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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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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여우(汝遇)
    일묵재(一默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2(명종 17) - 1608(선조 41)
    본관
    상주(尙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두(金光斗)에 대하여

    1562년(명종 17)∼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 자는 여우(汝遇), 호는 일묵재(一默齋).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정경세(鄭經世)·이전(李㙉)·이준(李埈)·전식(全湜)·조정(趙靖) 등과 같이 함창(咸昌)·황령(黃嶺) 등지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 왜군과 맞서 싸웠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경원(慶源)
    죽포(竹圃)
    시호
    충효(忠孝)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광복(金光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원(慶源), 호는 죽포(竹圃). 부친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증직된 우계당(友溪堂) 김순(金洵)이다. 선천적으로 골격이 크고 재주와 용기가 뛰어났다. 일찍이 8세 때 시를 지었는데, 그 시구는 “봉화(烽火)는 천리 밖의 통신을 전하고 종(鐘) 소리는 수많은 가정에 때를 알린다”라고 하였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여러 경전과 역사책을 두루 읽었는데, 특히 병학(兵學)에 정통했다. 1571년(선조 4)에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부친의 명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아우 김광록(金光祿)과 조카 김몽화(金夢和)와 더불어 군무를 감독하였다. 경주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函)이 정병(正兵)을 내주어 서생포(徐生浦) 전투에서 여러 번 싸워 대첩을 거두었다. 항상 전쟁에 임할 때 분연히 맹세하여 말하기를 “온 나라가 크게 어지러운데, 신하된 도리로써 어찌 감히 삶을 찾겠는가?”하였고,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공을 세웠다. 팔공산과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달려가니,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일찍이 말하기를 “용맹을 떨치며 돌격하여 큰 군사를 모두 거느릴 자는 김 장군 한 사람뿐이다”고 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후 부모상을 당하여 6년 동안 시묘하며 상제를 마쳤다. 어사 이상신(李尙信)이 조정에 아뢰기를 “효성은 신명과 통하고 충성은 월일에 꿰었다”하였다.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제수되었다. 원종공신 2등에 녹선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79(우왕 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광부(金光富)에 대하여

    미상∼1379년(우왕 5). 고려의 무신. 1361년(공민왕 12)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이등공신이 되었다.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격파하였으며, 그뒤 계림윤(鷄林尹)을 거쳐, 1379년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 시호

    이칭
    김경천(金擎天)/김현충(金顯忠)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7(고종 24) - ?
    본관
    시흥(始興)
    분류
    항일/국방 > 광복군
    김광서(金光瑞)에 대하여

    1887년(고종 24)∼미상. 독립군 지휘관. 본관은 시흥. 아명은 현충(顯忠), 별명은 경천(擎天). 함경북도 북청 출신. 대한제국의 포병 부령(副領)이며, 군기창장(軍器廠長)을 역임한 정우(鼎禹)의 아들이다. 191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졸업생으로 기병장교로 동경 제1사단 기병제1연대에 근무하였다. 1916년 동경에 근무하는 한국인 장교들의 모임인 전의회(全誼會)회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재일 동경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자 즉시 병가를 얻어 귀국하였다. 이때 마침 일본군장교로 복무중이던 지석규(池錫奎)·이응준(李應俊)도 귀국중이었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접촉을 하여, 일본군을 탈출한 뒤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해 6월 지석규와 같이 신의주를 경유하여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설립되어 있던 항일독립군 장교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훈련에 힘썼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는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 3인이 교관으로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을 삼천(三天)이라 하였다. 즉 신팔균(申八均)은 동천(東天), 김광서는 경천, 지석규는 청천(靑天)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 김광서가 독립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구입할 목적으로 노령 연해주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일본군에 의하여 이항사변(尼港事變)이 발생하였고, 이때 일본군이 무고한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분격하였다. 그리하여 노령에 재류하는 한국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6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일본군 및 그들의 후원하에 활동하는 백계 러시아군을 상대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철수한 뒤 적군이 배신하여 한국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단행하자 이에 항거하였으며, 1923년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으나 회의 진행경과를 보고 실망하여 다시 연해주로 돌아왔다. 그뒤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용하던 교재를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족군인구락부(韓族軍人俱樂部)를 조직하여 흩어진 항일 역량을 재규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연해주군관구 산하의 군사전문가로 영관급 장교대우를 받으며 봉사하였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적군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며, 1937년 석방된 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현지 집단농장의 작업반장이라는 말단 직위로 노동생활을 하였다. 그뒤 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 팔산(八山)
    시호

