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군승(金軍勝)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문무왕 때의 무관. 김유신(金庾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알 수 없다. 관등은 아찬(阿飡)이다. 661년(문무왕 1) 2월에 아버지 김유신의 명에 따라 김인문(金仁問)·양도(良圖)와 더불어 당시 평양에 설치되어 있던 당나라의 군영에 가서 장수 소정방(蘇定方)에게 군량을 공급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68(공민왕 17)
    본관
    선주(善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군정(金君鼎)에 대하여

    미상∼1468년(공민왕 17).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본관은 선주(善州).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낸 달상(達祥)이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몽진할 때 원외랑으로서 왕을 호종한 공으로 1363년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오르고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1365년에는 좌대언에 올랐다. 이때 동생 문현(文鉉)이 사람을 죽이는 등 패륜이 심하므로 외방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신돈은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인물이다.” 라고 말하였다는 동생의 모함으로 부자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뒤에 신돈이 몰락하자 복권되었다.

  • 이중(而中)
    졸탄(拙灘)
    시호
    충간(忠簡)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9(명종 4) - 1622(광해군 14)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권(金權)에 대하여

    1549년(명종 4)∼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중(而中), 호는 졸탄(拙灘). 아버지는 참봉 덕무(德懋)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인(麟)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헌납(獻納)으로 재임중에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여립(鄭汝立)을 논박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590년 지평(持平)으로 복직되었으나 그 이듬해 정철(鄭澈) 등이 축출당할 때 다시 파면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문학·교리·지평·사간 등을 역임하고, 난이 끝난 뒤 사인(舍人)·수찬(修撰)·직강(直講)·연안부사·사복시첨정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 전주로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청풍군(淸風君)에 봉해졌다. 1615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정치가 문란하므로 사직하였다. 1617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무안으로 이배되어 5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인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청풍의 봉강서원(鳳岡書院)과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권일(權一)
    노악(露岳)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36(헌종 2) - ?
    본관
    김해(金海)
    분류
    기타 > 의열
    김권일(金權一)에 대하여

    1836년(헌종 2)∼미상. 조선 말기 효자·문신. 자는 권일(權一), 호는 노악(露岳)이다. 다른 이름은 김석암(金石岩)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도초면(都草面) 만년리(萬年里) 출신이다.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의 70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허벅다리 살을 도려내어 잡수도록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다시 회생시키려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둘째 아들 김경재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장사랑(將仕郞),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의 관직을 지냈고, 도초면 일대의 주민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풀어 유림조직인 대동사문회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며, 면민들은 공적비를 세워 주었다. 셋째 아들 김경지(金璟趾)는 이름난 효자로, 아버지가 병환이 들었을 때 산신께 기도를 올리니, 한 노인이 나타나 약초와 처방을 가르쳐 주어, 그대로 마련해 드리므로 병이 다 나았다. 김경지의 처 초계최씨(草溪崔氏)도 소문난 열녀로, 김경지가 죽자 다시 소생시키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운명 뒤에는 묘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궤(金軌)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1264년(원종 5) 몽고가 친조(親朝)를 요구하자 왕은 음양가(陰陽家)인 백승현(白勝鉉)의 말을 믿고 마리산(摩利山)에 가궐(假闕)을 지어 모면하려 하였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으면서 “혈구(穴口)는 흉한 산인데 승현이 대일왕(大日王: 摩利毘盧遮那의 음역으로 태양이 가진 속성처럼 중생들을 두루 비추어 지혜의 광명을 내는 부처라는 의미)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불사를 일으키도록 고종에게 권했지만 얼마 아니되어 고종이 죽었다.”고 하는 전왕(前王)의 일을 들어 박송비(朴松庇)를 통해 당시의 권신 김준(金俊)에게 승현의 말을 물리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승현의 말을 믿고 있던 김준에 의해 죽음을 당할뻔하였다. 1269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된 뒤 1272년 동서학당이 설치되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별감에 임명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김귀(金貴){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민애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838년(희강왕 3) 1월 상대등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 뒤 민애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해 3월 이찬(伊飡)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고 있는데, 이는 민애왕의 즉위에 공을 세웠거나, 그 지지세력인 것과 관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애왕 정권은 이듬해인 839년 1월에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군사를 이끌고 달구벌(達句伐: 지금의 대구)까지 진격해온 김우징(金祐徵)·김양(金陽) 등의 반란군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크게 패하여 겨우 성립 1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민애왕 자신도 반란군에 피살되었다. 그는 이때 민애왕 정권의 붕괴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67(공민왕 1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귀(金貴){2}에 대하여

