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청구일기(靑邱日記)
    발급년
    20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청구일기(靑邱日記)』는 1905년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 1842(헌종 8)~1910(융희 4)]가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청량산과 일월산 등지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10년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내용을 주변의 사람들이 기록한 일기이다. 1910년 8월 14일부터 9월 6일까지 24일간의 일기로 일반적으로 단식을 하면 문을 닫고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과는 달리 이만도는 단식을 하면서도 가족은 물론 이웃의 친지들이나 문인과 제자들 그리고 방문객까지 모두 만나서 의견도 나누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제자들에게는 양심적인 행동을 가르치고 며느리에게는 부덕을 가르치고 아들과 손자에게는 의리를 가르치며 평소의 검소한 생활과 같이 장례도 검소하게 치룰 것을 부탁하는 등 유학자의 본분을 잃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숨을 거두기 3일 전 일본의 영향력을 우려하여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서 미음을 먹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나는 떳떳한 조선의 정이품 관리이거늘 누가 나를 설득하려 하며 누가 나를 협박하려 하는가' 하고 호통을 치는 대목은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숙연하게 한다.
    이만도는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대사성(大司成) 휘준(彙濬)의 아들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안동(安東)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의 침략에 항거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다시 조약에 찬성한 적신(賊臣)의 처형을 상소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 제목
    구위판매안시일기(舊位版埋安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위판매안시일기(舊位版埋安時日記)』는 임인년 2월 28일에서 3월 7일 구(舊) 위판(位版)을 매장할 때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2월 28일 하계에 살던 이중벽(李中璧)이 일 때문에 이곡(狸谷)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월란(月瀾)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쳐다보니, 강 위 깎아지른 절벽 아래 조금 넓은 곳에 위판(位版)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위판을 받들 수도 없어 곧장 하계(下溪)로 들어가 알리고는 재빨리 상계(上溪)에 사는 종군(宗君)에게 사실을 알리었다. 하계 사람들이 먼저 석정(石亭)으로 건너가서 위판을 목격하고는 모두가 통곡하고 실성(失聲)할 지경이었다. 얼마 후 종군이 도착해서 요여(腰轝)로 위판을 봉안해 나와 암서헌(巖栖軒)에 봉안해 두었다. 이미 신(新) 위판이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 위판은 부득이 매장할 수밖에 없어서 매장할 날짜를 정하고는 3월 1일 고유제를 지냈으나 매장할 방법을 두고 서로간에 의견이 맞이 않았다. 유도성(柳道性)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바탕으로 매장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결정되지 않고, 이강호(李康鎬)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집에 실린「답자천서원삼선생위판개제문목(答紫川書院三先生位版改題問目)」의 내용을 복사해오자 모두 여헌의 설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내용은 ‘구 위판을 어떤 곳에 묻어야 합니까? 또 어떤 물건속에 싸 두어야합니까? (舊位版埋置何地耶, 且用何物?襲耶)’라는 물음에 ‘매장할 곳은 사당 뒤 깨끗한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종이를 깔고 묻는 것이 어떻습니까?(埋藏之所, 則就廟後潔地掘坎, 用席紙藉掩埋之, 如何)’라는 답변의 내용을 취하여 상덕사 뒷 편 깨끗한 곳에 구덩이를 파고 종이로 싸서 묻었던 것이다. 이렇듯 옛날 선조들은 오래된 위판이라도 함부로 버리거나 불태우지 않고, 반드시 예와 절차를 갖추어 매우 소중하게 취급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 제목
