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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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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견(時見)
    월담(月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1(명종 16) - 1619(광해군 11)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정룡(金廷龍)에 대하여

    1561년(명종 16)∼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시견(時見), 호는 월담(月潭). 선공감참봉 담수(聃壽)의 아들로서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1586년 예안현감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수송에 공이 커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607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고, 그뒤 영월군수·풍기군수·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집안의 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소학 小學》에 정력을 기울였다.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중연(仲淵)
    삼산(三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10(순조 10) - 1879(고종 16)
    본관
    문소(聞韶)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정린(金廷麟)에 대하여

    1810년(순조 10)∼1879년(고종 16).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자는 중연(仲淵)이고, 호는 삼산(三山)이다. 본관은 문소(聞韶)이며, 경상남도 합천군 노파리(魯坡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기진(金基鎭)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5살에 부친이 죽자 어린 나이임에도 크게 슬퍼하며 상례를 따랐다.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을 받고 자랐고 형들을 부처럼 섬겼다. 근면한 자세로 학문에 임하였으며 이설에 빠지지 않고 오직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만년에 독서당(讀書堂)을 짓고 족질(族姪)을 가르치는 한편 성리(性理)의 이치를 궁구하며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의 문집 《삼산문집(三山文集)》은 형 김정봉(金廷鳳)의 문집 《노구문집(魯邱文集)》과 합철(合綴)되어 《노하연방집(蘆下聯芳集)》으로 전한다.

  • 정일(貞一)
    신암(愼菴)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0(고종 17) - 1955()
    본관
    경주(慶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정만(金正萬)에 대하여

    1880년(고종 17)∼1955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정일(貞一), 호는 신암(愼菴)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화산면(華山面) 출신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김균(金菌)의 후손이다.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성리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로 1905년(광무 9) 을사조약 체결에 비분하여 순절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시세를 한탄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꺼려했으며, 오직 초야에 묻혀 후학을 키우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 이경(而敬)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0(명종 15) - 1612(광해군 4)
    본관
    언양(彦陽)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정목(金庭睦)에 대하여

    1560년(명종 15)∼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이경(而敬). 아버지는 부사 건(鍵)이다.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2년 호조정랑·헌납 등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교섭에 많은 일을 담당하였다. 1595년 이후 상원(祥原)·성천(成川)·선천(宣川) 등의 지방관을 맡았을 때는 군사훈련을 잘 시켜 상을 받기도 하였으나, 방종한 생활로 처벌을 받았다. 1600년 비변사에 의하여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으며 다음해 사예·내자시정에 임명되었다. 가주서로 재직할 때에 기록이 서투르고 글씨가 졸렬하다는 이유로 선조의 명에 의하여 물러난 적이 있다. 1612년 장흥부사(長興府使) 재직시 호서시(湖西試)의 참시관이 되어 제출한 논제가 임해군(臨海君)의 옥사를 빗댄 것이라 하여 김시양(金時讓)·윤효선(尹孝先)과 함께 대북정권에 의하여 유배되어 유배지 회령에서 죽었다.

  • 이운(而運)
    과재(過齋)
    시호

    이칭
    두묵(斗默)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39(영조 15) - 1799(정조 23)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정묵(金正默)에 대하여

    1739년(영조 15)∼1799년(정조 2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 초명은 두묵(斗默), 자는 이운(而運), 호는 과재(過齋).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위재(偉材)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참봉 휴경(休耕)의 딸이다. 재당숙인 기재(驥材)에게 입양되었으며, 양어머니는 진주유씨(晋州柳氏)로 전적(典籍) 상휘(尙徽)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업에도 충실하였으며, 능히 과장(科場)에 나갈 수 있었으나 할아버지인 운택(雲澤)이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벼슬하기를 꺼려 학문에만 힘썼다. 1780년(정조 4) 도천(道遷)으로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경연서연관(經筵書筵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그때 족친인 김하재(金夏材)의 역변(逆變)이 있었으므로 끝내 사퇴하였다. 그는 경전 외에도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성학집요 聖學輯要》를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성리학 예설(禮說)에 밝았으며, 《남당집 南塘集》 중 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 등에 관한 한원진(韓元震)의 논술이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본뜻에 많이 위배됨을 지적, 고증을 들어 변증하는 〈규도수록 圭刀隨錄〉을 저술하였다. 저서로는 《과재유고》 11권 5책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7(고종 24) - 1935()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김정문(金正文)에 대하여

