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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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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종(覺從)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의 승려. 660년(의자왕 20) 7월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포로가 되었다. 그해 9월 각종은 이름이 전하지 않은 달솔(達率) 관 등의 사람과 함께 간신히 나당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백제멸망사실을 일본의 야마토[大和] 조정에 알렸다. 각종이 전한 당시 백제의 사정은 “금년 7월 신라가 당나라 사람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백성들은 거의 흩어 없어져버렸으므로, 이에 분개한 서부은솔(西部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과 달솔(達率) 여자진(餘自進)은 임사기산(任射岐山: 충청남도 大興의 任存城)과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公州)에 각각 웅거하면서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처음 몽둥이로 신라군을 격파한 뒤 무기를 탈취했으며, 백제부흥군이 강성해지자 당나라 군대가 감히 넘보지 못하였으며 왕성까지 탈환하였다. 백제사람들은 오로지 복신의 신묘한 무략(武略) 덕분에 이미 망한 나라가 부흥하게 되었다고 칭송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가감없이 백제인이 직접 체험한 생생한 전황보고인 관계로 어떤 사료보다도 값진 의의를 지니고 있다.


  • 고양취곤(高陽醉髡)
    시호

    이칭
    각월(覺月)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훈(覺訓)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승려. 각월(覺月)이라고도 하며, 자호(自號)는 고양취곤(高陽醉髡)이다. 전기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생애를 알 수 없다.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기에 생존했던 이인로(李仁老)와 젊어서부터 친했던 것으로 보아 거의 동년배였음을 알 수 있다. 개경의 화엄대찰인 흥왕사(興王寺)와 영통사(靈通寺)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215년을 전후하여 영통사의 주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화엄종의 고승이었음은 흥왕사와 영통사가 모두 화엄종의 대찰이며, 이규보(李奎報)가 부음을 듣고 지은 시에 “법문(法門)의 대들보 꺾였으니, 후학은 누구를 의지해 십현연기(十玄緣起)를 토구(討究)하랴.”고 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 이규보는 “법상(法床)을 치면 두마리의 호랑이가 우는듯, 목탁을 치면 한마리의 용이 나타나는 듯하다.”고 평하였고, 임춘(林椿)은 초연히 빼어난 인물이라고 평했다. 당대의 일류문인이었던 이인로·임춘·이규보, 승려인 문선사(文禪師), 시랑 조충(趙沖) 등과 문장 및 저술을 통하여 교유했으며, 시격(詩格)은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의 풍이 있었다 한다. 저작으로는 《해동고승전》과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 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1편, 《시평 詩評》 등이 있다.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는 신라 성덕왕 때의 삼법(三法)이 육조 혜능의 정골(頂骨)을 전래한 연기를 쓴 글이며, 《시평》은 현존하지 않지만, 사림(士林)에서도 널리 읽혔다고 전한다. 학문적 업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적지만, 그가 남긴 《해동고승전》 하나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고려 이전에 찬술된 현존하는 유일의 고승전이며, 고승전 내의 논(論)과 찬(贊)을 통해 그의 학문적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찬을 보면 유학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문산(蚊山)
    시호
    상절(尙節)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가평(加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간균(簡筠)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가평(加平). 호는 문산(蚊山). 가평간씨(加平簡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1164년(의종 18)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1187년(명종 17) 관직을 그만두고 풍덕 백후동(지금의 가평)으로 내려가 시와 글을 지으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시호는 상절(尙節)이다.



  • 시호

    이칭
    대명충(大明忠)
    시대
    남북국시대 > 발해
    생졸년
    ? - 81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간왕(簡王)에 대하여

    미상∼818년. 발해의 제9대왕. 재위 817∼818##. 이름은 대명충(大明忠). 제7대 정왕의 둘째아우이다. 형인 제8대 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태시(太始)’라고 건원(建元)하였으나,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업적은 별로 없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가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족
    간원경(間元卿)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가락국(駕洛國) 9대왕 구형(仇衡)의 진손(眞孫)인 규림(圭林)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는 잡찬(匝干) 충지(忠至)라는 사람이 있어서,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고성(高城)을 공격하여 취하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그 부하인 영규(英規)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묘향(廟享)인 수릉왕묘(首陵王廟)의 제사를 참람하게 지내다 불상사로 죽게 되었다. 이에 충지가 왕의 진손인 규림을 불러 옛날대로 제사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규림의 아들인 간원경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상고시대 > 부여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간위거(簡位居)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부여의 왕. 아버지는 위구태(尉仇台)인 듯하나, 어머니는 공손탁(公孫度)의 종녀(宗女)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왕이 되었는데 그에게는 적자(嫡子)는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麻余)만이 있어 마여가 국인의 추대를 받아 간위거의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간진(侃珍)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효소왕 때의 하급관리. 당시의 화랑인 죽만랑(竹曼郞)이 거느리고 있던 낭도 중에 득오(得烏)라는 사람이 당전(幢典: 軍職으로 추정됨.)의 관직에 있는 아찬(阿飡) 익선(益宣)에 의해 차출되어 부산성(富山城)에서 부역을 하고 있었다. 이에 죽만랑과 그의 낭도들이 익선을 찾아가 주연을 베풀어주고 득오에게 휴가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때마침 간진이 추화군(推火郡: 지금의 밀양) 능절(能節)의 세금 30석을 거두어 운송하고 있다가 죽만랑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아름답게 여겨 운송중에 있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득오의 휴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다시 사지(舍知) 진절(珍節)의 기마안구(騎馬鞍具)를 주어 득오의 휴가를 허락받았다. 이를 효소왕이 듣고 간진의 자손들을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아 포상하였다.



