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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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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2(고종 29) - 1953()
    본관
    미상(未詳)
    분류
    경제/사회 > 실업가
    김기덕(金基德)에 대하여

    1892년∼1953년. 실업가. 함경북도 부령 출생. 아버지는 형국(炯國)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경성(鏡城) 함일학교(咸一學校)에서 수학한 뒤 청진에서 일본인과 사귀면서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일본 상선회사의 측량기사로 근무하다 1913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大阪)에서 약 2년간 머무르면서 일본상인들과 사귀고 일본인들의 감정을 터득하여 후일 그가 총독부 관리 및 조선은행의 일본인 고위층과 친교하여 사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1915년경 귀국하여 러시아와 국제무역을 착수, 우리나라의 곡물과 목재를 반출하여 연해주산 해산물과 잡화를 수입, 시판하여 많은 축재를 하였고, 공동무역상사(共同貿易商社)를 설립, 우리나라와 만주·러시아를 잇는 무역을 더욱 확장하였다. 한편, 루블화의 환투기(換投機)로 상당한 수익을 보았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발생으로 막대한 손실을 보아 재기불능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전재산을 담보로 하여 조선은행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50만원의 거액을 융자받아, 1924년 공동무역상사를 동일상회(東一商會)로 개편하고, 우리나라와 만주·연해주를 잇는 국제무역을 확장하였다. 회령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 목재와 물화 수집을 하였고, 무산에 목재회사, 청진에 수남제재소(水南製材所)를 설립, 함경선이 부설될 때 철도국에 다량의 침목과 전주를 납품하여 많은 축재를 하였다. 1935년 삼천리사(三千里社) 기자가 방문하여 재산관(財産觀)을 묻자 “돈이란 1,000∼2,000원이나 1∼2만원일 때에는 개인재산이지만, 100만원이나 1,000만원이 되면 사회의 공재(公財)를 관리하는 데 불과하며, 자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불찬성이며, 교육과 인격을 줄 일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고향인 청진에 해산물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북만주에 목재회사, 대련(大連)에 곡물무역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에도 많은 제재소를 소유하였다. 만주에 곡물, 특히 대두와 목재를 해외로 수출하는 무역을 하였으나 재산의 대부분을 토지에 투자하였다. 자수성가형 근검절약의 상인형(商人型)이라기보다는 모험적이고 투기적인 기업인이었다. 청진에 청덕학교(淸德學校)와 청덕전기학교(淸德電氣學校)를, 서울에 한성실업학교(漢城實業學校)를 설립하였다. 동생 기도(基道)를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시켰고, 후일 그를 통하여 많은 독립운동자금도 헌상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 중석(重石)의 해외무역을 착수하여 성공하였다.


  • 시원(枾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7() - 1986()
    본관
    안동(安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동(金起東)에 대하여

    1927년∼1986년.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시원(枾園). 경상북도 상주 출생. 팔봉(八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궁전씨(龍宮全氏)이다. 일제 말기에는 한학(漢學)을 수학하였고 여가에 묵화(墨畵)를 익혔다. 김천중학교를 거쳐 1952년 동국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73년 동대학에서 〈국문학상의 불교사상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이후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1963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전임하여 재직하였다. 전국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장, 동악어문학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4년 한국학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고소설의 자료발굴과 소개 및 연구에 전력하여 김태준(金台俊)·주왕산(周王山)·김동욱(金東旭)과 함께 고소설연구 기초를 확립하였다. 주요저서로는 《국문학개론》(1955)·《한국고대소설개론》(1956)·《이조시대소설론》(1959)·《한문소설선집》(1960)·《국문학상의 불교사상연구》(1973)·《이조시대소설의 연구》(1974)· 《한국고전소설연구》(1981) 등이 있다. 그리고 고소설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영인본 《활자본고소설전집》(12책)·《필사본고소설전집》(20책)·《한국문헌설화전집》(10책) 등을 발간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0() - 1993()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두(金箕斗)에 대하여