    금강탐승록(金剛探勝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강탐승지(金剛探勝誌)』는 갑자년(1924) 4월 7일에서 5월 12일까지 금강산을 유람하고 겪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유람기이다. 한 달간의 여정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날 여행한 거리도 병기하고 있다. 금강산유람에서 느낀 감정은 다음의 3편의 시가 작자의 감정을 모두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시는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었다고 하는, '초리(草履)를 신고, 죽장(竹杖)을 짚고 1만 2천 봉우리를 올랐네, 봉우리의 동쪽에는 바다가 있지만, 바다의 동쪽에는 더 이상 길이 없구나.(履艸履杖竹杖, 登一萬二千峰, 峰之東有海, 海之東無東)'이고, 다음은 '산과 구름이 모두 희니, 구름인지 산인지 분변하지 못하겠네, 구름이 걷히고 산이 홀로 우뚝하니 1만 2천봉우리라(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容,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시는 일반적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일기에서는 작자를 자세히 알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와 비슷한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의「영금강산(詠金剛山)」이라는 시와 너무나 흡사하다.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과 구름이 모두 흰빛을 띠고 있어 희미하여 모습을 분간하기 어렵네. 구름이 걷히어 산만 홀로 드러나니 1만 2천 봉우리도다.(山與雲俱白 熹微不辨容 雲飛山亦露 一萬二千峯)' 이다. 2구의 앞 두 글자와 3구의 3글자만 다를 뿐 나머지는 모두 같으며, 의미상으로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우암 송시열이 아니고, 아마 누군가 홍여하의 시를 퇴고하여 남겨놓은 것은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강스님이 지은 것으로, '백옥처럼 붕우리마다 온통 돌이요, 안개속은 곳곳마다 암자로다, 금강산의 무한한 경치를 소승(小僧)은 말로 전하지 못하겠네(白玉峰峰石, 靑煙處處庵, 金剛無限景, 未傳小僧談)'이다. 이 상의 시 3수는 모두 금강산의 경치를 표현한 것으로 더이상 금강산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없을 정도로 절창이라고 할 만하다. 일기 뒷부분에는 수창한 시들을 부기하고 있다.
  • 제목
    금남선생표해록(錦南先生漂海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남선생표해록(錦南先生漂海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보(崔溥 ; 1454∼1504)가 부친상을 당해 제주도에서 귀향 하는 도중, 뜻밖에 흑산도 부근에서 태풍을 만나 명나라의 절강 연안까지 떠 밀려가서 일행 43명과 함께 혹한 속에서 살아남기까지의 체험담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중국 절강 연안에 표류한 때는 1488년, 35살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명나라의 관료와 필담을 통해 명의 관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중국 고전에 나오는 지명과 인물들을 자신이 지나는 지방과 거의 빠짐없이 연결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그는 지식 뿐 아니라 실행에도 엄격하였다. 도교와 불교에 대해 배타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자신의 예와 어긋나는 경우에는 황제의 명령까지 거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아껴 43명 중 어느 한 사람 다치지 않고, 다시 그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다녀온 길, 다리, 개울, 만난 사람 이름, 먹거리 등 빠뜨린 것이 없을 정도로 낱낱이 기록하였고, 각 지방에 대한 관찰기도 놀랍다. 강남인과 강북인에 대한 비교가 그러한데, 강남인들이 온화하고 유순한데 비해, 강북 인심은 사나우며, 산동 이북은 다툼이 많고, 강도와 살인이 많은 곳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 당시 명나라 남부를 괴롭히고 있던 왜구의 모습을 실제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사실적인 기록은 사료에서 맛볼 수 없는 생생한 것이다. 최보의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2년(성종 1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고 교서관(校書館)의 저작ㆍ박사ㆍ수찬 등을 지냈으며, 1485년 『동국통감(東國通鑑)』, 1486년 홍문관교리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7년 제주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어 부임하였다가 부친상으로 돌아오던 중 표류하여 중국 명(明)나라를 거쳐 6개월 뒤 귀국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성종의 명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찬술하였는데, 중국 연안의 해로·산천·기후·민요·풍속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충청도 지방의 가뭄 해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 제목