    미상∼1367년(공민왕 15). 고려의 무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가게 된 왕을 호종하여 삼등공신에 오르고, 1363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올랐다. 같은해 5월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화주(和州)에 진을 치고 동북을 방비하였다. 1364년 정월에 삼선(三善)·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삼철(三撤) 등에 침입하자 도지휘사 한방신(韓方信)과 함께 진격하였으나, 패전하여 후퇴하다가 철관(鐵關)에서 방어하였다. 다음달에 동북면에서 이성계(李成桂)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이에 합세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잃었던 화주·함주(咸州) 등을 모두 수복하게 되었다. 이 싸움의 전공으로 왕으로부터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1365년 정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는데, 당시 신돈(辛旽)의 횡포에 대하여 이구수(李龜壽) 등과 같이 이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신돈의 미움을 받아 같은해 6월에 금주(金州)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8월에 노산사(盧山寺)에서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9(융희 3) - 197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예능보유자
    김귀수(金貴秀)에 대하여

    1909년∼197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유 水營野遊〉의 기예능보유자. 부산 출신. 1925년에 부산동래보통학교를 마치고 1927년에 부산실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부터 광복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다 귀국하였다. 1950년에 부산시 수영동 선거위원장을 지냈고 1962년에는 수영동 농업협동조합이사를 역임하였다. 최한복(崔漢福)과 정시덕(鄭時德)에게 10여년간 〈수영야유〉를 배웠고 1971년에 〈수영야유〉의 할미역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 학이(學而)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월성(月城)
    분류
    기타 > 의열
    김귀열(金貴悅)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학이(學而). 판서 김문기(金文起)의 10대손이다. 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나이 겨우 5, 6세에 어머니 섬기기를 예로써 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이 아무개[李兒]”라고 불렀다. 어머니 나이가 96세요, 그의 나이가 78세가 되었어도 효도를 도타이 하여 늙어도 오히려 쇠하지 않고 어머니가 병이 있으면 변의 달고 쓴 것을 맛보아 병의 경중(輕重)을 증험했다.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자 여막을 묘 옆에 짓고 낮이면 묘에 절하고 밤이면 여막에서 울어 3년 동안을 혼자 지키고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았다.

  • 현경(顯卿)
    동원(東園)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20(중종 15) - 1593(선조 26)
    본관
    상주(尙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귀영(金貴榮)에 대하여

    1520년(중종 15)∼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할아버지는 목사 사원(士元)이며, 아버지는 응무(應武)이다. 154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2년 뒤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곧 홍문관으로 옮겨 정자·저작을 역임하고 성균관박사로 전직되었다. 이어 부수찬·정언·수찬을 거쳐 1555년 김홍도(金弘度)·유순선(柳順善) 등과 사가독서했으며, 그해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이 되어 광주(光州)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헌부집의로 재임중,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예관(禮官)으로 활약한 바 있다. 1558년 홍문관전한에 올랐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로 옮겼으며, 이때 경연에서 경기내의 농민생활안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의로 전직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으로 다시 우부승지로 체직되었다. 그뒤 한성부우윤·춘천부사를 지냈고, 대사간·대사헌·부제학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군주의 공명정대한 처신과 윤원형(尹元衡) 첩자(妾子)의 허통(許通)문제 등에 관해 활발한 언론을 하였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589년에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녹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으며,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과 뒤이어 피난온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고,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국(推鞫)하여 회천으로 유배되어 가던 중 중도에서 죽었다.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 희서(希瑞)
    노곡(魯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626(인조 4)
    본관
    김녕(金寧)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귀희(金貴希)에 대하여

    미상∼1626년(인조 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희서(希瑞), 호는 노곡(魯谷). 아버지는 덕해(德海)이다. 어려서는 지극한 효심으로 효동(孝童)으로 불렸으며, 커서는 완력과 담력이 세고 지략이 뛰어나 1591년 장사군관(壯士軍官)으로 뽑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순찰사 김수(金睟)의 막료로 왜적과 싸웠으나 그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듭 패하자 고향에 돌아와 의병에 가담, 영천성(永川城)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의 전부총장(前部摠將)이 되어 경주의 적을 추격, 계연(鷄淵)에서 대파하고, 또 하빈(河濱)에 주둔한 적을 대파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의 휘하에서 울산의 적을 공격, 전과를 올렸다. 그뒤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2등에 올랐다. 충효사(忠孝祠)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실기인 《노곡실기》에 〈용사일기 龍蛇日記〉가 전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金㺩){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1347년(충목왕 3) 양광도 안렴존무사(楊廣道按廉存撫使)가 되어 이천현의 부정을 적발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 감찰집의(監察執義)로 당시의 실력자인 조일신(趙日新)을 곽충수(郭忠秀)·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탄핵하였으나 감찰대부(監察大夫) 이연종(李衍宗)이 자기와 의논하지 않고 한 행동이라고 하여 도리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조일신이 숙청된 뒤에 우대언이 되었고, 1354년에는 감찰대부에 이르렀다. 1361년에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대호군으로 도순문사 정사도(鄭思道)와 함께 절령(岊嶺)을 지켰으며, 1364년에는 서북면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 자서(子瑞)
    백주(白州)
    시호
    의정공(議政公)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96(선조 29) - 1613(광해군 5)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金珪)에 대하여

