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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고대일록(孤臺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고대일록(孤臺日錄)』은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 1556-?)이 지은 것으로, 임진년(1592년) 4월 20일에 왜적이 육지에 닿았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후 4월 22일까지는 일실하여 상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4월 23일부터 병오년(1606년) 11월 1일까지 15년간의 사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발생이후 왜적의 동태와 전쟁이 끝난 이후 국가적 전후수습대책 등 전체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이다. 4권 4책의 필사본으로 윤달도 표시하고 있어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경운의 자는 덕옹(德?), 호는 고대,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함양(咸陽)에서 태어났으며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다.
  • 제목
    고성기행록(高城紀行錄)
    발급년
    18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고성기행록(高城紀行錄)」은 김몽화(金夢華 ; 1723~1792)의 문집인 『칠암문집(七巖文集)』 권 3의 잡저부분에 실려져 있다. 고성뿐만 아니라 인근의 경관을 두루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유기이다. 김몽화는 강릉 8경으로 꼽히는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과 강릉의 경포대(鏡浦臺)는 한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간성 이북지역과 강릉 이남지역을 아직 가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때마침 고성(高城)으로 공적인 일을 보러 가게 되어 유람을 떠난 것이다. 이때가 바로 정미년(1787년) 10월 1일이며 그의 나이 65세였다. 김몽화의 자는 성민(聖民), 호는 칠암(七巖),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김몽화의 아버지는 유수(裕壽)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석망(碩望)의 딸이다. 권상일(權相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754년에 사마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특히 백형(伯兄)과 더불어 대과에 올라 당세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1789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이어 부총관, 한성부좌우윤 등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 제목
    고종일기(考終日記)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고종일기(考終日記)」는 이동간(李東幹 ; 1757∼1822)의 시문집인 『침산문집(砧山文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장인 이동간이 임오년(1822년) 7월 20일부터 8월 5일 사시(巳時)에 별세할 때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사위 류우신(柳宇臣)이 쓴 일기이다. 이동간은 죽음을 앞두고 선조들의 사당이 불타 없어진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 사당을 짓지 않고 있기에 자식과 후손들로 하여금 사당을 지어 봄, 가을로 정자가례(程子家禮)에 의거하여 제사를 받들 것을 유언하고 있다. 이동간의 자는 여간(汝幹), 호는 침산(砧山),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아버지는 익룡(翼龍)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덕후(德?)의 딸이다. 그는 과거에 실패한 후로 벼슬의 뜻을 버리고 더욱 공부에 전념하였다.
  • 제목
    공산일기(公山日記)
    발급년
    17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공산일기(公山日記)」는 조익(趙翊 ; 1556∼1613)의 문집인 『가휴선생문집』 권 10에 실려 있으며 1602년 4월부터 1607년 6월 21일까지의 유배기간에 쓴 일기이다. 이 당시 그는 장령에 올라 지제교가 되었으나, 정철이 최영경을 무살(誣殺)한 죄를 추론할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어 1602년 공산(公山)에 유배되었다가 1607년에 이르러 해배(解配)되고 복직되었다. 6여 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차분한 필치로 그려낸 이 일기는 당대의 정치구도와 정계인물들의 활동상을 소상히 기록한 저작이다.?조익의 본관은 풍양(?壤)이며 자는 비중(?仲)이다. 선초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지낸 숭(崇)의 7세손이다. 숭이 처음 상주에 내려와 거주하였다가 그 후 춘천부사를 역임한 증조 윤녕(允寧)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조부 희(禧)가 다시 상주로 돌아옴으로써 세거하게 되었다. 부친은 효행으로 이름난 광헌(光憲)이며, 모친은 남양홍씨이고, 검간(黔澗) 조정(趙靖)은 그의 형이 된다. 조익은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독서에 힘써, 약관이 되어서는 백씨와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사(師事)하였다. 1582년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588년에는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 해에 부친상을 당해 추모의 정을 다했다. 3년 상을 마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친을 등에 업고 문경 노동(蘆洞)으로 피신했다. 백씨와 함께 왜구들의 침략을 통분해 하다가, 속리사(俗離寺)를 거점으로 하여 의병을 일으켜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을 상장군으로 삼고 그는 참모가 되어 왜적을 치는 일에 힘썼다.
