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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암집』은 조선 말기의 문신인 이돈우(李敦禹 ; 1807∼1884)의 시문집이다. 이돈우(李敦禹)의 자는 시능(始能)이고, 호는 긍암(肯庵)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경북 안동(安東) 출신이며, 이상정(李象靖)의 현손(玄孫)이자 이수응(李秀應)의 아들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이 책은 1934년 이완복(李完馥)이 편집, 간행하였다. 이 가운데 시(詩)에는 만시(輓詩)가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술회십칠운(述懷十七韻)」은 소서(小序)에서 자신이 평생 공령(功令)의 글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고 하여 문장사화(文章詞華)에 관심이 없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 시 역시 문학적 흥감보다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읊은 설리시(說理詩)로 되어 있다. 소(疏)의 「응지진삼강구목소(應旨陳三綱九目疏)」는 1877년(고종 14) 임금의 명에 응하여 지은 것으로, 체천(體天)·순천(順天)·외천(畏天)을 3강령으로 하여 입지(立志)·거경(居敬)·납간(納謙)은 체천으로, 휼민(恤民)·회공(恢公)·상검(尙儉)은 순천으로, 입강(立綱)·척사(斥邪)·흥학(興學)은 외천으로 분류하여,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장편의 소이다. 서(書)에는 스승 유치명(柳致明)을 비롯하여 동문 이진상(李震相)·이수일(李壽一)·김흥락(金興洛) 등 주로 영남학파에 속한 많은 학자들과 문목(問目)·별지(別紙)로 학문적인 내용을 문답한 것이 많다. 잡저 역시 성리학과 예설 등에 관한 논설들이 많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대개 사설(師說)을 따라 주리적(主理的)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특히 「이기무한량설(理氣無限量說)」은 새로운 시각으로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잡저에는 이밖에도 「경이직내설(敬以直內說)」·「존양함양변(存養涵養辨)」 등 수신(修身)에 관한 것을 비롯하여 경의 해석에 관한 논변의 글이 상당수 있다. 전(傳)에는 이보흠(李甫欽)의 전기가 있는데, 이보흠이 순흥부사로서 그곳에 유배되어 있는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교살 당한 사실이 소상하게 쓰여 있다. 그 가운데 흥미 있는 내용으로는 순흥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고사(桔死)한 지 1백여 년이 되었으나 이보흠이 그 고을에 부사로 부임해오자 고목에 새 잎이 돋아 울창해졌다가 이보흠이 처형당하자 갑자기 잎이 말라 떨어 졌고, 그 뒤 단종이 복위되면서 이보흠도 신원 되자 전과 같이 다시 고목의 잎이 울창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이돈우는 1850년(철종 1)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正字)가 되고, 정언(正言)·교리(敎理)·동부승지 등을 거쳐 1882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임종(臨終) 때 '요(堯)의 흠경(欽敬)과 순(舜)의 유일(惟一), 우(禹)의 자자(孜孜)와 탕(湯)의 율율(慄慄)'이 가전(家傳)의 학문이라고 유계(遺戒)하였다.
그는 리기설(理氣說)에서 이상정을 계승하였다. 그는 리기(理氣) 관계에서 불상잡(不相雜)과 불상리(不相離)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긍파재문집』은 조선후기의 학자 권한성(權翰成 ; 1811∼1879)의 시문집이다. 권한성의 자는 익보(翼甫), 호는 긍파재(肯播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이 책은 1942년 증손 오봉(五鳳)이 편집하였고, 1976년 기원(奇元)·기철(奇喆)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회춘(李會春)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유현우(柳賢佑)의 발문이 있다. 시 가운데 「고풍이십운(古風二十韻)」은 계모부귀(戒慕富貴), 계추세도(戒趨勢途), 논학문(論學問), 계사치(戒奢侈), 증아미(憎阿媚) 등으로 공령(功令)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는 그가 안주(安州)의 대동찰방으로 있을 때 당시 관찰사인 박규수(朴珪壽)가 뜻을 굽히고 벼슬할 것을 권하자 이 사(辭)를 지어 그의 뜻을 밝힌 것이다.