  • 시호

    이칭
    갈만로(葛蔓盧)/갈거맹광(葛居孟光)
    시대
    삼국시대 > 고구려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장군
    갈로맹광(葛盧孟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구려 장수왕 때의 장군. 갈만로(葛蔓盧) 또는 갈거맹광(葛居孟光)으로 전해지기도 하며, 갈로와 맹광을 두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의 가계나 행장은 알 수 없으며, 다만 436년(장수왕 24) 북위(北魏)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북연(北燕)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고구려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북연은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후연(後燕)을 계승한 나라이며,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그 황제로 즉위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운의 즉위를 축하하여 같은 종족으로서의 우의를 표한 바 있고, 고운도 그에 답례하여 양국은 친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뒤 고운이 피살된 뒤 그 친우이던 풍발(馮跋)이 즉위하였는데, 고구려는 풍씨 왕들과도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당시 동으로 확장해오던 새로운 세력인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협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위의 공격이 가열되자, 북연 황제 풍홍(馮弘)은 435년 양이(陽伊)를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군을 파견하여 북연 지배층을 고구려로 망명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맹광으로 하여금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연의 수도 화룡(和龍)에 가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화룡의 교외에 도착할 즈음에 북위 원정군도 성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성안에서는 황제 등 고구려에 의존하려는 세력과 상서령(尙書令) 곽생(郭生) 등 북위에 투항하려는 일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후자측에서 먼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받아들이려 하였다. 그런데 북위군이 주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갈로맹광은 고구려군을 성내로 돌입하게 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반대파를 제압, 성내를 장악하였다. 이어 성내를 약탈하고 성을 불지른 채 풍홍 이하 주민들을 몰아 동으로 고구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갈로맹광의 고구려군은 후미를 담당하여 북위군을 경계하면서 서서히 동으로 나아갔다. 망명의 행렬은 80여리에 뻗쳤고 북위군과 고구려군은 시종 첨예하게 대치하였으나 양자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갈로맹광의 다른 행적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장군
    갈봉하(葛逢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갈봉하(葛逢夏)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파견한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유격장군을 맡고 있었으며, 의주(義州)를 거쳐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할 때, 이여송(李如松) 휘하에서 통령보진건준조병유격장군(統領保眞建遵調兵遊擊將軍)으로 마병 2천을 거느리고 있었다. 후에 남원(南原)까지 원정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고찰할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기를, 당시 도원수(都元帥)였던 김명원(金命元)이 갈봉하에게, “그대가 앞서 의주(義州)에 있을 적에 날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았는데 이것이 어찌 장관의 도리이겠는가.”라고 질타했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6(광무 10) - 1989()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갈홍기(葛弘基)에 대하여

    1906년∼1989년. 정치인·외교관. 인천 출생.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1931년 캐랫신학교를 마친 뒤 노스웨스트대학원을 거쳐 1934년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생활을 14년간 하였는데, 1943년 11월 종교보국회 주최로 함경남·북도 도청소재지에서 기독교계 대표로 학병지원의 유세를 행한 적도 있었다. 1948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51년 한일회담 대표, 이듬해 외무부차관으로 외교관생활에 임하였다. 1953년 공보처장, 1955년 공보실장으로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대변인 자리를 지켰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어 1956년 2월 대한농구협회장을 맡아 체육진흥에 기여하였고, 1957년 동명학원(東明學園) 이사장으로 육영사업에도 관여하는 한편, 1962년 국민대학에도 출강하였다. 1967년부터 다시 외교관으로 돌아와 주말레이지아대사로 일하였으며, 1971년 외무부 대기대사, 1973년 아스팍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을 맡은 뒤 도미하여 만년을 보냈다. 말레이지아 탄스리훈장을 받았다.

