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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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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경휴(景休)
    최와(最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29(영조 5) - 1791(정조 15)
    본관
    함창(咸昌)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규오(金奎五)에 대하여

    1729년(영조 5)∼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경휴(景休), 호는 최와(最窩). 부여의 수천리(秀川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두찬(斗燦)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로 우(堣)의 딸이다. 처음 한원진(韓元震)에게 글을 배웠고, 한원진이 죽은 뒤에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우보(李雨普)가 박세채(朴世采)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리면서 윤봉구의 말을 인용한 것에 반대하여 항소(抗疏)를 올렸고, 윤봉구가 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원정비문(院庭碑文)에 대해 물의가 일어나서 원문이 수정되자 그것에 항의하여 시정을 요구했다. 이것이 세상에 유명한 ‘경인호통(庚寅湖通)’으로 호락시비(湖洛是非)의 발단이 되었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이듬해에는 《시남연보 市南年譜》를 작성, 이어서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간행하라는 왕명이 있자 송환기(宋煥箕)와 함께 교정을 담당하였다. 1778년 ‘경인호통’ 중에서 선정(先正)을 침욕한 사문득죄(師門得罪)로 체포되어 포옥(浦獄)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어사 박우원(朴佑源)에 의해 홍산에서 조사를 받고 기성(岐城)으로 유배되었다. 변백서(辯白書)를 올려 무죄를 주장했으나 그것이 화근이 되어 2천여리나 떨어진 이산(夷山)으로 옮겨져 갖은 고통을 겪었다. 1784년(정조 8) 정조의 특명으로 풀려나서는 후진의 교육에 전념했다. 경사(經史)에 조예가 깊어 학문연구에 많은 자료를 남겼다. 저서로는 《최와집》 8권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862(철종 13)
    본관
    미상(未詳)
    분류
    정치/사건 > 반란/반역
    김규진(金奎鎭){1}에 대하여

    미상∼1862년(철종 13). 조선 후기 철종 때 개령민란(開寧民亂)의 주모자. 경상도 개령(開寧: 지금의 金泉) 사람. 출생과 가계에 대해서는 문헌상 알려진 바가 없다. 1862년 4월에 관기가 문란해지자, 이에 항거하여 민폐를 없애려고〈읍폐교구 邑弊矯捄〉라는 통문을 돌려 읍민들을 선동하다가 현감 김후근(金厚根)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격분한 촌민들이 옥을 부수고 김규진을 구출한 뒤, 당시의 이방 우학능(禹學能), 수교(首校) 우해룡(禹海龍), 서리 문진기(文晋祺) 등을 학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그뒤 이들은 경상도관찰사 이돈영(李敦榮)과 현감 김후근을 몰아낸 다음, 그 후임을 조정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윤태경(尹泰經)을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고, 그의 계언(啓言)에 따라 김규진은 다른 주모자들과 함께 효수되었으며 또한, 민란도 진압되었다.

  • 용삼(容三)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무기옹(無己翁)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8(고종 5) - 1933()
    본관
    남평(南平)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규진(金圭鎭){2}에 대하여

    1868년(고종 5)∼1933년. 서화가.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무기옹(無己翁) 등 많은 별호를 썼다. 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1885년(고종 22)에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1893년에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 朝鮮國平壤城圖〉(1895)를 그렸다. 1897년 서울로 올라와 궁내부 외사과(外事課)와 예식원(禮式院) 문서과의 관직을 얻었고, 1901년에는 영친왕의 서법(書法)을 지도하는 한편 궁내부 시종(侍從)에 임명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서 사진관을 개설함으로써 그 분야에서도 개척자가 되었다. 1913년 그 사진관(상호는 天然堂)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여 자신의 서화작품과 다른 여러 명가(名家)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古書畵)도 취급하였다. 또, 1915년에 발족한 ‘서화연구회’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으로서 3년의 수업과정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조석진(趙錫晋)·안중식(安中植)·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나, 그뒤 협회를 떠났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서예와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저서로는 《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육체필론 六體筆論》 등이 있다.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의기(意氣)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고,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그림으로는 글씨에서의 필력이 그대로 반영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 등이 독자적 경지였으나,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 內金剛萬物肖勝景〉과 〈해금강총석정절경 海金剛叢石亭絶景〉(1920)같은 본격적인 채색화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산수화·화조(花鳥) 등의 화재도 다루었다.

