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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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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자청(子靑)
    우곡(愚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90(숙종 16) - 1777(정조 1)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백(姜栢)에 대하여

    1690년(숙종 16)∼1777년(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청(子靑), 호는 우곡(愚谷). 아버지는 석주(碩周)이며, 어머니는 삭녕최씨(朔寧崔氏)로 윤신(胤紳)의 딸이다. 할아버지 무(珷)에게서 글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시에 재능을 보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1등, 1727년(영조 3)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호분위부사맹(虎賁衛副詞猛)을 지냈다. 1728년 성환찰방으로 있을 당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당시 순무사이던 오명항(吳命恒)이 강백의 도움으로 공을 세우고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었는데도 강백은 책훈할 때 오히려 무고한 죄를 입어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 유배기간 동안 철산 지방의 젊은이를 교육,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과거에 많은 합격자를 낸 공로가 참작되어 1732년 죄가 감형되어 정산현감에 제수, 1769년 통정에 오르고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 《가훈 家訓》·《해사록 海槎錄》이 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특히,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풍부하였고 일반 유학자의 시와 비교하면 불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등 보다 다양하고 넓은 시적 세계를 지녔다. 대부분의 작품이 그의 문집인 《우곡집》 6권에 전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 - 1954()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강백규(姜伯圭)에 대하여

    미상∼1954년. 현대 경찰·반공주의자.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계남면(溪南面) 장안리(長安里) 최평에서 출생하였다. 1950년 9·28 수복 후 용병치안대에 들어가 공산군 빨치산 소탕작전에 참전하여 많은 승전을 올려 장수경찰서 사찰 유격대장이 되었다. 특히 빨치산 공비 이현상(李鉉相) 부대의 명덕리(明德里) 1주일 주둔작전과 장안산(長安山)·장수덕산(長水德山)·팔공산(八公山)·덕유산(德裕山)·덕대산(德大山)·임실(任實) 성수산(聖壽山)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60년 그의 출생지인 장수군 계남면 장안리에 비를 건립하였다. 묘지는 장수군 계남면 신전리(薪田里)에 있다.

  • 숙구(叔久)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시호
    문정(文貞)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03(선조 36) - 1681(숙종 7)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백년(姜栢年)에 대하여

    1603년(선조 36)∼1681년(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아버지는 주(籒)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응서(應瑞)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내고, 1646년에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삭직당했다. 이해에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동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상소하여 전국에 걸쳐 향교를 부흥케 하였고, 1648년 대사간으로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1653년(효종 4) 좌승지에 오르고 충청도·강원도의 관찰사를 거쳐 1660년(현종 1)에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0년 도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册文)을 지었고 예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관직재직중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만년에는 고금의 가언(嘉言)과 선정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대학》의 팔조를 모방하여 《한계만록》을 지었고, 약간의 시문이 《설봉집》에 실려 있다. 169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뒤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 수안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자온(子韞)
    무명재(無名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504(연산군 10)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백진(康伯珍)에 대하여

    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온(子韞), 호는 무명재(無名齋). 아버지는 척(惕)이고, 중진(仲珍)은 그의 아우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1472년(성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49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함안군수가 되었으며, 재직기간 선정을 베풀어 1493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으로부터 선정사실에 대한 장계(狀啓)로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이 대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할 때 장(杖) 80에 정주로 귀양가서 봉수(烽燧)의 야역(夜役)을 하였다. 1504년에 무오수죄(戊午受罪)로 외방부처된 사람들의 처리안이 나와 그는 결국 능지처참되고, 아들과 형제들도 결장(決杖)에다 외방으로 축출당하였다. 1506년(중종 1)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8(광무 2) - 1982()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강백천(姜白川)에 대하여

    1898년(광무 2)∼1982년.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까지 활약한 대금산조의 명인. 남원 태생. 만년에는 부산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대금 시나위를 잘 불었는데, 여러 창극단에서 대금을 불었다. 대금산조를 먼저 짰다는 박종기(朴鍾基)와 교분이 있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금산조를 짰다. 그의 산조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잦은모리장단으로 조성되고, 우조와 계면조로 짜되 계면이 주가 되어 대금 시나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시나위더늠’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박종기 대금산조가 우조·설렁제(드렁조)와 같은 판소리조를 구사하고 선율이 판소리형에 가까운 것과 대조적이다.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대금산조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이수자로 김동표(金東表)·송부억쇠(宋富憶釗)·이엽(李葉) 등 세명을 길렀다.

