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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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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문언(文彦)
    지산(芝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추(金光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문언(文彦)이고, 호는 지산(芝山)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축은(築隱) 김방려(金方礪)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운(金運)이다. 영조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전라남도 보성(寶城)에서 여수(麗水) 만흥동(萬興洞)으로 이거하였으며, 만흥동에 그 자손들이 살고 있다.

  • 회경(晦卿)
    동림(東林)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90(선조 23) - 1643(인조 21)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혁(金光爀)에 대하여

    1590년(선조 23)∼1643년(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회경(晦卿), 호는 동림(東林). 아버지는 장단부사 상관(尙寬)이다. 1623년(인조 1) 참봉이 되었고 이듬해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25년 설서(說書)가 되었으며 검열을 거쳐 이듬해 정언을 역임하였다. 1630년에 교리가 된 뒤 헌납·수찬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으로서 호남을 순찰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정랑이 되었다. 1638년에는 집의에 임명되었으며 검상·사인·광주목사를 거쳐서, 1640년에 예문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 회여(晦汝)
    수북(水北)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84(선조 17) - 1647(인조 25)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광현(金光炫)에 대하여

    1584년(선조 17)∼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우의정 상용(尙容)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숨은 인재로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 1625년(인조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및 홍문관부정자, 검열·정언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 및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 때 영사공신(寧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으나 뒤에 개훈(改勳)때 삭제되었고, 1626년 수찬·교리·암행어사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 심열(沈悅)의 종사관으로 기읍(畿邑)에 파견되어 기민구제에 힘썼으며, 사간·응교·대사헌·대사간·예조참의를 거쳐 1634년 부제학이 되었다. 이때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옹호함을 임금에게 아부한다 하여 탄핵하다가 삼수(三水)로 유배당하였다. 다음해 재이(災異)가 빈발함을 이유로 방면되어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 상용이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당하매 그곳에서 자살하자, 그도 홍주의 오촌동(鰲村洞)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그 호종(扈從)의 공을 수록하고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시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호 쓰기를 거부하고 단지 간지만 씀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뒤 이조참판을 배수하였으나 사직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이 일어나 강씨가 사사되자, 강빈의 오빠 문명(文明)이 그의 사위였던 까닭에 순천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그곳에서 울분 끝에 죽었다.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글씨로는 홍천에 있는 〈홍양청난비 洪陽淸難碑〉 및 통진에 있는 〈민기신도비 閔箕神道碑〉와 〈영상이탁묘비 領相李鐸墓碑〉가 있다. 시문집으로 《수북유고》 4권이 전한다.

  • 자서(子瑞)
    의재(毅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광협(金光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자서(子瑞)이고, 호는 의재(毅齋)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고흥군(高興郡) 풍양면(豊陽面) 출신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준(金遵)의 후손이며 김하서(金夏瑞)의 둘째 아들이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1561년(명종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고금도에서 크게 공을 세워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의주(義州)에서 선조를 호종하며 공훈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금산(錦山) 대첩사(大捷祠)에 배향되었다.

  • 중화(重華)
    죽암(竹菴)/죽호(竹湖)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0(고종 27) - 1961()
    본관
    경주(慶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광호(金光鎬)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61년.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유학자로, 자는 중화(重華)이고, 호는 죽암(竹菴) 또는 죽호(竹湖)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충청남도 아산(牙山) 여수동(麗水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장릉참봉(莊陵參奉) 김기태(金基泰)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현수(朴顯秀)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한밤이 되도록 등불을 밝히고 독서하였다. 몸이 약하여 이질(痢疾)에 걸려 고생하며, 독서를 폐하고 통곡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 꿈에 한 노인이 약을 가르쳐 주었다. 깨어나 그대로 처방하니 효험이 있었다. 그 후 예전처럼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다. 한 번은 견문을 넓히고자 상경(上京)하여 학교를 둘러보았는데,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그길로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성리학에 잠심하는 한편 고을의 법도를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흠재(欽齋) 임공(任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집으로 《죽암집(竹菴集)》 4권이 전한다. 권1에는 시(詩), 권2에는 서(書)·잡저(雜著), 권3·권4에는 부록이 실려 있다. 부록은 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개백(介伯)
    석정(石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50(세종 32) - 1482(성종 13)
    본관
    영광(靈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괴(金塊)에 대하여

