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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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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차산(次山)
    지포(止浦)
    시호
    문정(文貞)
    이칭
    김백일(金百鎰)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1211(희종 7) - 1278(충렬왕 4)
    본관
    부령(扶寧)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金坵){1}에 대하여

    1211년(희종 7)∼1278년(충렬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령(扶寧: 현재의 扶安).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과거에서는 모두 장원을 믿었으나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있을 때 부사 최자(崔滋)는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다. 서울에서 과장(科場)의 부제(賦題)가 전달되었는데 매우 어려운 제목이었다. 최자가 구에게 이 제목으로 글짓기를 청하자, 그는 담소자약하면서 즉석에서 글을 지었다. 최자는 문장에 더 가필할 것이 없으므로 탄복하여 아들에게 “이는 시부(詩賦)의 준승(準繩)이니 잘 간직하라.”고 하였다.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로는 8년 동안 한원(翰院)에 재직하였고, 각문지후(閣門祗候)를 거쳐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되었을 때, 최항(崔沆)의 명으로 지은 《원각경 圓覺經》 발문에 쓴 시가 최항의 뜻을 거슬러 좌천되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중이었기 때문에 대간이 될 수 없었으나, 그 재주를 인정받아, 1263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고,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추밀원부사·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서는 문신들의 저술을 시험하여 유능한 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할 것을 건의하였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당시 역관들이 간계를 부려 사실대로 통역하지 않고 사리를 꾀하는 일이 있으므로, 헌의하여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궁중 학관(學館)의 연소한 참외(參外)들로 하여금 한어(漢語)를 습득하게 하였다. 성품이 성실하여 말이 적었으나 국사를 논함에는 강직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신종·희종·강종 및 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당시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에 일을 잘 처리하였다. 원나라에 갔을 때 《북정록 北征錄》을 남겼고, 충렬왕의 《용루집 龍樓集》에도 그의 시가 들어 있으며,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다고 한다. 묘는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있다. 저서로는 《지포집》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직지(直之)
    귀산(歸山)
    시호
    문장(文長)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62(세조 8)
    본관
    아산(牙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金鉤){2}에 대하여

    미상∼1462년(세조 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아산. 자는 직지(直之), 호는 귀산(歸山).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435년(세종 17)에 종학박사(宗學博士)에 제수되었다. 1439년 눈병으로 사직하자 종친인 경녕군(敬寧君) 비(裶) 등 19인이 상소하여 한관(閒官)에 서용되었다. 1446년 사성으로 있으면서 종학에 근무하는 교수들의 겸직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소를 올렸다. 1448년에는 상주목사로 나갔다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내직에 임명되어 사서언해(四書諺解)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해에 불당의 설립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후에 사간이 되었으나,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의 아들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아 그로 말미암아 좌천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사성·부제학에 제수되고, 1454년(단종 2)에 예문제학이 되었다. 그해에 다시 내불당(內佛堂)의 혁파를 건의하는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제수되었으며, 1458년 이승소(李承召)와 함께 최선복(崔善復) 등 12인을 거느리고 《초학자회 初學字會》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1459년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김석제(金石梯)와 함께 새로운 진법(陣法)을 의논하였다. 이듬해에 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 9명과 함께 《손자주해 孫子註解》를 바르게 고쳐 정리하는 등 한문국역에 공이 컸다. 1462년 아산현을 회복하고자 도모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고신(告身)이 삭탈되었다. 죽은 후 성균생원 이고소(李古紹) 등의 상언(上言)으로 관직과 과전을 돌려받았다. 김말(金末)·김반(金泮)과 함께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당시에 성균관에서 후진교수에 전념하여 학문발전에 큰 성과가 있었으므로 ‘삼김(三金)’·‘경학삼김(經學三金)’ 혹은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불렸으며,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 대유(大柔)
    자암(自庵)/삼일재(三一齋)
    시호
    문의(文懿)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88(성종 19) - 1534(중종 29)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金絿){3}에 대하여