  • 중빈(重斌)
    송암(松菴)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9(고종 26) - ?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유생
    강범희(姜凡熙)에 대하여

    1889년(고종 26)∼미상. 일제강점기 독행(篤行). 자는 중빈(重斌),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임실(任實)에서 출생하였다. 금재(琴齋) 강한(姜漢)의 후손이다. 천성이 순후(淳厚)하고 자애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하며 친구들과 미덥게 하였다. 근검절약으로 가계(家計)가 넉넉해지자 시혜(施惠)에 힘썼다. 8년 동안 향교의 성묘(聖廟)를 관리하며 사림과 협동으로 유지책을 마련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1() - 1971()
    본관
    진주(晋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병두(姜炳斗)에 대하여

    1921년∼1971년. 헌법학자. 본관은 진주. 경상남도 합천 출신. 1943년에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던 중,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편입, 1947년에 졸업하였다. 1970년에 서울대학교에서〈국가권력구조에 관한 연구―행정부에 대한 의회 및 사법부의 통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58년에는 하버드대학 연경학사(Harvard Yenching Institute)에서 연구하였다. 1960년에는 국민대학 교수가 되고, 1962년에는 국민대학과 국민여자초급대학에서 학장직을 겸임하였다. 같은 해에 국가재건최고회의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67년에는 총무처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에는 행정계획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건국대학교·명지대학교에서 헌법을 강의하였다. 저서로는 독일 뢰벤스타인의 신헌법이론을 우리나라 헌법학계 초창기에 도입, 소개한 《혁명헌법》을 비롯하여 《신헌법》·《헌법강의》(공저)가 있으며, 〈위헌법령심사의 기준〉 등 20여 편의 논문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8(고종 25) - 192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병일(姜秉一)에 대하여

    1888년∼1928년. 독립운동가. 일명 병일(丙日). 함경북도 회령 출신. 1919년 만주 길림성 혼춘현(琿春縣)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휘하의 의사단(義士團)과 최경천(崔慶天)의 포수단(砲手團)을 통합, 군무부(軍務部)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박정환(朴政煥)·채덕승(蔡德勝)·한경석(韓京錫) 등과 무기구입비 약 25만루블을 러시아영토 거주 동포들로부터 모금하여 군무부 군무부장 황병길(黃丙吉)에게 전달하였다. 1926년 장쭤린(張作霖)의 부하 왕잉창(王營長)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아 1928년 순국하였으며, 부인도 일본경찰에 피살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백남(白南)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82(고종 19) - 1955()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독교인
    강병주(姜炳周)에 대하여

    1882년∼1955년. 장로교 목사·한글학자. 호는 백남(白南). 경상북도 영주 출신. 목사이며 신학자인 신명(信明)의 아버지이다. 25세 무렵 기독교에 입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목사안수를 받고 풍기교회·명동제일교회 등에서 일하였다. 한편, 개화와 계몽운동에도 뜻을 두어 일찍이 영주 내명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안동 경안중학교의 교장도 역임하였으며, 1943년에는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세워 실용적인 교육에 힘썼다. 3·1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1938년에는 일제가 강요한 이른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구속당하였다. 농촌운동에도 힘써 농사개량법을 장려하고 소비조합제도를 만들었으며, 도박을 없애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유일한 목사회원으로서 한글보급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32년 총회종교교육부 교사양성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서류 일체를 한글로 사용하게 하였고, 1934년 제23회 총회 때에는 성경 및 찬송가를 새 맞춤법에 따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글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선어학회가 펴낸 《큰사전》 편찬에 기독교용어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글목사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보(姜保)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의 명으로 《수시력첩법입성 授時曆捷法立成》을 편찬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 판서운관사로서 공민왕이 태묘에서 관제(祼祭)를 지내고자 할 때 이를 만류하다가 도당(都堂)의 책망을 받았다.

  • 명지(明之)
    죽간(竹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0(명종 5) - 1634(인조 12)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복성(康復誠)에 대하여

    1550년(명종 5)∼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 중진(仲珍)의 증손이고 유선(惟善)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직장(直長)·찰방(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현감이 되었으며, 곧 김제군수로 옮겼는데, 이때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뒤 고양군수·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때에 시강(侍講)한 인연이 있다 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평산부사·전주부윤·청송부사 등의 외직에 보임된 뒤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제수받았다. 이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군수를 제수받았으며, 곧 성주목사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고,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노쇠하여 향리인 선산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찍이 재행(才行)을 겸비하고 학술이 정심(精深)한 것으로 천거되었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받은 바도 있었다. 저서로는 《죽간집》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4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봉돌(姜奉乭)에 대하여

