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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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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기서(岐西)
    삼회재(三悔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56(철종 7) - 1919()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봉회(姜鳳会)에 대하여

    1856년(철종 7)∼1919년. 조선 말기 유학자·교육자. 자는 기서(岐西)이고, 호는 삼회재(三悔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전라북도 순창(淳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강재철(姜在哲)의 계자 강재준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공부를 시작한 첫날 하루 동안에 수천 단어를 줄줄이 암송하더니, 사서오경(四書五經)은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까지도 눈으로만 읽고도 그 자리에서 외워버렸다. 또 천문·지리는 물론 복서·의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런 후에도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히는데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먼 곳까지 널리 알려졌다. 노년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여러 각지에서 배움을 위해 모여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 힘을 썼다. 그의 유집으로 《삼회재유고(三悔齋遺稿)》가 있다고 하나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파악되고 있지 않다.

  • 순구(舜九)
    운거(雲居)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4(고종 1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봉희(姜鳳熙)에 대하여

    1874년(고종 11)∼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순구(舜九), 호는 운거(雲居). 아버지는 강조수(姜祖秀)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905년(고종 42, 광무 9)에 여현릉(麗顯陵)이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2년 후인 1907년에 여현릉 정자각 이하를 개수할 때의 별단에서 9품이었던 강봉희의 품계가 6품으로 올랐다.


  • 한정(寒井)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72(영조 48) - 1863(철종 14)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유생
    강사공(姜師孔)에 대하여

    1772년(영조 48)∼1863년(철종 14). 조선 후기 선비. 호는 한정(寒井)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제주도 대정읍(大靜邑) 일과리(日果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강재필(姜載弼)이다. 강사공은 대정향교(大靜鄕校)의 훈장을 지내면서, 지방의 유림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46년(헌종 12)에는 1840년(헌종 6)부터 제주도로 유배와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서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해서체의 글씨를 받고, 오재복(吳在福)에게 각자를 시켜 대정향교의 동재(東齋) 현판으로 걸어놓았다. 이것은 1811년(순조 11)에 대정현감(大靜縣監) 변경붕(邊景鵬)이 주자(朱子)의 필체를 집자(集字)하여 대정향교의 명륜당에 걸어둔 것을 본받은 것이다. 또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헌관(獻官)의 제복(祭服)을 마련하였으며, 대성전 뜰에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명륜당 뜰에는 백일홍을 심었다. 대정향교는 제주도 남제주군(南濟州郡) 안덕면(安德面) 사계리(沙係里) 3126에 있으며,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등록되어 있다. ‘의문당’ 현판은 현재 서귀포시(西歸浦市) 추사 적거지(시도 기념물 제59호) 추사관에 전시 중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10(태종 10)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사덕(姜思德)에 대하여

    미상∼1410년(태종 10). 조선 초기의 무신. 1397년(태조 6) 남포진첨절제사를 거쳐, 1410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재직시 조세 수취의 올바른 방법을 위해 3조목을 들어 장계를 올렸고, 형조전서·우군총제·우군도총제·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按撫察理使)·전라도병마도절제사·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406년에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경상도도절제사 등을 역임하여 주로 경상도·전라도 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방어하는 데 공이 많았다. 1409년 윤목(尹穆)·이빈(李彬)·조희민(趙希閔) 등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 이듬해 사사되었다.



  • 시호

    이칭
    강판열(姜判烈)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6(고종 13) - 1909(순종 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사문(姜士文)에 대하여

    1876년(고종 13)∼1909년(순종 3). 다른 이름은 강판열(姜判烈). 1908년(융희 2) 1월 함평(咸平)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김태원(金泰元)의 휘하에 있다가, 다음해 2월 광주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 112명, 총기 80여 정을 갖춘 단독 부대를 결성하였다. 순천·보성 지역에서 활동하다 안계홍(安桂洪)을 만나 그를 부대장으로 삼아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 경찰대·헌병대와도 전투를 벌였다. 이후 부대장 안계홍을 따르던 무리들과 갈등이 생겨 그와 결별하고, 광주(光州)·창평(昌平)·동복(同福)·화순(和順) 등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해 11월 전해산(全海山)·유진여(柳鎭汝) 등과 연합부대를 편성, 광주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추월산(秋月山) 전투에서 대패, 1909년 영산포(榮山浦)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상지(尙之)
    월포(月浦)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19(중종 14) - 1581(선조 14)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사상(姜士尙)에 대하여