    1488년(성종 19)∼1534년(중종 29). 조선 중종 때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광산.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 대흥현감(大興縣監) 계문(季文)의 아들이다.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고, 충청도 예산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503년(연산군 9)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일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 2)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여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4년 뒤인 1511년에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전경(典經)·사경(司經)·부수찬 등을 지냈다. 1515년에는 기준(奇遵)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어서 홍문관수찬·부교리를 거쳐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신병으로 일시 사직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이조좌랑·정랑·사간·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좌승지 등을 지냈다. 1519년 5월 같은 사림파인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자, 그의 후임으로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림파는 관료들을 육성하는 성균관과 문한·언론기관인 홍문관을 장악하여 그들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519년 11월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유배중 부모가 모두 죽고, 그 때문에 그도 병을 얻어 죽었다. 그뒤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일찍부터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여 학문실력이 조광조(趙光祖)·김식과 겨눌만하였다 하며, 《전고대방 典故大方》의 문인록에 의하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음률에도 능통하여 악정(樂正)에 임명된 적이 있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瑢)·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그의 서체는 매우 독특하여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하였는데, 중국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시독관(侍讀官)으로도 활약하여 중종으로 하여금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적극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일에 임해서는 매우 강개하였다고 한다. 또, 조광조와 함께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앞장섰고, 사림파 대간(臺諫)의 현실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 自庵集》, 유품으로는 《자암필첩 自庵筆帖》·《우주영허첩 宇宙盈虛帖》과 예산 소재의 〈이겸묘지 李謙墓誌〉 등이 있고, 단가 3수와 〈화전별곡 花田別曲〉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관복재(觀復齋)
    시호
    충헌(忠憲)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49(인조 27) - 1704(숙종 30)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金構){4}에 대하여

    1649년(인조 27)∼1704년(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자긍(子), 호는 관복재(觀復齋). 아버지는 관찰사 징(澄)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춘당대문과에 장원하여, 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 위한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무소(時務疏)를 올려 일반의 찬탄을 받았으며,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힘썼다. 경연관·수찬·승지 등을 거쳐 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의 4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간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로서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서 세운 공으로 가자(加資)되었으나,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으로부터 흉년으로 모든 역사를 정지시켰는데도 내전(內殿)을 통해나온 명을 받들어 집을 지었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판결사(判決事)에 있으면서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복위를 극력 주장하여 숙종으로 하여금 단종의 위(位)를 추복(追復)하게 하였고, 아울러 단종비 신씨(愼氏)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역을 감독하여 그 공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육조의 판서를 거쳐, 1703년 우의정이 되었다. 임금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하였으므로 임금의 총애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鞱)》 등 병서와 도가류(道家類)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가 힘찼다. 글씨로는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 百川橋重刱碑〉와 선산에 있는 〈김주신도비 金澍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연상(蓮上)
    백범(白凡)/연하(蓮下)
    시호

    이칭
    김창암(金昌巖)/김창수(金昌洙)/김구(金龜)/원종(圓宗)/두래(斗來)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6(고종 13) - 1949()
    본관
    안동(安東)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구(金九){5}에 대하여

    1876년(고종 13)∼1949년.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텃골〔基洞〕 출신. 1. 성장기의 가정환경 순영(淳永)의 7대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과도 만났다. 2. 항일운동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달 만에 환속하였다. 3. 애국계몽운동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는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4.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그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고, 1929년 재중국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5. 광복군 운동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6. 해방 후의 정치 활동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수립의 시련을 맛보고 그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자택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월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 白凡逸志》를 남겼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경(金久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일찍이 진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어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1405년(태종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고, 1407년 4월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실시하는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와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를 지냈다. 1410년 성균주부(成均注簿)로서 진하성절사(進賀聖節使)의 서장관으로 차정(差定)되었으나, 명나라에 가기를 꺼리어 병이 있다고 전(箋)을 올려 사면해주기를 간청하자, 사간원의 탄핵으로 괴주(槐州)에 유배되었다. 1432년 호군(護軍)으로 부회례사(副回禮使)가 되어 회례사 이예(李藝)를 따라 일본을 다녀왔다.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녀온 공으로 의복·삿갓·신과 쌀 10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 변계량(卞季良)과 사이가 좋지 않아 높이 등용되지 못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년(金龜年)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1349년(충정왕 1)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이듬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공민왕초에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가 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절일사(節日使)로 원나라에 갔으나, 공민왕이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기씨(奇氏)일족을 살해하는 등 친명배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원나라에 의해 요양성(遼陽城)에 억류되었다.