    기사종사위개제시일기(己巳從祀位改題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종사위개제시일기(從祀位改題時日記)』는 기사년(1809)에 도산서원에 종향된 월천 조목의 위패를 개제(改題)할 때 빚어진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기사년 5월 초하루 향례를 마친 후에 임원들은 모두 나가고, 함안에 사는 박형욱(朴馨郁)과 고을 유행 4~5명이 상덕사를 배알하고 봉심(奉審)할 때 종향위의 신독(神?)이 열려져 있고, 괴한이 달아나는 것을 목격하고는 우선 재유사(齋有司)인 이정순(李鼎淳)에게 알리고, 이정순은 이 사실을 고을 원임(原任)들에게 알려 의논을 했지만, 전에 없었던 매우 중대한 일이라서 서로 갑론을박만 할 뿐 합의하지 못한 채 한 달을 보냈다. 그리하여 6월 11일 유학 이진경(李鎭慶)이 서원에 단자를 보내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도내 사림의 일로 부쳐 함께 논의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임원들은 의논을 모으지 못해 결국 8월 석채(釋菜 : 석전제)일까지 당회는 열리지 못했다. 석전제를 마치고 산장 김한유는 이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임원들을 빨리 돌려보내니 또 의논은 정해지지 않았다. 며칠 뒤 생원 이병순(李秉淳)이 서원에 단자를 보내어 당회를 열 것을 전하여 9월 4일 당회를 열고 위판을 개제하기로 합의하고 10월 15일 재임이 다시 당회를 열어 개제의절(改題儀節)을 정하였다. 당시 도집례(都執禮)는 직장(直長)을 지낸 김시찬(金是瓚 ; 1754~1831)이, 제위판(題位版)은 현감(縣監)을 역임한 김종수(金宗壽 ; 1761~1813)와 유학(幼學) 유치익(柳致翊)ㆍ이만수(李晩受)가 맡았고, 직일(直日)은 이정순(李程淳 ; 1764~1844)ㆍ금여모(琴汝模)가, 택일(擇日)은 유생 김영유(金詠儒)가 맡았는다. 택일을 맡은 김영유는 11월 16일 묘시(卯時)에 개제 고유제를 올리기로 정하여 이날 위판을 씻고, 분면을 새로 칠하여 고유제를 올리게 되었다.
  • 제목
    기해묘우중수시일기(己亥廟宇重修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묘우중수시일기(廟宇重修時日記)』는 기해년(1959년) 10월 17일부터 경자년(1960년) 3월 27일까지 도산서원 묘우(廟宇)를 중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그동안 사우(祠宇)의 중수(重修)는 영조 계유년(1753년)에서 고종 신축년(1901년)까지 훼손되고 무너진 곳을 부분적으로나마 5번이나 중수했지만, 400년이 지난 시점까지 묘우(廟宇)는 제대로 중수를 하지 않아 허물어지고 낡고 기울어져 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국가적 지원도 있고 해서 10월 17일 전교당에서 당회를 열어 중수하기로 결정하고, 도집례(都執禮)는 이항호(李恒鎬)가 도도감(都都監)은 금학수(琴學洙), 도감(都監)은 임시호(任時鎬) 외 몇 명이 맡기로 하였다. 20일 이항호 등 10여명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위판이 봉안된 사당에 가서 이안(移安)에 따른 고유제를 올리고 위판(位版)은 한존재(閑存齋)에 임시적으로 보관하고, 매달 초하루에는 반드시 분향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하여 5개월간의 모든 중수 과정을 마치고 3월 27일 환안례(還安禮)를 지냈다. 마지막 일기에는 묘우를 중수하기 전에 정유년(1957년)부터 무술년(1958년)까지는 전교당을 거칠게나마 중수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일기는 이안(移安)과 환안(還安)할 때의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날짜별로 구체적인 행동과 사람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일들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임과 동시에 뒷날 묘우를 중수할 때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 역할까지 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제목
    김기로일기(金基老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김기로일기(金基老日記)』는 김기로가 경신년(1920년) 5월 22일에서 임술년(1922년) 5월 11일까지 약 2년간의 개인적인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일기만 물에 젖었기 때문에 다시 책을 만들어 기록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이전의 일기는 다른 일기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집안에 물이 들어 가재도구가 떠내려가고 사람도 빠져 죽은 일, 가을에 성묘하고 조상의 무덤에 성묘한 일,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춥다는 이야기 등 매우 일상적인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일이 없으면 날짜와 날씨만이라도 기록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제목
    김창석일기(金昌錫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김창석일기(金昌錫日記)』는 김창석이 을사년(1905년) 1월 1일부터 병오년(1906년) 윤4월 30일까지 17개월 동안 선조들의 기일(忌日), 집을 방문한 사람, 상대방에 답한 편지글 등 자신의 신변을 둘러싼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1월 23일에는 『중용(中庸)』을 다 읽고 『시경(詩經)』을 읽기 시작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12월 22일 『시경』을 다 읽고 23일부터 『서경(書經)』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시경』을 완독하는데 11개월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 4월 30일에도 『서경』을 읽다가 취침한 것으로 보아 『서경』은 아직 완독하지 않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평소에 책을 무척 즐겨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병오년 윤4월이 되자, 윤달에 관한『기삼백해(朞三百解)』등 윤달에 관한 서적과 이에 대한 풀이와 해설도 덧붙이고 있다.