    1519년(중종 14)∼1581년(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상지(尙之), 호는 월포(月浦). 사인(舍人) 온(溫)의 아들이며, 사필(士弼)의 형이다. 1543년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 1552년에 수찬이 된 뒤, 사간원정언·헌납, 의정부검상·사인,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1557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서 우승지를 역임하고,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는데, 그때 재해에 대한 왕의 수성(修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1559년 좌승지가 되고, 이듬해 도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거쳐 1561년 왕의 특별명령으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뒤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다시 부제학이 되어 권신(權臣) 이량(李樑)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이량의 미움을 받아 부호군(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1564년 도승지로 다시 기용되었다. 다음해에 경상도관찰사로 외보(外補)되어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한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사액하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566년에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 1) 대사헌으로 사간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조광조의 신원과 추숭을 건의하였고, 1570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병조·형조·이조판서와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576년 우참찬을 거쳐, 1578년 우의정이 되었고, 2년 뒤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그는 국가의 치란이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정쟁에 초연한 처지를 취하였다. 아들 인(絪)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사찬(姜師贊)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명나라 태조(太祖)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고려로 보내어 명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였음을 알리는 새서(璽書)와 공민왕을 왕으로 봉하며 금인(金印)을 내린 일이 있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그 답례로 강사찬(姜師贊)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하여 책명(冊命)에 대해 사의를 표하게 하고, 이전에 원나라가 보내준 금인(金印)을 바치게 하였다. 이 때 탐라(耽羅)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말은 제주의 토착민이 기르게 하고, 말을 기르던 몽고인들은 고려의 양민으로 삼게 할 것을 아뢰었는데, 이는 원나라의 지배가 미쳤던 지역을 자국영토로 삼으려는 것으로, 명나라에 대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명나라 태조에게 여러 음악에 정통하고 기예에 뛰어난 악공(樂工)의 파견을 요청하였는데, 명 태조는 악기는 제공하였으나, 악공을 파견하는 대신 고려 태상시(太常寺)의 악공을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음악을 익히라고 답을 하였다.

  • 경유(景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26(중종 21) - 1576(선조 9)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사필(姜士弼)에 대하여

    1526년(중종 21)∼1576년(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유(景猷). 세조 때 주서(注書)를 지낸 온(溫)의 아들이며, 우의정 사상(士尙)의 아우이다. 어려서 조욱(趙昱)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1555년(명종 10)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를 시발로 1558년 홍문관의 박사·저작·수찬과 이조좌랑 등을 거쳐 예문관응교를 지냈다. 1560년에 병조참의가 되었고, 1564년에는 사헌부대사헌·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여양포(閭陽舖)에 이르자 만주족인 달로(韃虜)가 성을 공격하여 민심을 동요시키므로 병사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그뒤 충청감사·강원감사에 이르렀다.

  • 종도(宗道)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삼(姜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종도(宗道). 아버지는 응(應)이다.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업중, 1479년(성종 10) 윤비가 폐비되자 동료 62인과 함께 이의 부당함을 주청하다 하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설서(說書)·사서 등을 거쳐 1488년 세자가례도감낭관(世子嘉禮都監郞官), 1491년에 헌납이 되었다. 이때 경연에서 가뭄에 대비하여 각 도의 제방수축을 의논하는데 농번기임을 들어 반대하며 추수 뒤 농한기에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상관에 아부하는 한건(韓健), 상고(商賈)와 결탁하여 모리를 일삼는 윤은로(尹殷老), 부끄러움 없이 재물을 탐내는 민영견(閔永肩), 교사(巧詐)하고 망녕된 최흥손(崔興孫), 불학무식한 이계명(李繼命) 등이 세인의 지탄을 받아 관직을 더럽히고 있음을 들어 이들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1494년에는 영암군수가 되었는데, 재직중 청렴하고 읍민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염근리(廉謹吏)로 뽑혀 포상받았다. 1502년(연산군 8) 동부승지에 이어 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 백휴(伯休)
    능호(菱湖)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78(정조 2) - 1849(헌종 15)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상국(姜祥國)에 대하여

    1778년(정조 2)∼1849년(헌종 15).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백휴(伯休), 호는 능호(菱湖).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아버지는 김덕리(金德利),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창렬(金昌烈)의 딸이다. 김려(金鑢)·이우신(李友信)의 문인이다. 1824년(순조 24)에 경학(經學)으로 천거되고, 1828년에 다시 별천(別薦)되었다. 1849년에는 안릉참봉(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령(富寧)에 호환(虎患)이 들끓자, 호랑이 덫 설치를 군수에게 건의하여 수십 마리의 호랑이를 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실학(實學)에 전념하면서 김려·이우신 등과 서로 권면하면서 실학(實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능호집(菱湖集)》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4(고종 31)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상모(姜尙模)에 대하여