  • 시호
    안정(安靖)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28(세종 10)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덕(金九德)에 대하여

    미상∼1428년(세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郞)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 현재의 堤川)·한주(韓州: 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령부사를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 중원(重遠)
    묵와(默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명(金九鳴)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중원(重遠), 호는 묵와(默窩). 아버지는 현감 현직(賢稷).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고향인 의주에 을파소(乙巴素)·강감찬(姜邯贊)·김상헌(金尙憲)·임경업(林慶業) 등의 사우를 건립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버이가 돌아가자 여묘(廬墓)에서 3년을 마쳤다. 뒤에 벼슬에 나가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의주의 용현사(龍峴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와집》이 남아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한의사
    김구상(金龜詳)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관. 경상남도 거창 출신. 특히 침술에 뛰어났기 때문에 1610년(광해군 2)에 광해군의 치병을 위하여, 내의원에서 그곳 현감에게 지시하여 서울로 불러올렸다. 그뒤 1613년에 내의원주부에 제수되고, 1616년에는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에 이르렀다. 1620년 지평현감(砥平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미천한 의관출신이라는 사헌부의 상소로 파면되었다.

  • 천칙(天則)
    수분와(守分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51(효종 2) - 1718(숙종 44)
    본관
    선산(善山)
    분류
    기타 > 의열
    김구성(金九成)에 대하여

    1651년(효종 2)∼1718년(숙종 44).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천칙(天則), 호는 수분와(守分窩). 대대로 안동 신성포(申城浦)에 살았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순충공(順忠公) 김선궁(金宣弓)의 후예로, 증조부는 김구(金愳)이고, 조부는 김명휴(金命休)이며, 아버지는 김필명(金必鳴)이다.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명길(李鳴吉)의 딸이다. 그의 아내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부호군(副護軍) 윤장(尹墇)의 딸이다. 만년에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였으나 스스로 여력이 없어 공부에 힘쓰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였고,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였으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아버지의 묵은 병을 여러 해 동안 지성으로 돌보았고, 아버지가 제철이 아닌 때에 참외와 송이버섯을 먹고 싶어하니 하늘에 정성껏 기도하여 구해드렸다. 상을 당하자 늘 상복을 입고 있어서 허리에 종기가 날 정도였으나 그래도 날마다 성묘하니 마을 사람들이 길을 닦아 주었다고 한다. 영조(英祖) 조에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전을 지었다.

  • 낙서(洛瑞)
    정사(睛沙)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4(고종 21) - 1931()
    본관
    연안(延安)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구영(金龜永)에 대하여

    1884년(고종 21)∼1931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낙서(洛瑞), 호는 정사(睛沙)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전라북도 진안(鎭安) 출신이다. 증조부는 김사성(金思聲)이고, 조부는 김석기(金奭基)이다. 부친은 김종협(金鍾協)이다. 외조부는 천안전씨(天安全氏) 전명석(全明錫)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1925년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유림들은 연재(淵齎) 송병선(宋秉璿) 선생과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 등 애국지사들의 뜻을 기리고자 진안 마이산(馬耳山)에 이산묘(駬山廟)를 창건하였는데 김구영도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4월 6일 마령면(馬靈面) 평지리(平地里) 마을 뒷산에서 전영상(全永祥), 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주민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때 전영상이 왜병에게 붙잡혀 강정리(江亭里) 주재소로 끌려가자,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그를 구출하였다.

  • 경지(敬之)
    척약재(惕若齋)/육우당(六友堂)
    시호
    문온(文溫)
    이칭
    김제민(金齊閔)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1338(충숙왕 복위 7) - 1384(우왕 10)
    본관
    안동(安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용(金九容)에 대하여

    1338년(충숙왕 복위 7)∼1384년(우왕 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郞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40(영조 16) - 1786(정조 10)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구주(金龜柱)에 대하여