    1450년(세종 32)∼1482년(성종 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개백(介伯), 호는 석정(石亭). 평강현감(平康縣監) 경의(敬義)의 손자이며, 이조참판 필(㻶)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찰방 이숙강(李叔剛)의 딸이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남효온(南孝溫)과 교유하였다. 1469년(예종 1) 사마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474년(성종 5)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승문원정자·주서가 되고, 이조좌랑·박사·정언 등을 거쳐, 1477년에는 헌납이 되어 감찰로서 활약하였다. 이해 유자광(柳子光)·임사홍(任士洪) 등이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탄핵하도록 하였다. 이어 유자광도 현석규를 탄핵하고 나오자 성종은 이들의 탄핵이 파벌을 일으키는 비판으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시켰다. 이듬해 그는 예문관봉교 표연말(表沿末)·종실 심원(深源) 등과 함께 헌납으로 현석규와 김언신에 대한 구해(救解) 상소를 하여 유자광과 임사홍을 동래와 의주로 각각 유배시키게 하였다. 그런데 그는 사헌부로부터 오히려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탄핵을 받고 표연말·김맹성(金孟性) 등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였다. 그러나 그뒤 1482년(성종 13) 그의 죄상이 없음이 인정되어 반대파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직첩을 환급받았다.

  • 자야(子野)
    구와(龜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39(영조 15) - 1816(순조 16)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굉(金㙆){3}에 대하여

    1739년(영조 15)∼1816년(순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자야(子野), 호는 구와(龜窩). 아버지는 생원 광헌(光憲)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73년(영조 49) 사마시를 거쳐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1년에 스승 이상정이 죽자 스승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다. 1787년 전적을 거쳐 지평·정언을 역임하였고 단양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재직시에는 서리(胥吏)를 엄단하고 위정염간(爲政廉簡)하여 군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으며, 문학에 남달리 뛰어났고 필법이 높아 능히 한 체제를 이룰 만하였다.

  • 견중(堅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70(성종 1) - 1526(중종 21)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굉(金硡){2}에 대하여

    1470년(성종 1)∼1526년(중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견중(堅仲). 아버지는 평양서윤(平壤庶尹) 순성(順誠)이다. 1496년(연산군 2)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507년 정언이 된 뒤 지평·장령 등 언관(言官)을 두루 거쳤으며, 1513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다녀왔으며, 사신으로 두번이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6년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으로서 단종과 연산군이 비록 쫓겨난 군주이지만 입후종사(立後從祀)하여야 마땅함을 주장하였다. 같은해 대사간·홍문관부제학 등을 지내고 이듬해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23년 승정원동부승지와 우부승지, 경상도관찰사 등을 두루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평안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충청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525년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74(공민왕 23)
    본관
    의성(義城)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굉(金鋐){1}에 대하여

    미상∼1374년(공민왕 23). 고려말의 무신. 본관은 의성. 처음 충혜왕을 섬기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나주에 옮겨 살면서 전민(田民)을 탈취하여 부호가 되었다. 공민왕 때에 나주에서 왜구를 격퇴하여 그 전공으로 복직되었으며, 권귀에게 재물을 주어 1359년에 전라도추포부사(全羅道追捕副使)가 되었다. 1361년 전라양광도방어사(全羅楊廣道防禦使)를 거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고, 1362년에는 전라도연해순방 겸 조전사(全羅道沿海巡訪兼漕轉使)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상시로서 홍건적을 물리치고 경성(京城)을 수복한 공으로 경성수복일등공신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도순어사(全羅道都巡御史)가 되었으나, 백성을 침탈하고 조세를 갈취하여 사복을 채웠으며, 내포(內浦)에서 외적을 만나 참패했으면서도 폐행(嬖幸)에게 뇌물을 주어 도리어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371년 신돈의 일당으로서 유배되었다가 재기용,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었고, 1373년에는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다. 그뒤 행신 김흥경(金興慶)과 총신 김사행(金師幸)의 비위를 맞추어 1374년에는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옮겨 합포(合浦)를 지켰는데, 왜구 침입으로 5천인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참패하여 처형당하였다.

