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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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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천서(天瑞)
    명암(明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0(중종 35) - ?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몽각(姜夢角)에 대하여

    1540년(중종 35)∼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천서(天瑞)이고, 호는 명암(明菴)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출생지는 지금의 군산인 군산포(群山浦) 회현면(澮縣面) 대정리(大政里)이다. 호부사공(戶部事公) 강원전(姜元鐫)의 7세손이고, 충순위부장(忠順衛部將) 강수빙(姜受聘)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9년(선조 32)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으며, 병자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 경협(景協)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30(중종 25) - ?
    본관
    진주(晉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몽규(姜夢奎)에 대하여

    1530년(중종 25)∼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협(景協)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지금의 군산인 군산포(群山浦) 회현면(澮縣面) 대정리(大政里)에서 출생하였다.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으로, 호부사공(戶部事公) 강원전(姜元鐫)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충순위부장(忠順衛部將) 강수빙(姜受聘)이다. 선조(宣祖) 때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讓衛副司果)를 지냈다.

  • 중협(仲協)
    지촌(芝村)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33(중종 28) - 1616(광해군 8)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몽벽(姜夢壁)에 대하여

    1533년(중종 28)∼1616년(광해군 8).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중협(仲協)이고, 호는 지촌(芝村)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으로, 호부사공(戶部事公) 강원전(姜元鐫)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충순위부장(忠順衛部將) 강수빙(姜受聘)이다. 군산포(群山浦), 곧 지금의 군산 회현면(澮縣面) 대정리(大政里)에서 출생하였다.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정이 깊고 온후하여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효심이 두터웠다. 나라에 대한 충심 또한 깊어 선조(宣祖) 때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讓衛副司果)에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사적이 조헌의 《중봉집(重峰集)》에 기록되어 있다.

  • 덕로(德老)
    남재(南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晉州)
    분류
    기타 > 의열
    강몽진(姜夢眞)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효자.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남재(南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통정대부(通政大夫)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응접()이다. 용모가 남다르고 뜻이 높고, 언행이 분명하였다. 학문이 깊었으며 평소 의리와 예(禮)에 밝아, 효자로 알려졌다.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지켜 치상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5(인종 1) - 1592(선조 25)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몽허(姜夢虛)에 대하여

    1545년(인종 1)∼미상.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회현면(澮縣面) 구정리(九政里)에서 출생하였다. 호부사공(戶部事公) 강원전(姜元鐫)의 7세손이고 해주판관(海州判官) 강응주(姜應周)의 현손이며, 부친은 충순위부장(忠順衛部將) 강수빙(姜受聘)이다.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훈련원주부(行訓鍊院主簿)가 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심을 발휘하여 수문장(守門將)으로 참전하여 장렬히 싸우다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아들 강덕민(姜德民)을 두었다. 묘지는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옥산면(玉山面) 남내리(南內里)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8(고종 15) - 1909(융희 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무경(姜武景)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09년. 한말의 의병. 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고,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경회(景晦)
    근재(謹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88(정조 12) - 1836(헌종 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문규(姜文奎)에 대하여

    1788년(정조 12)∼1836년(헌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회(景晦), 호는 근재(謹齋). 익위사세마 필효(必孝)의 아들이다. 1828년(순조 28) 감사에 의해 도천(道薦)되고 이듬해는 별천(別薦)되었다. 1832년 희릉참봉(禧陵參奉)을 거쳐 의영고봉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많은 명사·고관과 교유하였다. 특히, 성근묵(成近默)·성수묵(成遂默)·정시용(鄭始容)·정윤용(鄭允容)·정정현(鄭鼎鉉)·신석수(申錫壽)·김계수(金啓洙) 등과의 교분이 두터웠고, 친구의 자제 중에는 그를 사사한 이가 많았다. 경미한 병으로 갑자기 죽자 경향간 유림에서는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3() - 198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군인
    강문봉(姜文奉)에 대하여

