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되고,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에 전임되었다. 이어서 병조정랑·홍문관부교리·헌납·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함과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 치죄할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치죄를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된 바 있었다. 얼마 뒤 그는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권민수와 이행이 파직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것은 곧 중앙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뒤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서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뒤 기묘사화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명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에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였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하였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여 새·짐승 등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하였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응지(凝之).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郞) 종지(宗砥)이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라도도사·곡산부사(谷山府使)를 거쳐 승문원교리가 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생몰년 미상. 자는 군중(君重). 김식(金湜)의 7세손이며, 조카로는 동중추(同中樞) 김유하(金有夏)가 있다. 숙종(肅宗) 때 동중추(同中樞)를 지냈다.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얼음 속에서 잉어를 낚아 올렸고, 눈 속에서 참외를 찾아다가 드려서 어머니 병을 낫게 해드렸다고 전해진다.
1576년(선조 9)∼1645년(인조 23). 조선 광해군·인조 때의 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훈경(勳卿), 호는 국원(菊園). 정구(鄭逑)·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먼저 정구에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배웠고, 뒤에 상주의 정경세를 따라 도학을 닦았는데,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경의(經義)의 연마에 힘쓰고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상주의 낙암사(洛巖祠)에 제향되었다.
1345년(충목왕 1)∼1419년(세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아버지는 진주목사 성경(星慶)이다. 일찍이 고려 때에 벼슬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에 찬성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지지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삼군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를 지냈는데, 인사관리를 잘하였다. 1396년(태조 5)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가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 각지의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윤으로서 방원(芳遠)에 협력하여 이를 진압,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그뒤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명나라의 사행을 회피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04년(태종 4)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1408년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역임하고, 1410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용맹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재물을 좋아하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 효소왕 때의 관리. 국보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관하던 천존고(天尊庫)의 창고지기로 근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93년(효소왕 2)에 화랑인 부례랑(夫禮郞)이 화적에게 붙잡혀간 직후 천존고에 보관중이던 피리와 현금(玄琴)도 없어졌다. 이에 창고를 지키던 김정고를 비롯한 다섯명이 투옥되었다. 그뒤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柏栗寺)의 관세음보살상 앞에 나아가 무사히 귀환할 것을 기원하여 부례랑과 승려낭도인 안상(安常), 피리와 현금을 찾을 수 있었다. 효소왕은 국보와 화랑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치하하고, 3년간의 조세를 면세하여 주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이때 김정고도 사면되었으며, 관직도 5등급 승진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조부(調府)의 관리인 사고(司庫)는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대사(大舍)에 해당하는 사람이 임명되었는데, 천존고를 지키던 그의 관등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연산군(燕山君) 때의 가객(歌客)이다. 노래와 시조를 잘하여 작품 약간이 전한다. 그 중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울세라 / 청강에 좋이 시슨 몸 더럽힐까 하노라’라는 내용의 〈백로가(白鷺歌)〉는 고려 말에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은 것이라고도 하나, 《약파만록(藥坡漫綠)》에 한역(漢譯)된 시로 인하여, 김정구(金鼎九)의 작품임이 확실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485년(성종 16)∼1541년(중종 36).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아버지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연(璉)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수 지(芝)의 딸이며, 안국(安國)의 동생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향(趙有享)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 다음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조에 달하는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그뒤 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의학 등에 밝았다. 문인으로는 정지운(鄭之雲)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을 비롯하여, 《성리대전절요 性理大全節要》·《역대수수승통입도 歷代授受承統立圖》·《촌가구급방 村家救急方》·《기묘당적 己卯黨籍》·《사재척언 思齋摭言》·《경민편 警民篇》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신. 관등은 급찬(級飡)이었다. 760년(경덕왕 19) 9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조정이 무쓰오안찰사(陸奧按察使) 등을 보내어 내조한 까닭을 묻자, 김정권 일행은 오랫동안 교린을 못하였으므로 신라왕의 명에 따라 물품을 전하고 또한 일본의 풍속·언어를 아는 자가 없어서 학어(學語) 2인을 파견하고자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조정은 전에 왔던 신라 사신들이 안하무인이었으며, 또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이 사신으로 와서 모든 일을 잘해주겠다고 하고서도 그뒤 일본에서 파견한 오노(小野田守)를 신라가 홀대한 이유를 물었으며, 신라 사신의 지위가 낮으므로 빈객으로 대접할 수 없다고 하고,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를 보내되 충실한 예를 갖추고 공물을 전과 같이 하며 외교문서의 내용을 명확히 하는 조건을 갖추어 사신을 파견하도록 트집을 잡았다. 그뒤에도 이 일을 계속 트집을 잡으므로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멀어져갔다. 그리하여 779년 사신파견을 마지막으로 일본사서에 신라 사신은 등장하지 않으며, 일본은 727년(무왕 9) 이후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인 919년(애왕 19)까지 30여회에 걸쳐 빈번한 교섭을 가지면서 선진문물 수입 통로를 발해로 바꾸었다. 이처럼 신라의 사신을 돌려보낸 것은 이러한 발해와의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1782년(정조 6)∼1847년(헌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태수(台叟), 호는 서어(鋤漁). 이조판서 상용(尙容)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익(炳翼)이다. 1813년(순조 13) 진사가 되고, 1820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다. 1822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각 지방의 부사·현감 등의 치적을 평가하여 상과 벌을 내리도록 건의하였다. 이듬해 왕세자가 섭행(攝行)하고 태묘에 제향할 때 대축(大祝)이 되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830년 대사간이 되고, 1841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45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저서에 《서어유고》가 있다.