권한성의 아버지는 득추(得錘)이며 김화(金華), 김홍규(金弘奎)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세에 부친을 따라 선산(善山)의 감시(監試)에 응해서 장원하였다. 이후부터 문사(文詞)와 명성이 날로 높아졌고 다시 소암(所菴)에게 집지(執贄)하여 1837년(헌종 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5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선되었다. 정자(正字), 저작(著作), 직장(直長), 박사(博士) 등을 역임하여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고 6품직에 올라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옮겨졌다. 찰방직(察訪職)에 머물렀고 돌아와서는 풍기 적성산(赤城山)에 들어가 후학을 가르치고 여생을 보내는 동안 세 번이나 제수가 내려도 일체 불응하였다.
『가세잡기(家世雜記)』는 「고성종유록(高城從遊錄)」, 「안변종유록(安邊從遊錄)」, 「풍파기(風波記)」, 「신유일기(辛酉日記)」라는 네 가지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으로 보아 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아니고 집안 대대로 적은 것이다. 정사년 10월 27일에서 이듬해인 기묘년 12월 12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표지에는 없지만 경신년 3월 4일에서 15일까지의 기록이 「남귀일기」라는 제목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안변종유록」은 겉표지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북성록(北省錄)」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경신년 8월 4일에서 8월 25일까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풍파기(風波記)」는 무신란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죄를 주라는 상소와 관련된 기록이다. 의금부, 비변사, 이조 등에서 논의된 것과 경연에서 논의된 여러 가지 정황들을 기록하고 있다. 「신유일기(辛酉日記)」는 따로 제목을 부여하지 않고 곧바로 ‘신유(辛酉) 8월 21일’이라고 기재했는데, 기록 기간은 이날부터 이듬해인 임술년 2월 16일까지이다.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여정을 적은 것이다.
「가야일기(伽倻日記)」는 독립운동가 이승희(李承熙 ; 1847∼1916)의 시문집인『대계문집(大溪文集)』권 30에 수록되어 있다. 계미년(1883년) 여름에 재종형인 이달희(李達熙)가 가야산 유람할 것을 창의하여 11명이 4월 28일 길을 떠나서 5월 4일까지 여행을 가서 산수의 풍광을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여행 중에 명승지를 만나면 운자에 맞추어 시를 짓고 화답하는 형식을 취하곤 하였다.
이승희의 본관은 성산(星山), 일명 대하(大夏),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ㆍ대계(大溪)ㆍ한계(韓溪)이며, 진상(震相)의 아들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고,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 이념에 기초한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감시등록(監市謄錄)』은 계해년(癸亥年) 8월부터 갑자년(甲子年) 2월까지의 관청의 공문서를 모아 놓은 것으로 예조(禮曺)에서 각 관청으로 보내는 과거시험과 관련된 문서와 시장의 개시(開市)와 관련된 관찰사의 문서와 완문(完文), 아전들 간에 주고받은 치통(馳通)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예조(禮曺)의 공문은 생원시(生員試), 진사(進士試), 식년시(式年試) 등을 거행할 때의 시험감독 및 주의사항,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 채점방식 등을 자세히 지시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에 차질 없이 시행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의 문서이다. 관찰사에게 보내는 공문은 압록강 변경의 회령(會寧), 경원(慶源) 등의 지방에서 시장을 열 때의 감독사항으로 경원개시(慶源開市)때에는 경흥부사(慶興府使)를 임명하여 파견하고, 회령부개시(會寧府開市) 때에 부녕부사(富寧府使)가 병으로 감독을 할 수 없을 때에는 명천부사(明川府使)를 선임하여 임명하여 감독하라는 내용과 청나라사람들과의 교역 때의 금지 물품과 주의사항들도 기록되어 있다. 매 장마다 모두 관인이 찍혀 있다.