    1923년∼1988년. 군인·외교관. 만주 용정(龍井) 출생. 아버지 윤철(潤喆)이 고향인 함경북도 부령을 떠나 만주에서 동만은행(東滿銀行)을 비롯한 여러 기업체를 설립, 경영한 갑부이고, 신경(新京 : 지금의 長春) 조선교민회 회장과 만주국 의회격인 협화회의(協和會議) 대의원이어서 신경에서 성장하였다. 신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5기)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 1945년 59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8·15 광복으로 귀국하였으며 한때 여운형(呂運亨)을 추종하였으나 그의 좌경적인 행위에 실망, 그해 12월 군사영어학교를 마친 뒤 창군(創軍)에 참가하였다. 1949년 대령이 되었으며 1951년 준장, 소장으로 계속 진급한 뒤, 미국 육군참모학교에 유학하였다. 1953년 중장으로 진급한 뒤 1954년 제2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56년 11월, 그해 1월 30일에 발생한 김창룡(金昌龍) 육군특무부대장 암살사건의 배후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 이듬해 4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며 4·19혁명 이후 사면, 석방되었다. 그뒤 1963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 같은해 민정당(民政黨)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공화당정권의 배려로 1967년 주 스웨덴대사를 시작으로 1971년 스위스·바티칸 대사를 역임하였고, 1973년 유정회(維政會)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6년 〈특별범죄가중처벌법〉 위반사건에 휘말려 수뢰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뒤 정계를 떠났으며, 1983년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이후 옛 전우와 관련된 회고록을 쓰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여왔으나 신병으로 미국에서 죽었다.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 훈장·태극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 성언(成彦)
    수죽(水竹)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19(순조 19) - 1877(고종 14)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문오(姜文伍)에 대하여

    1819년(순조 19)∼1877년(고종 14).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언(成彦), 호는 수죽(水竹). 《진양속지(晋陽續誌)》에 “용모가 단정하여 빼어났고 재주와 슬기가 높았다. 장중하고 간묵함을 스스로 지켜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죽오(竹塢) 하범운(河範運)을 따라 배웠고 문집(文集)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수죽정유고(水竹亭遺稿)》가 전한다. 진주(晋州) 북쪽 명석면(鳴石面) 추동(樞洞)에 수죽정(水竹亭)을 세웠다. 강문오가 세상을 떠나 정자도 폐해졌는데 1936년에 그의 손자 강재선(姜在善)이 아들 강예조(姜睿祚)로 하여금 중건케 했다.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이 기문을 지었다.

  • 여익(汝翼)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문우(姜文佑)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여익(汝翼). 증조부는 강자순(姜子順), 조부는 강형동(姜亨仝), 아버지는 강원(姜源)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다고 한다. 1558년(명종 13) 무오(戊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여, 관직은 만호(萬戶)를 거쳐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함경북도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할 당시 선두에 서서 부성(府城)에 이르러, 항거하는 국세필(鞠世弼)을 위협하여 병사(兵使)의 인(印)을 회수하였으며, 길주(吉州)의 왜군 1백여 명이 상황을 살피러 왔을 때는 성문을 열고 나가 수십 명의 머리를 베어 남은 적들을 물리치는 등 왜적을 공격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7(광무 1) - 1950()
    본관
    진주(晉州)
    분류
    경제/사회 > 실업가
    강문원(姜文源)에 대하여

    1897년(고종 34)∼1950년. 일제강점기 계리사. 일명 강문유(姜文儒)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서홍동(西烘洞)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강경모(姜景模)이다. 한논성당(지금의 서귀포 본당으로 서귀포시 호근동에 있다)의 초기 카톨릭 신자가 되어 개화문명을 수용한 부친 때문에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6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고베고등상업학교[神戶高等商業學校]를 졸업,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입사하여 이사(理事)가 되었다. 만주(滿洲)로 건너가 은행계에 종사하다 광복 후에 서울은행의 계리사(計理士)로 옮겼다. 1949년 충청남도 도지사(道知事)로 재임 중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9(고종 16) - 1945()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문주(姜文周)에 대하여