생몰년 미상. 철종과 고종 때에 활약한 명창. 충청도 강경 출생.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金成玉)의 아들로, 철종·고종 때에 〈무숙이타령〉으로 명성이 높았다. 상궁접(삼공제비)곡조를 창시하였으며, 판소리의 곡조는 그의 가계인 김씨문중에서 거의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시조와 음률에도 정통하였고, 문하에는 명창 이동백(李東伯)이 있으며, 그의 아들인 창룡(昌龍)도 역시 판소리명창이다.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1895년 지방관제 개혁 때 강계부관찰사(江界府觀察使)를 지냈다.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에 대한 고종의 재가에 당황한 수구파의 책동으로, 1898년 11월 경무사(警務使)로 임명되어 고종의 명에 따라 이상재(李商在)·방한덕(方漢德)·남궁 억(南宮檍)·정교(鄭喬)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사무실을 수색하는 등 독립협회 탄압에 앞장섰다. 그러나 체포된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의 시위가 경무청 앞에서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같은달 7일에 파면되었다. 이후 독립협회로부터 독립협회 탄압 5흉(五凶)의 한 사람으로 규탄되었고, 독립협회의 요구에 따라 정부에 의해 같은달 17일에 체포되었으나, 독립협회 해산과 더불어 1899년 1월 풀려났다. 이어서 1900년 강원도관찰사, 1901년 법부협판(法部協辦), 1904년 경위총관(警衛總管)·경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1885년(고종 22)∼1947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정오(靜吾), 호는 겸산(兼山)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는 김주하(金柱河)이며, 어머니는 수원백씨(水原白氏)이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제대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30여 세가 되던 해에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4∼1931)을 만나 일찍이 의심을 가졌던 것들을 묻고 답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이후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따라 고금(古今)의 학술에 대해 수학하였다. 그는 매년 수십일씩 조긍섭을 방문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조긍섭이 죽은 이후, 그가 남긴 글들을 모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며 살았다. 당시의 정치 사정이 옳지 못한 것에 항상 통분(痛憤)해 하였으며, 만년에는 산수(山水)에 유람하면서 지냈는데, 멀리 만주(滿洲)에 다녀온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부인은 창녕성씨(昌寧成氏) 성범진(成範眞)의 딸이며 그 사이에 아들 김호진(金浩鎭), 김호선(金浩善)과 두 딸을 두었다.
1883년(고종 20)∼1963년. 일제강점기 유학자·관리. 자는 명우(明佑), 호는 운파(雲坡)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재예(才藝)가 탁월하였으며, 일찍부터 농촌진흥운동에 참여하여 많은 부분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향촌사회에서의 지도력을 인정받아, 1930년대 후반에는 임실군 둔남면(屯南面)의 서기(書記)로 일하였다. 또한 향교(鄕校)의 중진으로서 지역 유림들과 교유하며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운파문집(雲坡文集)》이 있다.
1898년(고종 35)∼1925.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지도읍(智島邑)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으며, 대한제국 말기 지도군수 서리(智島郡守署理)를 지낸 심재(心齋) 김병석(金炳晳)의 장남이다. 향리(鄕里)에서 양사재(養士齋)와 지명학교(智明學校)에서 수학하고, 지도보통학교(현 지도중앙초등학교)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합병되자 동경으로 건너가 동양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한 뒤 그곳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3·1운동 때는 서울과 동경의 비밀통신에 가담, 《두터운 선인(鮮人)》이란 지하신문을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들로부터 불평불만 분자인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낙인이 찍히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서 수학하는 한편, 1922년 상해 재류한인(在留韓人)의 조직체인 ‘상해한인구락부(上海韓人俱樂部)’ 의 지육부 위원(智育部委員)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조사과원으로 《대한독립운동사》 편찬에 공헌하였다. 또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있는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에서 우리나라 민족주의자들의 2세를 맡아 가르치는 데 헌신해오다, 1924년 9월 22일 26세의 나이로 이역만리에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1875년∼1964년. 판소리의 명창 겸 창극명인. 전라남도 영광 출생. 정창업(丁昌業)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조선 말기 판소리의 가선(歌仙)으로 꼽히던 박기홍(朴基洪)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닦았다. 1907년에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해산된 뒤에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그는 매우 뛰어난 명창이었지만, 지방에 묻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심청가〉와 〈적벽가〉에 매우 능하였으며, 특히 〈적벽가〉에서 ‘조자룡이 장판교싸움에서 신출귀몰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소리를 이어받은 제자는 없다.
