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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소백유록(小白遊錄)
    발급년
    1878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백유록(小白遊錄)」은 권정침(權正? ; 1710∼1767)의 『평암선생문집(平菴先生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으며, 소백산 일대를 유람하고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유람록이다. 그는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살고 있으면서 소백산 유람을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다가 경신년(1740년) 4월 9일 취암에 가서 10일 동안 머무는 동안에 소백산 유람을 약속한 후 5월 병오일(7일)에 마침내 소백산 유람을 하게 된다. 산수를 유람하는 동안 주변의 풍광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병오일(7일)에서 임자일(13일)까지 7일 동안의 유람을 마친 그는 산수에 대한 평가를 단순히 좋은 경치만 구경해서는 안되고 산수유람을 통해 그동안 속세에서 쌓인 마음의 찌꺼기를 제거하고 넓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정침의 자는 자성(子誠), 호는 평암(平菴),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대대로 봉화(奉化)에서 살았다. 이광정(李光庭)ㆍ강재항(姜再恒)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175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조의 신임을 받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고,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757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여 처벌될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가 사서(司書) 임성(任珹), 검열(檢閱) 임덕제(林德?)와 함께 그 무고함을 밝혀 일단 무사히 풀려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 달 영조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고 곧 뒤주에 넣어 죽게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형장에까지 끌려갔다가 특지(特旨)로 풀려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은거하였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 제목
    소청일기(疏廳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청일기(疏廳日記)』는 조정(趙靖 ; 1555~1636)이 1596년 11월부터 1597년 3월 17일까지 친정(親征)을 주청하는 소를 올리기 위해 향론(鄕論)을 모으고 의사를 결정해 소를 올리는 과정이 자세히 쓰여 있어 당시 향론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자료이다. 1596년에 이전(李?)과 함께 소를 올렸지만 보고조차 되지 않아서 이듬해인 1597년에 2월 28일 도성에 가서 직접 소를 올리게 된다. 도성에 머물면서 연이은 소청을 올려보지만 가납되지 않자 3월 11일 도성을 나와 17일 집에 도착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권말에는 상주 백성들의 임란을 극복하고 의병을 일으킨 치적을 위로하기 위해 선조가 경상도민에게 내린 교서(敎書)가 부기되어 있다. 조정의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이다. 김성일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경호(權景虎), 정경세(鄭經世), 이홍도(李弘道), 채유희(蔡有喜)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적 토벌에 힘쓰고 친명(親命)으로 기원(基遠), 영원(榮遠) 두 아들을 화왕산성의 곽재우 진중에 보내 직접 싸우게 하였다. 임란 후 1599년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가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지냈다. 저서로 『남행록(南行錄)』, 『진사록(辰巳錄)』,『서행일기(西行日記)』,『문견록(聞見錄)』 등 임란일기 7책이 전한다.
  • 제목
    소청일기(疏廳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청일기(疏廳日記)』는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난 지 6년 후 영남유생들이 연명으로 복제(服制)의 부당함을 조정에 올리기까지의 사건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을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조대비 복상은 우선 정태화가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에 있는 규정을 내세워 기년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허목과 윤선도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확산되었다.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삼년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었다.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이고 효종은 조대비에게 둘째아들이므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종지설(四種之說 : 왕위를 계승했어도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 적자(嫡子)이면서 장자(長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 서인의 주장이었다. 반면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허목(許穆) 등 남인의 주장이었다. 이들 남인과 연합한 소북계(小北系)의 윤휴(尹?)는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삼년상을 주장하였다. 유세철을 포함한 안동의 유림들도 모두 남인의 주장에 따라 3년 복을 입어야 함을 역설하였고 도내에 통문을 띄워 연명으로 상소를 하게 되는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 제목
    소청일록(疏廳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청일록(疏廳日錄)』은 대산 이상정(李象靖 ; 1711∼1781)이 돌아가신 2년 후에 서원에 배향하여 향사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러한 일은 신중을 기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어 미루어 오다가, 돌아가신지 10년 뒤인 1792년에 증직시호 상소를 올려서 증직과 함께 고산서원에 배향하고자 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는 과정과 진행 상황을 일정별로 기록한 도서이다. 1792년 김종덕(金宗德), 김노진(金魯進) 등 100여 명이 연명으로 노림서원(魯林書院) 원장에게 건의하니, 원장 김가수(金家洙)가 각 고을의 서원과 향교 등에 안동 태사묘 숭보당에서 도회를 열자는 통문을 보내었으나, 마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막혀 회의에 참석치 못한다고 통보한 유생이 130여 명이나 되어 다시 다음해 2월에 의성향교에서 도회를 열자는 통문을 보냈다. 의성향교에서 400여 명이 모여 도회를 하고 상소를 올릴 것을 결정한 것과 소수와 천출조사 공사원 등을 정한 것, 설소청(設疏廳)을 마련하기 위해 선발대를 먼저 보낸 것, 서울로 향하여 가는 과정과 서울로 가는 도중에 격려 방문한 지우들과 유생들, 서울에서 찾아온 관료들의 명단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계속 이어지는 문서로 결론이 없다.?