    1740년(영조 16)∼1786년(정조 10). 조선 후기의 척신(戚臣).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오빠이다. 서산 출신. 홍양해(洪量海)의 문인이다. 그를 비판하는 글을 남긴 심낙수(沈樂洙)와는 동문 사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어서 충청도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였고, 스스로도 사대부 중에 시세에 아부하지 않는 청류(淸流)로 자부하였다 한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 급제, 그해에 도당록(都堂錄)에 올라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그뒤 강원감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772년 공조참판으로 있을 때 청의(淸議)와 명절(名節)을 우선하는 모임인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가 발각되어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어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당시 홍봉한(洪鳳漢) 외척정치의 탓으로 돌려, 홍봉한을 제거하는 것이 의리라는 상소를 사촌동생 관주(觀柱)와 함께 올렸다. 이 상소는 홍봉한이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의 외가였으므로 왕세손의 위치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1776년(정조 즉위)에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 및 홍인한(洪麟漢)·정이환(鄭履煥)들과 결탁하여 정조를 해치려 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784년에 왕세자 책봉으로 감등되어 나주에 이배되었다가 다음해 죽었다. 순조 연간에 김관주·심환지(沈煥之) 등 그와 가까운 인물들이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살육함으로써 그뒤 이 쟁단은 크게 확대되었다. 김한록·김상로(金尙魯)·신만(申晩)과 함께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으며, 김종수(金鍾秀)·윤시동(尹蓍東)·유언호(兪彦鎬)·심환지 등이 겉으로는 청류를 표방하였으나, 속으로는 그의 심복이라는 주장이 시파계(時派系)당론서에 보여지면서, 외척으로서 국가에 화란을 일으킨 본보기로 지목되었다.

  • 희중(希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나주(羅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구진(金九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으로, 자(字)는 희중(希仲)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출신지는 전라남도 무안(務安)이다. 김원(金遠)의 후손이며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귀암(龜巖) 김충수(金忠秀)가 그의 백선조(伯先祖)이다. 일찍이 김충수의 시호(諡號)를 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임종에 이르러 막내 아들 관포공(觀圃公)

  • 경락(景洛)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20(순조 20) - ?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구현(金九鉉)에 대하여

    1820년(순조 20)∼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경락(景洛). 아버지는 재현(在顯)이나, 재헌(在獻)에게 입양되었다. 1874년(고종 11) 증광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바로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그뒤 부응교(副應敎)·응교 등의 직을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높였다. 한때 충주목사로 외직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1881년에는 도총부부총관이 되고, 그뒤 한성부좌윤·이조참판·형조참판·예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1890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이어서 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쳤다. 1896년에는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및 칙임관 2등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태의원경(太醫院卿)이 되었다. 1901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 관경(觀卿)
    서석(瑞石)
    시호
    정정(丁靖)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15(태종 15) - 1480(성종 11)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국광(金國光)에 대하여

    1415년(태종 15)∼1480년(성종 11). 조선시대의 문신·공신. 본관은 광산.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사헌부감찰 철산(鐵山)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박사에 이르고, 1445년에는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이어 황해도도사·성균관주부·사헌부감찰·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하였다. 1448년 4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이사임(李思任)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세조 1) 12월에는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으며, 당시 할머니의 상을 입고 있었으나 이듬해 복을 벗고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었다. 1458년 4월 최옥산(崔玉山)의 살부사건(殺父事件)이 일어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이것이 무고임을 밝혀내는 데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을 얻게 되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사예(成均司藝)·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하였다. 1460년 사섬시윤(司贍寺尹)에 임명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刑典) 편찬을 주도했으며, 그해 10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그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직접 ‘사지제일(事知第一)’의 4자를 써서 하사하고, 당시 승지들이 모두 탄핵을 받자 가도승지(假都承旨)로 임명하여 왕명출납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1464년 10월 호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책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훈봉되는 동시에 좌찬성 겸 세자시강원 이사(貳師)·병조판서·오위도총부도총관·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올랐으며, 이어 행해진 건주위(建州衛)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軍功) 3등에 책훈되었다.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으나, 그해 10월에는 겸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이듬해 5월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4월 좌의정으로 옮기고 5월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1등에 책훈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8월 그의 아우 정광(廷光)과 사위 이한(李垾)의 부정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만 원상과 영경연사(領經筵事)만을 겸했다. 그뒤 사헌부·사간원 등 대간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면서도 1476년 5월 원상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원상으로서 국방·외교·법전편찬 등의 국정자문에 응하고 경연관으로서 국왕보도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1477년 10월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6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심한 반발로 사직하였다. 일찍이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 성덕(性德)
    송암(松庵)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0(고종 27) - 1937()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국원(金國元)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37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성덕(性德), 호는 송암(松庵)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순천(順天) 승주군(昇州郡) 별량면(別良面)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막하에서 활약한 김대인(金大仁) 장군의 후손이다. 1906년(고종 43)에 순창(淳昌)의 유병우(柳秉禹), 담양(潭陽) 이항선(李恒善) 등이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며 독립운동을 할 지사(志士)를 소집할 때, 이에 가담하였다. 순천에서 왜적들을 밤에 습격할 떄, 그가 선두에 서서 지휘하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왜인에게 동지 백낙구(白樂九)가 피살되었으며, 유병우·이항선·김상기 등과 함께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전멸은 모면하고 고향에 피신하였다. 그 후에도 왜인들을 죽일 기회를 엿보다가, 말을 타고 촌락을 순회하는 왜인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체포되어 1년의 가혹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681(신문왕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장군
    김군관(金軍官)에 대하여