  • 제목
    계서예집(溪書禮輯)
    발급년
    190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정의】
    국은(菊隱) 임응성(林應聲, 1806~1866)이 퇴계집(退溪集) 가운데 예설(禮說)을 논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한 예서(禮書).
    【서지사항】
    목판본. 2권 2책. 1905년 안동 임하(臨河)에서 간행되었다. 識 : 임응성. 跋 : 金道和(1905).
    【체재 및 내용】
    저자의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종휴(鍾休)이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의 문인이다. 『계서예집』은 임응성의 아들 소한(昭漢)에 의해 간행되었다.
    임응성이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집 가운데 예설(禮說)을 논한 내용을 발췌한 책으로서, 권1에는 상례(喪禮), 복제(服制), 조제(朝祭), 장사(葬事)로부터 상식(上食), 삭망전(朔望奠), 대복추복(代服追服)까지 모두 14조목이 실려있고, 권2에는 소상(小祥), 대상(大祥), 선제(禪祭), 합장개장(合葬改葬)으로부터 혼례(婚禮), 잡조(雜條), 국휼례(國恤禮)까지 모두 14조목이 실려있는 바, 모두 28조목으로 편집한 예서(禮書)이다. 그 내용은 상례와 제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권말에 저자인 임응성의 후지(後識)와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1825~1912)가 1905년에 쓴 발문이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이황의 예설(禮說)을 모은 이 책은 “편집한 것이 퇴계집의 예(禮)의 큰 절목을 취하였고, 그 차례도 각각 조리가 있다. 계산예설유편(溪山禮說類編)이라는 비슷한 성격의 글이 있어 상세하게 절목을 기록하였지만 간행되지 못하였고, 이 계서예집이 간행되어 이황의 예에 관한 사상을 살펴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고 발문은 쓴 김도화는 그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 제목
    계서문집(溪西文集)
    발급년
    1912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계서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권규도(權奎度 ; 1782~1852)의 시문집이다. 권규도의 본관은 안동, 자는 천상(天祥), 호는 계서(溪西)이다.
    이 책은 1912년 그의 손자 용하(庸夏)등이 편집, 간행했는데, 권두에 김도화(金道和)의 발문이 있다. 목판본이다. 시 60여수를 비롯한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을 읊은 것이다. 서는 스승인 권방(權訪)에게 보낸 문안편지가 대부분이다. 그 중 유치명(柳緻明)에게 보낸 편지에는 성리(性理)와 상례에 관해 질의한 내용 등이 있다. 가장에서는 역대 조상들의 내력을 소상히 밝혔다.
    권정하(權靖夏) 찬(撰)한 행장(行狀)에 의하면, 권규도는 약관에 학림(鶴林) 권방선생(權訪先生)에게 사사하여 학문을 닦음에 있어서 그 재주와 용모가 단결(端潔)하고 영민(穎敏)하므로 선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학림옹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유문(遺文)을 수집편집(蒐集編輯)하여 출판함에 그의 힘이 컸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만년까지 봉친(奉親)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향리를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함이 많았다. 또 일찍이 관(冠)·혼(婚)·상(喪)·제(祭)의 간소화를 주장하여 몸소 실천하였으며, 분수에 상응한 생활을 하도록 계도하였다 한다.
  • 제목
    계암집(溪巖集)
    발급년
    1772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계암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겸 학자인 김령(金玲 ; 1577~1641)의 문집이다. 김령의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이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1772년(영조 48) 그의 현손 굉(紘) 등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편집, 간행하였다. 목판본이다. 권두에 이상정(李象靖)의 서문과 권말에 이세택(李世澤)과 굉의 발문이 있다. 시 326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짤막한 절구보다는 고시·율시·배율이 많이 실려 있으며, 서는 친지와 아들·조카들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소 중 하나는 인조가 벼슬을 내려 부른 데 대해 사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내의 유생들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5현의 문묘종사를 청한 내용인데, 이 상소는 올려지지 않았다.
