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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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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화윤(和允)
    인재(認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64(고종 1) - 1927()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학 > 문필가
    김기영(金璂永)에 대하여

    1864년(고종 1) 1월 3일∼1927년. 조선 말기 문인. 자는 화윤(和允)이고, 호는 인재(認齋)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경상북도 성주(星州) 용계촌(龍溪村) 출신이다. 신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이다. 증조는 김상렬(金相烈), 조부는 김재희(金在僖)이다. 부친 김진곤(金鎭坤)과 부친의 둘째 부인 죽산전씨(竹山全氏)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청도김씨(淸道金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공부를 시작하고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없었으며, 경전(經傳)을 숙독(熟讀)하고 연구하여 나이 20세에 학문의 깊이가 심오해졌다. 그 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으며, 특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였다. 평생을 사람들과 예물을 주고받으며 사귀거나 명예를 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절친하게 지낸 사람은 이양래(李陽來)·우여칠(禹汝七)·정대경(鄭大卿)·윤명숙(尹明淑) 등의 몇 명 뿐이었으며, 이들과는 서로 30년간 왕래하면서 강학(講學)하고 연마하였다. 그는 대의(大義)에 힘쓰고 자신을 수양하고 갈고 닦는 것을 즐겨 하였다. 질병으로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상란(金相蘭), 김상복(金相福)이며, 딸은 윤병기(尹炳驥)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구남산(九南山)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유집 《인재유고(認齋遺稿)》는 이도복(李道復)의 서문과 이종익(李鐘翼)의 발문이 붙어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재유고》에 실린 작품 가운데는 〈취정일기(就正日記)〉·〈을사서행일기(乙巳西行日記)〉·〈동유일기(東遊日記)〉·〈남정일기(南征日記)〉 등 다수의 일기류가 주목할 만하며, 부록(附錄)에는 그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 등이 실려 있다.



  • 시호

    이칭
    김명숙(金明淑)/김사보(金士寶)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3(고종 20) - 193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기용(金基用)에 대하여

    1883년(고종 20)∼1938년. 독립운동가. 일명 명숙(明淑)·사보(士寶). 경상북도 영천 출신. 1928년 1월경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진 주동자 장진홍(張鎭弘)과 만나 영천경찰서 및 영천의 부호 이인석(李仁錫)에게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투척연습을 하며 시기를 엿보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 및 살인예비죄 등이 적용되어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옥중에서도 장진홍이 죽자 그 진상을 추궁하기 위하여 형무소장의 면회를 요청, 간수가 폭언하므로 이에 분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감방을 파괴하다 가중형 6개월을 언도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성언(聖彦)
    회촌(晦村)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4(헌종 10) - 1902(고종 6)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우(金箕宇)에 대하여

    1844년(헌종 10)∼1902년(고종 39).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성언(聖彦), 호는 회촌(晦村)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대산면(大山面)에서 출생하였다. 국재(菊齋) 김성진(金聲振)의 후손이다. 동해(東海) 김훈(金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졌다. 1975년 석판본 2권 1책으로 간행된 《회촌만헌양세고(晦村晩軒兩世稿》는 그의 저서인 《회촌유고(晦村遺稿)》와 아들의 《만헌유고(晩軒遺稿)》를 합철한 것인데 시(詩)·서(序)·부록(附錄)으로 엮어졌다.

  • 여술(汝述)
    운곡(雲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97(숙종 23) - 1755(영조 31)
    본관
    울산(蔚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조(金基祖)에 대하여

    1697년(숙종 23)∼1755년(영조 31).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여술(汝述), 호는 운곡(雲谷)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전라북도 순창(淳昌) 복흥면(福興面) 출신이다. 학문을 익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데 힘썼다. 또 효우(孝友)를 몸소 행하여 인근 향리의 학자들이 우러러 보았다고 전한다. 만년에는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써 그의 문하에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문집으로 《운곡유고(雲谷遺稿)》가 전한다.