    1920년∼1993년. 법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전라남도 구례 출신. 1937년 광주공립 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마쯔에고등학교(松江高等學校) 문과를 마친 뒤 1943년 동경제국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하였다.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년 11월부터 광주의 과대학 조교수로 있다가 1949년 1월부터 1951년말까지 법무부 법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9월부터 1954년 2월까지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1951년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1955년 7월부터 미국 국무성초청 교환교수로 하버드대학에서 1년간 형사법을 연구하였다. 1959년 9월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서 1985년 8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였고, 1967년 3월부터 2년간 사법대학원장을 지냈다. 유엔국제범죄방지회의 한국대표(1957), 유엔국제인권옹호회의 한국대표를 지냈으며(1961), 유엔범죄방지 및 범죄인처우회의(1970), 일본형법학회의(1975) 등 국제회의에 참석하였다. 갱생보호회 이사(1961), 대한교육연합회 인권위원(1964), 중앙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 위원(1964), 잡지윤리위원회 위원장(1965), 교정제도심의위원회 위원(1969), 법무부정책자문위원(1981) 등 다양한 사회활동도 하였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1985년 정년퇴임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92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형법학과 형사정책학의 인간화를 강조하였고, 특히 범죄인들의 갱생과, 청소년범죄대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주요 저술로는 《신형사소송법》(1956)·《형사소송법》(1959)·《형법각론》(1963)·《신형사소송법》(1964)·《한국소년범죄의 연구》(1967)·《한국에 태어난 행복》(1970)·《수재론》(1970)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미국형 사소송법》(1948)·《형사학원리》(1957)·《아메리카연구》(1958)·《사랑이냐 파멸이냐》(1959)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3() - 1983()
    본관
    개성(開城)
    분류
    예능 > 공예가
    김기련(金琦連)에 대하여

    1923년∼1983년. 칠보공예가·금속공예가. 본관은 개성. 함경북도 웅기 출신. 1940년 고향에서 동라남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으로 유학하였다. 일본여자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1943년에서 1946년까지 고향의 모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여 창덕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25세 때 평소 원하던 미술수업을 결심하여 1960년 5월에 독일에 유학하여 서독 슈베비쉬그뮨트금속예술대학과 뮌헨국립미술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7년 이후 뒤셀도르프미술대학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서독 칠보국가자격증과 용접기술자격증을 획득한 뒤, 1968년 귀국하여 한국디자인포장센터 금속공예담당 상임연구원, 공예화랑 ‘도라장’ 및 칠보개인공방을 자영하다가 1976년부터 죽을 때까지 연세대학교 가정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3년 칠보예술회를 창립하였고,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전국민예품경진대회에도 참가하였다. 국내 및 해외(서독·하와이)에서 13회에 걸친 개인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전국공예가초대전·한국현대공예대전 등에도 초대 출품하는 등 많은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에는 장신구류·용기류 등 주로 실용성에 치중하였으나 말기에는 색채표현성이 높은 추상적 회화성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독 오펜바흐미술상(1962)·뮌헨숄현상전(최우수상, 1965·1966)·뮌헨국제미술인협회전(특별상, 1967), 프랑스리모주국제칠보비엔날레(금상, 1973) 및 민속예술상(1975), 동경국제칠보공모전 외국부분 국제상(1983) 등을 수상하였고, 죽기 며칠 전에 프랑스국제칠보창작회의 부회장으로 피선된 바 있다. 1968년 이래 약 7년간에 걸친 칠보와 금속공예의 기술보급과 공예품의 생활화 및 수출에 역점을 둔 실용적 제품개발은 선구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5년간의 ‘도라장’ 경영은 우리나라공예전문화랑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리모주국제칠보비엔날레 등 국제전출품의 성과는 우리나라의 칠보작품 수준을 국제적으로 인식시킨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칠보공예의 선각자적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작품으로는 〈역사의 얼〉·〈산〉·〈십장생〉·〈Long long time ago〉 등이 있다.