    이상정(李象靖)이 찬(撰)한 서(序)에 의하면, 김령은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정자(權知承文正字)가 되고 1615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승진했으나 대북당(大北黨)이 집권함을 보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곧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 외부와의 교섭을 끊었으나 정원(政院)으로부터 일기를 편수하기 위해 여러 번 상경을 독촉하므로 부득이 서울에 가서 성 밖에서 일기를 닦아 올리고 되돌아 왔다. 인조반정 후 6품직을 서임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고 이어서 전적(典籍), 형조정랑(刑曹正郞), 의주판관(義州判官)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반신불수로 수족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핑계하여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예조정랑(禮曹正郞), 장령(掌令), 보덕(輔德),집의(執義), 사간(司諫) 등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17~18년을 병폐인(病廢人)으로 자처하여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 한다. 1689년(숙종 15) 도승지(都承旨)를 추증받았다.
  • 제목
    계은집(桂隱集)
    발급년
    196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계은집』은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인 이면주(李冕宙 ; 1827~1910)의 시문집이다. 이면주의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이다.
    이 책은 1865년 그의 후손인 상휘(相徽)·진재(震宰)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석인본이다. 권말에 진재의 발문이 있다.
    시 69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한도팔경(漢都八景)」의 연작시(連作詩)를 비롯하여 서정이 강하게 투영된, 「화매(?梅)」·「추야(秋夜)」·「산거(山居)」등과 김흥락(金興洛)·이교영(李敎英) 등에 대한 만시 등 다양한 작품이 고루 실려 있다. 소 가운데 「사정언겸진육조소(辭正言兼陳六條疏)」는 무고를 당하여 무주에 좌천되었다가 1864년(고종 1) 사면되어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을 때 올린 것으로서, 국정에 대하여 입지(立志)·강학(講學)·통변(通辯) 등 6개 조항으로 대별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다. 「을사팔조소(乙巳八條疏)」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국정이 침탈됨을 통한하여 국정의 쇄신을 촉구한 것으로 당시의 국내사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는 을사오적의 처벌을 상소한 것이다.
    서(書)는 주로 김숙·이헌영·조병호(趙秉鎬)등과 시사(時事)에 대해 의논한 것들이다. 그밖에 잡저에는 『주역』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학역의례(學易儀例)」와 「영해박씨족보서(寧海朴氏族譜序)」·「내곡지(柰谷誌)」등이 있다. 부록인 행장·연보 등에는 당시의 혼미한 정국과 정계의 움직임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필영(柳必永)이 찬(撰)한 행장(行狀)에 의하면, 이면주는 1850년(철종 1)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고, 다음 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이 되고, 1854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1855년 목릉별검(穆陵別檢), 1856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1861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866년에 사직겸문선전(司直兼文宣傳)으로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서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옮겨서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902년에 종반특망(宗班特望)으로 이품질가선대부종정원경(二品秩嘉善大夫宗正院卿)에 올랐다. 1905년에 매국조약을 듣고 울분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1910년에 사옥지변(社屋之變)을 듣고 유서누편(遺書累編)을 쓰고 사당에 고한 후 독약을 마시고 자진하였다 한다.
  • 제목
    계재집(溪齋集)
    발급년
    1909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계재집』은 조선말기의 학자 정제용(鄭濟鎔 ; 1865~1907)의 시문집이다. 정제용의 자는 형로(亨櫓), 호는 계재(溪齋)이다.
    이 책은 1909년(순종 3) 아들 인영(仁永)·덕영(德永) 등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목판본이다. 권두에 곽종석(郭鐘錫)의 서문이 있다. 시 230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상면우곽선생(上?宇郭先生)」에는 사물잠(四勿箴)·이기(理氣)·상례 등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별지에 시정(時政)에 관한 득실을 10개 조항으로 나누어 열거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문치를 너무 숭상하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무비를 갖추어 국방을 튼튼히 할 것과 군량을 비축하고 토지개혁 등을 단행하여 서정을 쇄신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잡록(雜錄)」과 「구산만록(龜山漫錄)」은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선유들의 좋은 말을 발견하면 기록하고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정리하여 후일에 비망한 것이며, 이기·심성·호연지기·성선·성정 등에 대해 토론하여 얻은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삼동이이변(三同二異辨)」은 『주역』의 선천수(先天數)와 후천수(後天數)를 대비, 숫자의 자리가 바뀐 것을 지적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지극히 미묘한 일은 모두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근원하고 그 묘함을 수(水)와 화(火)의 동이에서 생겨남을 강조했다. 이밖에 각처에서 학문에 대한 강의의 결과를 기록한 「서소정강의(舒簫亭講義)」와 수와 화의 이치를 설명한 「수화위척지정(水火爲尺地精)」이 있다.