  • 여일(汝一)
    관술정(觀術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9(선조 2) - 1648(인조 26)
    본관
    회산(檜山)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감경인(甘景仁)에 대하여

    1569년(선조 2)∼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여일(汝一), 호는 관술정(觀術亭). 아버지는 감예종(甘禮從)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박종(朴宗)의 딸이다. 창원에서 태어났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감경륜(甘景倫)과 함께 이순신의 진영에 달려가 공을 세워 여도만호(呂島萬戶)가 되었다. 이어 내금위(內禁衛)·정략장군(定略將軍)이 되고, 원종공신의 적에 올랐다. 1606년 전계신(全繼信) 등과 함께 대마도에 파견되어 1년간 머물면서 도주 무네[宗義智]와 교섭하여 그들의 국서를 고치게 하고, 두 명의 왕릉범(王陵犯)과 귤지정(橘智正)을 잡아오는 한편, 잡혀간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오는 등 전후 수습에 힘썼다. 죽은 뒤 충훈부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삼렬당문집 三烈堂文集》이 있다.

  • 영팔(英八)
    동미(東湄)
    시호

    이칭
    감태현(甘泰鉉)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80(고종 17) - 1964()
    본관
    회산(檜山)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감기현(甘麒鉉)에 대하여

    1880년(고종 17)∼1964년.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영팔(英八), 호는 동미(東湄). 어렸을 때 이름은 태현(泰鉉)이다. 증조는 감수운(甘守雲)이고, 조부는 농와(農窩) 감회정(甘檜廷)이다.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의관(僉知中樞府事兼議官)을 지낸 우우재(友于齋) 감재원(甘在元)이고, 어머니는 순흥(順興) 안중금(安中嶔)의 딸이다. 1880년(고종 17)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내동리(內洞里)에서 태어났다. 1899년(광무 3) 20세에 참정(參政)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로 추천되었다.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승진되었으며, 1904년 혜민원참서(惠民院參書)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민영환이 죽자 그를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초계현감(草溪縣監)이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이에 분개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42년 호서의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여, 구조하(具祖夏), 김기성(金璂成) 등 명사와 교류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김해 청천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64년에 죽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감자(邯子)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673년(신라 문무왕 13) 고구려(高句麗) 상부위두대형(上部位頭大兄)으로, 전부대형(前部大兄) 석간(碩于)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조공하였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신라는 한나말(韓奈末) 김이익(金利益)을 파견해서 고구려의 사신을 쓰구시(築紫: 지금의 규슈)에 보냈으며, 일본에서는 차등 있게 녹(祿)을 내렸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의열
    갑이(甲伊)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명종이 즉위한 1545년에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의 모함을 받아 윤임(尹任)·유인숙(柳仁淑)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사사(賜死)된 유관(柳灌)의 노비였다. 나이 15세 무렵에 유관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한 후에 우의정 정순붕(鄭順朋)의 노비가 되었는데, 정순붕은 바로 유관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린 장본인이었다. 갑이는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유골을 가져다 정순붕의 잠자리에 몰래 숨겨 두었는데, 1년 사이에 정씨의 집안 사람 7명이 죽고, 정순붕도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정씨 집안에서 노비들을 신문하자 갑이는 억울하게 죽은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라고 밝히고 자결을 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조정에서 정려하였다. 묘는 과천현 상북면 방배리(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신동아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가 도시화로 1973년 안산시 와동으로 이장되었다.

  • 경오(敬吾)
    도은(陶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20(광해군 12) - 1657(효종 8)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각(姜恪)에 대하여

    1620년(광해군 12)∼1657년(효종 8).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오(敬吾), 호는 도은(陶隱). 증조부는 강억(姜億), 조부는 강덕서(姜德瑞)이고,부친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낸 강윤조(姜胤祖)이다. 잠은(潛隱) 강흡(姜恰)이 그의 큰형이다. 대대로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큰형 강흡과 더불어 부모를 모시고 안동(安東)의 북촌에 피난하였고,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서 형제가 태백산 아래에 은거하며 독서와 부모의 봉양에 전념하였다. 당시에 강흡을 비롯하여 홍우정(洪宇定), 정양(鄭瀁), 심장세(沈長世), 홍석(洪錫)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고 하였는데, 강각(姜恪)까지 포함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이라고도 불렀다. 태백오현은 일찍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지만, 강각은 추증을 받지 못하였다. 1796년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병자년 절의를 지킨 처사들을 조사하는 조치에 의해 추천되었으며, 1818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의리를 생각하고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고 하며[守義自靖], 효행과 우애를 독실하게 행하였다[敦行孝悌]고 한다. 그의 행적과 그를 추존하기 위한 통문(通文)과 상소(上疏) 등이 기록된 《도은공실기(陶隱公實記)》가 있다.