  • 중윤(仲胤)
    청하(聽荷)
    시호
    충정(忠定)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85(선조 18) - 1635(인조 13)
    본관
    강릉(江陵)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종(金起宗)에 대하여

    1585년(선조 18)∼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중윤(仲胤), 호는 청하(聽荷). 서울 출신. 철명(哲命)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전날 이이첨(李爾瞻)이 사당(私黨)을 심기 위한 과거에 참여하여 장원하였다는 지적을 받고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청요직에 허락되지 않았다. 1624년 관서원수(關西元帥) 장만(張晩)이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할 때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자, 조정은 잘못을 용서하고 등용하여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에 책록,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지고 당상관에 올랐다. 청렴하고 조신하며 과거에 오른 지 12년 만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편서로 《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 달경(達卿)
    신암(愼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언양(彦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준(金基濬)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달경(達卿), 호는 신암(愼菴)이다.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김성일(金成鎰)의 아들로 풍채가 준수하였다. 효를 힘써 실천하여 부모의 상(喪)을 당하자 3년 동안 피죽으로만 연명하였다. 1814년(순조 14) 김조순(金祖淳), 이조원(李肇源)과 함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충남 논산 궐리사(厥里祠)에 배향하도록 상소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필법은 당대에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 원파(圓坡)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9(철종 10) - 1933()
    본관
    울산(蔚山)
    분류
    경제/사회 > 육영사업가
    김기중(金祺中)에 대하여

    1859년(철종 10)∼1933년. 육영사업가. 본관은 울산. 호는 원파(圓坡). 전라북도 부안 출생. 제2대 부통령 김성수(金性洙)의 큰아버지이며 양부(養父)이다. 1886년에 진사가 되고, 1904년 용담(龍潭)·평택·동복(同福) 등지의 군수를 거쳐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떠나 교육·문화사업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1908년 향리 줄포(茁蒲)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뒤 일본에 건너가 교육제도를 시찰하고 중등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15년에 경영난에 빠진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 김성수의 생부인 경중(暻中)과 함께 설립자가 되었으며, 1917년에 계동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다. 1932년에는 경중과 함께 천도교로부터 보성전문학교를 넘겨받고 동대문 밖에 신축교사를 건립, 이전하였다. 그당시 김성수의 민립대학 설립계획이 여의치 못하자 민간사학을 통해 그 뜻을 이어 나가고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김성수로 하여금 운영을 맡게 하였던 것이다.

  • 공서(公緖)
    석거(石居)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9(순조 9) - ?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찬(金基纘)에 대하여

    1809년(순조 9)∼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緖), 호는 석거(石居). 아버지는 주묵(周默)이다. 1835년(헌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37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그 이름이 올랐다. 1842년에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다녀와서 하동부사 이남원(李南轅), 금산군수 장조남(張照南), 남해현령 김증(金增), 성주목사 신재순(申在淳), 전우병사 조원석(趙元錫) 등의 죄상을 보고하고 그 처벌을 건의하였다. 그뒤 집의를 거쳐 1852년(철종 3)에 대사간이 되었으며, 1859년에는 이조참의를 지내고 이어서 참판을 지냈다. 저서로는 《석거집》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0(고종 27) - 1935()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원불교인
    김기천(金幾天)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35년. 원불교의 성직자. 본명은 성구(聖久), 법호는 삼산(三山). 전라남도 영광 출신. 16세에 서당 훈장이 되었다. 1916년 김광선(金光旋)을 통해 소태산(少太山)에게 귀의하여 9인제자 중 한 사람으로 원불교 초기교단 형성과정에서 저축조합·방언공사(防堰工事)·혈인기도(血印祈禱) 등에 참여했다. 이어 영광지부장·총부서무부장·교무부장·선원교무·부산 하단(당리)교무 등을 역임하며 20여년간 전무출신으로 봉직하였다. 출가 후에는 수양에 전념하였고 성리(性理)에 밝아 소태산으로부터 최초의 견성인가(見性認可)를 받았다. 〈교리송 敎理頌〉·〈사은찬송가 四恩讚頌歌〉·〈심월송 心月頌〉 등의 시문을 남겼으며, 그가 펴낸 《철자집 綴字集》은 원불교 초기 교서에 나오는 한자를 모아 엮은 책으로 초심자들에게 좋은 교과서 구실을 해오고 있다. 출가위(出家位)로 추존되어 종사위(宗師位) 법훈(法勳)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7() - 1986()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김기철(金基喆)에 대하여