    1887년(고종 24)∼1935년. 판소리 명창. 남원 출신으로 주천면에서 살았다. 유성준(劉成俊)과 장자백(張子佰)의 생질이다. 처음에는 외숙인 유성준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송만갑(宋萬甲)의 고수로 있으면서 그의 소리를 익히게 되었고, 결국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송만갑의 영향으로 동편제(東便制) 소리를 하였으나, 서편제(西便制) 김채만(金采萬)의 소리를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운 뒤, 동편제에 서편제의 맛을 섞어서 독창적인 소리를 하였다. 그는 타고난 재주는 적었으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마침내 명창이 되었고, 판소리뿐만 아니라, 창극에도 솜씨가 있어 서울에 올라와서는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여 크게 인기를 모았다. 그는 특히 〈흥보가〉·〈심청가〉·〈적벽가〉를 잘하였고 단가인 〈홍문연가 鴻門宴歌〉도 잘 불렀다. 남원에 있을 때는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그 가운데 박녹주(朴綠珠)·김준섭(金俊燮)·강도근(姜道根)·박초월(朴初月) 등은 당대 명창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소리는 동편제에 기초를 두고 서편제의 맛이 나는 가락을 함께 구사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동편제라고는 할 수 없다. 현재 음반으로는 〈춘향가〉 몇 대목과 단가 〈홍문연가〉가 남아 있다.

  • 백연(伯淵)
    노구(魯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8(순조 8) - 1851(철종 2)
    본관
    의성(義城)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정봉(金廷鳳)에 대하여

    1808년(순조 8)∼1851년(철종 2).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자는 백연(伯淵)이고, 호는 노구(魯邱)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경상남도 합천군 노파리(魯坡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기진(金基鎭)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예의를 알았다. 7세에 부가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을 예법에 맞게 치렀다. 부친상을 치르는 3년간 오직 죽만 먹었다. 동생 김정린(金廷麟)을 잘 보살피는 한편 가문의 내치 또한 남다르게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성현의 도리를 궁구하였고 일체 이설(異說)에는 눈을 두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독서를 게울리 하지 않았다. 행실과 학행 또한 뛰어나 인근 고을에 명성이 있었다. 문집 《노구문집(魯邱文集)》은 동생의 문집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합철(合綴)되어 《노하연방집(蘆下聯芳集)》으로 전한다.

  • 덕중(德仲)
    유촌(柳村)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48(인조 26) - 1707(숙종 33)
    본관
    강진(康津)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정삼(金鼎三)에 대하여

    1648년(인조 26)∼1707년(숙종 33).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덕중(德仲), 호는 유촌(柳村)이다. 본관은 강진(康津)이며,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고현내(古縣內) 출신으로, 이는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칠보면(七寶面) 원촌리(院村里)와 시산리(詩山里)에 걸친 지역이다. 아버지는 김석지(金錫祉), 형은 김우삼(金禹三)이다. 1693(숙종 19년)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8위로 합격하였다. 1704년(숙종 30)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배향하는 서원을 창평(昌平)에 창건할 당시,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소두(疏頭)가 되어 이 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았다. 묘소는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甕東面) 비봉리(飛鳳里) 수천동 선산(先山)에 있다.