「강도일록(江都日錄)」은 신달도(申達道 ; 1576~1631)의 문집인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권 7의 잡저부분에 실려져 있다. 1627년 정묘호란시에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해 1월 17일부터 3월 23일까지의 진행된 전란상황과 자신의 활동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월 13일에 오랑캐들이 이미 의주(義州)를 침범하였고 14일에는 정주(定州)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일기는 시작된다. 특히 이정구(李廷龜)ㆍ장유(張維)ㆍ이경직(李景稷) 등이 청나라 사신인 유해(劉海)와 더불어 강화를 논의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달도의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형보(亨甫), 흘(?)의 아들이다. 1610년 생원시에 합격, 1623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을 거쳐 성환도(聖歡道) 찰방이 되고 1624년 이괄의 난에 대가(大駕)를 모시고 공주(公州)에 갔으며 난이 평정된 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가 다시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하고 소학과 가례(家禮)를 강론하여 교화에 힘썼다. 1637년 형조ㆍ예조의 정랑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10조소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였다. 1637년 청병(淸兵)이 의주(義州)를 함락하여 조야(朝野)가 황급해지자 극력 주화설(主和說)을 반대하였다. 1628년 예조정랑에서 시강원문학과 필선을 거쳐 장령이 되고 1631년 수찬이 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646년 영사공(寧社功)으로 도승지를 추증 받았다.
『강문일기(講問日記)』는 명나라 1601년(신종 29)부터 1634년(의종 7) 6월 15일까지의 기록이다. 쌍벽당(雙碧堂) 이원생(李元生 ; 1567~1654)이 스승인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 1553~1634)을 모시고 정구(鄭逑 ; 1543~1620), 장현광(張顯光 ; 1544~1637), 정경세(鄭經世 ; 1563~1633) 등 당대의 명유들을 방문하여 강론하고 질의한 사적들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에는 회원이 10여명 이었으나 손처눌이 죽은 해에는 40여명으로 늘어났다. 모당과 쌍벽당의 사우(師友) 연원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원생의 자는 선백(善白), 호는 쌍벽당(雙碧堂),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영남(榮男)이고, 어머니는 성산여씨(星山呂氏)로 종사랑(從仕郞) 응붕(應鵬)의 딸이다.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 1548~1615)과 모당 손처눌을 스승으로 모시고 다니면서 당대의 명유였던 한강(寒岡) 정구ㆍ여헌(旅軒) 장현광ㆍ우복(愚伏) 정경세를 찾아가서 학문을 강론하곤 하였다. 사우들의 기록을 남긴 『사우록(師友錄)』이 있다.
「강화일기(江華日記)」는 독립운동가 이승희(李承熙 ; 1847∼1916)의 시문집인『대계문집(大溪文集)』 권 30에 수록되어 있다. 일기는 기묘년(1879년) 늦봄에 정시(庭試)를 보러 갔다가 시험 후에 겨를이 있어서 족인 조현(祚鉉)과 두훈(斗勳), 그리고 친구 이덕후(李德厚)와 함께 심도(沁都)를 유람할 것을 약속하였다. 13일 돈의문(敦義門)을 나와 20일 소의문(昭義門)을 들어가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특히 병인양요 때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으로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한다. 이승희의 본관은 성산(星山), 일명 대하(大夏),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ㆍ대계(大溪)ㆍ한계(韓溪)이며, 진상(震相)의 아들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으며,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개국후구갑자정월원조(開國後九甲子正月元朝)』는 갑자년(1924년)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이다.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어 당시 절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월 1일 설날에는 주천(舟川)에 있는 큰집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친족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전등신화의 내용을 기록한 것은 특이할만하며, 동서분당의 원인과 명나라 신종이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책을 읽고 친구에게 답한 7언 절구 3수를 부기하고 있다.
『개국후구갑자지신미원조(開國後九甲子之辛未元朝)』는 신미년(1931년)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이다. 책력형식을 모방하여 일기를 기술하고 있으며,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매일 날씨를 기록하고 있어 당시 일기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으며, 일어난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 상황을 파악하기에 쉽다. 특히 찾아온 인물들의 성명까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내왕했던 사람들의 신상파악에도 용이한 자료이다. 7월 15일의 일기를 살펴보면, 동아일보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폭풍우가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특히 심하여 사상자와 가옥파괴의 정도, 전답 수몰이 많았다고 적고 있으며 또 그 수량까지 낱낱이 적고 있어 저자의 치밀성을 엿볼 수 있다.