  • 제목
    소청일록(疏廳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청일록(疏廳日錄)」은 금시해(琴是諧 ; 1587~1667)의 문집인『아양헌문집(峨洋軒文集)』 권 2의 잡저부분에 실려져 있으며, 을해년(1635년)에 우율종사(牛栗從祀)의 논의가 있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우율종사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문묘에 모시어 제사를 지내자는 것인데, 당시 서인들은 찬성 쪽이었지만, 남인 측에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금시해도 남인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 저지하였는데, 「소청일록」이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다. 금시해의 자는 극성(克成), 호는 아양헌(峨洋軒), 본관은 봉화이다. 아버지는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에 증직된 복고(復古)며 어머니는 영양남씨 계홍(繼洪)의 딸이다. 그의 호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의 친구인 종자기가 자신의 뜻을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두었다는 고사에서 기인하여, 자신의 뜻을 산수자연에 두겠다는 의미와, 혹은 지음 같은 친구를 취하여 스스로 즐긴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 제목
    소행일기(疏行日記)
    발급년
    1927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행일기(疏行日記)」는 독립운동가 이승희(李承熙 ; 1847∼1916)의 시문집인『대계문집(大溪文集)』 권 30에 수록되어 있다. 을사년(1905년) 10월 25일에 시작하여 11월 29일까지 기록하고 있다. 10월 25일부터 11월 10일까지는 단락을 나누지 않고 기록하였고 중간 중간 누락된 부분이 있으며, 11월 11일부터 29일까지는 날짜별로 단락을 나누어 하루하루의 일과를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을 파기하고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상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곽종석이 먼저 상소를 올려 고종의 비답을 얻지 못하자 이승희와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에 대한 부당성을 상소한 것이다. 이승희의 본관은 성산(星山), 일명 대하(大夏),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ㆍ대계(大溪)ㆍ한계(韓溪)이며, 진상(震相)의 아들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으며,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하여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제목
    소행일기(疏行日記)
    발급년
    1738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소행일기(疏行日記)」는 오흡(吳? ; 1576∼1641)의 문집인『용계선생문집(龍溪先生文集)』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이이첨 일당의 간악하고 흉포한 행동에 격분한 안동인근의 영남유생들이 이들을 참할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과정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1621년 7월 20일 안동인근의 유생들이 김시추(金是樞)를 소두(疏頭)로 삼아 모인 사람들이 700여명이나 되었으나, 이이첨 일당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고 유생들을 잡아들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믐날에 다시 모인 사람은 100여명이었다. 이들은 위로는 사직의 안녕과 아래로는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도성으로 향하게 된다. 8월 11일 도성에 도착하여 8월 12일 첫 번째 소를 올리게 된다. 세 차례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네 번째는 무기를 들고 대궐문을 부수고 상소를 올린 후에 임금의 자중하라는 명을 받고 9월 2일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발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한 모습에서 선비정신을 읽을 수가 있다. 오흡의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극성(克成)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교위(校尉) 승백(勝白)의 딸이다. 이덕홍(李德弘)의 문인이며, 1636년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뒤로는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 제목
    속리산유록(俗離山遊錄)
    발급년
    190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속리산유록(俗離山遊錄)」은 도우경(都禹景 ; 1755∼1813)의 문집인『명암집(明庵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평소에 병이 있어 산수 유람은 꿈도 꾸지 못하던 도우경은 경신년(1800년) 봄에 속리산 문장대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유람을 결행하여 속리산 일대를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청천을 지나 화양동으로 가서 우암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들을 살펴보고 사자암을 거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문장대에 오르니 마치 신선이 된 듯이 온갖 번뇌가 사라짐을 느꼈으며, 문장대를 내려와 법주사에 들러 돌아왔다. 도우경의 자는 경승(景升), 호는 명암(明庵)ㆍ억옹(憶翁)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상욱(尙郁)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 정렴(正濂)의 딸이다.