  • 벽파(碧波)
    시호

    이칭
    원국(元國)/정범(禎範)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9(융희 3) - ?
    본관
    전주(全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정수(金晶壽){1}에 대하여

    1909년(융희 3)∼미상.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 원명은 정범(禎範), 별명은 원국(元國), 호는 벽파(碧波). 평안북도 초산 출신. 아버지는 병식(炳植)이다. 할아버지인 낙용(洛用)은 3·1운동 때 초산에서 시위운동을 벌였고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다가 투옥되어 옥사하였으며, 아버지는 동생과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2년 가족과 함께 간도의 집안현 주선구(輯安縣朱仙溝)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천도교강습소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이때 구왜소년단(驅倭少年團)의 부단장으로 일본경찰의 정황을 탐지하여 독립군에 알리는 한편, 밤에는 군사훈련에 힘썼다. 1923년 아버지가 중국관헌에 붙잡혀 투옥되자, 이에 자극되어 그해 9월 독립단 최석순(崔碩淳)부대에 입대하여 일본어를 습득하는 한편, 전술을 익혔다. 1923년 모험대원 황학봉(黃學奉)·박기범(朴基範)·정낙영(鄭洛永)·김형준(金亨俊)·김영복(金永福)·김병걸(金炳杰)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보통학교 학생으로 행세하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해 가을 흥경군관학교(興京軍官學校)에서 수학하다가 참의부(參議府)본부중대 및 제4중대에서 근무하였다. 1924년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초산에서 일본경찰의 경비전화선을 끊었으며, 군자금출연 거부자 및 이적행위자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성면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원대복귀하였다. 1925년 참의부의 별동유격대 대장이 되어 일본경찰의 밀정을 제거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1926년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이 대한혁명군으로 개칭되자, 강계의 낭림산을 근거로 하여 자성·후창·삼수·갑산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초산군 동면에서 위원초산서(渭原楚山署)의 연합수색대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그뒤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초평(艸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9() - 1985()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건축가
    김정수(金正秀){2}에 대하여

    1919년∼1985년. 건축가. 호는 초평(艸平). 평양 출생. 건축가 전창일(全昌日)의 영향을 받아 건축을 지망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1941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조선총독부 영선계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 근무하던 한국인 건축가 김세연·김순하·장연채·이용재·유원준·김재철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48년 정부수립이 되면서 퇴직한 뒤 1953년 이천승과 함께 ‘종합건축연구소’를 창설하였는데, 그것은 한국현대건축사에서 본격적 건축설계사무소의 출발점이 되었다. 종합건축연구소는 6·25사변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적 건축업무를 시작하여 1957년 국제극장, 1958년 명동성모병원, 1960년 종로 와이엠시에이(YMCA), 장충체육관 등 일련의 시대사적 작품들이 그때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는 그 작품들을 통해서 기능주의적이고 기계적인 구조전문가의 태도를 보여주었고, 아울러 구조와 외관과의 관계를 솔직하게 표현, 경제적이며 합리적인 건물을 만들어내는 성향도 보여주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최초의 금속커튼월(curtain wall)도 도입하였으며, 피시(PC)콘크리트를 제작, 보급하기도 하였다. 1957년에는 미네소타대학에 가서 미국의 현대건축을 연구한 바 있으며, 1961년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교수로 취임, ‘연세건축의 뿌리’를 내린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종교건축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1972년에는 대한건축학회 회장이 되었고, 1975년에 연세대학교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여의도국회의사당(1969∼1975, 설계진 대표), 연세대학교 캠퍼스 건물 일부 등이 있다. 죽은 뒤 초평건축상이 제정되었다.



  • 시호
    충양(忠襄)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7() - 1991()
    본관
    경주(慶州)
    분류
    예능/체육 > 조각가
    김정숙(金貞淑)에 대하여