    1894년∼1944년.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이원 출신. 1910년 아버지 진벽(鎭壁)을 따라 북간도로 이주하여 신흥평학교(新興坪學校)에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정(龍井)과 신흥평 동포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20년 봄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에 참가하여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일본경찰의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6월 대한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 및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 참가하였다. 홍범도와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한 그 전투에서 일본군 제39사단 소속 소좌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일본군 120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에게 중상을 입힌 전과를 올리고, 적의 소총 160여 정과 기관총 3정을 노획하였다. 7월의 봉오동전투 때에는 대한독립군 제2중대장으로서 봉오동 상촌(上村)을 맡아 일본군 사살 157명, 중경상 300여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수산(水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8(광무 2) - 194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타종교인
    강상백(姜祥伯)에 대하여

    1898년(광무 2)∼1941년.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인·항일운동가. 호는 수산(水山)이다. 본관은 미상이며,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대포동(大浦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우포(愚浦) 김종훈(金鐘勳)에게 이호진 등과 함께 한문을 익혔으며, 안덕면(安德面) 창천리(倉川里) 출신으로 양씨(梁氏) 성을 가진 훈장에게서 7년을 더 배웠다. 1916년에는 보천교(普天敎)에 입단하여 교리를 익히면서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키웠다. 1918년 서귀포시 법정사(法井寺)에서 보천교 신자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을 때 강상백 역시 동참하였다. 이때 같이 항일운동을 하던 동지들이 붙잡혀가자 그는 전라북도 정읍으로 건너가서 민족종교와 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는 1929년에 제주도로 돌아와 북제주(北濟州) 한림읍(翰林邑)에서 수산교(水山敎)를 창설하였다. 1930년에는 제주도 서귀포시 색달동(穡達洞) 감수동(옛 가물개)에서 한문 서당을 열고 민족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이던 중, 1936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類似宗敎) 해산명령에 따라 보천교도 강제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전라북도 정읍(井邑)으로 올라가 수도(修道) 생활에 전념하면서 증산(甑山) 사상에 침잠하였다. 1941년 3월 일본은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을 때, 그는 1941년 1월 17일 4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구속 수감되지는 않았다. 현재 서귀포시 색달동에 있는 ‘수산강상백선생추모비(水山姜祥伯先生追慕碑)’는, 1988년 3월 그의 문하생들인 ‘수산문인회(水山文人會)’가 스승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18(세종 즉위년)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상인(姜尙仁)에 대하여

    미상∼1418년(세종 즉위).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가신이었고, 태종의 즉위와 함께 사재(私財)의 출납을 감독하였다. 1402년(태종 2) 강계 지방에 파견되어 임팔랄실리(林八刺失里) 등의 여진을 위무하였고, 이후 태종대를 통하여 시위에 공헌하였다. 1418년 병조참판이 되었는데, 태종이 선위(禪位)하기는 하나 세종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하여 국가의 중대사와 병권만은 양여하지 않고 친히 관장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上王: 태종)의 병권행사를 위한 핵심인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의 의도와는 달리 군사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옥된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과 직첩을 몰수당하고 단주(端州)관노로 충속되었다가 원종공신임이 참작되어 용서받았다. 그뒤 다시 전일에 박습·심증(沈泟) 등과 함께 병권이 양분됨은 옳지 않다고 한 말로 인하여 하옥되었고, 태종 부자간의 정을 끊으려 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옹진진(甕津鎭)에 충군(充軍)되었다가 의금부의 장계에 따라 모반대역죄로 참수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77(우왕 3) - 1454(단종 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서(姜筮){1}에 대하여

    1377년(우왕 3)∼1454년(단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 할아버지는 판도정랑 창귀(昌貴), 아버지는 정당문학 군보(君寶)이다. 1382년(우왕 8) 화척(禾尺)들이 왜구로 가장하여 영해군에 침입하여 관청과 민가를 불사르자, 전 밀직부사로서 판밀직 임성미(林成味)와 함께 이를 평정하였다. 조선 건국 후 정진개국원종공신녹권(鄭津開國原從功臣錄券)에 의하면, 1395년(태조 4) 전 절제사인 그는 서열 65번째로 원종공신에 책봉,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받고, 1403년(태종 3)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1416년 의정부찬성사로 치사(致仕)하였다.