    1879년(고종 16)∼1945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대야면(大野面) 지경리(地境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치국(姜治國) 또는 강치국(姜致國)이며, 6대 독자이다. 소년시절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였다. 서당에서 한학공부를 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하였다. 당시 일본인 지주 오오꾸라[大倉]가 그의 총명함에 호감을 가져 농장 사무실 근무를 위촉하여, 약 10여 년 근무하는 동안 많은 신지식과 일본인의 생리를 알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인 주임과 소작권 이전관계로 의견대립을 겪다가 그만두고 집에서 영농과 야학을 가르쳤다. 4∼5년 후 오오꾸라의 권유로 농장의 마름(舍音: 지주의 위임을 받아 소작권을 관리하는 자리) 자리를 맡아 소작인의 편의를 많이 봐 주었다. 그때 임시정부와 연결하는 연통제(聯通制)의 옥구군 책임자 노춘만(盧春滿)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하다, 1922년 정식 회원에 가입하고 독립자금 100 원을 기부하였다. 마름 일을 신병을 핑계로 그만두고 현금 전환이 쉬운 소를 사서 기르며 계속 독립운동을 도왔는데 광복 5개월을 앞두고 67세로 별세하였다. 슬하에 아들 강남재·강진남(姜鎭南)과 1녀를 두었다. 1980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90년에는 국내항일운동으로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중현(中見)/중현(仲現)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9(고종 6) - 1929()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문진(姜文鎭)에 대하여

    1869년(고종 6)∼1929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호는 중현(中見), 또는 중현(仲現). 나주 출생. 1920년에 전협(全恊)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입단,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조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활동지역은 금산과 공주지역으로 1920년에 단원인 백남식(白南式)·윤상기(尹相起)·윤태병(尹太炳) 등과 권총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0년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6년 7개월간 복역한 후에 3년 5개월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덕윤(德允)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64(세조 10) - 1547(명종 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문한(姜文翰)에 대하여

    1464년(세조 10)∼1547년(명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윤(德允). 고려시대 병부상서(兵部尙書) 태자태사(太子太師)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북청판관(北靑判官) 강자위(姜自渭)의 아들이다. 그의 선대(先代)는 대대로 온양(溫陽)에서 살았으나 그의 대(代)에 와서 회덕현(懷德縣) 자운동(紫雲洞) 한사산(寒寺山, 대덕구 석봉동 한절구지 일대) 일대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연산현감, 사복시정(司僕寺正),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681년에 추보된 《회덕향안(懷德鄕案)》에는 향원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진주강씨로는 최초의 인물이다.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다. 묘소는 회덕 자운동 한사산에 있고, 1949년에 후손 강면식(姜冕植)이 찬(撰)하고 강인환(姜仁煥)이 쓴 묘비가 있다.

  • 덕보(德輔)
    난포(蘭圃)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1(순조 3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문형(姜文馨)에 대하여

    1831년(순조 31)∼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덕보(德輔), 호는 난포(蘭圃). 1869년(고종 6)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2년에는 회환진하 겸 사은사(回還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 박규수(朴珪壽), 역관 오경석(吳慶錫)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4년에는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전정(田政)·동포(洞布)·사창(社倉)·수령광관(守令曠官) 등의 폐단을 별단(別單)에서 일일이 고하였다.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약 70일 동안 일본의 군사·교육·행정·공장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해 정부기구 개편 때 감공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개화정책에 비교적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부승지의 직에 있으면서 정변 후 승정원의 김옥균일파 비난에 동참하였다. 1885년에는 예방승지(禮房承旨), 1887년에는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 1893년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와 쓴 《일본견문사건》과 《일본공무성시찰기》가 규장각도서에 있다.