    1917년∼1991년. 조각가. 본관은 경주(慶州). 서울 출생. 193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중퇴하고 혼인하여 가정주부로 생활하다가 1949년 홍익대학 미술학부 조각과에 입학, 1953년에 졸업하고 조각계에 진출하였다. 홍익대학에서는 윤효중(尹孝重)에게 지도를 받았다. 1955년 한미재단 장학금으로 미국에 건너가 미시시피주립대학 대학원에서 현대적 철조각을 연구하였다. 1956년 미시간주의 불룸필 힐즈 크랜부룩 미술대학 대학원에서 거듭 수학하고 1957년 잠시 귀국하여 모교의 교수로 취임하였다가 1958년 다시 도미하여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미술연구소에서 2년간 산업디자인과 금속공예를 연구하였다. 작품활동은 1956년부터 시도한 철조(鐵彫) 추상조각을 비롯하여 대리석·나무·청동 재료의 추상·반추상 작업으로 이어졌다. 창의적 반추상이나 자유로운 조형적 변용의 구상작업은 주로 여인상 주제와 새의 날개 또는 비상(飛翔) 이미지를 형상한 휴머니즘과 자연애·생명애를 구현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누워 있는 여인〉(1959, 호암미술관)·〈여인흉상〉(1962)·〈자라나는 날개〉(1971),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 계속 연작된 〈비상〉 등이 그 계열이다. 순수형태의 추상작품들도 〈삶〉(1965)·〈봄의 움직임〉(1967)·〈촛불〉(1974)·〈반달〉(1976) 등 대개 자연적인 심상의 주제성으로 지향되었다. 다만, 1970년대 전반기에 보여준 〈토템〉·〈어떤 모뉴먼트〉·〈핵〉 등은 대칭적 또는 건축적 공간구조의 조형미를 시도한 것이었으나 그뒤로 그 계열의 지속은 별로 없었다. 반면, 또다른 작품으로는 서울 YMCA와 YWCA 회관의 벽면부조(1964·1968), 서울기독교연합회관 벽면부조(1969)·〈이율곡동상〉(1969)·〈이승만동상〉(1979·1983)·〈박인덕동상〉(1983) 등을 들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호암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957∼1991년 국전(國展)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과 1975년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전권대표로 참가하였다. 1974∼1982년 한국여류조각가회 회장, 1983∼1987년 한국칠보작가협회 회장, 1983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 및 1984∼1991년 명예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문예상 미술부문, 1976년 국전 초대작가상, 1984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1985년 신사임당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2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 시호
    충양(忠襄)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1086(선종 3) - 1145(인종 23)
    본관
    황주(黃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정순(金正純)에 대하여

    1086년(선종 3)∼1145년(인종 2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황주(黃州). 한미한 집안출신으로 협기가 있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항상 변방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마침 예종 때 여진정벌에 종군, 공을 세웠으므로 화주(和州)·수주(水州)두 고을을 지키게 되었다. 본래 이무(吏務)를 익히지 않았으나, 문부(文簿)에 개의치 않고 대체만을 들어 시행하였어도 크게 착오가 없었다.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는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으로서 김부식(金富軾)의 지시를 받아,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을 죽였고, 이듬해에는 도병마사로서 김부식을 좇아 난을 평정하였다. 1138년에는 추밀원부사가 되고, 1140년 병부상서, 1141년 지추밀원사, 1142년 수사공(守司空)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판형부사(判刑部事)에 올랐다.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1144년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겸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추충정난공신(推忠定難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 광국(光國)
    포석(圃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9(고종 6) - 1952()
    본관
    강진(康津)
    분류
    경제/사회 > 사회사업가
    김정술(金廷述)에 대하여

    1869년(고종 6)∼1952년. 일제강점기 자선가·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애국계몽운동가. 자는 광국(光國), 호는 포석(圃石)이고, 본관은 강진(康津)이며,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산외면(山外面) 출신이다. 조선 개국공신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연직(金然稷)이다. 춘우정(春雨亭) 김영상(金永相)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평소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이를 철거시키도록 하였다. 1914년 유생들의 무성서원(武城書院) 창의(倡義)가 있자 스승 김영상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정읍 내장동(內藏洞) 유만규(柳滿圭)로부터 독립운동자금으로 5천 원을 받아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였으며, 1921년 4월 임시정부 독립채권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윤철(尹喆), 이태훈(李泰勳), 유학규(柳學圭) 등과 더불어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여 농민과 노동자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삼성(三醒)/삼성(三省)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2(철종 13) - 1937()
    본관
    청풍(淸風)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정식(金貞植)에 대하여

