 태어났다. 처부는 이승갑(李承甲)이다. 7세 때 취학(就學)하여 한 번 보면 오래도록 기억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조부 강암공이 기뻐하며 반드시 학문에 성취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14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치고, 이후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다. 부인은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다. 저술로는 시문집 《수오재선생문집(遂吾齋先生文集)》목활자본 19권 10책이 있는데 1951년 아들 김종가(金種嘉) 등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권말에 김종가의 발문이 있다. 묘지는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팔덕면(八德面) 청계리(淸溪里) 연대산(蓮臺山)의 곤좌간향(坤坐艮向)에 자리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3(광무 7) - 195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재훈(金載勳)에 대하여

    1903년∼1951년. 바이올린 연주가·작곡가·음악교육자. 함경남도 흥상(興上) 출생. 독일의 하노버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고, 1934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주최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였다. 1936년에는 이승학(李升學)과 함께 경성음악학교(京城音樂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3회 졸업생을 배출한 뒤 1943년 폐교되었다. 1940년 이후 전쟁중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유지, 발전시키면서 암흑기의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작품으로는 1937년에 발표된 합창곡 〈추억〉, 그리고 바이올린 독주곡인 〈비가 悲歌〉 등이 있다.

  • 학광(學光)

    시호
    충민(忠愍)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12(중종 7) - 1547(명종 2)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저(金䃴){3}에 대하여

    1512년(중종 7)∼1547년(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학광(學光). 아버지는 이조참판 세필(世弼)이다. 1539년(중종 34)에 유학으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뒤 검열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진휼하였고, 인종 초년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지평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 3)에 다른 10여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김저(金貯){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역관(譯官). 1271년(원종 12) 원나라 비서감 조양필(趙良弼)을 따라 역어별장(譯語別將) 서칭(徐偁)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그 이듬해 돌아왔다. 그 공로로 원나라 왕의 명에 의하여 교위에서 낭장에 올랐다. 1281년(충렬왕 7)에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2차로 일본을 정벌할 때 통역으로 원수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89(공양왕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저(金佇){2}에 대하여

    미상∼1389년(공양왕 1). 고려 말기의 무관. 시중 최영(崔瑩)의 생질이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최영을 따라 오랫동안 군사에 종사하였다. 1389년에 최영의 측근인 전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주에 가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李成桂)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곽충보(郭忠輔)와 모의하여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가 팔관회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 있자,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였다가 문객에게 잡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대간의 문책에 따라 변안열(邊安烈)·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왕안덕(王安德)·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복위하기로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왕(昌王)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 그해 11월 옥에서 죽으므로 그 시체를 저자에서 베었다. 그리고 그의 모의에 가담한 문하평리 정지(鄭地) 등 27인은 유배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적(金迪)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충숙왕 때의 무신. 1321년(충숙왕 8)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계략으로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로 하여금 국가의 비밀을 원나라에 고해바치게 하고 왕을 참소한 까닭으로 왕이 원나라에 불리어가 4년 동안 억류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 왕을 따라 원나라에 있으면서 보좌한 공이 있었으므로 1327년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에게 충절을 바쳤던 신하들을 추론(追論)하여 윤석(尹碩)·김심(金深) 등 79인에게 공신호를 내리게 되자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이등공신에 뽑히었다.

  • 혜중(惠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18(숙종 44) - ?
    본관
    선산(善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적기(金廸基)에 대하여