    하겸진(河謙鎭)이 찬(撰)한 행장(行狀)에 의하면, 정제용은 후산(后山)과 면우(?宇) 두 선생을 사사하여 옛 성현의 심법(心法)이 오로지 이(理)에 있음을 알고 정사(精思)하고 명변(明辨)하여 독실히 믿어서 ″모든 일의 옳은 것이 곧 이(理)이니 사물을 떠나서 한갓 귀와 눈으로 익힘은 잘못이다″ 하여 함양함이 더욱 깊고, 체험함이 더욱 엄하였다. 비록 뜻밖의 역경에 처해서도 말과 일로 몸을 다스리고 사물에 응함을 모두 이(理)에 근본하여 합당하고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한다. 저술로는 문집 외 『용학차의(庸學箚疑)』1권이 있다.
  • 제목
    계촌선생문집(溪村先生文集)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계촌집』은 조선후기의 학자 이도현(李道顯 ; 1837~1907)의 시문집이다. 이도현의 자는 치문(穉文), 호는 계촌(溪村)이다.
    이 책은 간행연대는 미상이나 유필영(柳必永)이 쓴 행장에 의하면 정조 때 사인(士人)들이 저자의 방후손(傍後孫) 면주(冕宙)와 함께 간행한 것 같다. 목활자본이다.
    시 201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암암자실(暗暗者室)」·「안유류의(岸有柳矣)」 등은 『시경』의 체재를 모방한 것으로 4언으로 된 것이며, 「관동잡영(關東雜詠)」은 강원도지방의 명승고적 가운데 주로 금강산의 풍물을 담고 있어 `금강산유람시`라고 평할 수 있는데, 제목마다 해설을 붙여 독자의 이해를 도운 것이 특색이다.「청사도세자신설소(請思悼世子伸雪疏)」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국권을 농락한 권간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착오이니,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권간을 처벌하고 그 원통함을 씻어 줄 것을 청한 소이다. 그는 이 상소로 멸문의 화를 입었다. 잡저의「본기」는 『항우본기(項羽本紀)』의 예에 따라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단군조선·기자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의 경종조까지 약 4천년의 역사를 중요한 사건과 특색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실을 기록하여 사학연구에 참고가 되게 했다.「칠음청탁삼십육모차서(七音淸濁三十六母次序)」는 음계를 궁·상·각·치·우와 반치·반상 등 일곱 개로 구분하고 그것을 순음·설음·아음·치음·후음·반설음·반치음으로 분류한 뒤 청탁에 따라 36개 모음으로 구분해야만 바른 음색을 낼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도 「양몽총도(養蒙總圖)」는 사친(事親)·봉선(奉先)·지신(持身)·독서 등 어린이 교육에 필요한 10개의 도설이 있고,「팔진도설」은 군대 교련과 고대 전법에 사용하던 도설이 있다.
    유필영(柳必永)이 찬(撰)한 행장(行狀)에 의하면 이도현은 태종 제칠남(第七男) 온녕군(溫寧君) 정(呈)의 11대손으로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문인이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 폐사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상소사건으로 대역죄를 받아 철물교(鐵物橋)에서 처형됨에 아들 응원(應元), 응인(應寅)도 동시에 피살되고 유족은 풍천(豊川) 초도(椒島)에 유배되었다. 1899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변(內部協辨)을, 응원(應元)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추증하였다 한다.
  • 제목
    고계문집(古溪文集)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고계문집』은 이휘령(李彙寧 ; 1788~1861)의 시문집이다. 이휘령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이다. 이황(李滉)의 10대 종손으로 이황의 학풍을 계승, 성리학에 전심했다. 1816년 진사가 된 후 밀양, 동래의 부사를 역임했고 1853년 동부승지, 1861년엔 부총관이 되었다.