    1596년(선조 29)∼1613년(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서(子瑞). 증조는 김안도(金安道)이고, 조는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 김오(金祦)이고, 아버지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다. 어머니는 광주노씨(光州盧氏)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으로 노계(盧洎)의 딸이다.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고, 12세에 선대(先代) 의정공(議政公)의 묘문(墓門)에 직접 해서(楷書)로 글씨를 썼다. 선조가 그에게 시를 짓게 하고서 칭찬하며 책을 내려 권장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5세 때 경술식년사마시(庚戌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백주(白州) 이명한(李明漢)과 절친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한다는 무고죄(誣告罪)에 연루되어 아버지 김제남과 3형제가 모두 옥사(獄死)했다. 후에 인목대비가 복위(復位)되면서 아버지 김제남은 영의정(領議政)에, 김규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贈職)되고 의례(儀禮)대로 제사지냈다. 도성 서문 밖에 거적으로 싸서 묻혔다가 고양(高陽)의 대자동(大慈洞)에 이장하여 예장(禮葬)을 지냈다. 달성도위(達成都尉) 서경주(徐景霌)의 딸과 결혼하여 1남 김홍석(金弘錫)을 낳았다.

  • 몽서(夢瑞)
    탄수(灘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522(중종 17) - 1565(명종 20)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金虯){2}에 대하여

    1522년(중종 17)∼1565년(명종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몽서(夢瑞), 호는 탄수(灘叟). 아버지는 성균전적 세우(世愚)이다. 1543년(중종 38)에 생원이 되고, 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지평·이조정랑 등을 거쳐 전한에 이르렀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어서 13살 때에는 아버지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자 상소를 올려 특사케 한 일도 있다. 1557년에 선위사로 동래에 있을 때, 사간 김여부(金汝孚)의 사주를 받은 윤원형(尹元衡) 등의 무고로 체포되어 벽동(碧潼)에 귀양갔다가 경원(慶源)으로 다시 이배되었다. 1564년 8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왔다. 1554년에는 경상도 암행어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 시호

    이칭
    김백추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1(고종 18)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사상가
    김규면(金圭冕)에 대하여

    1881년(고종 18)∼미상. 사회주의운동가. 이명은 백추. 함경북도 경흥 출신.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만주 지방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곳에서 이동휘(李東輝)·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 등 30여명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다. 그뒤 이동휘계의 군사지도자 이용(李鏞)과 손을 잡고 시베리아의 한인군사조직을 상해임시정부 산하에 규합하는 데 힘쓰게 되었다. 1921년 6월 세칭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직전 5월 18일 오하묵(吳夏默)의 특무대에 붙잡혔다. 이때에 같이 붙잡힌 사람으로는 한운룡(韓雲龍)·박원섭(朴元燮)·우시욱(禹時旭)·주영섭(朱英涉)·안태국(安泰國)·임상춘(林常春) 등이다. 당시 오하묵은 이른바 이르쿠츠크집단의 요인으로서 고려혁명군정 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부사령관이었다. 김규면이 소지한 상자에는 3만여원의 금은전(金銀錢)과 비밀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뒤 처형을 면하여 이용과 함께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의 위원장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아니고, 다만 적군편에 들어 한국독립의 무장투쟁에 일생을 바쳤던 민족독립운동자이다.

  • 국서(國瑞)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88(정조 12) - ?
    본관
    의성(義城)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서(金奎瑞)에 대하여

    179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국서(國瑞). 아버지는 유성(維城)이다. 1827년(순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왕세자가 춘당대(春塘臺)에서 유생들을 시험하였는데 강거수(講居首)로 유생의 대표였다. 승문원부정자로 출발하여 지평·정언·이조좌랑 등을 지내고 헌납·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57년(철종 8)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가 죽었을 때는 섭통례(攝通禮)를 맡아보았다. 주로 청직(淸職)을 지내며 공사간에 소홀함이 없었고, 경사(經史)에도 밝았다고 한다.