    이칭
    김성섭(金成燮)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9(고종 16) - 1939()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원불교인
    김광선(金光旋)에 대하여

    1879년(고종 16)∼1939년. 원불교의 성직자. 본명은 성섭(成燮), 법호는 팔산(八山). 전라남도 영광 출신. 창교주 박중빈(朴重彬)의 9인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7세 때는 음양복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뒤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상업도 하고 31세 때는 김씨문중의 대동보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무렵 12세 연하인 박중빈과 의형제를 맺고 수도정진하는 그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다. 1916년 4월 박중빈이 26세로 대각(大覺)을 얻자 첫 제자가 되었다. 인생의 새출발을 결심한 그는 이웃 주민들로부터 받은 3천여원의 채권증서를 불살라버리기도 했다. 초기 원불교 교단의 큰 행사였던 저축조합·방언공사(防堰工事)·혈인기도(血印祈禱)를 진행할 때 중심소임을 담당하였으며, 방언공사 당시에는 둑에 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몸으로 물구멍을 막아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원불교총부 건설에도 적극 참여하여 농업부원으로 일하였다. 총부농업부원·서무부장·총부감원·마령교무·영산서무부장·원평교무·총부순교무 등을 역임하였다. 마령교당교무로 봉직할 때는 낮이면 몸소 밭을 갈고 땅을 파며, 밤에는 야학을 실시하여 주경야독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957년에 대봉도(大奉道) 법훈(法勳)을 추증받았다.


  • 이산(怡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5(광무 9) - 1977()
    본관
    전주(全州)
    분류
    문학 > 시/시조인
    김광섭(金珖燮)에 대하여

    1905년∼1977년. 시인. 본관은 전주. 호는 이산(怡山). 1. 학력·경력 1917년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동학교로 옮겨 1924년에 졸업했다.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적을 둔 이헌구(李軒求)와 친교를 맺었으며, 이어 정인섭(鄭寅燮)과 알게 되어 해외문학연구회에 가담하였다.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1941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문화 및 정치의 표면에서 활동하였다. 중앙문화협회의 창립,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보국장을 거쳐, 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이후에는 주로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자유문학가협회를 만들어 위원장직을 맡고, 《자유문학 自由文學》지를 발행했다. 2. 문학 성향 평가 그가 문학에 뜻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 이헌구와 교분을 맺으면서부터인데, 1927년에는 같은 학교의 우리나라 학생 동창회지인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했다. 1933년 《삼천리 三千里》에 〈현대영길리시단 現代英吉利詩壇〉을 번역, 발표했고, 같은해 시 〈개 있는 풍경〉을 《신동아》에, 평론 〈문단 빈곤과 문인의 생활〉을 《동아일보》(1933.10.2.)에 발표했다. 이어서 1934년 《문학 文學》에 〈수필문학고 隨筆文學考〉, 《조선문학 朝鮮文學》에 〈현대영문학에의 조선적 관심(朝鮮的關心)〉을 발표하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들어선 것은 1935년 《시원 詩苑》에 〈고독 孤獨〉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시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좌절과 절망을 읊은 것이었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동경 憧憬〉·〈초추 初秋〉 등이 있는데, 만주사변을 배경으로 한 고독·불안·허무의식이 배경이 된 것들이었다. 1937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 연극운동에 가담하면서 서항석(徐恒錫)·함대훈(咸大勳)·모윤숙(毛允淑)·노천명(盧天命) 등과 교유했다. 1938년 제1시집 《동경 憧憬》을 간행했다. 광복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해 창작과 단체활동을 병행했다. 이 무렵의 시로는 〈속박과 해방〉·〈민족의 제전〉 등이 있는데, 광복의 환희와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편, 계도적인 민족주의 문학론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경향신문》에 〈정치의식과 문학의 기본이념〉(1946), 《민주일보》에 〈문학의 당면 임무〉(1946), 《만세보 萬歲報》에 〈민족문학의 방향〉(1947), 《백민 白民》에 〈민족문학을 위하여〉(1948)·〈민족주의 정신과 문학인의 건국운동〉(1949)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론(時論)들은 그의 시정신과 동일한 맥락을 이루는 것이었다. 1949년에 간행된 제2시집 《마음》과 1957년에 간행된 제3시집 《해바라기》의 시는 민족의식과 조국애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된 시편들이었다. 작품 〈마음〉은 맑은 물과 백조의 조응을 통하여 한 생명의 실상을 읊은 것이고, 〈해바라기〉는 높은 이념을 해로써 상징하고 민족의 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후기의 작품들은 1966년에 간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1971년 간행된 《반응 反應》에 수록되었는데 전자에서는 병상에서 터득한 인생·자연·문명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1960년대의 시대적 비리도 비판하였고, 후자는 사회성을 띤 시들로서 1970년대 산업사회의 모순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때의 시편들은 관념이 예술적으로 세련, 승화되어 관조와 각성의 원숙경을 보여준다. 그는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 문명의 괴리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시킨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문화공보부예술상, 같은해 국민훈장모란장, 1974년에는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이밖에 저서로는 《김광섭시전집》(1974)과 번역시 《서정시집 抒情詩集》(1958) 등이 있다.