『개국후구갑자지임신(開國後九甲子之壬申)』은 임신년(1932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일기이다.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다. 8월 26일 일기를 살펴보면, 지난 24일에 성주와 의성지방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우박이 내려 농작물이 전멸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이쪽 지방에는 우박으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또 9월 21일 일기를 살펴보면, 공진회(共進會)를 구경하려고 구미에 가서 차를 타고 김천에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저자는 구미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인 듯하다.
『개국후구경오정월원조(開國後九庚午正月元朝)』는 경오년(1930년)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이다.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다. 3월 13일 일기를 살펴보면, '지난달 보름 경에 인동(仁同) 문림촌(文林村)앞에 기이한 일이 발생하였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천둥이 치더니만 갑자기 두개의 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하나는 떨어졌고, 다른 하나는 떨어진 곳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불과 몇 근밖에 되지 않는 돌이였지만 떨어진 곳은 움푹 파였고, 야인(野人)이 지나다가 주워 와서 구경꾼들이 빙 둘러 있었다. 이때 관청에서 알고는 와서 빼앗아갔다. 이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여서 전하기를 꺼리기에 자신이 간략하게 기록한다.'고 하였다. 믿기 어려운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인동 인근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개국후구기사정월원조(開國後九己巳正月元朝)』는 기사년(1929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일기이다.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다. 2월 4일과 5일의 일기에는 자식의 병간호를 위한 아버지의 열정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아이가 감기인지 홍역인지 열이 내리지 않자 갈탕(葛湯)을 제조해서 복용시켰더니 도리어 심해져서 정신까지 잃을 정도여서 할머니 제사인데도 불구하고 자식걱정에 형만 보냈다. 그 다음날 최상사 약방에 갔더니 홍역이 아니고 독감증세이니 보원탕(保元湯)과 사향어합환(사향?合丸)을 복용하면 낫는다고 했으나 사향어합환은 구할 수 없다고 하자 최상사가 서울에 있는 약방에 주문해 놓아서 구미역에 곧 도착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2첩을 사서 보원탕과 곁들여 먹였더니 아이의 병이 나았다고 했다. 여기에서 작자의 열정적인 자식사랑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개국후구을축정월원조(開國後九乙丑正月元朝)』는 을축년(1925년) 1월 1일 부터 12월 30일까지와 병인년(1926년) 1월 1일 부터 12월 29일까지의 일기이다.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다. 설날이지만 관에서 금주령을 내려 술을 빚지 못하고 대신 감주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가격이 12,3량 이었던 것이 열흘이 못되어 가격이 1냥 8,9전으로 떨어져서 물가변동이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국후구정묘정월원일(開國後九丁卯正月元日)』은 정묘년(1927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일기와 무진년(1928년)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를 기록한 것이다. 책력형식을 취하여 두주로 24절기와 삼복을 표시하고 있다. 정묘년 1월 9일 일기를 살펴보면, 일본 경도(京都)에 지진이 났는데 지난 동경에서보다 훨씬 심하였다고 한다. 무진년 4월 24일과 25일의 내용을 보면, 초여름 가뭄이 극심하여 모판에 모종을 해놓았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하늘에 원망을 하니 그 다음날에 비가 내려 사람들이 희색으로 변하면서 하늘에게 도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천수답이 많은 당시로서는 의지할 곳이 하늘밖에 없었으니 농민들의 애타는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검간선생진사일록(黔澗先生辰巳日錄)」 계사정월(癸巳正月)은 조정(趙靖 ; 1555~1636)이 임진왜란의 상황을 기록한 『검간선생문집진사일록(黔澗先生文集辰巳日錄)』에 실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 1월 1일부터 그해 10월 21일 선조가 몽진을 갔다가 한양에 돌아오기까지의 전란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당시 전란의 피해와 몽진의 고초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조정의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이다. 김성일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경호(權景虎), 정경세(鄭經世), 이홍도(李弘道), 채유희(蔡有喜)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토벌에 힘쓰고 친명(親命)으로 기원(基遠), 영원(榮遠) 두 아들을 화왕산성의 곽재우 진중에 보내 직접 싸우게 하였다. 임란 후 1599년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가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지냈다. 저서로 『남행록(南行錄)』, 『진사록(辰巳錄)』,『서행일기(西行日記)』,『문견록(聞見錄)』 등 임란일기 7책이 전한다.