  • 경집(敬執)
    한남(漢南)/신호거사(新湖居士)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51(철종 2) - 1939()
    본관
    경주(慶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규채(金圭采)에 대하여

    1851년(철종 2)∼1939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경집(敬執), 호는 한남(漢南) 또는 신호거사(新湖居士)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자양면(紫陽面) 노항리(魯巷里)이다. 증조는 김종수(金宗洙), 조부는 양애(陽厓) 김학만(金學萬)이며, 부친은 김활(金活)이다. 외조부는 김녕(金寧) 김이례(金履禮)이며, 처부는 여산(礪山) 송지정(宋持貞)이다. 성품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사치스러운 것을 멀리하였다. 10세에 백부 죽와공(竹窩公)의 가르침을 거쳐, 손와(巽窩) 권영휴(權永休)의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부친의 명으로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신기동(新基洞)으로 옮겨 스스로 신호거사(新湖居士)라 칭하고, 이중식(李中植), 이충호(李忠鎬) 등 명유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한일병합으로 나라가 기울어지자, 나라를 구할 재주도 힘도 없음을 한탄하였으며, 이후 자호(自號)를 한남(漢南)으로 하였다. 향년 89세에 사망하였다. 묘지는 명산곡(明山谷) 죽전상(竹田上) 자좌지원(子坐之原)이다. 시문집으로 《한남선생문집(漢南先生文集)》이 있다.


  • 비장(飛將)
    시호

    이칭
    김규철(金奎喆)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1(고종 18) - 192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김규철(金奎哲)에 대하여

    1881년(고종 18)∼1929년. 의병·독립운동가. 일명 규철(奎喆). 호는 비장(飛將). 충청북도 단양 출신. 1907년 군대해산 뒤 단양·죽령·청풍·제천·영주·예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지역에서 4백여명을 인솔하고 다섯 차례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패전하였다. 1909년 폐위된 고종이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하는 친서를 지니고 출발하였으나, 인천에서 발각되어 6개월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1910년 이범규(李範圭)·남장희(南壯熙)와 합세하여 의친왕을 호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던 도중에 안동(安東)에서 발각, 실패하였다. 1922년 군자금을 가지고 상해임시정부로 가는 도중 인천에서 발각되어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웅초(熊超)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6(광무 10) - 1962()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규택(金奎澤)에 대하여

    1906년∼1962년. 만화가·삽화가. 호는 웅초(熊超). 경상남도 출신.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33년 9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광수(李光洙)의 〈유정 有情〉의 삽화를 비롯하여 함대훈(咸大勳)의 〈폭풍전야 暴風前夜〉(1934), 한용운(韓龍雲)의 〈흑풍 黑風〉(1935), 이광수의 〈이차돈(異次頓)의 사(死)〉(1935∼1936), 김말봉(金末峰)의 〈찔레꽃〉(1937),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 林巨正〉(1937∼1939), 한용운의 〈삼국지〉(1939∼1940) 등에 삽화를 그렸다. 1935년 5월에는 같은 신문에 유머소설 〈망부석 望夫石〉을 직접 쓰고 거기에 그림까지 곁들여 다재다능한 역량을 잘 보여주었다. 또한, 광복 후에도 《조선일보》에 시사만평을 발표하였으며, 정비석(鄭飛石)의 〈암야행로 暗夜行路〉(1947), 염상섭(廉想涉)의 〈난류 暖流〉(1950), 김영수(金永壽)의 〈빙하 氷河〉(1959∼1960) 등에도 삽화를 그렸다. 6·25남침 때는 일본 동경 주재 유엔군사령부의 심리작전과 전속화가로 활약하였고, 1961년 귀국하여 만년에는 《한국일보》에 시사만화를 맡아 발표하였다. 풍자작품으로 〈망부석〉과 함께 〈억지 춘향전〉이 있다.