  • 제미(濟美)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00(숙종 26) - ?
    본관
    상주(尙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세(金光世)에 대하여

    1700년(숙종 26)∼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제미(濟美). 아버지는 현감 동익(東翼)이며, 어머니는 전라우수사 이홍(李泓)의 딸이다. 1733년(영조 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삼사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기도 하였고, 검토관(檢討官)으로서 문벌을 숭상하는 것이 용인(用人)의 도(道)가 아님을 진강(進講)하였다. 1743년에는 교리로서 세자훈유문(世子訓諭文)의 간행에 대한 노고로 가자(加資)되어 특별히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뒤 형조참판·병조참판·강화유수·대사헌을 지냈다.

  • 권표(權表)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51(문종 1) - ?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광손(金輄孫)에 대하여

    1451년(문종 1)∼미상.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 초휘(初諱)는 권손(權孫)이고, 자는 권표(權表)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경상북도 청도(淸道)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문과 급제로 재상(宰相)을 지낸 분성군(盆城君) 김서(金湑)이며, 조부는 절효선생(節孝先生) 김극일(金克一)이다. 부친 진의부의(進義副義) 김현(金鉉)과 모친 창녕성씨(昌寧成氏) 성이환(成以煥)의 딸 사이에서 5형제 중 막내로 났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종형제간이며,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종숙부가 된다. 세조 조에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이다. 성종이 의로운 선비를 널리 구하였는데, 이때 고향에서는 그를 제일로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와 절의(節義)를 지키며 살았다. 1498년(연산군 4)에 사촌 동생 김일손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일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는데, 이에 연루되어 그도 전라남도 옥과(玉果)로 귀양을 갔다. 중종반정으로 은사(恩赦)를 받고 그의 나이 56세 되던 해에 고향인 청도에 돌아왔으나, 종질(從姪)인 김대유가 기묘사화에 화를 입게 되자 그는 다시 옥과로 되돌아와 신분을 숨기고 지냈다. 사화가 끝나자 귀향하였으나 아들 화서당(華胥堂) 김진철(金璡哲)은 옥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손자인 김치도(金致道)가 의병장으로 출정하여 남원(南原) 숙성치(宿星峙)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충효와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되었다. 이러한 남원과의 인연으로 그 아들인 김세인(金世仁)이 옥과에서 처음으로 남원 송동면(松洞面) 세전리(細田里)에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 구음(龜陰)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광수(金光壽)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구음(龜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학문이 독실하여 여러 선비들이 추중(推重)하였다. 저서로는 《구음집(龜陰集)》이 남아있는데, 모두 4권 2책이고,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문집 중에 권 1∼3에는 시 222수가 수록되어있는데, 주로 자연에 은거하면서 산수화초(山水花草)와 자신의 인생에 빗대어 읊은 서정시가 많다. 그 중에서 〈춘한연일회견화개(春寒連日喜見花開)〉는 추운 봄 날씨가 계속되는데도 그 아픔을 무릅쓰고 피어나는 꽃을 자신의 생애와 비유하여 잘 묘사했다. 이 밖에 서(書) 17편·잡서 3편·제문 21편이 있으며, 권 4에는 가장(家狀)으로 행록(行錄) 1편·행략(行略) 1편 및 부록으로 만사 9수·제문 5편·유사 1편·묘지명 1편 등이 실려 있다. 문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는 남양주 와부읍 율석리에 소재하고 있다.