  • 편석촌(片石村)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8(융희 2)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학 > 시/시조인
    김기림(金起林)에 대하여

    1908년(융희 2)∼미상. 시인·문학평론가·영문학자. 호는 편석촌(片石村). 함경북도 성진 출생. 니혼대학(日本大學) 문학예술과를 거쳐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경성중학교(鏡城中學校)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으며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내고, 1933년 구인회(九人會)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하였는데, 이때 많은 서적과 가재를 탈취당해 곤궁한 나날을 보냈다. 좌익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고, 1946년 2월 제1회조선문학자대회 때 ‘우리 시의 방향’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나, 정부수립 전후에 전향하였다. 월남 후 중앙대학·연희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고, 그가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6·25남침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부인과 5남매가 서울에 살고 있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시 〈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1931.1.23.)·〈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10.)·〈고대 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 〈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1.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첫 시집이며 장시인 《기상도 氣象圖》(彰文社, 1936;재판 珊瑚莊, 1948)는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荒蕪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상과 감각의 통합을 시도한 주지주의 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한 것이다. 제2시집 《태양의 풍속》(學藝社, 1939)은 몇 편의 이미지즘 시를 제외하고는 지적 유희성이 두드러진 것이고, 광복 후의 《바다와 나비》(新文化硏究所, 1946), 좌경적인 《새노래》(雅文閣, 1947) 등이 있다. 그러나 시집 《새노래》는 예술로 성숙하지 못한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 및 저서로서 《시론 詩論》(白楊堂, 1947)·《시의 이해》(乙酉文化社, 1950) 등이 있으나, 전자는 1930년대에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전환시킨 중요 시론집이며, 후자는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한 계몽적인 저서이다. 이밖에 《문학개론 文學槪論》(新文化硏究所, 1946)·《문장론신강 文章論新講》(民衆書館, 1949) 등이 있다. 그가 우리나라 시사에 기여한 점은 주지주의 시의 도입과 그 창작,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시학(詩學)의 정립을 위한 노력, 자연발생적인 시를 거부하고 의식적인 방법에 의한 제작의 강조, 음악이나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지성의 강조, 그리고 전체시의 주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 도여(道汝)
    매석(梅石)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71(고종 8) - ?
    본관
    청도(淸道)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만(金器萬)에 대하여

    1871년(고종 8)∼미상.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도여(道汝), 호는 매석(梅石)이다. 본관은 청도(淸道)이고 전라남도 구례(求禮) 출신이다. 경서와 역사서 그리고 여러 학자들의 학설에 두루 밝았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경서에 대한 암송을 시험할 때면, 수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지금까지 박학다식한 유학자로서 칭송받고 있다.

  • 계수(季秀)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1(명종 16) - 1620(광해군 12)
    본관
    강릉(江陵)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기명(金基命)에 대하여

    1561년(명종 16)∼1620년(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계수(季秀). 조부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던 김혼(金渾)이고, 부친은 주부(主簿) 김광서(金光瑞)이다.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좌랑(佐郞)이였던 권구(權矩)의 딸이다. 형은 김석명(金錫命)으로 현감을 지냈다. 1591년(선조 2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남해부사(南海府使)를 거쳐 1597년에 총제부원수(摠制副元帥), 1600년에는 숭의대부(崇義大夫) 좌찬성(左贊成) 겸 의금부사(義禁府事)가 되었으나, 1618년(광해군 10)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재임 중에 삭탈관직 되고 영종도에 유배되었다. 1620년 4월 8일 유배지에서 죽은 후 다시 이장되었으며, 1624년(인조 2)에 복관(復官)되었다. 묘는 남양주 별내면 화접리에 소재하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8(고종 5) - 1920()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독교인
    김기범(金箕範)에 대하여

    1868년(고종 5)∼1920년. 기독교 감리교 목사. 최초의 한국인 집사목사(세례와 혼례·예배·전도의 거행권만이 부여됨.) 중 한 사람이다. 1890년에 기독교에 입교, 1893년부터 전도사가 되어 제물포지역에서 8년간 전도사업에 종사하였다. 감리교의 지방회에서 개최하는 신학회(Theological class: 신학교의 전신)에서 목사안수 과정을 밟고 난 뒤, 1901년 5월 서울 상동교회에서 김창식과 함께 북감리교회의 감독 무어(Moore, H.)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뒤 황해도 연안지방에서 순회전도하다가 제물포의 내리교회(內里敎會)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교회재단의 영화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871(고종 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인
    김기삼(金基三)에 대하여