  • 내협(乃協)/여초(汝初)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40(영조 16) - 1822(순조 22)
    본관
    부안(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하(金圭夏)에 대하여

    1740년(영조 16)∼1822년(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안. 자는 내협(乃協)·여초(汝初). 아버지는 진사 계명(啓明), 어머니는 홍제민(洪濟民)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간 뒤, 의영고주부·종부시주부·종묘서령·감찰을 거쳐서, 1798년 장령·정언을 역임했다. 같은해 용강현령이 되었는데, 특히 학문을 일으키는 데 힘썼다. 그뒤 지평·정악원정을 거쳐 1802년(순조 2) 다시 장령이 되었을 때, 시무책 6조와 궁인들의 불공을 금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1806년 장령으로 재직중 귀향하여, 귀재(歸齋)라는 현판을 달고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820년 병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의집(義執)
    농은(農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5(순조 5) - 1885(고종 22)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현(金奎鉉)에 대하여

    1805년(순조 5)∼1885년(고종 22).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의집(義執), 호는 농은(農隱)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북도 장수(長水)에서 거주하였다. 초명은 김천규(金天奎)이다. 후추공(後推公) 사복시정(司僕寺正) 김수태(金壽泰)의 5세손이며, 조부는 진사(進士) 김석해(金碩海)이고, 부친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김연조(金延祖 또는 金延祚)이다. 위로 형 김태현(金泰鉉)이 있다. 일찍이 재질과 인물이 출중하였고, 가숙(家塾)에서 엄부(嚴父)로부터 학문과 몸을 닦아 행실이 두터웠다. 1866년(고종 3) 남원부사(南原府使) 김경근(金敬根)과 사우(士友)들의 천거가 있었으며, 1873년(고종 10) 계유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 209위로 합격하였다. 벼슬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에 이르렀다. 묘지는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고달면(古達面) 두계촌(杜溪村) 뒤편 부증자좌(釜嶒子坐)에 자리하였다. 문사(文詞)가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농은집(農隱集)》을 남겼다.

  • 화일(華一)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5(헌종 11) - ?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홍(金奎弘)에 대하여

    1845년(헌종 11)∼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화일(華一). 서울 출신. 학성(學性)의 아들이다. 186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89년 전라도관찰사, 1891년 형조판서, 1892년 예조판서, 1893년 공조판서·경기도관찰사, 1894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1894년 7월 개화파정권에 의해 탄핵을 받아 면직되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정권이 아관파천에 의해 붕괴된 뒤 건양·광무연간에 다시 등용되어, 중추원의관·의정부참정·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태의원경(太醫院卿)·장례원경(掌禮院卿)·시종원경(侍從院卿)·귀족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고 있을 때, 한성부내 각처에서 민회를 빙자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민인을 구타하여 가옥을 파괴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한성부판윤과 경무사를 견책할 것을 상주하기도 하였다. 1902년 5월에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양경제도(兩京制度)를 둘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3년 8월에는 북간도에 이주한 많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북간도에 보호관을 둘 것을 상주하여 고종의 허락을 얻어내었다. 그 결과 이범윤(李範允)이 북간도의 한인을 보호하는 관리로 처음 파견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9() - 1985()
    본관
    미상(未詳)
    분류
    법조/언론 > 언론/출판인
    김규환(金圭煥)에 대하여

    1929년∼1985년. 언론인·학자. 국회의원이었던 김동석(金東碩)의 장남으로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출생하였다. 194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195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수료한 뒤 일본으로 유학, 1954년 동경대학 신문연구소 본과를 졸업하고 1959년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로 학계활동을 시작하여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 연구부장·소장·신문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뒤 계속 서울대학교 신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편, 언론계에도 몸을 담아 1959년 동양통신사의 동경특파원을 비롯하여 1960년부터 1977년까지 동양통신사 편집국장·이사로 활동하였다. 그밖에도 국제신문인협회(IPI)한국위원회사무국장·한국신문학회회장·한국방송윤리위원회위원장(1970∼1973)·아시아신문재단본부이사 등 여러 언론관계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69년 8월에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기사훈장(騎士勳章)을 수여받았다. 1985년 서울대학교 신문학과 교수 겸 신문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 뇌졸증으로 순직하였다. 학계와 언론계에서 이론과 실제를 익혔던 그는 특히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종래의 일본 및 독일 편향적인 규범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초기의 신문지학(新聞紙學)의 연구경향에서 탈피하여 사회적 전달현상을 사회과학적 틀 속에서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커뮤니케이션학으로의 전환을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신문학의 학문적 영역의 확대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저서로는 《매스컴의 이론》·《한국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일제하의 대한(對韓)언론과 선전정책》·《한일간의 문화마찰(일문)》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매스커뮤니케이션》·《여론》·《경영커뮤니케이션》 등 다수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57(철종 8) - ?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규희(金奎熙)에 대하여