  • 시호
    인헌(仁憲)
    이칭
    강은천(姜殷川)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948(정종 3) - 1031(현종 22)
    본관
    금주(衿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감찬(姜邯贊)에 대하여

    948년(정종 3)∼1031년(현종 22). 고려의 명신. 본관은 금주(衿州: 지금의 始興).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로부터 금주에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이듬해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이에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귀주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義州 威遠面)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귀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 지금의 義興)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 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그는 비단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 북암(北庵)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6(고종 23) - 1951()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교육자
    강갑수(姜甲秀)에 대하여

    1886년(고종 23)∼1951년. 일제강점기 교육자. 호는 북암(北庵)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정읍(井邑) 신태인읍(新泰仁邑) 출신이다. 세종 때 문신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 참여한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강영호(姜永浩)이다. 1914년에 군산농업학교(群山農業學校)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18년간 신태인면장(新泰仁面長)을 지냈다. 1922년에 신태인사립초등학교(新泰仁私立初等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46년 신태인중학교(新泰仁中學校) 설립에 많은 사재를 기부하고 이사장과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신태인 궁술구락부(弓術俱樂部)를 창설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거효(姜居孝)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신(子愼)의 아들이다. 1469년(예종 1)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제수된 이후 1472년(성종 3)까지 경연전경(經筵典經)과 홍문관정자를 겸임하였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471년 12월과 이듬해 5월에 각각 한급씩을 가자받았다. 1474년에 예문관봉교, 12월에 헌납, 이듬해 4월에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그뒤 1484년 4월까지 지평·검상·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집의에 승진, 1484년 12월에 기장현(機張縣)에 파견되어 수령과 만호(萬戶) 등의 불법을 적발하였다. 이듬해 가예조좌랑(假禮曹佐郞)으로서 세조비 정희왕후의 부묘사(祔廟事)에 참여하고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1489년 12월에 안접체찰사(安接體察使) 이철견(李鐵堅)의 종사관이 되어 평안도의 농사상태를 돌아보고, 경비대책과 성곽보수를 건의하였다.

  • 건부(建夫)
    복재(復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17(순조 17) - 1881(고종 18)
    본관
    진산(晋山)
    분류
    기타 > 은사
    강건(姜楗)에 대하여

    1817년(순조 17)∼1881년(고종 18). 본관은 진산(晋山). 자는 건부(建夫), 호는 복재(復齋). 증조는 인재(忍齋) 강재보(姜再輔)이며, 조부는 강일유(姜一儒), 아버지는 석계(石溪) 강협(姜浹)이다. 어머니는 달성 배시상의 딸이며, 계비인 의령 여항변(余恒變)의 딸이다. 1817년(순조 17) 8월에 태백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도연서원(道淵書院)에 가서 종형(從兄)인 송서(松西) 강운(姜橒: 1773∼1834)에게서 학업했으며, 18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어 종형인 강운 역시 죽자 홀로 학업을 하였다. 1836년 유교(由橋)로 이사하였으며, 이어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이 그를 경학(經學)으로 추천하였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나가지 않았다. 1874년(고종 11)년에는 유치명의 유집을 문인들과 함께 만우정(晩愚亭)에 모여 교정하기도 하였다. 1881년(고종 18) 정월에 졸하였다. 문집으로는 《복재선생문집(復齋先生文集)》이 있으며, 의례에 관한 저술인 〈심의설(深衣說)〉 1편을 지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591(선조 24)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생
    강견(姜涀)에 대하여

    미상∼1591년(선조 24). 조선 중기의 유생. 선조 때의 기축옥사를 날조하도록 무고한 사람이다. 1590년 서인들의 사주를 받고 양천경(梁千頃) 등과 함께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의 자백에서 나왔던 이른바 정여립의 친구라는 길삼봉(吉三峯)이 바로 최영경(崔永慶)이라고 무고하여 옥사하게 하였다. 그뒤 1591년 양사(兩司)에서 무고인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탄원이 있자, 최영경을 모함한 당시의 언관(言官)이 파면되고, 무고인 양천경·양천회(梁千會)·김극관(金克寬)·김극인(金克寅) 등과 같이 잡혀 문초당하자, 정철(鄭澈)을 따르던 끝에 그와같은 허위사실을 상소하였음을 자백하여, 양천경·양천회 등과 함께 북도로 장배(杖配)되어 가다가 장독(杖毒)으로 도중에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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