    1862년(철종 13)∼1937년. 독립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청풍. 호는 삼성(三醒, 三省). 황해도 해주 출신. 독립협회 운동이 기세를 올릴 무렵 경무관(警務官)으로서 만민공동회에 가담하였으며, 상부에서 그 회원들을 잡아들이라 하였을 때, 체포를 지연 또는 피신시켰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지하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상재(李商在) 등 독립협회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 망명간 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자들과 공모하여 정부전복을 음모하였다는 흉계에 걸려들어 1902년 6월 이상재·유성준(兪星濬)·홍재기(洪在箕)·이원긍(李源兢)·이승인(李承仁) 등과 함께 국사범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심령의 변화를 입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3년간의 옥살이 끝에 1904년 3월 석방되어 옥중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입교하는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교육협회 및 부용회(芙蓉會)라는 청소년운동체를 조직하였고,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 한인총무가 되어 서구식 교육과 체육운동 등을 개척하였다. 1906년 8월에는 일본 동경에 파송되어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고, 초대총무가 되었다. 조만식(曺晩植)·장혜순(張惠淳) 등 초창기 회원들과 함께 유학생을 보호, 지도하는 한편 1907년 제7회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규식(金奎植)·민준호(閔濬鎬)·김필수(金弼秀)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교회연합운동의 선봉을 서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조선기독교회(오늘날의 대한기독교회총회)를 조직했다. 즉, 1909년 제3회조선예수교장로회독로회가 평양에서 모였을 때 한국유학생들을 위한 교회창설을 건의한 결과, 목사 한석진(韓錫晋)을 파송받아 청년회회관에서 정식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교회간부로 김정식을 비롯하여 조만식·오순형(吳舜炯) 등 3인의 영수와 백남훈(白南薰)·장혜순 등 4인의 집사가 있었다. 그뒤 이 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교회로 발전하여 2년마다 장로·감리 두 교파 목사들이 번갈아 파송되었다. 그리고 우치무라(內村鑑三) 등 일본교계 지도자들과 교분이 두터워 무교회주의 신앙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큰 구실을 했으며, 신해영(申海永)과 손잡고 유학생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육성에 힘썼다. 대한흥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09년에 해산되었으나 다시 이를 각 지방별 학생친목회로 재건하여 학우회(學友會)로 발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1919년 동경 기독교청년회회관에서 2·8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는 그 진상을 폭로하다가 1914년 총무직에서 쫓겨나 귀국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정언(金廷彦)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학자. 광종대에 재상을 지냈다. 그가 지은 금석문으로 세 편의 글이 전하고 있으며, 이에 언급된 내용으로 그의 경력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958년(광종 9)에 쓴 옥룡사동진대사보운탑비가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옥룡사지에, 975년에 지은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의 비문이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의 부도비에, 978년(경종 3)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문이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의 부도탑에 남아 있다. 이들 비문은 왕명에 의하여 쓰여졌다. 958년에 통직랑(通直郞)이었고 정위(正衛)·한림학사(翰林學士)·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를 지냈으며, 왕의 중요한 글을 거의 전담하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옥룡사동진대사보운탑비문 중에 외손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 이 비문의 주인공인 김경보(金慶甫)와 혈연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고, 김경보는 구림사람이었으므로 후백제 지역 출신이 아닌가 한다. 예부사(禮部使), 문하성의 참지정사(參知政事), 사관(史館)의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거쳐 975년에는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한림학사·내봉성령(內奉省令)을 지냈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내봉성령을 전직으로 기록하고 단지 한림학사만을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광종이 죽으면서 관직생활도 끝난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태성리 각연사에 남아 있는 각연사통일대사탑비는 원문의 마모가 심하여 거의 판독이 어려우나 판독되는 비문 중에 한림학사 김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이 비문도 왕명을 받아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비문은 찬자의 위계가 통직랑이고 사단금어대이어서 958년으로부터 1∼2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추측된다. 또한, 광종연간에 설치된 사관의 초대감수국사를 맡았고 문장이 웅위하고 학식이 깊었음을 비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2(고종 19) - 1927()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정업(金正業)에 대하여