    1718년(숙종 44)∼미상.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혜중(惠仲). 증조부는 김세호(金世灝), 조부는 김종상(金宗相)이고, 부친 김수규(金壽煃)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외조부는 신성(辛聖)이다. 홍이원(洪以源)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김진성(金鎭聲)을 두었다. 36세 때 1753년(영조 29) 계유(癸酉) 정시(庭試) 병과(丙科) 9위로 합격하였다. 영조(英祖)가 승지(承旨)들에게 ‘남옥(南玉)과 김적기(金廸基)와 성대중(成大中) 가운데 누가 제일 뛰어난가를 물었는데, 승지들이 김적기와 성대중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1762년 4월 11일에 김적기(金廸基)를 거제로 정배하라는 영조의 명이 있었다. 이것은 전라도에 사는 홍형보(洪亨輔)가 양향청(粮餉廳) 소속의 금당도(金塘島)에 있는 소나무를 잘라내다 팔 것을 계획하고는 거짓으로 선공감(繕工監)의 공문을 받아내려고 했었다. 이 때김적기가 감역(監役) 서명철(徐命喆)과 짜고서 금당도의 소나무를 내가도 된다는 공문을 임의로 내주었던 사건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전(金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증조부는 참봉(參奉) 김덕무(金德懋)이고, 조부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김권(金權)이고, 부친은 군수(郡守) 김흥상(金興祥)이다. 병자호란 때 빙고별제(氷庫別提)로서 남한산성의 사정을 물으려다 청나라 병사를 만나 결전 중에 순국하였다. 그의 아들 김중명(金重明)이 부친의 시신을 양주(楊州) 금촌(金村)으로 짊어지고 와서 매장하였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삼패동에 있다.



  • 시호
    익대(翊戴)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271(원종 12)
    본관
    언양(彦陽)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전(金佺){1}에 대하여

    미상∼1271년(원종 1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취려(就礪)이다. 1258년(고종 45)에 좌복야(左僕射), 1260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62년에 추밀원사, 이듬해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다. 1268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영(崔瑩)과 함께 단련조병도감판사(團練造兵都監判事)에 제수되었으며, 1271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한의사
    김전(金琠){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의관(醫官). 당시 유생들에 의한 배불론이 일어나 유교와 불교가 심각하게 대립하자 1391년(공양왕 3) 왕에게 글을 올려 태조 이래 고려의 창업은 사원을 영조하고 불상을 만들어 불교를 장려한 때문이라고 불교옹호론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일부 승려들에 의해서 자행된 타락행위와 불법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시정을 촉구하여 참된 불법을 수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의해서 부처에 아첨하고 왕을 미혹한다 하여 탄핵을 당하였고, 또 성균생원 박초(朴礎) 등으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 중륜(仲倫)
    나헌(懶軒)
    시호
    충정(忠貞)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58(세조 4) - 1523(중종 18)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전(金詮){3}에 대하여

    1458년(세조 4)∼1523년(중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나헌(懶軒). 지중추부사 우신(友臣)의 아들이다. 1472년(성종 3) 진사가 되었고, 1489년 식년문과에 장원, 예안현감(禮安縣監)·홍문관수찬을 역임했으며, 성종이 유신들로 하여금 피폐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도록 하였을 때 예안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한(典翰)이 되었으며,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당했다가 1501년 부호군(副護軍)으로 다시 서용되고, 1504년 성균관대사성에 올랐으나 갑자사화로 다시 좌천되었다. 중종반정 뒤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가 득세한 1513년에서 1519년 사이에는 지중추부사·우참찬, 이조·형조·예조·공조의 판서, 한성부판윤·우찬성 등을 역임하면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 등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반대론을 전개했다. 1518년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신용개·남곤(南袞) 등과 함께 《속동문선》을 왕에게 찬진하였다. 1519년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남곤·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우의정을 거쳐 1520년 영의정 겸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항상 청렴결백하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후세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내■(乃■)
    의촌(義村)
    시호
    호강(胡剛)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69(고려 공민왕 18) - 1457(세조 3)
    본관
    청도(淸道)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점(金漸)에 대하여