    미상∼1871년(고종 8). 조선 후기의 무인. 김기삼(金基三)은 1871년(고종 8)에 무과에 올라 별장(別將)을 지냈다. 그 해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강화 초지진(草芝鎭)을 수비하였는데, 미국 해군 육전대와 교전하는 도중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뒤에 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정문을 세워졌다.

  • 자성(子成)
    연곡(蓮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83(고종 20) - ?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삼(金基參)에 대하여

    1883년(고종 20)∼미상.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자성(子成)이고, 호는 연곡(蓮谷)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역임한 김선(金銑)의 11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경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였다고 전한다. 또 온화한 성격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을 예로써 대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뜻을 펴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 치규(稚圭)
    이호(梨湖)/낭간거사(琅玕居士)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청풍(淸風)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김기서(金箕書)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규(稚圭), 호는 이호(梨湖) 또는 낭간거사(琅玕居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상숙(相肅)의 아들이다. 생애와 행적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작으로 〈단발령도 斷髮嶺圖〉(간송미술관 소장)한 점이 전한다. 이 그림은 정선(鄭歚)의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의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형식화되고 섬약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집 靑城集》에는 그의 산수화를 보고 읊은 제화시문(題畵詩文)이 한수 실려 있다.

  • 성극(聖極)

    시호
    정무(貞武)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광산(光山)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김기석(金箕錫){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광산. 자는 성극(聖極).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상순(相順)이다. 일찍이 홍산현감·금천군수 등을 거쳐 1876년(고종 13)에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1877년 총융사·무위도통사·통제사·금위대장·강화부유수 등을 거쳐,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면서 복설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중용되었다. 1884년에는 수원부유수를 거쳐, 같은해 새로이 설치된 친군영(親軍營)의 우영사(右營使)·별영사(別營使)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886년 해방총관이 개칭된 해방영사(海防營使)를 거쳐, 1888년 춘천유수를 지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 서은(西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5(광무 9) - 1974()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석(金基錫){2}에 대하여

    1905년∼1974년. 철학자·교육학자. 본관은 광산. 호는 서은(西隱). 평안북도 용천 출생.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도호쿠대학(東北大學)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교육에 뜻을 두어 귀국한 뒤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였다. 칸트철학과 인도철학을 연구하였고, 국민윤리교육 및 도의교육을 강조하였다. 학술원 회원과 1953년 한국교육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교육분과위원장을 지냈다. 그뒤 1959년에 도덕재무장(MRA)국제대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서울특별시교육회 회장과 1960∼1962년에 단국대학 학장을 지냈다. 5월혁명 후 1963∼1964년에 걸쳐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고문을 지냈으며,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교육위원, 동방아카데미 원장, 1971∼1974년 경남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철학개론》·《현대정신사》·《윤리전서》·《남강이승훈 南岡李昇薰》 등이 있으며, 개인적으로 잡지 《이성 理性》을 19집까지 발행하였다. 근무공로훈장·문화훈장대통령장·국민훈장목련장 등을 받았다.

  • 성여(成汝)
    이길헌(頤吉軒)
    시호
    효헌(孝憲)
    이칭
    김두성(金斗性)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811(순조 11)
    본관
    광산(光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성(金箕性)에 대하여

    미상∼1811년(순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성여(成汝), 호는 이길헌(頤吉軒).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딸인 청연공주와 결혼하여 광은부위(光恩副尉)가 되었다. 1790년(정조 14) 동지 겸 사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5년 상호도감에서 금인서사관(金印書寫官)으로, 1800년 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서사관으로 공로가 커 말 1필을 하사받았다. 1802년(순조 2) 왕비책봉 때에는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 등의 일을 맡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그뒤 의령현감으로 나갔으며, 1805년에는 호조참판에 올랐다. 글씨에 능하여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항상 발탁되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268(원종 9)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손(金起孫)에 대하여

    미상∼1268년(원종 9). 고려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태서(台瑞)이고, 형은 경손(慶孫), 동생은 약선(若先)이다. 1251년(고종 38)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고, 1256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1259년 문하평장사를 겸임, 1260년 문하평장사 판이부사(門下平章事判吏部事)가 되었으며, 1262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268년에는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하였다.