  • 삼우(三憂)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8(광무 2) - 1986()
    본관
    신천(信川)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문호(康文昊)에 대하여

    1898년(고종 35)∼1986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목사. 호는 삼우(三憂)이며,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중문동(中文洞)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강규언(姜圭彦)과 같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전북 옥구군(沃溝郡)의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서울 경성신학교, 일본 고베[神戶] 중앙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영명학교 고등과 4학년생으로서 교사 이두열에게 감화되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월형이 선고되었으며 대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1932년 장로교 목사가 되어 경남 거창(居昌)·전남 무안(茂安)·제주 서귀포와 한림(翰林) 등지에서 목회생활을 하였으며, 1940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하였다. 1942년 한림교회(현재 북제주군 한림읍 한림리 1284에 소재)에 부임하였고, 1945년 광복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제주도지사 취임을 종용했으나 종교활동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거절하였다. 1953년 제주대학에서 종교학 강의를 하였으며, 1966년 제주노회(濟州老會) 초대 이사장이 되어 문태선 목사와 《제주선교 70년사》를 편저하였다. 1980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3·1운동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한림교회 신도들이 교회 내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2008년에는 통합노회의 ‘제주기독교 100주년 대상’에서 교회목회부문 공헌으로 수상하였다.

  • 우인(友仁)
    소요당(逍遙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33(세종 15) - 1499(연산군 5)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문회(姜文會)에 대하여

    1433년(세종 15)∼1499년(연산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우인(友仁), 호는 소요당(逍遙堂). 아버지는 광양현감(光陽縣監) 행(行)이다. 독학으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매 훈도의 직임을 다하였다. 1469년(예종 1) 추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제수된 이후, 성균관으로 자리를 옮겨 후진양성에 힘썼다. 성종 때에는 학덕으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주백손(朱伯孫)·김극검(金克儉)·정구년(鄭龜年)·주계정(朱繼程) 등과 더불어 사표(師表)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여 폭정이 계속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단성(丹城)의 별장으로 낙향하였다. 그리하여 산수간을 소요하면서 여생을 즐기는 한편 후진교육에 힘쓰니,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어득강(魚得江)·김수경(金守敬)·이적(李迪)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천성이 순후하고 준정(竣正)하였으며 심기를 바로 하고 행동에 가식이 없었다. 시문에 능하였는데, 특히 간고(簡古)하여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저서로는 《소요당기》가 있다.

  • 내숙(來叔)
    모산재(茅山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51(효종 2) - 1705(숙종 31)
    본관
    진주(晋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민저(姜敏著)에 대하여

    1651년(효종 2)∼1705년(숙종 3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재(茅山齋). 무장(茂長) 출생. 아버지는 함양군수 필주(弼周)이며, 어머니는 황주변씨(黃州邊氏)로 태윤(泰允)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에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던 남구만(南九萬)을 탄핵하다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였고, 이듬해 다시 남구만일파의 죄를 규탄하는 소를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3년 만에 풀려나온 뒤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여러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특히 경학과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에 역점을 두어 연구하였다. 남구만에게 보낸 서찰인 〈상남상 上南相〉은 18장에 달하는 장편의 명작이며, 또한 우국충정의 내용이 담긴 많은 시를 남겼다. 저서로는 《모산집》 3권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 1021(현종 12)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장군
    강민첨(姜民瞻)에 대하여

    미상∼1021년(현종 12). 고려시대의 장군. 본관은 진주.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고 강과(剛果)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다. 1012년(현종 3)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으며,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올라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죽은 뒤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그의 공로로 아들 단(旦)에게도 녹자(祿資)를 가하였다.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

  • 자순(子淳)
    국포(菊圃)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90(숙종 16) - 1742(영조 18)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박(姜樸)에 대하여

    1690년(숙종 16)∼1742년(영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순(子淳), 호는 국포(菊圃). 아버지는 석훈(碩勛)이다. 큰아버지인 석번(碩蕃)에게 입양되었다. 1714년(숙종 40) 절일제(節日製)에 장원,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으나 척신(戚臣) 민진원(閔鎭遠)과 어유구(魚有龜) 등을 탄핵하다가 안주(安州)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1723년(경종 3)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이 되었으며, 이듬해 부수찬이 되었다. 1727년 부교리를 거쳐 다시 수찬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윤지술(尹志述)을 탄핵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해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기용되어 수찬·부교리·교리·필선·함종부사(咸從府使)·장례원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로서, 특히 오상렴(吳尙濂)·채팽윤(蔡彭胤) 등의 시맥(詩脈)을 계승한 시인으로 잘 알려졌다. 저서로 《국포집》·《국포쇄록 菊圃瑣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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