    1917년∼1986년. 정치가·행정관료. 서울에서 출생하여 1938년 만주 길림사범학교 졸업 후 교편생활을 시작하여, 1939년 만주 신선공립우급교장(神仙公立優級校長)에 임명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직을 맡았다. 1948년 제헌국회 총선에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출마하여 제헌의원이 되었고, 1954년 제3대 총선거 때 자유당 공천으로 충주에서 당선되었다. 그뒤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욕이 노골화되자 반독재정치투쟁에 나서 1958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변인, 같은해 공명선거추진위원회 조직책임위원 등을 맡았다. 1960년 제5대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농림부 정무차관직에 임명되었다. 5·16군사혁명으로 민주당정권이 붕괴되면서 야당정치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64년 민주당 당무위원과 조직위원장, 1965년 민주구락부 대변인, 1966년 민주동지회 대표간사, 1967년 야당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거쳤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로서 197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사무국 주간, 1975년 천주교 평신도사도직전국협의회회장, 1976년 꾸르실료한국협의회 부회장, 1979년 한국협의회 상임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민주정의당 창당준비위원으로 정부여당에 참여하여 제11대국회에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참여하였다. 1980년에는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비동맹7개국을 순방하기도 하였고, 같은해 9월부터 1981년 3월까지 제11대 체신부장관직을 맡았다.


  • 백봉(白峯)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8(융희 2) - 1985()
    본관
    김해(金海)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기추(金基秋)에 대하여

    1908년∼1985년. 독립운동가·불교지도자. 본관은 김해. 호는 백봉(白峯). 부산 출생. 10세 때까지 제주도에서 자라다가 11세 때 부산으로 이주, 그곳에서 영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제이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조선사를 교과목에 삽입시킬 것과 일본명으로 된 학교명을 우리말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교명바꾸기운동을 일으켰으며, 일본군의 현역군인이 출장하여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도 반대하였다. 이 운동이 교외적(校外的)인 문제로 확산되고 집단적 소요가 거세지자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그뒤 20세가 되기 전에 25세 이하의 청년들로서 구성된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조선민족의 해방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의 열렬한 기질로 인하여 곧바로 청년동맹위원장의 직위를 맡았다. 그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행상을 하는 한편, 1927년 2월에 발족한 신간회(新幹會)조직과도 관계를 맺는 등 은밀히 활동하였다. 1928년초에는 일본의 사상범에 대한 검거선풍에 의해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부산의 중국음식점 동반루를 부수고 일본형사들에게 쫓기어 만주로 가서 박대좌라는 한국인 장교 밑에서 서생(書生)노릇을 하며 도피생활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간부로 가담하였다가 당시 미군정청에 의하여 구금을 당하여 2년동안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불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감옥살이 때에 《채근담》과 《벽암록 碧巖錄》을 읽고 인생문제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부터였다. 1963년초 대전의 심광사(心侊寺)에서 도반들과 선수행(禪修行)의 결사를 맺고 입정에 들어 7개월 만에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뒤 서울·인천·경기도일대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지도하였다. 1969년에는 대의(大義)의 요청으로 대전 심광사에 머물면서 《금강경》·《유마경》을 강의하였고, 1972년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금정사(金井寺)에서 《금강경》을 강의하는 등 재가불자의 선수행포교(禪修行布敎)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해 부산 남천동 산중턱에 보림선원(寶林禪院)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수행자들을 모아 매년 선수련법회를 열고 《금강경》·《유마경》·《선문염송 禪門拈頌》을 교재로 선리(禪理)를 가르치고 참선수행을 지도하였다. 총 22차에 걸친 선수련법회를 중심으로 하여 거사불교운동을 고양시켰으며, 불교계에 공관(空觀)을 통한 오도의 성취라는 새로운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1984년에는 지리산으로 선원을 옮기고, 1985년 여름 선수련회를 열고 철야정진을 주관하다가 8월 2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金剛經講頌》·《유마경대강론 維摩經大講論》·《선문염송요론 禪門拈頌要論》·《백봉선시집 白峯禪詩集》·《절대성과 상대성》 등이 있다.