  • 계지(季芝)
    창산(蒼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2(순조 32) - ?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수(金綺秀){1}에 대하여

    1832년(순조 32)∼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 서울 출신. 준연(駿淵)의 아들이다. 1875년(고종 12)에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응교에 오르고,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음력 2월 22일 가자(加資)되어 통정(通政)에 올랐으며, 예조참의에 결함(結銜)하여 수신사로 임명되니 근대 대일교섭의 첫 사절이 되었다. 사절단원 76인을 인솔하고 4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 부산에서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에 승선,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고 5월 4일 고베(神戶)를 경유하여 5월 7일 요코하마(橫濱)에 입항하여, 일본 외무성 관리의 출영을 받고 특별열차편으로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그뒤 5월 27일 동경을 떠날 때까지 20일간 체류하면서 개화한 일본의 문물, 즉 전신과 철도의 가설, 군함과 대포의 제조를 비롯하여 군사·기계·학술·교육 등의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그의 일본 견문기는 《일동기유 日東記游》·《수신사일기 修信使日記》에 나타나 있다. 수신사 일행의 보고와 그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復命別單)은 고종과 민비, 그리고 척신(戚臣)과 조신(朝臣)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경 체류 당시 주일영국공사가 호의를 베풀어 면회하기를 요망하였으나, 구미외국사절과는 일체 접촉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1877년 황해도 곡산군수(谷山郡守), 1879년 덕원부사(德源府使), 1881년 대사성, 1883년 감리의주통상사무(監理義州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1893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을 때 황간(黃澗)·청풍(淸風)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민란주모자를 엄형정배(嚴刑定配)하고 전 황간현감 민영후(閔泳厚)와 전 청풍부사 송병두(宋秉斗)는 의금부로 하여금 나문(拏問)하게 하였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 저서로 《일동기유》와 《수신사일기》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7() - 1986()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악가
    김기수(金琪洙){2}에 대하여

    1917년∼1986년. 대금 연주가 및 작곡가·교육자. 서울 출생. 193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졸업하였다. 이왕직아악부 아악수(雅樂手)로 근무하면서 1939년 이왕직의 신곡 공모에서 〈황화만년지곡 皇化萬年之曲〉으로 당선되었고, 1941년 사중병주곡(四重並奏曲)인 〈세우영 細雨影〉을 창작한 이후 많은 신작 국악곡을 작곡하였다.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 1955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교무주임을 거쳐 1962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1972년 국립국악원장, 1977년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83년 정년퇴임 이후 국립국악원 연주단 사범으로 재직중 죽었다. 대표적인 전통악기를 사용하여 새로운 국악곡을 창작한 개척자로, 국립국악원의 행정직을 맡으면서 국악의 체계 정립 및 보급에 힘썼다. 국악사양성소 및 각 대학 국악과의 강의 등을 통하여 국악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예능보유자,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각각 지정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개천부 開天賦〉·〈송광복 頌光復〉·〈하원춘 賀元春〉 등이 있다. 그밖에 국립국악원에서 발행한 오선보 및 정간보로 된 한국전통음악 악보를 채보하였으며, 저서로는 《국악입문》·《남창가곡백선 男唱歌曲百選》 등이 있다.