    1857년(철종 8)∼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26세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학업을 닦다가 1883년(고종 20)에 관직에 나아갔다. 처음 제중원주사(濟衆院主事)가 되었고 1890년에는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가 되었으며, 1894년 4월에는 선공감별제(繕工監別提)가 되었다. 그해 8월에는 중추원외랑(中樞院外郞), 1895년에는 내부참서관(內部參書官)이 되었다가 한동안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탁지부재무관에 등용되었다. 그해 6월에는 분비서원승(分秘書院丞)이 되었고 광무개혁 이후에는 시종원시종·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귀족원경(貴族院卿) 등으로 근무하였다. 시국의 불안정으로 여러 차례 견책을 받기도 하였으나 1900년에는 철도국장이 되어 칙임4등(勅任四等)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교섭상의 잘못으로 철도(鐵島)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9월에 풀려나 중추원의관 및 칙임4등에 다시 등용되었다. 1902년에 시종원시종으로 잠시 있다가 1904년에 한성부판윤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칙임3등에 올랐으며, 한성재판소수반판사(漢城裁判所首班判事)·법부협판(法部協判)이 되고 법관양성소장을 겸임하였다. 이해에는 여러 차례의 견책을 받았다가 다시 등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그것은 국운이 기울어가고 내각이 자주 바뀌는 등의 시국 때문이었다. 1905년에는 내장원감독(內藏院監督), 1906년에는 학부협판(學部協判)·법부협판·법부법률기초위원장·전라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지냈다.



  • 시호
    제숙(齊肅)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98(태조 7)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균(金稛)에 대하여

    미상∼1398년(태조 7).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공역승(供驛丞) 남미(南美)의 현손, 예빈경(禮賓卿) 수(粹)의 증손, 예의판서(禮儀判書) 기연(起淵)의 손자, 아버지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使) 지윤(智允)이다. 장인은 개국원종공신 밀직부사 권현(權鉉)으로 고려관직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공양왕대에는 조준(趙浚)이 권력을 잡자 친우인 인연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가자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보국숭록좌찬성(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가족 중에 태조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우 은(穩), 당숙 의(義) 등이 개국원종공신이었고, 자녀의 통혼가문이 태조에게 각별히 우대된 노은(盧訔)·문계종(文繼宗)·이정간(李貞幹) 등의 공신가에서 딸을 맞았으며, 사위는 신간(辛僩)과 태조의 지우(知友)이자 고려 입절인(立節人)인 차원부(車原頫)로, 조선 건국과정에서 중진급 정치집단을 이루었던 세력이었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 홍여(洪汝)
    근재(勤齋)/행은(杏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8(고종 25) - 1982()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균배(金匀培)에 대하여

    1888년(고종 25)∼1982년. 일제강점기 유학자·시인. 자는 홍여(洪汝), 호는 근재(勤齋)·행은(杏隱)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조천읍(朝天邑) 북촌리(北村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향리(鄕里)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21년 전라남도 광주(光州)의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에게 3년간 사사받은 뒤 후진 교육을 위해 10년 동안 한문을 가르쳤다. 1927년 제주에서 수생당(水生堂)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였다. 1952년 영주음사(瀛洲吟社: 1930년대 후반 영주지방, 즉 강릉 일원을 중심으로 조직된 문학단체)에 출입하며 문우들과 교유하였고, 1958년에는 영주음사의 사장이 되어 김정언(金廷彦)과 함께 고시필(考試筆)을 잡아 시평(詩評)에 진력하였다. 저서로는 필사본 《북학일기(北學日記)》와 《안부해본고(安浮海本稿)》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생졸년
    ? - 836(희강왕 1)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족
    김균정(金均貞)에 대하여