    이 책은 손자 중인(中寅), 장증손 충호(忠鎬), 외종손 허훈(許薰)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8권 4책이며, 목활자본이다.
    권1과 권2에는 시 125수, 소 5편, 서(書) 29편, 전문(箋文) 2편, 권3과 권4에는 「서연강의(書筵講義)」1편, 서(序) 21편, 기 4편, 발 15편, 상량문 2편, 권5와 권6에는 축문 22편, 제문 13편, 비명 1편, 묘갈명 16편, 권7과 권8에는 행장 12편, 부록으로 사제문 1편, 가장 1편, 묘갈명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가운데는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고, 이황의 도통연원을 이어 받은 이덕홍(李德弘)의 시호를 청한 것이 있으며, 서(書)는 성학십도(聖學十圖), 이기설 등의 논변도 있으나 대부분 문안편지이다. 이기설을 논한 내용에서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이고,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이라는 설을 강조한 것이다. 「서연강의」는 그가 세마(洗馬)로 있을 때 세자에게 강의한 『중용』과 『시경』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놓은 글이다.
    이휘령은 이황의 종손으로서 선조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에 전념한 바, 그 저서 중 『십도고증(十圖攷證)』과 국문으로 된 『방경무도사(邦慶舞蹈辭)』 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
  • 제목
    금파선생문집(琴坡先生文集)
    발급년
    193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파집』은 이정병(李鼎秉 ; 1759∼1834)의 시문집이다. 이정병의 자는 이집(?執), 호는 금파(琴坡), 본관은 여주(驢州)이다.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이며, 유치명(柳致明)에게 수학하였다.
    이 책은 1936년 손자인 석영(錫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의 소(疏)에는「진정걸군소(陳情乞郡疏)」이 있는데, 이것은 1800년 경연강의를 하고 있을 때,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의 수령이 될 것을 진정하면서 올린 것이다.「재이구언소(災異求言疏)」는 1807년에 올린 것으로, 임금은 만백성의 근원이 되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정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격물·치지·성의·정심 등의 공부에 역점을 두어 조심(操心)·양성(養性)에 유의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법도에 조금도 착오가 없어야 조종의 대업을 잘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정병은 1783년(정조 7)에 동당회시에 합격하고, 178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휘릉별검이 되었다. 그 뒤 원릉별검에 임용되고, 의령고주부,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811년(순조 11)에는 능·종묘의 축문과 숭인전의 제문·기우문 등을 제진하였다. 1815년에는 성균관사성, 시강원문학,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그 뒤 1827년에는 사간원대사간, 1834년는 용양위호군 겸 외위도총부부총관을 끝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다.
  • 제목
    금파유집(錦坡遺集)
    발급년
    1957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파유집』은 조선 말기의 문신은 박우현(朴遇賢 ; 1829∼1907)의 문집이다. 박우현의 자는 치문(穉文), 호는 금파(錦坡), 본관은 고령, 아버지는 수룡(秀龍)이다.
    이 책은 손자 병인(柄寅)이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의 권두에 권상규(權相圭)의 서문과 권말에 병인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자산록(玆山錄), 권2는 부록으로 만사, 제문, 가장(家狀), 행장, 묘지, 묘갈명, 입석고유문(立石告由文)등이 수록되어 있다. 「자산록」은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흥성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일에 대해 이를 논박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약 12년의 귀양살이를 끝낼 때까지 겪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상소의 내용은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군신의 관계이기 이전에 부자간의 인륜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한 것으로서, 충과 효는 국사에 우선해야 한다는 당시의 유교적 도덕관을 강조하고 있다.