  • 화중(化中)
    초은(樵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2(철종 13) - 1931()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순(金箕淳)에 대하여

    1862년(철종 13)∼1931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화중(化中), 호는 초은(樵隱)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所聲面) 기린동(麒麟洞: 옛 고부군(古阜郡) 성포면(聲浦面) 관할)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낸 장영(章榮) 김진(金稹)의 16세손이며, 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의 후손이다. 고조부는 인일정(引逸亭) 김성은(金性溵), 증조부는 김국회(金國檜), 조부는 김찬영(金瓚榮)이며, 아버지는 기로소(耆老所: 임금을 포함하여 정2품 벼슬을 지낸 70세 이상 노인들의 이름을 등록하고 예우하던 경로당)에 들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김상관(金相寬)이다. 처는 학생인 선산김씨(善山金氏) 김규집(金奎集)의 딸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13세손이다. 어려서 총명하였으며 예를 알아 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집안을 잘 다스렸다. 문집으로 《초은유고(憔隱遺稿)》가 있다. 《초은유고》에는 유영선(柳永善)의 서문(序文), 아들 김재룡(金在龍)과 족손(族孫)인 김훈석(金勳錫)의 발문이 있다. 6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제는 문집의 일반적 형식을 따랐다.

  • 정범(正範)
    국헌(菊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49(헌종 15) - 1929()
    본관
    도강(道康)
    분류
    교육/사상 > 유생
    김기술(金箕述)에 대하여

    1849년(헌종 15)∼1929년. 일제강점기 유생·의병. 자는 정범(正範), 호는 국헌(菊軒)이며,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고현내(古縣內: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도강백(道康伯)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부친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영석(金永碩)과 모친 수원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봉양에 지성을 다 바쳤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며,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반동학군(反東學軍)으로 활약하였다. 1906년 담양(潭陽) 용추사(龍湫寺)에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 호남 유생의 거의동맹(擧義同盟)에 가입, 면암선생의 무성창의(武成倡義)에 참여하여 우익장(右翼將) 직책으로 정읍(井邑) 무성서원을 출발한 뒤, 순창(淳昌)에 이르러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스승을 끝까지 지킨 12 명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태형(笞刑) 1백대를 맞고 풀려났다. 아들 김재환(金在煥)이 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합격하였고, 손자 김유현(金裕鉉)은 조선 후기 교육사업가로 활동하였다. 묘지는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칠보면(七寶面) 고현(古縣) 성황산(城隍山) 북록(北麓) 미좌(未坐)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1975년 시산사(詩山祠: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 4번지에 소재)에 배향되었다.

  • 경택(敬澤)
    가당(稼堂)/가정(稼亭)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5(고종 2) - 1920()
    본관
    김해(金海)
    분류
    교육/사상 > 유생
    김기식(金淇植)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20년. 일제강점기 유생·항일운동가. 자는 경택(敬澤), 호는 가당(稼堂)·가정(稼亭)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후추공(後推公) 사복시정(司僕寺正) 김수태(金壽泰)의 7세손으로,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김석적(金碩迪)의 현손이고, 부친은 송은(松隱) 김제락(金濟洛)이다. 두 아들 또한 남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항일운동가 김용호(金容鎬)·김삼룡(金三龍)이다.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7세부터 족숙(族叔)인 수성재(修惺齋) 김제휴(金濟休)의 문하에 있으면서, 경서(經書)와 제가서(諸家書)를 두루 수학,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고풍(古風)을 고수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능하였다. 1906년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주둔한 일본 헌병대를 격퇴시켜 3일천하를 만든 양한규(梁漢奎)·박재홍(朴在洪) 사건에 동참 거사하였고, 1910년(융희 4) 한일병합이 되자 공북대(拱北臺: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 동산에 있는 단)에 올라 북향통곡을 하였으며 일제상품 불매운동과 불법 식민통치를 비판한데 앞장섰다. 그가 55세인 1919년 3·1독립만세 때는 덕과면장(德果面長) 이석기(李奭器) 주동 아래 두 아들과 함께 장꾼 동원책으로 선두에 섰다가 일본 헌병에게 쫓기어 멀리 피신하였다가 이듬해인 경신(庚申) 대수해를 겪은 뒤 별세하였다. 묘소는 남원시(南原市) 대강면(帶江面) 사석리(沙石里) 청계동 선산 아래 임좌(壬坐) 언덕에 자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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