    미상∼836년(희강왕 1). 통일신라 후기의 왕족·정치가. 원성왕의 손자이며, 예영태자(禮英太子)의 아들이다. 처음 진교부인(眞矯夫人, 혹은 貞矯)과 혼인하고 뒤에 사촌형인 김충공(金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 혹은 昕明)과 혼인했다. 진교부인과의 사이에서 제45대 신무왕을, 조명부인과의 사이에서 제47대 헌안왕을 낳았다. 802년(애장왕 3) 대아찬이 되었으며, 이때 조정에서 그를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일본에 인질로 보내려함에 이를 사양하였다. 812년(헌덕왕 4) 봄에 시중(侍中)으로 승진되었다가 814년 8월 김헌창(金憲昌)과 교체되었다. 822년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이던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찬(伊飡)으로서 김웅원(金雄元), 그리고 아들인 대아찬 우징(祐徵)과 함께 삼군을 장악, 단시일내에 반란 토벌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다. 828년(흥덕왕 3) 7월에는 일가의 원찰인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비학산(飛鶴山) 소재 법광사(法光寺)에 삼층석탑을 건립했다. 835년 2월 김충공의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나, 이듬해 12월 흥덕왕이 아들없이 죽자, 아들 우징과 조카 예징(禮徵) 그리고 김양(金陽) 등의 추대를 받아 그의 종질 제륭(悌隆)과 왕위경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시중이던 김명(金明) 등의 지지를 받은 제륭과 궁궐 안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싸움에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뒤에 아들 우징이 왕위에 오르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74(성종 5) - ?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개(金克愷)에 대하여

    1474년(성종 5)∼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광성군(光城君) 겸광(謙光)의 넷째아들이고, 좌찬성 극핍(克愊)의 동생이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국광(國光)의 조카이다. 문음으로 진출하여 병조정랑에 임용되고, 이어서 사헌부지평·사간원사간·사도시부정(司導寺副正)을 지내고 4년 만인 1522년(중종 17)에 승정원에 들어갔다. 이에 대간들은 그와같은 특별 발탁은 불가하다고 서용(敍用)을 거부하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 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고 1527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서 개성유수를 거쳐 이듬해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주관하였다. 이어서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이때 작서사건(灼鼠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김안로(金安老)일파에게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

  • 사렴(士廉)
    괴애(乖崖)
    시호

    이칭
    기열(祁烈)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39(세종 21) - 1499(연산군 5)
    본관
    김해(金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검(金克儉)에 대하여

    1439년(세종 21)∼1499년(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사렴(士廉), 호는 괴애(乖崖). 아버지는 강의(剛毅)이다. 학식이 뛰어나 일찍이 생원시와 진사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 특히, 시문에 능하여 1469년 세조가 양성지(梁誠之) 등에게 명하여 연소한 문신을 육문(六門)으로 나누어 배정할 때, 성현(成俔)·유순(柳洵) 등과 함께 시학문(詩學門)에 선발되었다. 이어서 예문관대교에 올랐는데, 당시 발영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뒤 승문원교리로서 조운사종사관(漕運使從事官)으로 활약, 경상도 연변의 군량미 10만석을 함경도로 운송하는 공로를 세웠다. 세조가 죽자 예문관부교리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장령·예문관응교를 역임하였다. 그뒤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성종 초년에는 목민관으로 나가 뛰어난 치적을 보였다. 이어 사표(師表)로 추천되었으며, 1477년 다시 장령을 역임하였는데, 그때에 신주(辛柱)의 분경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그뒤 1482년 사간이 되어 충청도진휼사의 종사관으로 나가 빈민구제에 힘썼다. 1487년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 등을 역임하고, 1491년 홍문관부제학에 올랐다. 그때 언관으로서 크게 활약하여 제천정(濟川亭)의 역사(役事)가 불가함을 주장하고, 여진정벌의 부당함을 역설하며, 언론의 기능 정상화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종에게 기피되어 1개월 만에 전라도관찰사의 외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정조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조공의 방물을 도둑맞고 다시 고신을 환수당하였다. 그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호조참판에 올랐고,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종이 죽자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때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문장에 능하였고, 성품은 청렴강직하였다.