    박우현은 1869년(고종 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고, 1871년(고종 8) 사헌부감찰, 그 뒤 전적, 좌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 제목
    금포실기(錦浦實紀)
    발급년
    187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포실기』는 김시성(金是聲 ; 1602∼1676)의 유문과 행적을 모은 문집이다. 김시성의 자는 문원(聞遠), 호는 금포(錦浦),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손처눌(孫處訥)과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 책은 8대손 진규(鎭奎)가 1871년(고종 8)에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 중 시(詩)는 만시 1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강정(江亭)의 10경을 읊은 것인데, 시어가 아담하고 표현이 절묘하여 하나의 화폭을 보는 것 같다. 서(書) 중 아들 우진(宇振)에게 쓴 편지는, 아들에게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기 바란다는 것과 노복이나 전토를 물려주는 것이 아버지의 정이지만 백성의 것을 함부로 빼앗아 내 자손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전토를 그대로 두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김시성은 1636년(인조 14) 별과에 급제하여 주사랑이 되었다. 이듬해 익위사익찬으로서 병자호란의 결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배종하여 심양에 간 후 3년 동안 충의로 섬겼다. 1639년 귀국 후 호분위사과가 되었고, 이듬해 황주판관이 되었다. 1644년(인조 22) 용천부사에 이어 이듬해는 강계부사가 되었다. 1648년 감경남도병사, 1649년 충무위부호군, 1651년 경상좌도병사, 1652년 회령부사, 1655년 훈련원도정, 1656년 함경북도병사, 1657년 포도대장, 1662년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그후 금위좌별장, 춘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 제목
    금호세고(琴湖世稿)
    발급년
    181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호세고』는 허조(許稠 ; 1369∼1439), 허후(許口 ; ?∼1453), 허조(許口 ; 1430∼1456) 세 사람의 시문집이다.
    허조의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전의시승이 되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예악제도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11년에는 예조좌참의 보문각직제학이 되어 성균학사와 하부학당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142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는 『속대전』을 찬술하였다. 1430년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완성하였다. 예악제도의 정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등을 뽑았고, 1439년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다.
    허후는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1428년에 병조좌랑이 되고, 1431년에는 지평을 지냈다. 이후 143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1442년 예조참판 등을 거쳐1448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451년(문종 1) 우참찬이 되어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등과 함께 『고려사』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의정부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마침내 거제도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교살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정단배식(正壇配食) 32명에 함께 향사되고,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허조(許口)의 자는 사가(思暇), 호는 응천(凝川)이다.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집현전수찬을 지냈다.
  • 제목
    급산집(?山集)
    발급년
    1937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급산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안영호(安永鎬 ; 1854∼1896)의 시문집이다. 안영호의 자는 경능(敬能), 호는 급산(?山),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 책은 1937년에 그의 아들인 승윤(承胤)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말에 정태진(丁泰鎭)의 발문이 있다. 권1, 2는 부(賦),시, 권3은 서(書), 고유문, 제문, 명, 찬(贊), 서(序), 지(識), 권4는 행록, 묘표, 잡저,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백운동부(次白雲洞賦)」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백운동부」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것으로 소수서원에 관한 전말을 소상하게 묘사한 명문이다. 시에는 「강사(江詞)」,「청야사(淸夜詞)」,「정사(征詞)」,「전사(田詞)」,「봉래사(蓬萊詞)」,「보패가(寶?歌)」등의 가사가 들어있는데, 각 제목마다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동사잡영 (東史雜詠)」은 사학(史學)에 취미를 가지고 사적을 답사하여 읊은 것으로 단군굴(檀君窟), 기자도(箕子都), 이연비(二連碑), 청성묘(淸聖廟), 신도(薪島), 치술령(?述嶺), 삼성굴(三姓窟), 후직묘(后稷墓), 인박산(咽薄山), 냉림(冷林), 포석정(鮑石亭), 칠불사(七佛寺), 조룡대(釣龍臺), 개골산(皆骨山), 영랑포(永郞浦), 탄금대(彈琴臺), 예성강(禮成江), 선죽교(善竹橋), 운문사(雲門寺), 의기사(義妓祠) 등 각 제목마다 상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
    잡저의 「치도론(治道論)」은 천하를 다스리는 도, 즉 정치의 기본적인 방법을 논한 것으로서 2편이 있다. 그 밖에도 정전설(井田說)에 관한 것 등 흥미있는 논설이 들어 있다.
    안영호의 아버지는 호연(浩淵)이며 과문(科文)을 잘 하여 한번에 10여 편을 연독(連讀)하여 미사여구를 점철하였으나 과장(科場)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 고문사(古文辭)에 힘써 더욱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또한 만족하는 바가 없었으며 노친을 섬김에 효를 다하고 조상을 공경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아졸(雅拙)하여 지나치게 고담(枯淡)한 듯하나 누 위에 달이 떠올라 만상이 고요하면 두건을 비껴 쓰고 가늘게 읊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