  • 명중(明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4(선조 7) - 1664(현종 5)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수(金光燧)에 대하여

    1574년(선조 7)∼1664년(현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중(明仲). 할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김규보(金奎報)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김양(金樑)이다. 어머니 증정부인(贈貞夫人)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충의위(忠義衛) 황련(黃璉)의 딸이다. 내직(內職)으로는 별제(別提), 주부(主簿), 전부(典簿)로서 예빈시(禮賓寺), 사섬시(司贍寺), 종친부(宗親府)를 거쳤고, 외직(外職)으로는 포천(抱川)·목천현감(木川縣監), 평양통판(平壤通官), 단양(丹陽)·고부(古阜)·임천(林川)·면천(沔川) 등 네 군(郡)의 수령을 지냈다.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결백하여 치적(治績)이 있었고, 임기가 차서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사모하여 비를 세웠다. 80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면서 중추부(中樞府)의 첨지사(僉知事)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90세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1664년(현종 5)에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증좌찬성(贈左贊成) 권현(權睍)의 딸인데 20세에 세상을 떠났고, 후에 사직(司直) 이탁(李倬)의 딸 완산이씨(完山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완산이씨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승지 김중일(金重鎰)은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 계유증광문과(癸酉增廣文科) 병과(丙科) 20등으로 급제하였다. 큰사위는 현감(縣監) 민충량(閔忠亮)이고, 둘째사위는 강백년(姜柏年)이다. 측실(側室)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김중현(金中鉉)은 1663년(현종 4) 계묘식년사마시(癸卯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 국화(國華)
    송은(松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68(세조 14) - 1563(명종 18)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학 > 시/시조인
    김광수(金光粹){1}에 대하여

    1468년(세조 14)∼1563년(명종 18).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아버지는 지례현감 극해(克諧)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고향인 의성의 북촌에 머물면서 시가를 읊조리며 청빈하게 지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부근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죽은 뒤 대곡산(大谷山)에 장사지냈는데, 그뒤 외손인 유성룡(柳成龍)이 왕의 명을 받아 제사지내고 묘를 살펴보았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과 《경심잠 警心箴》이 있다.

  • 성중(成仲)
    상고당(尙古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96(숙종 22) - ?
    본관
    상주(尙州)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광수(金光遂){2}에 대하여

    1696년(숙종 22)∼미상. 조선후기의 화가. 서화고동(書畵古董) 감식가 및 수장가. 본관은 상주. 자는 성중(成仲), 호는 상고당(尙古堂). 이조판서 동필(東弼)의 아들이다. 1729년 진사가 되고 벼슬은 부사를 지냈다. 빈양노인(濱陽老人)의 〈상고당김씨전 尙古堂金氏傳〉과 신유한(申維翰)의 〈상고당자서후제 尙古堂自敍後題〉에 의하면, “집안에 모은 고서화와 진기(珍器)는 모두 천하명품이며 고시문(古詩文) 등도 천하의 기서(奇書)인데, 뜻에 맞는 것이 있으면 가재를 기울여 비싼 값으로 구입하였다.”라고 했으며, 또한 “감식이 신묘했다.”고 했다. 박지원(朴趾源)은 그를 가리켜 “감상지학(鑑賞之學)의 개창자”라고 말했다. 그림에도 능했으며 유작은 전칭작으로 화조(花鳥)와 초충(草蟲) 4점이 전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들은 먹으로만 그려졌으며 소재의 생동감이 강조되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광식(金光軾){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무신. 1178년(명종 8) 조위총(趙位寵)의 난 이후 민심이 흉흉해진 서경지역을 응징하기 위해 서경의 관제를 고칠 때, 대장군으로 서경제치사(西京制置使)에 임명되었다. 좌산기상시를 거쳐 1181년에는 전중감(殿中監)이 되고, 이어 추밀사를 역임했다.



  • 시호

    이칭
    김채홍(金采弘)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1() - 1972()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광식(金光植){2}에 대하여

    1911년∼1972년. 대금 명인. 경기도 광주 출신. 본명은 채홍(采弘). 1924년 무렵부터 양경원(梁慶元)에게 피리 삼현시나위를 배웠고, 방용현(方龍鉉)에게 대금 풍류삼현시나위를 배웠으며, 뒤에 박종기(朴鍾基)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 1935년 무렵에는 김덕진(金德鎭)에게 해금삼현과 시나위를 배웠다. 경기도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대금악사로 종사하다가 1935년에는 광무좌단장(光舞座團長)을 역임하였고, 1955년에는 대한국악원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3년부터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서라벌예술대학 강사로 출강하였고, 1965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으로 있었다. 그는 피리보다 대금연주에 더 주력하였고, 삼현과 풍류에도 능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663(현종 4)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의열
    김광신(金光信)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전라남도 영암(靈岩)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지극하게 섬겼다. 하루는 어머니가 까치 한 마리를 주면서 날려 보내지 말라고 하였으나 실수로 까치를 놓쳤다. 어찌할 줄 모르고 울고 있는데 홀연히 까치가 다시 날아와 그의 어깨 위에 앉아 날아가지 않은 일이 있었다. 또 무더운 여름에 어머니의 병세가 위급하였는데, 의원이 꿩을 구워 먹으면 낫겠다고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효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날아와 어머니에게 구워 먹이니 병이 다 나았다. 이를 두고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宥)가 그의 행장(行狀)에 ‘방작환견(放鵲還肩) 호천치격(呼天雉格)’이라 적었다. 평소에 거문고 타기를 즐기며 《역경(易經)》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의 저술은 모두 역경에 정통한 것이 많다. 향년 67세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광주(光州) 장열사(壯烈祠)에 배향되었다.