  • 후재(厚載)
    소창(少滄)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3(헌종 9) - 1919()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학 > 문필가
    김기택(金基澤)에 대하여

    1843년(헌종 9)∼1919년. 조선 말기 문인이다. 자는 후재(厚載), 호는 소창(少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출신지는 충청북도 청주(淸州)이다. 증조는 김계봉(金啓奉), 조부는 김수형(金秀亨)이며, 부친은 김만희(金萬熙)이다. 외조는 함안(咸安) 윤영검(尹永儉), 청주(淸州) 한방리(韓方履)이며, 그는 윤씨 소생이다. 처부는 은진(恩津) 송능수(宋能洙), 평산(平山) 신표(申杓)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비범하며 위엄이 있어, 동료들도 함부로 장난질하지 못하였다. 오당(峿堂) 이상수(李象秀)의 문인이다.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때는 향리가 쓸쓸하고 어수선하였으나, 그의 위덕(威德)을 듣고 동비(東匪)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향리에서 은둔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다, 1919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아들은 김욱(金旭), 김범구(金範九)이다. 묘지는 탑산(塔山) 좌록(左麓) 부계원(負癸原)이다. 시문집으로 《소창유고(少滄遺稿)》가 있다.

  • 대백(大伯)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54(영조 30) - 1827(순조 27)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풍(金基豊)에 대하여

    1754년(영조 30)∼1827년(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 자는 대백(大伯). 아버지는 군수 안묵(安默)이며, 어머니는 참봉 한사중(韓思重)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진사가 된 후 1785년 영릉(永陵)·명릉(明陵)의 참봉을 거쳐 의금부동부도사·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형조좌랑·형조정랑·호조정랑 등을 거쳐 사도시·사옹원·장악원의 첨정과 돈령부판관·선혜낭청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삼등(三登)·영유(永柔) 현령, 순안·맹산현감, 함흥·광주판관, 선산·장성부사 및 임천군수·평양서윤·충주목사 등을 거쳤다. 지방수령으로 재직중에는 관개·교량 등의 사업에 힘썼고 군역의 폐단이던 첨정(簽丁)을 방지하고 세를 가볍게 하였다. 특히 평양서윤을 지낼 때의 진휼사업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용구(用九)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49(인조 27) - 1701(숙종 27)
    본관
    울산(蔚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하(金器夏)에 대하여

    1649년(인조 27)∼1701년(숙종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용구(用九). 성리학자 인후(麟厚)의 4세손이며, 아버지는 형우(亨祐), 어머니는 허열(許說)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유학뿐 아니라 역사·의학·지리·천문 등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이 사사되자 부근에 살고 있던 선비들을 모아 장례를 주관하는 한편, 스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그것을 운영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숙종 때의 명신이었던 김수항(金壽恒)의 여러 자제들과 깊이 사귀었는데, 벼슬길에는 뜻이 없어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학행(學行)으로 추천받아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 직재(直齋)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4(고종 21) - 192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기한(金起漢)에 대하여