  • 제목
    수문록(輸聞錄)
    발급년
    191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수문록(輸聞錄)』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쓴 경술년(1910년)의 일기이다. 첫머리에 『수문록』이라고 명명한 이유를 밝힌 서문이 있으며, 1910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1년 동안의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본문은 날짜 아래 가로로 그 날의 일진, 간지를 기록한 다음 날씨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자신의 행적이나 견문을 기록하였으며, 친척이나 친구, 이웃들의 방문까지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간혹 아버지나 이웃 어른들을 모시고 침산정, 삼산정 등등을 유람한 내용도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며, 입춘이나 단오 등의 절기나 책을 읽다가 느낀 감정들을 시로 지어서 본문보다 작은 세주 형식으로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본문에 대하여 자세한 사항이나 24절기 등은 두주(頭註) 형태로 적어 두었다. 사서삼경 외에도 『예기』, 『춘추』, 『좌전』, 『사략』, 『통감』 등 그 날 읽었던 책은 모두 기록되어 있어 선비들의 독서량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어머니가 노환으로 시력이 떨어져 오곡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도 자식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며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숭재일록(崇齋日錄)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숭재일록(崇齋日錄)』은 김두흠(金斗欽, ; 1804~1877)이 숭릉별검(崇陵別檢)을 역임하면서 기사년(1845년, 헌종11) 8월 1일부터 병오년(1846년)과 정미년(1847년) 4월 30일까지 쓴 일기이다. 일기의 내용은 월일과 간지, 및 날씨를 쓰고 참봉을 지내면서 숭릉에서의 일과 개인의 사생활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숭릉에 들어가서 여러 능에 근무하는 당직자들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여러 능의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서 지면례(知面禮)를 나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명절 때와 헌종, 명성왕후의 기제사 때에 조정에서 제사를 모시러 온 관리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친지나 지우들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나 편지를 주고받은 일 등등, 멀리서 집안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뒤에 부록으로 「숭재일용하기(崇齋日用下記)」가 실려 있으며, 여기에 숭릉에서 사용된 물품과 비용들을 기록하였다. 겉표지 안쪽에 손자사주[孫兒四柱 己巳十二月十一日未時]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손자가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김두흠의 자는 문일(文一)이고, 호는 낙애(洛厓), 본관은 풍산(豊山), 중우(重佑)의 아들이다, 1843년과 1866년 문과에 두 차례 급제, 지평, 정언, 수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 제목
    신미일기(辛未日記)
    발급년
    1904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신미일기(辛未日記)」는 오준선(吳駿善 ; 1851∼1931)의 문집인『후석유고(後石遺稿)』 권 25에 수록되어 있으며, 신미년(1931년)에 오준선의 제자인 양상하(梁相賀)가 스승의 운명순간부터 삼우 때까지 20여 일간에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주요기록들을 살펴보면, 6월 21일에 운명하여 습을 하였고, 22일에 조문객들이 왔고, 23일에는 소렴, 24일에는 성복, 25일 조문객이 왔고, 26일부터 7월 13일까지의 기록은 없으며, 14일 발인, 15일 재우(再虞), 16일 삼우(三虞)를 지내고 돌아오는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스승의 죽음을 두고 제자가 모든 장사의 일들을 주관하여 처리한 모습에서 사우간의 정을 느낄 수가 있다. 오준선의 자는 덕행(德行), 호는 후석(後石),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오준선의 아버지는 항규(恒圭)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학란 때 민종렬(閔種烈)과 함께 동학군을 맞아 싸웠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일어난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송병선(宋秉璿)ㆍ최익현(崔益鉉) 등과 강론하였다. 고향에서 후진양성에 전력하였으며, 경술국치 후 일제의 하사금을 거부하다 곤욕을 겪기도 하였다. 기정진의 문집을 간행할 때 기정진의 이기설(理氣說)이 이이(李珥)의 학설과 다르다하여 세론이 들끓자 통문을 보내 글을 고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문장에 능하였고, 양효묵(梁孝默)ㆍ최윤로(崔潤魯)ㆍ김요원(金堯元)ㆍ양상하(梁相賀) 등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 제목
    신사이월척사소거서행시일기(辛巳二月斥邪疏擧西行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신사이월척사소거서행시일기(辛巳二月斥邪疏擧西行時日記)」는 장효진(張孝鎭)의 문집인『만포유고(灣浦遺稿)』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신사년(1881년) 2월 7일에 사악한 무리들을 배척하라는 소를 올리기 위해 도성에 다녀온 일을 기록한 것이다. 유생들은 7일 출발하여 9일에는 단양을 지나, 15일 용인을 거쳐, 17일에 도성에 도착한 사람은 모두 270여명이었다. 도착해서 소장을 준비하여 21일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27일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28일 다시 소를 올렸는데, 3월 4일 소를 올린 이들을 엄벌에 처하라는 분부가 내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일 소수(疏首)는 함경도 안변(安邊)에 유배를 가게 되었고, 17일 소장(疏丈)은 강원도 덕천(德川)으로 유배를 가게 됨으로써 유생들의 의견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18일 충청도ㆍ강원도ㆍ황해도 등에서 소장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언급하는 것으로 일기는 끝이 난다. 이후의 기록은 일실되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제목