  • 동첨(東瞻)/수이(秀而)
    독좌와(獨坐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94(숙종 20) - 1759(영조 35)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악(金光岳)에 대하여

    1694년(숙종 20)∼1759년(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동첨(東瞻)·수이(秀而), 호는 독좌와(獨坐窩). 정상(鼎相)의 아들이다. 1726년에 사마양시에 응시하여 생원시에 장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73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간 뒤 감찰로 나갔다가 1736년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는데, 당하관으로 승교(乘轎)하였다 하여 처벌을 받았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고, 이어 현릉령(顯陵令)을 지내다가 귀향한 뒤 효성으로 이름이 나서 충청도관찰사 서종급(徐宗伋)의 추천으로 흡곡현령(歙谷縣令: 지금 강원도 통천의 한 지명)에 제수되었다. 효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충과 믿음도 돈독하여 참의 김변광(金汴光), 교리 권세숙(權世橚)과 함께 당시 호서지방의 진신(縉紳)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또한, 근세인의 좋은 말과 행동을 수집, 그 이름을 《문견록 聞見錄》이라 하고 모범으로 삼았다.

  • 대지(大之)
    목촌(牧邨)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43(영조 19) - 1799(정조 23)
    본관
    도강(道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광억(金光億)에 대하여

    1743년(영조 19)∼1799년(정조 23).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대지(大之)이고, 호는 목촌(牧邨)이다.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공신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전라북도 정읍(井邑) 태인면(泰仁面)에서 출생하였다.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계몽기의(啓蒙記疑)》 등의 저술을 남긴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을 사사했다. 그의 문집 《목촌유고(牧邨遺稿)》 필사본 1책이 전한다.

  • 이회(而晦)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1(명종 16) - 1610(광해군 2)
    본관
    순천(順天)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엽(金光曄)에 대하여

    1561년(명종 16)∼1610년(광해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이회(而晦). 경상북도 상주 출신.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병마만호(兵馬萬戶) 침(琛)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승문원판교 수장(壽長)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뒤 그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과 예문관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로 옮겼다. 그뒤 옥당의 저작,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부응교와 사간원의 정언·헌납과 사헌부의 집의·지평 등 요직을 거쳐서 이조정랑과 성균관의 직강·사예·사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흥해군수를 역임하였는데, 주민생활에 이로운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찬을 들었다. 저서로는 《죽일문집 竹日文集》이 있다.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이옥(而玉)
    죽은(竹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김녕(金寧)
    분류
    교육/사상 > 유생
    김광옥(金光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유생. 자는 이옥(而玉)이고, 호는 죽은(竹隱)이며,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김준(金遵)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주서(金周瑞)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품계까지 올랐다. 선조(宣祖) 때 흥양(興陽)에서 와서 쌍봉면(雙䭰面) 웅천리(熊川里)에서 우거(寓居)하였으며, 후손들은 웅천(熊川)에서 살고 있다.

  • 백첨(伯瞻)
    당계(棠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07(숙종 33) - 1781(정조 5)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우(金光遇)에 대하여

    1707년(숙종 33)∼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백첨(伯瞻), 호는 당계(棠溪). 아버지는 진사 진하(鎭夏)이다. 1737년(영조 13)에 생원이 되고, 1749년 해주판관을 지냈으며, 176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전적·병조좌랑·예조좌랑을 거쳐 함경아사(咸鏡亞使)를 지냈다. 그뒤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시문에 뛰어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광운(吳光運)·강박(姜樸) 등과 교분이 두터워 시문을 겨루기도 하였으며,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들을 즐겨 읽었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외직으로는 상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내직에서는 주로 양사(兩司)에서 사환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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