    1884년∼1921년. 독립운동가. 호는 직재(直齋). 평안북도 안주 출생.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예성강유역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하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조맹선(趙孟善)·박장호(朴長浩)·백삼규(白三圭) 등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사한장(司翰長)으로 활동하였다. 이해 11월 독립단의 국내지단 결성과 군자금모금의 사명을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먼저 황해도 해주에서 지단 조직에 착수하고, 1920년에는 평남지단(平南支團)과 군단(郡團)조직을, 7월에는 평북지단과 군단을 결성하였다. 그뒤 서울에 잠입하여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단원들을 포섭, 군자금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중 발각되어 잡혔다. 1921년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일본경찰의 악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우범(禹範)
    벽와(碧窩)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57(철종 8) - 1912()
    본관
    광산(光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김기혁(金箕赫)에 대하여

    1857년(철종 8) 1월 10일∼1912년 3월 18일. 조선 말기 유학자이다. 자는 우범(禹範), 호는 벽와(碧窩), 본관은 광산(光山), 출신지는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대동면(大洞面) 덕산리(德山里)이다. 증조는 김정철(金鼎鐵), 부친은 김상환(金相煥)이다. 외조부는 영월(寧越) 신택규(辛宅奎), 처부는 함평(咸平) 이상서(李商緖), 나주(羅州) 임홍묵(林弘黙)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슬기로와, 5, 6세에 외조부로부터 수업하였다. 8세에 외부의 은사로부터 사사하였는데 기특하다고 칭찬하였다. 특히 문예(文藝)에 능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는데도 스스로 어떻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없자, 세상에 회의를 품고 향리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은거하였다. 향년 56세에 사망하였다. 아들은 김재백(金在白), 김재황(金在黃)이다. 묘지는 무안군(務安郡) 몽탄면(夢灘面) 승달산(僧達山) 가사곡(袈裟谷) 부간원(負艮原)이다. 시문집으로 《벽와선생문집(碧窩先生文集)》이 있다.


  • 해악(海岳)
    시호

    이칭
    김현구(金鉉九)/김현구(金玄九)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7(고종 24) - 194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김기형(金基瀅)에 대하여

    1887년(고종 24)∼1943년. 독립운동가. 호는 해악(海岳), 가명은 현구(鉉九·玄九). 황해도 안악 출신. 향리에서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독립운동을 결심한 뒤, 1914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다. 만주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이천민(李天民)·임의탁(林義鐸) 등과 독립운동 및 문화사업에 힘쓰다가, 고향에 돌아와 문신소학교(文新小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안악에서 봉기한 3월 11일, 4월 6일, 4월 8일의 세차례 만세시위운동의 주동적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군내 여러 곳의 장날을 이용하여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뒤, 연통제(聯通制)의 황해도경무사(黃海道警務司)로 임명되어 군자금을 모집하여 안악군 대행면 굴산리에 국내 연락소를 두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뒤 만주 안동(安東)에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모집한 군자금을 보내고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을 계속하다가, 1921년 5월 13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다시 임시정부에 업무연락을 하러 갔다가 국내에 잡입하여 황해도독판(黃海道督辦) 및 각 군의 요원들에게 임시정부의 밀령과 연락사항을 전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다시 상해로 갔다. 1922년 7월 상해에서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 황해도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해 10월 28일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10년 이내에 1만여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백만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할 목적으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발기총회를 김구(金九) 등 20여명과 같이 개최하고 여기서 그는 비서부장과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23년 6월 3일 국민대표회의파의 황해도 대표로서 참가하였다. 상해대한인교민단의사(上海大韓人僑民團議事) 및 총무부장을 역임하고 이 단체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이사로 교육운동에 앞장섰으며, 같은해 4월 1일 한국노병회의 회계검사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탄핵심판위원에 선임되었다. 1926년 우리나라 유학생들을 진학시키기 위한 민족교육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최창식(崔昌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상해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을 설립하였다. 또한 문일민(文一民) 등과 같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다. 1929년 3월 이동녕·이시영·김구·이유필·조완구·조소앙(趙素昻)·안창호·박기준(朴基俊)·엄항섭(嚴恒燮)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중앙집행위원과 함께 문화부장·재무부장·감사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진영의 단결을 굳게 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오당통합운동(五黨統合運動)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 조직에 진력하였으며, 1937년 1월에는 이 당의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0년에 충칭(重慶)으로 가서 의정원의원으로 그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립에 노력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김요한(金Johan)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24(순조 24) - 1903(광무 7)
    본관
    안동(安東)
    분류
    종교 > 천주교인
    김기호(金起浩)에 대하여