    신종추원록(愼終追遠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신종추원록(愼終追遠錄)』은 이병연(李昺淵)이 1880년경에 태백산일대를 유람하고 쓴 「황지기사(潢池記事)」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행장인 「선비공인예안김씨기사(先?恭人禮安金氏記事)」와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형이 돌아가신 뒤 그의 제문과 의형제를 맺으며 지은 「도원결의서(桃園結誼序)」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지기사」에서는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과 태백산을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다고 서술하고 동료 3명과 함께 태백산까지 가는 과정과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소백산과 죽령, 조령, 대관령, 추풍령 등지의 지리적인 내용과 황지연못에서 샘솟는 물을 보고 느낀 소감 등과 특히 산의 혈맥 등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선비공인예안김씨기사」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행장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도원결의서」와 「세신묘정월29일연제김병준찬옥근정(歲辛卯正月二十九日捐弟金昞準贊玉謹呈)」은 김병준과 의형제를 맺은 연유와 제문이며, 「택지안치론의(擇地安?論擬)」는 묘터의 명당자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풍수지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제목
    안우록 18(安愚錄 18)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안우록(安愚錄)』 십팔(十八)은 류영희(柳泳熙 ; 1890~1960)가 기축년(1949년) 1월 1일부터 경인년(1950년) 3월 30일까지 15개월간의 자신이 경험한 일상적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서문에 보면 자신은 10년 동안 글을 읽고 어로(魚魯)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함을 언급하고 있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가족 간에 화목하게 살면서 모든 일에 안분자지하면서 살 것을 언급하고 있다. 『안우록』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그가 다른 욕심은 버리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류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다. 저서로 『농포유고』가 있다.
  • 제목
    알항재선생문목일기(謁恒齋先生問目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알항재선생문목일기(謁恒齋先生問目日記)」는 박신윤(朴身潤 ; 1661∼1698)이 계유년(1693년) 10월에 그의 스승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 ; 1631~1698)을 찾아가서 『근사록(近思錄)』, 『소학(小學)』, 『대학(大學)』 등의 의문 나는 대목에 대해서 묻고 답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우곡선생문집(愚谷先生文集)』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박신윤의 자는 덕경(德卿), 호는 우곡(愚谷),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의령출신이다. 아버지는 이경(而慶)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 준(濬)의 딸이다. 이시장(李是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뒤에 이숭일의 문인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고, 13세에 친상을 당해서도 예제를 다하였다. 향시와 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면접에서 실패하여 후진양성에 전력하였고 문명과 덕행이 널리 알려졌다. 38세로 요절하였고 1712년 호군좌랑에 추증되었다. 운암서원(雲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제목
    암사구허동유기(巖寺舊墟同遊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암사구허동유기(巖寺舊墟同遊記)」는 이광덕(李匡德 ; 1762~1824)이 지은 것으로, 암회사(巖回寺) 옛 터를 유람하고 느낀 감회를 적은 것으로 그의 『농산문집』 권 3에 실려져 있다. 태행(太行)의 남쪽 자락 정상에 우뚝하게 서 있고 그 아래에 조금 평탄한 곳에 돌들이 쌓여 있고 훼손된 기와들이 아직도 널려져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옛날에 절터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말하고 있다. 벼랑을 타고 올라가니 그윽한 정취가 있었고, 푸른 절벽과 푸른 물과 온갖 여러 봉우리들이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니 진풍경을 연출하는 느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비록 절은 없지만 절 주변의 경치들은 옛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광덕의 초명은 경원(慶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연(季淵), 호는 농산(農山)이며, 규복(奎福)의 아들이다. 정종로(鄭宗魯)와 신체인(申體仁)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유심춘(柳尋春), 유이좌(柳台佐), 홍우정(洪宇正), 신정주(申鼎周)와 교유하였다.