  • 구서(龜瑞)
    국헌(菊軒)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4(헌종 10) - 1908(융희 2)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석(金圭錫)에 대하여

    1844년(헌종 10)∼1908년(융희 2). 조선 말기 문신·문필가으로, 자는 구서(龜瑞)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신동(新洞) 출신이다. 늦은 나이에 등과(登科)하여 재랑(齋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거쳐 중추원의관(中秋院議官)을 지냈다. 1883년(고종 20) 10월에 내하녹비(內下鹿皮) 1령, 1889년(고종 26) 12월에는 아마 1필을 받았다. 문필(文筆)이 뛰어나 문집을 남겼는데 국헌시집(菊軒詩集) 1책이 전한다.

  • 우약(雨若)

    시호
    충헌(忠憲)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8(헌종 4) - 1896(건양 1)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식(金奎軾){1}에 대하여

    1838년(헌종 4)∼1896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우약(雨若). 세호(世鎬)의 아들이다. 1870년(고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3년 형조참의·영남위유어사(嶺南慰諭御史)를 역임하였고, 1879년과 1888년 두 차례에 걸쳐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89년 나주목사로 재직중 9월에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 관청사를 파괴하고 관장을 몰아낸 뒤 공금을 탈취하는 등 행패를 부리자, 9월 17일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되어 10월 14일 민란주동자 정홍기(鄭洪基)·박상룡(朴尙龍) 등을 잡아 효수하였다. 1893년에는 병조참판, 1894년에는 한성부우윤, 1895년 지방관제개혁 뒤 인천부관찰사, 충주부관찰사 겸 충주부재판소판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진(堤川義陣)이 충주성을 함락하고 성안으로 들어오자, 남문으로 피신하던 중 중군 종사 오명춘(吳命春)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 호은(芦隱)
    시호

    이칭
    호장군(虎將軍)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 - 192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2}에 대하여

    미상∼1929년. 독립운동가. 호는 호은(芦隱), 별명은 호장군(虎將軍). 경기도 출신. 영선(永先)의 아들이다. 대한제국 시위대부교(侍衛隊副校)·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의 조교로 있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해산된 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켜 철원과 양주를 근거지로 일본군과 네 차례나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뒤 노령(露領)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려고 노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8월 군정부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그해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왕청현(旺淸縣)의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교관으로 청년교육에도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는 보병대대장으로 활약하여 대첩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같은해에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이 되었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후 망명군을 재편성하는 한편, 독립사상의 함양에 진력하였다. 1923년 연길현(延吉縣)에서 이범석(李範奭) 등과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으로서 영농과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일제와의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1929년 동포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다가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우사(尤史)
    시호

    이칭
    김요한(金Johann)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81(고종 18) - 1950()
    본관
    청풍(淸風)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3}에 대하여

    1881년∼1950년.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동래 출신.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서 1881년 지성(智性)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동래부사의 막료로 있던 그의 아버지 지성은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갔다. 게다가 1887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때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趙淳煥)의 딸 은수(恩受)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얻었으나, 차남 진동(鎭東)만 남았다. 1917년에 첫부인과 사별하고, 1919년에 김순애(金淳愛)와 재혼하여 장녀 우애(尤愛)을 얻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Prins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목사의 비서, 와이엠시에이학교(YMCA學校)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교회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헌당식을 보게 되었고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경기·충청장로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華北)과 몽고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고 울란바토르 지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정치적 활동으로는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의 해외활동을 들 수 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 그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 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8·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그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위원단의 서울도착을 계기로 더욱 자기의 정치노선에 정열을 쏟아,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해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3월 15일 김일성·김두봉의 회신에 따라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월 21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성과없이 돌아온 이들은 5월 14일 북한측의 제2차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월 21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5·30남한단독총선거에는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교육가와 학자로서의 활동은 만주 복단대학(偪旦大學)에서의 영문학 강의(1923),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취득(1923), 톈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생활(1927∼1929), 난징(南京) 중앙정치학원(中央政治學院) 교수(1933), 쓰촨대학(四川大學) 강의(1936) 등과 같은 강단생활을 하였으며, 1950년에 6·25가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그해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저서로는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1940), 중국 근대비극시 《원용사 婉容詞》의 영문번역(1943), 《실용영문작법》(1944)·《실용영어》(1945), 그리고 시집으로 《양자강의 유혹》(1945) 등이 남아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