    1896년(건양 1)∼1945년. 1919년 4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과 양성면(陽城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처음에는 양성면과 원곡면의 면민 각각 1천여 명이 따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면의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다가 두 면의 접경지역인 고개에서 잠시 쉴 때, 이유석(李裕奭)을 비롯하여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 등 시위를 주동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본인을 모두 쫓아버리기로 결의하였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에 양성경찰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양성면의 시위 군중과 합류하여 다시 주재소로 가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양성우편소를 역시 불태운 다음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하였다. 다음으로 양성면사무소의 기물을 파괴하고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돌아가서 면사무소를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혐의로 2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덕휘(德輝)
    석포(石圃)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8(선조 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봉람(姜鳳覽)에 대하여

    1568년(선조 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휘(德輝), 호는 석포(石圃). 참봉(參奉) 강근우(姜謹友)의 증손이자 우승지(右承旨) 강삼(姜參)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강위표(姜渭彪)이다. 1591년(선조 24)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 생원 3등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갑자식년문과(甲子式年文科)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1608년(선조 41)과 1616년(광해군 8) 가을에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된 이발(李潑)·이교(李矯)·정개청(鄭介淸)·유몽정(柳夢井)·조대중(曺大中) 5인이 억울하게 죄를 받았음을 상소(上疏)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진경문(陳景文), 오정남(吳挺男)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 주서(周瑞)
    옥계(玉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35(영조 11) - 1815(헌종 14)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봉문(姜鳳文)에 대하여

    1735년(영조 11)∼1815년(헌종 14).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주서(周瑞), 호는 옥계(玉溪). 아버지는 강득위(姜得渭)이다.유홍원(柳弘源)에게서 배웠다. 가문은 비록 한미했지만, 효자로 이름이 높았고, 학문에 힘을 쏟아 그를 따르는 문인이 100여인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저서로 《옥계유고(玉溪遺稿)》가 있다. 《옥계유고》는 1829년(순조 29)에 그의 손자 강주복(姜周福)이 간행하였는데,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적은 〈답조석사(答趙碩士)〉, 제자들에게 보낸 〈여제군(與諸君)〉, 조상에 대해 추모한 〈족보서(族譜序)〉, ‘사익재(四益齎)’라는 서당을 짓게 된 내력 등을 적은 〈사익재신창기(四益齋新創記)〉, 스승인 유홍원(柳弘源)을 애도하는 〈제강포유선생문(祭江浦柳先生文)〉, 자신의 일생에 대한 행적을 적은 〈유사기략(遺事記略)〉, 효행에 대해 포상의 전말을 적은 〈효자전(孝子傳)〉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46(영조 22) - 1823(순조 23)
    본관
    진주(晉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봉서(姜鳳瑞)에 대하여

    1746년(영조 22)∼1823년(순조 23).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제주(濟州)에서 자랐다. 애월읍(涯月邑) 어도리(於道里) 대원(大元: 원나라) 사람의 후예로, 강치황(姜致璜)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강시양(姜時揚)이다. 30세에 1775년(영조 51) 을미 별시 문과 병과 28위로 합격하였다. 1775년(영조 51)에는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이담(李潭)이 제주도과(濟州道科) 시권(試券)의 성적을 매겼는데, 이때 병과에 합격한 것이다. 1793년(정조 17)에는 장령(掌令)에 제수(除授)되었다. 1793년(정조 17)에 강봉서는 대흉년이 든 제주도의 기민 구제책을 논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에 따르면 당시 흉년으로 굶주려 죽는 백성들의 숫자가 몇 천에 이르는데도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철운(李喆運)은 환곡을 잔뜩 받아 백성에게는 덜 돌려주고 이를 전용하여 비단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 조세 서류를 조작하여 국고를 타내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한 수령에 대한 포상으로 전 명월만호(前明月萬戶) 고한록(高漢祿)은 정의현감(旌義縣監)에 올랐으나 자신에게는 표리(表裏: 의복) 한 벌만이 내려지자 '나라에서 하는 일이 가소롭다'는 불경스런 발언을 하였다. 이에 강봉서는 제주목사 이철운을 삭직하고 고한록에게 내린 상도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강봉서의 상소를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 죄상을 낱낱이 밝히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에 대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채제공(蔡濟恭)과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사건이 중대한 만큼 철저히 조사해서 죄를 분명히 가려야겠지만, 강봉서가 고을 수령을 논죄한 일을 백성들이 전례로 삼으면 풍속을 해치게 되는 염려가 있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따라 정조는 전 교리 심낙수(沈樂洙)를 제주(濟州)·대정(大靜)·정의(旌義) 등 고을의 안핵어사로 파견하여 이철운을 잡아들이게 하였으며, '나랏일이 가소롭다'는 발언은 혹시 부정확한 정보로 무고한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하여 강봉서 역시 접대청으로 불러 조사하게 하였다. 1794년(정조 18) 의금부의 진언에 따라 이철운은 고금도(古今島)로 귀양 보내졌다. 또 '강봉서는 대관(臺官)으로서 백성들의 정상을 알리는 것이 직분상 가능하지만, 성주(城主)를 논핵한 것은 제주도의 풍속과 교화에 영향이 있으며, 그의 말에 더러 사실과 어긋난 것도 있는 만큼 죄를 정하여야 한다'는 채제공의 의견에 따라 강봉서는 인천부(仁川府)로 귀양 보내졌다가 곧 석방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늘 정도를 걸으려고 노력하였으며, 도민의 편에 서서 직간(直諫)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묘소는 애월읍 곽지리(郭支里) 버들못 근처에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0(고종 27) - 192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봉세(姜奉世)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25년. 1919년 4월 1일부터 2일까지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과 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양성면과 원곡면의 면민 각각 1천여 명이 따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면의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다가 두 면의 접경지역인 고개에서 잠시 쉴 때, 이유석 등이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본인을 모두 쫓아버리기로 결의하였다.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에 양성경찰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시위 군중과 합류하여 다시 주재소로 가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양성우편소를 역시 불태운 다음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하였다. 다음으로 양성면사무소의 기물을 파괴하고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돌아가서 면사무소를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혐의로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덕수(德叟)
    송암(松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3(중종 38)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봉수(姜鳳壽)에 대하여