  • 제목
    어운루유관기(御雲樓遊觀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어운루유관기(御雲樓遊觀記)」는 김영(金瑩 ; 1765~1840)의 문집인 『괴헌집(槐軒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무자년 늦봄에 어운루(御雲樓)에 올라서 자신의 의지를 다짐하는 의미에서 적은 것이다. 유람은 자연경관을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자신의 마음을 맑고 밝게 가져서 이런 마음을 정치하는데 전환시켜서야만, 백성들이 교화를 입고 나라가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구름을 잘 부리면 더울 때는 해를 가려주고, 가물 때는 비를 내리게 해주니, 백성들에게 구름보다 더 좋은 은택이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김영의 자는 의겸(義兼), 호는 괴헌(槐軒), 본관은 경주이다. 아버지는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오른 경집(慶集)이고 어머니는 숙부인에 증직된 봉화금씨 서봉(瑞鳳)의 딸과 청도김씨 태빈(兌彬)의 딸이다. 180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 예조정랑,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 제목
    여강기문록(廬江記聞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여강기문록(廬江記聞錄)』은 이우(李? ; 1739~1810)가 1765년 2월에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부친을 모시고 여러 유생들과 함께 『대학(大學)』을 강론한 내용을 동생이 기록한 도서이다. 2월 10일 안동부근에 있는 여러 유생들이 모여 퇴계, 서애, 학봉 세분에 대하여 향사하고, 그 다음날 강회를 열어 『대학』을 공부하다가 의문점들을 서문부터 차례로 질의하고 면암(?庵)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강회를 진행하였다. 질의답변 내용들은 대학이 학문을 하는 근본적인 법칙이 되는 이유에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가지 덕(德)과 네 가지 덕이 인성(人性)의 벼리가 되는 것, 명덕(明德)과 명명덕(明明德)의 차이점을 물의 청탁(淸濁)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하며, 오직 인(仁)한 사람만이 능히 사람을 미워하고 좋아할 수 있다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강론하였다. 이우의 자(字)는 치춘(稚春), 호는 면암(?庵)이고, 상정(象靖)의 아들이다.
  • 제목
    여강전말 인(廬江顚末 仁)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여강전말(廬江顚末)』 인(仁)은 영남의 3대 시비의 하나인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전말과 전개과정을 4권의 책으로 기록한 그 첫 번째 도서이다. 1812년 예안향교에서 도회(道會)를 열어 이상정의 문인들이 호계서원에 이상정을 추향하자는 논의를 제기하고 통문을 돌려 11월 10일 청성서원에서 도회를 열기로 하자, 병산서원에서 청성서원 도회소에 11월 6일 이를 반대하여 보낸 통문과 청성서원도회일기(靑城書院道會日記), 청성도석답병산문(靑城道席答屛山文), 병산답청성도회소통문(屛山答靑城道會所通文), 상주도남서원통호계문(尙州道南書院通虎溪文), 호계서원양재임단자(虎溪書院兩齋任單子), 전임고목제사(前任告目題辭), 병산통도내문(屛山通道內文), 사빈서원답병산문(泗濱書院答屛山文), 사빈통도내문(泗濱通道內文), 병산통이산서원도회소문(屛山通伊山書院道會所文), 이산도회일기(伊山道會日記) 등의 각 서원과 향교 도회소에 보낸 통문과 병호시비와 관련된 개인들의 주고받은 서신들의 원문이 그대로 실려 있어 병호시비의 전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제목
    연곡개갈시추감록(燕谷改碣時追感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연곡개갈시추감록(燕谷改碣時追感錄)』은 영천이씨 선조인 참의공(參議公)의 신도비를 1525년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짓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 됨에 글씨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자, 400여년 뒤인 1893년에 후손들이 비석을 다시 세워 중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도서이다. 농암이 비석을 세울 당시의 연유와 선조를 추모하는 시와, 퇴계의 추모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신도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사천재사(沙川齋舍)에서 후손들이 모의 회의를 하여 재원을 각출하고 일을 분담하여, 비석을 세울 돌을 구하고, 퇴계의 글씨로 다시 비석의 글씨를 새기기 위해 퇴계가 쓴 다른 여러 비에서 탁본을 구해오고, 글씨의 크기가 다른 글자는 축소와 확대를 거듭하며 집자를 하는 과정과, 비를 중수하고 후손들이 향사를 올리는 과정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의 추모시도 30여수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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