  • 제목
    관동유산기(關東遊山記)
    발급년
    17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관동유산기(關東遊山記)」는 『지지세고(枝止世稿)』 권 2의 「승의랑공유고(承議郞公遺稿)」 잡저 부분에 실려 있다. 권정(權挺 ; 1618~1683)이 정유년(1657년) 2월 27일에서 9월 3일까지 관동지방을 8개월간 유람하고 기록한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나 명승지에 도착하면 자신의 감회를 단순하게 서술하지 않고 반드시 시로 읊어서 마음속의 감정을 표현하려 한 것이 특징적이다. 권정의 자는 초촌(楚村)이며, 효우(孝友)가 극진하였고 문사가 일찍이 성취되었기에 향당에서 선사(善士)라 일컬었다.
  • 제목
    관박록(觀剝錄)
    발급년
    1912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관박록(觀剝錄)』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쓴 임자년(1912년)의 일기이다. 첫머리에 『관박록』으로 명명한 이유를 밝힌 서문이 있으며, 임자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1년 동안의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본문은 날짜 아래 가로로 그 날의 일진, 간지를 기록한 다음 날씨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편지를 주고받은 일과 자신이 여행을 하거나 친척이나 친구, 이웃들의 방문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지은 시는 본문보다 작은 세주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본문에 대하여 자세한 사항이나 24절기 등은 두주(頭註)형태로 적어 두었다. 선조들의 유고를 정리하며 선조들이 남긴 필첩이나 선조들이 직접 쓴 적벽부, 김생의 서체로 쓴 필첩 등을 발견하고는 감격하는 내용도 잘 기록되어 있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다.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관해일기(觀海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관해일기(觀海日記)」는 이광로(李光魯 ; 1828∼1903)의 문집인 『구암문집(究庵文集)』 권 3에 실려져 있다. 영천 가천(駕川)에 살면서 60이 다 되도록 바다구경을 한 번도 못해서 동지들과 계획을 구상하다가 을유년(1885년) 8월 21일 드디어 바다구경을 가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바다구경은 정말로 장관이며 말로 형언할 수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주요 여행 경로는 기계(杞溪)를 거쳐 평사(平沙)를 지나 칠포(七浦 : 지금은 해수욕장임)까지이다. 이광로의 자는 경관(景觀), 호는 구암(究庵), 본관은 벽진(碧珍), 아버지는 정목(楨穆)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이다. 류치명(柳致明)에게 사사하였으며, 특히 『대학(大學)』 탐구에 전념하였다 하여 구암의 호를 받았다. 1881년에 영남유림이 척이소(斥異疎)를 올릴 때 수개월간 서울에 머물렀다. 이돈우(李敦禹), 장복추(張福樞), 장승원(張升遠), 권주욱(權周郁), 배극소(裵克紹)등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 제목
    광양적행일기(光陽謫行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광양적행일기(光陽謫行日記)」는 김간(金侃 ; 1653∼1735)의 문집인 『죽봉집(竹峯集)』권 3에 실려져 있다. 경진년(1700년) 10월에 충청도 유생 최운익(崔雲翼)이 사계 김장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해야 함을 상소하자 임금이 윤허함을 시작으로 전개된다. 그리하여 11월에 안동의 사림들이 도내에 통고하고, 예천에 소청을 설치하고 안동에는 소회를 마련하게 된다. 1701년 1월 21일에 소두(疏頭)의 임무를 맡아 소장을 작성하여 2월 11일을 예천을 경유하여 충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충주에 도착하여 문묘배향의 부당함을 언급했지만 일이 잘못되어 조정에 보고되자 고삐를 늦출 수 없어서 미리 작성한 소장을 올렸으나 문묘에 동의하는 세력들에게 견제를 당하였으며, 또한 김장생의 손자 김만채(金萬埰)가 승지로 있었기 때문에 일은 실패로 끝나고 자신은 9월 22일 광양으로의 유배가 결정된다. 광양으로 가는 도중의 여러 가지 정황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다. 유배의 경로는 군위, 성주, 고령, 섬진강을 걸쳐 10월 5일 광양에 도착하게 된다. 광양에 도착하니 함께 소를 올렸던 안보천(安補天)이 먼저 광양으로 유배를 와있었으며, 도착하자 방문한 사람들을 기록한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김장생의 문묘배향문제는 남인 집권기에 한때 철회되었다가 다시 노론이 집권하자 1717년에 교지가 내려지게 된다. 당시 김장생의 문묘배향에 대한 전말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김간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이다. 아버지는 필신(弼臣)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로 통덕랑 천표(天標)의 딸이다.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이다.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01년 김장생을 문묘에 배향하는 데 반대하는 소를 올린 것으로 인하여 2년 동안 광양에 유배되었다. 1710년 58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권두경(權斗經)ㆍ이재(李載)ㆍ조덕린(趙德隣) 등과 교우를 맺었다. 1788년(정조 12) 이진동(李鎭東) 등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우고 포상 받지 못한 31인의 치적을 상소할 때에 제일 앞에 놓였다. 낙연서원(洛淵書院)에 봉향되었다.