    1369년(고려 공민왕 18)∼1457년(세조 3).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내■(乃■), 호는 의촌(義村). 조부는 무신(武臣) 원정공(元貞公) 김한귀(金漢貴)이며, 부친 문신(文臣) 김린(金潾)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가 개국 후 고려의 인재를 가려 뽑을 때 장군으로 천거되어 중용된 후 4대에 걸쳐 관로(官路)에 진출하였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까지 이르렀다. 1411년(태종 11)에 김점(金漸)의 딸이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숙공궁주이다. 태종 말년 명나라에 성절사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사신 간 최초의 인물이다. 1421년(세종 3)에 김점이 평안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뇌물을 수수 받고 치부(致富)를 한 죄에 대해 이원(李原)이 상소를 올렸다. 이때 저지른 비리로 인해서 김췌(金萃)는 김점을 잡아들여 의금부에 가두었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김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세종은 김점을 김포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더 이상의 죄는 묻지 않았다. 김점의 집안이 4대째 조정을 위해 충성을 했다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시호는 호강(胡剛)이다. 신숙주(申叔舟)의 《국조보감(國朝寶鑑)》 5권의 〈기해원년(己亥元年)〉과 변계량(卞季良)의 《춘정집(春亭集)》·〈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김점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성석린(成石璘)의 《독곡집(獨谷集)》에는 김점과 관련된 〈송판청주김점지임(送判清州金漸之任)〉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6(고종 13) - 1910()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의사
    김점동(金點童)에 대하여

    1876년(고종 13)∼1910년. 사회봉사에 헌신한 여자 의학박사이며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공한 여의사이다. 박에스터의 본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점동(點童)이다. 세례명이 김에스터였고,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박에스터는 서울 정동에서 아버지 김홍택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입학 박에스터는 선교사인 아펜셀러의 잡무를 맡으면서 일찍이 서구사상에 접했던 아버지 덕분에 1886년 11월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로 설립된 이화학당에 입학한다. 박에스터는 특히 영어에 능숙하여 이화학당의 교사로 취임한 홀 부인의 영어 통역을 맡게 되었다. 홀 부인으로부터 의료 보조원으로 일하며 의술을 배우게 된다. 1895년 박유산과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 생활 중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900년 6월 한국 여성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M.D.)를 획득하였다. 귀국하여 간호학교 설립 등 의료사업 벌인다. 뿐만 아니라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의료 인력의 보급을 위해 힘쓴다. 1910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 사달(士達)
    노봉(蘆峯)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70(현종 11) - 1737(영조 13)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정(金){6}에 대하여

    1670년(현종 11)∼1737년(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사달(士達), 호는 노봉(蘆峯). 아버지는 휘봉(輝鳳)이며, 어머니는 봉화금씨 성휘(聖徽)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문과에 급제,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이 되었고, 그뒤 사헌부감찰·경성판관(鏡城判官)·함경도사·병조정랑·옥천군수·강릉부사·사간원정언·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지방의 수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양역의 여러가지 폐단을 개선하기에 힘쓰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많이 남겼다. 경상북도 영풍군 오천서원(梧川書院)과 제주의 상현사(象賢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 4권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74(경문왕 14)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정(金正){1}에 대하여

    미상∼874년(경문왕 14). 신라 경문왕 때의 정치가. 이찬(伊飡)의 관등으로 862년(경문왕 2)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74년 1월 죽을 때까지 12년간 시중(侍中) 위진(魏珍) 등과 함께 정사를 맡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정(金精){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무신. 낭장(郞將)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1288년(충렬왕 14) 충렬왕을 정동행상서성 좌승상(征東行尙書省左丞相)으로 임명한다는 원나라 세조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뒤 1298년 1월에 대장군으로 평양후(平陽侯) 왕현(王眩)과 함께 충선왕의 책봉에 대한 사표(謝表)를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같은해 5월에는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멀리하고 조비(趙妃)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계국대장공주의 명의로 오정규(吳挺圭)와 함께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원사절(對元使節)로서의 구실을 주로 수행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68(공민왕 17)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정(金精){3}에 대하여

    미상∼1368년(공민왕 17). 고려 말기의 문신. 좌부대언(左副代言)·좌대언(左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과 함께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8년 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조린(趙璘)·김광재(金光載)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조사공이 이 사실을 자기와 평소 친히 지내고 있던 홍주목사(洪州牧使)에게 말하자, 정운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천(韓蕆)과 더불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밀고하였으며, 이춘부가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유배되었고, 신돈에 의하여 일당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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