    1882년(고종 19)∼1927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다. 계림군(鷄林君) 김곤(金稇)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병희(金炳煕), 아버지는 김교순(金敎淳)이다. 1919년 3월 23일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李起松), 오병용(吳秉鎔), 이만의(李萬儀)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출동한 남원헌병과 임실경찰서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그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그 해 10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족
    김정여(金貞茹)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의 왕족. 태종무열왕의 8세손이고 할아버지는 이찬(伊飡) 주원(周元)이며, 아버지는 소판(蘇判) 종기(宗基), 아들은 양(陽)이며, 장(璋, 璋如)과 형제간이다.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김양전(金陽傳)에 의하면 김주원·김종기·김정여가 대대로 장상(將相)이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김정여가 시중을 비롯한 관직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중 재직 연한과 관직 등은 확실하지 않다. 한편, 원성왕계의 왕위 독점에 저항한 김헌창(金憲昌: 정여의 작은아버지)의 난이 진압된 뒤 자기 편당 239인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김정여의 아들 양이 후대에 활동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김헌창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1(고종 8) - 1962()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정연(金正演){1}에 대하여

    1871년∼1962년.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예천 출신. 1919년 3월 21일 손영학(孫永學)·김정익(金正翼)과 안동군 길안면 천지(泉旨)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월 21일 오후 3시경 당초의 계획을 강행하여 3백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으고,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하다가, 면장과 면서기들도 만세운동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하여 면사무소로 진격하였다. 이때 미리 대기중이던 일본경찰이 제지하자,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투석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7시경에는 방향을 경찰관주재소로 돌려, 총기를 휴대하고 경비중이던 일본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투석으로 강력히 대항하였으나 일본경찰이 총격을 가하여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자신은 주동자로 검거되어 5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3() - 198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김정연(金正淵){2}에 대하여

    1913년∼1987년. 서도소리 명창.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평양 출신. 서도소리 명창 죽사(竹史)의 아우이다. 9세에 개성으로 이사하여 정화학교를 다녔다. 1929년 이승창에게 가곡·가사를 배웠고 이장산(李獐山)으로부터 무용을 배웠다. 홍기청에게 가야금·양금을 배웠고, 김칠성(金七星)으로부터 서도소리를 배웠다. 광복 후 서울에 살며 서도소리 공연과 무용공연 활동을 활발히 하는 한편 제자를 길렀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킹스타·신세기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그의 서도소리 음반을 내었는데, 특히 1972년 성음레코드사에서 《서도소리대전집》 53곡을 내어 서도소리로는 지금까지 가장 방대한 자료를 내었다. 저서로는 《우리춤의 첫걸음》·《한국무용곡집》·《시조집》·《서도소리 대전집》 등이 있다.

  • 세중(世重)
    춘강(春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53(철종 4) - 1918()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정엽(金正燁)에 대하여

    1853년(철종 4)∼1918년. 조선 말기 관리이다. 자는 세중(世重), 호는 춘강(春江),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출신지는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 주생면(周生面) 지당리(池塘里)이다. 증조는 증 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성익(金星翼), 조부는 수(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원(金宗遠)이며, 부친은 김철상(金喆商)이다. 외조부는 삭녕(朔寧) 최인효(崔仁孝)이다. 처부는 부령(扶寧) 김한탁(金漢卓)이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부친이 세상을 하직하여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따라서 편모와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1883년(고종 20)에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관직에 나아가, 1891년(고종 28)에 사천현감(泗川縣監)으로, 백성을 잘 살펴 칭송이 높았다. 1894년(고종 31) 동학란으로 나라 기강이 점점 무너지자 벼슬을 버리고, 인근 동지들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풍속을 바로잡아 보려 하였다. 향년 66세에 사망하였다. 아들은 김병식(金秉植), 김홍식(金泓植), 김윤식(金潤植), 김형식(金炯植), 김표식(金表植)이다. 묘지는 남원 황죽리(黃竹里) 부자원(負子原)이다. 시문집으로 《춘강선생문집(春江先生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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