  • 대유(大猷)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시호
    문경(文敬)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54(단종 2) - 1504(연산군 10)
    본관
    서흥(瑞興)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굉필(金宏弼)에 대하여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1. 집안환경·소학입문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인 청주한씨이다.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을 뿐 아니라,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하였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2. 관계진입·사화연루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3. 신원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하여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선조 10)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광해군 2)에는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4. 학문성향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던 데 반해,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성격은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으며, 유배지 교육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이라 하여 숭상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고경(高卿)

    시호
    양양(養襄)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28(세종 10) - 1480(성종 11)
    본관
    선산(善山)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교(金嶠)에 대하여

    1428년(세종 10)∼1480년(성종 11).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고경(高卿). 아버지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시로(時露)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1450년(세종 32) 무과에 합격하고, 1457년(세조 3)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훈련원판관을 거쳐 부호군이 되었다. 1460년 신숙주(申叔舟)의 군관으로 모연위(毛憐衛) 토벌에 공을 세워 사복시윤(司僕寺尹)으로 초수(超授)되었으며, 종성절제사·길주목사·경원부사·충청도수군절도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467년 5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충청도 홍주에 내려가 있다가 만포절제사로 기복(起復)되었으며, 그해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강순(康純)의 비장(裨將)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훈되었으며, 경원도호부사 겸 경원진병마첨절제사가 되고 오림군(烏林君)에 봉해졌다. 이어 회령도호부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내직으로 들어와 선산군(善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71년(성종 2) 어린 성종을 옹립하는 데 공이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훈되고, 그해 7월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거쳐 다시 지중추부사·공조판서·평안도절도사와 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다시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4월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과 함께 부원수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은대(銀帶)를 하사받았으며,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죽었다. 성품이 온량하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아우 6명이 모두 무과에 합격한 무인 집안으로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2(고종 19) - 195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교락(金敎洛)에 대하여

    1882년(고종 19)∼1954년.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함평 출신.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에 뜻을 품고 있던 중 1917년 6월 정동근(鄭東根)·양재홍(梁在鴻)·문재교(文在敎)·김영하(金榮夏)·고성후(高成厚) 등과 함께 전라남도의 나주·함평·화순 등지에서 자산가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모금활동을 폈다. 1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했는데, 일본경찰에 발각됨으로써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언도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1(광무 5) - 1960()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작곡/작사가
    김교성(金敎聲)에 대하여

    1901년∼1960년. 대중가요 작곡가. 서울 출생. 20세를 전후하여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 출신 연주인들에게 클라리넷을 배웠다. 1925년 무렵부터 무성영화를 위한 효과음악 연주단원으로 활약하였고, 연극단의 막간 여흥의 노래반주단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36년 신민요풍의 〈능수버들〉을 왕수복(王壽福)의 노래로 발표, 성공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신인가수선발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진방남(秦芳男)·백난아(白蘭兒)·박재홍(朴載弘) 등을 발굴하였다. 1957년 대중가요 작사가들과 작곡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협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대표작품으로는 〈능수버들〉 외에 진방남이 부른 〈넋두리 20년〉·〈사막의 애상(哀傷)〉,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직녀성〉, 박재홍이 부른 〈자명고(自鳴鼓)사랑〉·〈울고 넘는 박달재〉 등과 공보처 제정 국민가요로 〈고향역〉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1(광무 5) - 1945()
    본관
    미상(未詳)
    분류
    경제/사회 > 사회운동가
    김교신(金敎臣)에 대하여