    1824년(순조 24)∼1903년. 조선 말기의 천주교인. 세례명 요한. 본관은 안동. 황해도 수안 출생. 15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의 길을 버리고 글방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며 경향 각지의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30세 때 느낀 바 있어 서울의 홍봉주(洪鳳周)를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주교 베르뇌(Berneux, S. F.)로부터 세례받은 뒤 10여년간 그의 복사로 있으면서 명도회장(明道會長)·전교회장을 겸하여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전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체포된 홍봉주·남종삼(南鍾三)·베르뇌와 선교사들의 순교광경을 숨어서 목격한 뒤 신부 드게트(Deguette)와 강원도 산골에 숨어 박해를 모면하고, 그뒤 주교 리델(Ridel, F. C.)·블랑(Blanc, M.)·뮈텔(Mutel, G. C. M.) 등 3대에 걸쳐 교회재건에 헌신하였다. 1883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거행된 블랑의 성성식(成聖式)에는 신자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귀국길에 중국 상해·난징 등지의 천주교회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돌아와서는 명동성당 건립에 관여하다가 1901년 70세의 노령으로 경기도 하우현(下牛峴)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903년 12월에 죽었다. 저서로는 문답식 교리서인 《소원신종 溯源愼終》과, 1854년에서 1901년까지 47년 동안 자신의 전교활동을 회고한 《봉교자술 奉敎自述》, 그리고 《교령요의 敎靈要義》 등이 있다.

  • 윤숙(允淑)
    덕천(德川)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6(헌종 12) - ?
    본관
    청도(淸道)
    분류
    문학 > 문필가
    김기홍(金器洪)에 대하여

    1846년(헌종 12)∼미상. 조선 말기 문인. 자는 윤숙(允淑), 호는 덕천(德川)이다.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문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과문(科文)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과거에 뜻을 두고 학업에 정진하였으나 정국(政局)이 그릇됨을 보고 고향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만년에는 전라북도 덕천(德川)에 집을 짓고 독서하며 살았다. 그의 명성을 듣고 인근에서 배움을 청해 찾아오는 학생이 많았다고 전한다.

  • 사중(士重)

    시호
    효헌(孝憲)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47(영조 23) - 1830(순조 30)
    본관
    청풍(淸風)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김기후(金基厚)에 대하여

    1747년(영조 23)∼1830년(순조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중(士重). 아버지는 판돈령부사 지묵(持默)이다. 이구상(李龜祥)의 문인이다. 1774년(영조 50) 생원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었고, 1811년(순조 11) 총융사(摠戎使)에 임명되었다. 이어 금위대장·공조판서·지돈령부사·도총관·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왕실과 인척관계가 있으므로 항상 언행에 조심하여 60년 동안 궁궐에 출입하였어도 집안사람들에게 궁궐 안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궐일을 관장하게 되자, 더욱 근신하여 영비(營費)를 추호도 낭비하지 않고 봉직에 전력을 다하였다. 1826년 노령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진하였다가, 서만수(徐萬修)의 무고를 받아 외진 고을에 유폐된 지 수년 만에 죽고 말았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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