  • 노봉(老峰)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광주(廣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기(金克己){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명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노봉(老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못하고 있다가 무신들이 정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던 명종 때에 용만(龍灣: 지금의 義州)의 좌장(佐將)을 거쳐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장가로서 특히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시대에 핍박받는 농민들의 모습을 친근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또한 농촌문제를 자기 것으로 삼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시 문인들이 그의 시를 평하여 “문장의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말이 많을수록 내용이 풍부하다.”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는 그의 문집 《김거사집 金居士集》의 서에서 “참으로 난새나 봉황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고고한 행적을 찬양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구감》에 의하면 그의 문집은 135권 또는 15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동문선》·《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시가 많이 남아 있다.

  • 예근(禮謹)
    지월당(池月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79(우왕 5) - 1463(세조 9)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극기(金克己){2}에 대하여

    1379년(우왕 5)∼1463년(세조 9).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예근(禮謹), 호는 지월당(池月堂). 《동국문감(東國文鑑)》의 편자인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의 9세손이다. 그의 조부는 김양길(金陽吉)이며 아버지는 김삼성(金三省)이다. 그는 4형제의 막내로 그의 형은 김사치(金思恥), 김극치(金克恥), 김석치(金錫恥)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혜가 뛰어나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기 전에 이미 문장을 이루었고, 10세 때 지은 시를 이숭인(李崇仁)이 보고 칭찬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비록 14세의 어린 나이였으나 세상에 뜻을 버리고 과업(科業)을 포기하였다. 그는 경전과 성명(性命)의 도를 밝히고 수신에 전력하였으며, 때로 전국의 명승고적을 주유하여 이를 시로 지었다. 후에 삼현사(三賢祠)에 봉안되었다. 그의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다수가 실렸으며, 저서로 《지월당유고(池月堂遺稿)》가 전한다. 그러나 최근에 그의 시로 알려진 작품 대부분이 그의 저작이 아닌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극도(金克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영암(靈巖) 출신이다. 부친은 김사종(金嗣宗)이다. 1584년(선조 17) 친형 김극희(金克禧)와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권관만호(權官萬戶)가 되었고, 1587년에 광양현감(光陽縣監)을 지냈다. 1590년 이성현감(利城縣監)이 되었을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좌되어 승지(承旨) 이발(李潑)이 죽은 일로, 후임 광양현감(光陽縣監) 한덕수(韓德修) 등이 그를 이발의 근친(近親)임을 들어 무고하여 자신들의 공로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그는 이성에서 잡혀갔으나 무혐의로 밝혀졌으며, 무고자 모두 무사죄(無辭罪)로 잡혀 대부분 옥사하였다. 그는 유사(宥赦: 사면)를 받았지만 출옥을 앞두고 별세하였다. 아들 김완(金完)이 진무공신(振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은택이 삼대에 가해지니, 그는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학천군(鶴川君)에 추봉되었다.

  • 성지(成之)
    청라(靑蘿)/우정(憂亭)
    시호
    충정(忠貞)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74(성종 5) - 1540(중종 35)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극성(金克成)에 대하여

    1474년(성종 5)∼1540년(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蘿)·우정(憂亭). 아버지는 진사 맹권(孟權)이다. 1496년(연산군 2) 사마시에 장원하고, 149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에 임명되어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50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얼마 뒤 헌납에 발탁되었으나 연산군에게 충심으로 간하다가 죄를 입을 뻔하였고, 이어 병조정랑·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4등에 녹훈되어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임명되고, 이듬해 부모봉양을 위해 외직을 빌려 서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의주목사로 갔다가 1518년(중종 13) 삼공(三公)에 문무겸비의 인물로 천거되어 예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다시 경상우병사·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1523년 예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잠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 세자이사로 있다가,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그 일파의 모함으로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興德)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패사(敗死)함에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비교적 한미한 집안출신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자세하였으며, 전후 세번이나 예조판서를 지낼 만큼 문학에 뛰어났고 간결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사림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우정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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