    1901년∼1945년. 무교회주의를 제창한 교육자·종교인. 함경남도 함흥 출신. 태종 때 함흥차사 박순(朴淳)과 함께 함흥에 갔다가 요행히 죽음을 면하고 정평(定平)에 정주하게 된 덕재(德載)의 후예로 아버지는 염희(念熙), 어머니는 양신(楊愼)이다. 어렸을 때 한학을 수학하고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건너가 동경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에 들어갔다.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그뒤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동경유학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하던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으로 이 강의에 참석했던 송두용(宋斗用)·유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정상훈(鄭相勳)·함석헌(咸錫憲) 등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또, 이들은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을 창간하였다. 1930년 5월 제16호부터는 이 동인지를 김교신이 주필로 단독 간행하였으나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었다. 이 책은 불온잡지로 지목되어 1942년 3월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한국민족의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당하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하여 함석헌·송두용·유달영(柳達永) 등 13명은 검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것이 세칭 ‘성서조선사건’이다. 1944년 7월 함남질소비료공장에 강제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이 공장에 입사하여 주로 교육·후생·주택 등의 문제를 보살펴주다가, 1945년 4월에 죽었다. 그는 주로 민족사학의 교사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가 근무한 학교는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양정중학교·경기중학교·개성 송도중학교이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가슴으로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는 뜻에서 민족적이며, 교회라는 체제적인 울타리를 벗어 민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에서 민중적이며, 한국이라는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어야 한다는 뜻에서 토착적이었다. 이들 무교회클럽과 일반 교회 신자와의 신앙생활 방식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눈에 보이는 회당으로서의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보지 않고,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든 자리가 교회일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 교회의 목사, 또는 각 교파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 즉 교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세례식·성찬식 등 교회에서 행하는 예식에 별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넷째,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행사하는 성서해석권을 거부하고 각 사람의 믿음과 은총의 분수대로 성경의 뜻을 깨우침받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섯째,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위탁하신 귀한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국의 쓰라린 역사를 바탕으로 찾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수용자세, 종교인 및 교육가로서의 탁월한 행적에 관한 재평가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평중(平仲)
    영암(永菴)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4(고종 21) - 1940()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교일(金敎逸)에 대하여

    1884년(고종 21)∼1940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자는 평중(平仲)이고, 호는 영암(永菴)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에서 태어났다. 계림군(鷄林君) 김곤(金梱)의 18세손이다. 동학 접주 김학원(金學遠)의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회문산(回文山)에 은거하다가 돌아가시자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 1910년(융희 4) 국권이 강탈당하자, 숙부 김영원이 조직한 성문회(聖門會)에 가입하였다. 군자금을 마련하고 운무지(雲霧誌)를 발간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1910년(융희 4) 1월 19일 폭동죄로 기소되어 통감부 전주재판소에서 2년형이 언도되었다. 그 후 형 김교필(金敎弼)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천도교 구파(舊派)의 독립운동 모의에 가담하였고 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 경로(敬魯)
    경암(敬菴)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3(고종 20) - 1944()
    본관
    경주(慶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교준(金敎俊)에 대하여

    1883년(고종 20)∼1944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경로(敬魯), 호는 경암(敬菴)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만취정(晩翠亭) 김위(金偉)의 후손이다. 송병선(宋秉璿)과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많은 업적을 이뤘다. 《경암집(敬菴集)》은 그가 죽은 지 약 20년 뒤인 1961년에 제자 황갑주(黃甲周)와 오구영(吳龜泳)이 서(序)와 발(跋)을 붙여 석판본 9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 계평(季平)
    내원(萊園)
    시호

    이칭
    김준(金準)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84(고종 21) - 1965()
    본관
    경주(慶州)
    분류
    의료/기술 > 한의사
    김교준(金敎準)에 대하여