  • 원경(遠卿)
    난곡(蘭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38(중종 33) - 1589(선조 2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서(姜緖){2}에 대하여

    1538년(중종 33)∼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원경(遠卿), 호는 난곡(蘭谷). 아버지는 우의정 사상(士尙)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68년(선조 1) 음서(蔭敍)로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그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576년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을 비롯하여, 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홍문관부응교·사간원사간·수원부사·남양부사·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인천부사를 두루 지냈다. 이원익(李元翼)·조충남(趙忠男)과 교분이 좋았고, 지감(知鑑)이 있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7() - 1981()
    본관
    미상(未詳)
    분류
    법조/언론 > 법률가
    강서룡(姜瑞龍)에 대하여

    1917년∼1981년. 법조인·행정관료. 강원도 통천 출생. 1943년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8년 부산지검 진주지청 검사를 시작으로 검찰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57년 서울지검 부장검사, 1960년 치안국장 등을 역임하고 같은해 변호사 개업을 하였는데, 그는 형법학 및 형사정책학 연구에도 전념하여, 《사법경찰수사개요 司法警察搜查槪要》·《형법요의 刑法要義》·《신형법요의 新刑法要義》·《수사개요 搜查槪要》·《신형사소송법요의 新刑事訴訟法要義》·《수사실무 搜查實務》 등 많은 책을 썼다. 이러한 검찰계에서의 경험과 이론적 업적을 인정받아서 1963∼1968년 국방부차관, 1968∼1969년 교통부장관 등 국무위원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였다. 특히, 교통부장관 재임시 교통법규의 재정립에 착수하여 〈도로교통법〉을 재정비한 바 있다. 1967년 공화당의 중앙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1970년 행정 및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변호사업에 전념하면서 한국전력과 진해화학의 법률고문도 담당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석(姜碩)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 충렬왕 때에 정승오(鄭承伍)·김의광(金義光)과 더불어 신문색(申聞色)이 되어 궁중에서 국가기무를 관장하였다. 1352년(공민왕 1) 10월에 상장군으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4년 2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서 같은해 7월에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1361년 11월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공민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남행할 때 교주강릉도도순문 겸 병마사(交州江陵道都巡問兼兵馬使)가 되어 적을 방어하였으며, 신돈(辛旽) 집권 때 삼재(三宰: 左參贊)를 지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86(성종 17)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강석경(姜碩卿)에 대하여

    미상∼1486년(성종 17). 아버지는 강선(姜善)이고, 어머니는 성종(成宗)의 유모인 봉보부인(奉保夫人) 백씨(白氏)이다. 성종이 이 때문에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고 또 내승(內乘)의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경동(李瓊仝) 등이 천례(賤隷)로서 겸사복이 된 것도 은총이 충분하다 하여 수차례 차자(箚子)하였으나, 성종이 들어주지 아니하다가 이경동 등의 끈질긴 상소 끝에 결국 벼슬을 개정(改正)하였다.

  • 위망(渭望)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32(인조 10)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석구(姜碩耉)에 대하여

    1632년(인조 10)∼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위망(渭望). 아버지는 급()이다. 1663년(현종 4) 통덕랑의 신분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3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다음해 정언을 거쳐 지평에 승진한 뒤, 직강의 관직에 있으면서 진위사(陳慰使)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675년(숙종 1) 이후 장령·헌납·사간·집의에 여러 차례 임명되면서 1678년까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정치적 입장은 남인에 속하며, 숙종 초년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이 대립할 때에는 윤휴(尹鑴)를 중심으로 하는 청남을 편들어 탁남의 허적(許積)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 복이(復而)
    월당(月塘)/삼당(三塘)
    시호
    문정(文貞)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80(선조 13) - 1643(인조 21)
    본관
    금천(衿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석기(姜碩期)에 대하여

    1580년(선조 13)∼1643년(인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삼당(三塘). 이조참의 찬(燦)의 아들로, 큰아버지 순(焞)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의 제자로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으나 시세에 불만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인조반정 뒤 교리 등을 역임하고, 대사간·대사성·도승지 등을 거쳐서 1636년(인조 14)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640년에는 우의정에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부승지로 있을 때 딸이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이 되었는데, 그뒤 강빈(姜嬪)은 심관(瀋館)에서의 영리(營利: 뇌물외교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로 인조의 불평과 역위(易位)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던 중, 세자가 부왕에 의하여 독살된 뒤 강빈도 저주사건(역모)의 주모자로 모함되어 사사되었다. 그것을 ‘강빈의 옥’이라 하는데, 앞서 죽은 강석기는 관작을 추탈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 문성(文星)과 문명(文明)은 장살(杖殺)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역적 집안으로 멸문의 화를 당했다가 숙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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