    미상∼681년(신문왕 1). 신라통일기의 장군·정치가. 신문왕비의 아버지이다. 김유신(金庾信)과 김인문(金仁問)을 도와 고구려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때는 병부령(兵部令)·상대등까지 올랐다. 백제 멸망 뒤인 661년(문무왕 1) 7월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이 되어 고구려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잔민의 토벌이 급선무였고, 또한 무열왕의 상중(喪中)이어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4년초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이 되어 고구려정벌의 계획수립에 큰 몫을 하였다. 같은해 9월 고구려정벌군이 출동하였는데, 그는 일선(一善: 지금의 선산)·한산(漢山: 지금의 광주)의 두 주의 군대를 거느리고 웅진부성(熊津府城)의 병마와 합세하여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함락시켰다. 668년 6월 고구려정벌 당시 잡찬(迊飡)이던 그는 대아찬(大阿飡)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출정하여 평양성함락에 큰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680년 2월 상대등이 되었으며, 병부령을 겸하였고, 더구나 태자(뒤의 신문왕)의 장인이라는 높은 신분에 이르렀다. 그러나 681년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모반사건을 보고하지 않은 이유로 죽음을 당하였다.


  • 설당(雪堂)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군수(金君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 호는 설당(雪堂). 아버지는 돈중(敦中)이며, 할아버지는 부식(富軾)이다. 일찍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급제 이듬해인 1195년(명종 25)에 왕이 친히 제목을 내려 문신들의 시부(詩賦)를 시험하였을 때 장원을 하기도 하였다. 1194년 괴과(魁科)에 뽑혀 직한림원(直翰林院), 1210년 공주지사(公州知事)를 거쳐 고종 초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다. 이무렵 제도찰방사(諸道察訪使)로 지방행정의 감찰을 위해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1216년(고종 3) 8월 거란족의 침입으로 5군(五軍)이 편성되자 전군(前軍) 병마부사(兵馬副使)에 임명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파견되기도 하였다. 1218년 일단 물러났던 거란족이 다시 군세를 정비하여 남하하자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서 조충(趙沖)을 대신하여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직임을 띠고 파견되었다. 이때 북계(北界)의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일대에 횡행하는 거란족들을 숙주(肅州: 肅川)와 영청(永淸: 永柔) 등지에서 격파, 적 430여명을 베고 21명을 포로로 하고, 53필의 말을 얻는 등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의주(義州)의 별장(別將)이었던 한순(韓恂)·다지(多智) 등이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과 수령 이체(李棣)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 임명되어 지모(智謀)로써 적괴(賊魁)의 머리를 베어 반란 진압에 성공하였다. 서북면병마사 재직중 청백(淸白)과 애민(愛民)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순·다지를 목베어 난의 평정에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병마사 김취려(金就礪)의 미움과 관하의 녹사(錄事) 노인수(盧仁綬)의 참소를 받아 상공(賞功)대신 도리어 한남(漢南: 水原)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심히 애석히 여겼다. 시문(詩文)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竹〕를 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동문선 東文選》에 〈서요성역 書聊城驛〉·〈동도객관 東都客館〉 등의 시가 전하며, 송광사(松廣寺)의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은 1210년(희종 6) 그가 공주에 외관으로 나가 있을 때 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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