    1884년(고종 21)∼1965년. 근대 양의학계의 선구자이며, 대종교 최고원로의 한 사람. 본관은 경주. 자는 계평(季平), 호는 내원(萊園). 종교계에서는 김준(金準)으로 쓴다. 서울 출생.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창희(昌熙)의 넷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직각(直閣)을 지낸 이명기(李命棋)의 딸이다. 1902년 대한의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육군부위로 임관되었으며, 1903년에 대한의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그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할 때까지 군의무계통에 종사하면서 정3품 통정대부 육군참령삼 등 군의장으로 승진하였다. 경술국치 후 대종교를 신봉하여 1911년 지교(知敎)로 특별임명되어 배천지사(白川支司) 전사(典事)로 3년간 시무하였고, 1914년에는 상교(尙敎)가 되었다. 특히, 1917년 총본사가 동만주 화룡현 삼도구(東滿洲和龍縣三道溝)로 이전되자 맏형인 제2대교주 교헌(敎獻: 茂園宗師)을 따라서 만주로 건너가 선교에 힘쓰는 한편, 현지의 거류동포를 위한 의료사업에도 진력하였다. 1938년 정교(正敎)로 승진됨과 동시에 대형호(大兄號)를 받았다. 1946년 1월 서울에서 남도본사(南道本司)를 재건하여 전리(典理)가 되었고, 총본사가 만주로부터 환국하자 초대전리가 되었으며,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 교주권한대행)가 되었다. 그뒤 원로원장을 거쳐 1958년 사교(司敎)로 올라감과 동시에 도형호(道兄號)를 받았다. 1962년 4월 교의회에서 제5대총전교(總典敎: 교주)로 공선되어 2년간 시무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9(고종 26) - 195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교창(金敎昌)에 대하여

    1889년(고종 26)∼1959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강화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면(洪) 등이 전개한 수원군 송산면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26일부터 송산면 사강리의 면사무소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일본인 순사 노구치(野口廣三)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경찰은 주동자인 홍면 외 2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홍면이 갑자기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노구치가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의 어깨를 관통시켰다. 이 모습을 본 시위군중이 일시에 분노하여 달려들자,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망쳤다. 이때 홍면의 동생 준옥(㻐玉)이 사무실로 들어와, 그의 형이 총살당하였으니 함께 발포한 순사를 죽이자고 호소했다. 이에 그는 즉시 뛰쳐나가 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준옥 등 20여명과 노구치를 추적하여 돌로 때려죽이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만산(萬山)
    화암(化菴)
    시호

    이칭
    김덕원(金德遠)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7(고종 4) - 1944()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교필(金敎弼)에 대하여

    1867년(고종 4)∼1944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만산(萬山)이고, 호는 화암(化菴)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운암면(雲岩面) 화암리(化菴里)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학원(金學遠)이며 김덕원(金德遠)으로도 불리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혁신(甲午革新)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10년(융희 4)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숙부 김영원이 조직한 성문회(聖門會)에 가담하였다. '성문회'의 조직위원으로 많은 동지를 규합하며 《운무지(雲霧誌)》를 발간하려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3월 15일에는 봉통산(蜂桶山)에, 3월 18일에는 선순봉(仙筍峯)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그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39년 천도교 구파의 독립운동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백유(伯猷)
    무원(茂園)/보화(普和)
    시호

    이칭
    김헌(金獻)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8(고종 5) - 1923()
    본관
    경주(慶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교헌(金敎獻)에 대하여

    1868년(고종 5)∼1923년. 독립운동가·대종교 제2대교주. 본관은 경주.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 이름을 헌(獻)이라고도 하였다. 수원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창희(昌熙)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판관을 지낸 희필(熙弼)의 딸이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병조참의·예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의 좌절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 《문헌비고》 편집위원이 되었고, 1904년 《신단민사 神檀民史》를 저술,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에 재직할 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본인들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이권운동을 징치하다가 일본인들의 횡포로 일시 관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뒤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입회하여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 감인위원(監印委員)을 겸직하였고, 19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뜻이 깊었던 까닭에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해부터 교인이 되어 각종의 문헌을 섭렵하여 교(敎)의 역사를 정립하는 한편, 영계(靈戒)를 받고 총본사(總本司)의 부전무(副典務)·경리부장을 지내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남도본사전리(南道本司典理)·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을 역임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서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敎主)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하여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東滿洲和龍縣)으로 옮기고 교세확장을 통한 독립운동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동포들에 대한 독립정신교육에 전념하였다. 1918년 11월 해외에서 선언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수석으로 서명하여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해 12월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담당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하게 한 끝에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의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여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만주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는 《신단민사》·《단기실기 檀記實記》·《홍암신형조천기 弘巖神兄朝天記》 등이 있으며,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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