    1543년(중종 38)∼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덕수(德叟), 호는 송암(松庵). 온양 출신. 증조부는 판관 자위(自謂)이며, 아버지는 기(琦)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었고 15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뒤에 과거시험 답안지가 유실되어 당시 시험감독관이었던 임열(任說)·김귀영(金貴榮)이 탄핵을 받았다. 이같은 사고로 초사(初仕)가 늦었으나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다가 1604년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1666년(현종 7) 송준길(宋浚吉)의 상소로 정문이 세워졌다. 1791년(정조 15)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온양의 충효사우(忠孝祠宇)에 배향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2(고종 29) - 1970()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봉우(姜鳳羽)에 대하여

    1892년(고종 29)∼1970년.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평양 출신. 1911년 105인사건으로 검거당하였다가 1912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언도받았다. 1913년 10월부터 1918년 1월까지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러시아영토 거주 한국지사와 접촉하며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9년 1월 한민족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파견할 간도 거주 한국인대표 선정과 기부금 모집을 위한 용정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2월 함흥·원산·회령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3·1운동 거사를 종용하고, 간도에서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 및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거점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간도에서 검거되어 그해 8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덕휘(德輝)
    석포(石浦)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8(선조 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봉현(姜鳳賢)에 대하여

    1568년(선조 1)∼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휘(德輝), 호는 석포(石浦). 증조부는 강근우(姜謹友)이고, 조부는 승지(承旨)를 역임한 강참(姜參)이며, 아버지는 강위호(姜渭虎)이다. 1624년(인조 2)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에 1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승지에 이르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7(고종 4) - 1961()
    본관
    진주(晉州)
    분류
    종교 > 기타종교인
    강봉환(姜奉煥)에 대하여

    1867년(고종 4)∼1961년.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인·항일운동가.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제주도 산북(山北) 한림읍(翰林邑) 금악리(今岳里) 1287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강원선(姜元先)이다. 김연일(金蓮日)은 1914년에 중문면(中文面) 법정사(法井寺) 주지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와서부터 신도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18년 장임호(張林虎)·정구용(鄭九龍) 등 7명이 법정사에 체류하고 있었고,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합류하면서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방동화가, 민족종교인 보천교(普天敎)의 모태가 되는 선도교(仙道敎)의 수령 박명수(朴明洙)에게서 항일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내면서부터, 더욱 세력을 확장시켜갔다. 이에 힘을 얻은 김연일은 일본인들을 쫒아내고 국권을 회복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강봉환(姜奉煥)도 이 거사에 참여하였는데, 일찍부터 선도교의 신자였던 강봉환은 강민수(姜閔洙)·양남구(梁南求)·김삼만(金三萬)·김인수(金仁秀)·김용충(金用忠) 등과 함께 10월 8일 제주 성안으로 들어가서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여 전소 시키고,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 등 일본 경찰 3명을 포박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은 박명수 부대를 퇴각시키는 한편 38명의 선봉자들 모두를 체포하였다. 이때 검거된 인원은 모두 66명이며, 이 사건은 의병항쟁과 3·1운동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무력 투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2명은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열린 공판에서 31명은 실형을, 15명은 벌금형을, 남은 18명은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때 강봉환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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