1802년(순조 2)∼1874년(고종 11).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계중(啓重), 호는 휴각재(休殼齋). 김균(金均)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는 괴와(愧窩) 유한응(兪漢膺)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5세 이후에는 민영훈(閔泳勳)의 문인이 되었다. 43세 때인 1844년(헌종 10)에 치룬 회시(會試)에서 낙방한 다음 해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으나, 무효처리가 되자 더 이상의 과거를 포기한 채 산중에 들어가 경전(經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시문(詩文) 짓기에도 힘썼다. 이때 소재(素齋) 윤필현(尹弼鉉)과 편지글로 경의(經義)와 예설(禮說)에 관한 많은 논의들을 하며 많은 교류가 있었다. 또 홍산현령(鴻山縣令) 이배수(李培秀)와 협천군수(陜川郡守) 김용근(金龍根) 등에게도 경제지책(經濟之策)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편지글로 펼쳐 보이기도 했다. 후학들을 대할 때는 늘 언행(言行)이 정직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따뜻한 성품으로 인해서 마을 노인들에게까지도 존경을 받았다. 1876년에는 선비들의 추천으로 정려각(旌閭閣)이 건립되었으며, 1882년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詩文集)인 《휴각재유고(休殼齋遺稿)》가 1886년에 간행 되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휴각재유고》에 실린 〈매월당부도변(梅月堂浮屠辨)〉은 김시습(金時習)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항일운동가. 호는 모은(慕隱)이다.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줄포면(茁浦面) 파산리(巴山里) 출신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후 비분강개하여 순절하자, 두문불출하며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후 1910년(융희 4)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일본 천황에게 “나라를 빼앗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장문의 힐문서(詰問書)를 보냈으며,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에도 일본의 조선 병탄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스스로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한 죄인이라 자처하여 해를 가리는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다녔다.
1895년∼1968년. 독립운동가. 호는 진혼(震魂). 평안북도 용천 출신. 향리의 오암서원(梧巖書院)에서 7년간 한학을 배운 뒤,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거쳐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전문학교 재학중 항일활동을 한 혐의로 여러 차례 구금된 일이 있다. 그뒤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와 숭실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태형(苔刑) 90도를 선고받았다. 1919년 8월 전라남도 광주로 옮겨 숭일중학교(崇一中學校) 등지에서 항일교육을 펼치다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6월을 언도받았다.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원(扶韓靑年團員)인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 등과 함께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과 연락을 맺으면서 전라남도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구형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 그뒤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북경 등지를 거쳐 산시성 타이위안부(山西省太原府)로 가서 안창남(安昌男)·이용화(李容華)·정동석(鄭東錫)·노중현(盧仲鉉)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의 공명단(共鳴團)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일본의 밀정에게 붙잡혀 징역 2년6월형을 언도받고 톈진(天津)의 일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비행사 안창남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공명단장 최양옥, 단원 이선구(李善九)와 함께 1929년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한 뒤 서울 교외 망우리 근처에서 일본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은 뒤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으나, 이들을 추격한 일본경찰과 1주일여의 항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 때문에 그는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17년∼1992년. 군인·정치인. 서울 출신.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광복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했으며, 1949년 한국 공군의 초대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뒤 1957년 공군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공군사관학교 교장, 군사정전회담한국군연락장교단장, 주한(駐韓) 유엔군사령부 한국군사사절 단장,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군의 중요 간부로 활약하였다. 공군에서 예편한 직후인 1957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가, 4·19혁명으로 1960년 물러났다. 4·19혁명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5·16이후 박정희정권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의장이 되었으며, 그해에 주미(駐美)대사로 임명되어 약 1년간 재직하였으며,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1971년부터 실업인으로 변신하여 삼성물산(三星物産) 사장, 경제동우회(經濟同友會) 회장,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 부회장, 정우개발(正友開發)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약 10년간 경제인으로 활동하다가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평화통일자문회의(平和統一諮問會議) 수석부의장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하였으며, 제5공화국 말기의 정치적 과도기였던 1987년부터 1988년초까지 국무총리로 등용되었다. 제6공화국에서는 1989년부터 한일협력위원회(韓日協力委員會)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항공(航空)의 경종(警鐘)》이 있다. 오랜 군인생활 및 공직생활로 을지·충무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 광화장, 미국의 리전오브메리트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