「검간선생진사일록(黔澗先生辰巳日錄)」 임진사월(壬辰四月)은 조정(趙靖 ; 1555~1636)이 임진왜란의 상황을 기록한 『검간선생문집진사일록(黔澗先生文集辰巳日錄)』에 실려져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4월 13일부터 그해 12월 29일까지 장수들의 연이은 죽음, 어가의 몽진, 경복궁의 소실, 각 지역의 의병 봉기 등 당시의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정의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이다. 김성일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경호(權景虎), 정경세(鄭經世), 이홍도(李弘道), 채유희(蔡有喜)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토벌에 힘쓰고 친명(親命)으로 기원(基遠), 영원(榮遠) 두 아들을 화왕산성의 곽재우 진중에 보내 직접 싸우게 하였다. 임란 후 1599년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가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지냈다. 저서로 『南行錄』, 『辰巳錄』,『西行日記』,『聞見錄』 등 임란일기 7책이 전한다.
「경술일기(庚戌日記)」는 황익재(黃翼再 ; 1682∼1747)의 시문집인 『화재선생문집(華齋先生文集)』 권 6의 「소환록(素患錄)」에 수록되어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평정 이후 1730년 1월 22일에 자신이 오히려 난을 일으킨 주동자와 연루되어 있었다고 참소를 당하여 함경도 구성(龜城)에 귀양 가서 생활하던 때의 기록이다. 억울한 심사와 정치생활의 무상함, 7년간 유배지에서의 생활상, 험준한 산하의 모습 등을 담고 있다. 황익재의 자는 재수(再?),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7년의 유배에서 1736년 복직의 명을 받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경연일기(經筵日記)」는 정경세(鄭經世 ; 1563~1633)의 문집인 『우복선생별집(愚伏先生別集)』 권 3에 실려져 있다. 계해년(1623년)~경오년(1630년) 사이의 경연에서 강론 할 때 경전의 구절이나 선조의 하문에 응답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강론의 주제는 『논어』의 구절이나 『대학』의 구절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묻고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문장가이자 명환(名宦)으로 일컬어진 우복의 시문집인 만큼 분량도 많거니와 내용도 다양하여 문학 및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정경세의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ㆍ하거(荷渠)ㆍ승성자(乘成子)ㆍ석총도인(石?道人)ㆍ송록(松麓),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1542~1607)의 문인으로 1582년에 진사, 1586년 24세로 알성과에 합격하였다. 영남관찰사로 있을 때 민풍을 일으켜 성망이 높았으며 이때 류성룡을 위해 상장(上章)했다가 귀양살이를 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大丘府使)가 되었고 이어 나주목사(羅州牧使),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를 지냈다. 이때 당화(黨禍)에 얽혀 세 차례나 입옥치리(入獄治理)되었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그는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국가전례(國家典禮)나 의례(疑禮)의 변칙(變則)이 있으면 반드시 그의 의견을 들었다. 시호는 문장공(文莊公)이다.
「경오일록(庚午日錄)」은 이상채(李相采 ; 1787~1854)의 문집인 『수졸재집(守拙齋集)』 권 2에 실려져 있다. 그가 24세 때인 경오년(1810년) 2월 22일부터 임신년(1812년) 9월 18일까지 3년간 선조의 문집간행문제에 벌어진 여러 가지 정황들을 기록하고 있다. 앞부분은 기년체 형식으로 사건을 기술한 뒤에 연도를 언급하였고, 3월 27일부터 편년체 형식으로 날짜를 쓰고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하루에 행보한 거리를 기록하고 있어 지역 간의 지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이상채의 자는 숙량(叔亮), 호는 수졸재(守拙齋),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이현일(玄逸)의 후손이며, 벼슬을 지내지는 않았으나 당시 조야의 유명 인사들과 교유가 있었다. 이현일의 원통함을 신원(伸寃)하기 위해 집 안 일은 모두 부인에게 맡기고 당로(當路 ; 임금이 거동 하는 길)에서 애원하여 1852년에 이현일의 벼슬을 회복하였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서 옛집을 수리하여 수졸재라 이름하고 독서하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