  • 제목
    괴담입향시일기(槐潭立享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괴담입향시일기(槐潭立享時日記)』는 1852년(철종 3)에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 1759(영조 35)∼1789(정조 13)] 선생을 모실 사당을 짓고 입향시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본문은 사당을 짓자는 논의가 있은 지 24년 만에 녹동정사(鹿洞精舍)를 완성하고 위판을 봉안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상향축문은 유치명이 지었으며, 약조(約條), 별조(罰條), 봉안시집사(奉安時執事), 향시집사(享時執事), 증직분향당회시집사(贈職焚黃堂會時執事) 등이 부록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상열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군필(君弼), 호는 괴담이다. 경상북도 봉화 출생으로 집(緝)의 아들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처음에 특별한 스승의 교도(敎導)없이 독학으로 『주역(周易)』과 『율려신서(律呂新書)』 등을 공부하였다. 상수학(象數學)에 뛰어났고, 천문ㆍ지리ㆍ주수(籌數) 등에 정통하였으며, 일찍이 산천을 측량하고 일경대(日景臺)를 지어 천상(天象)을 관측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1780년 이후에는 이상정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뜻을 두고 경전 및 사서(四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중요한 저 서로는 『괴담유고』가 있으며, 그밖에 『성리찬요(性理纂要)』, 『사서찬요(四書纂要)』, 『계몽도해(啓蒙圖解)』 등이 있다.
  • 제목
    구갑자지갑술(九甲子之甲戌)
    발급년
    1749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갑자지갑술(九甲子之甲戌)』는 갑술년(1934년) 1월 1일부터 7월 12일까지의 일기이다. 3월 25일자 일기를 살펴보면 저자의 교육열에 관한 일면을 살펴볼 수가 있다. 거곡서당(居谷書堂)의 훈도인 남규찬(南珪燦)은 재능 있는 선비로 문필과 상식을 두루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동들을 위한 교육을 부탁하였으나 나오지 않자, 7언 절구 5수를 지어서 마을의 아동교육을 맡아 줄 것을 다시 부탁하고 있다. 1924년 1월 1일부터 1934년 7월 12일까지 10년 7개월간의 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작자가 죽기 전까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당시의 날씨, 역사적 상황, 친분관계, 풍속, 주변 상황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제목
    구갑자지계유(九甲子之癸酉)
    발급년
    1749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갑자지계유(九甲子之癸酉)』는 계유년(1933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일기이다. 책력의 형식을 취하여 두주에 24절기와 삼복과 일식을 표시하고 있다. 5월 21일자 일기를 살펴보면, 우박의 피해 실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박 때문에 보리가 남김없이 다 떨어져 농민들이 넋을 잃을 정도였고, 구미시 변두리에 새로 지은 작은 집이 우박 때문에 무너져서 주인이 깔려 죽었으니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해평은 빗겨갔다고 한다. 또 8월 16일의 일기를 보면, '체발례(剃髮禮)'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른바 머리를 깎으면 친구들에게 술을 한 턱 내는 것이다. 그 당시 풍속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제목
    구대야유기(龜臺夜遊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대야유기(龜臺夜遊記)」는 이광정(李光庭 ; 1674~1756)의 문집인 『눌은집(訥隱集)』 권 8에 실려져 있다. 임술년(1742년) 7월 16일 밤에 권일보(權一甫)와 함께 외가(外家)인 영천의 구대(龜臺)에서 노닐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임술년 7월 16일은 소동파가 적벽아래에 배를 타고 노닐었음을 연상하여 유람을 결정하였다. 구대는 적벽처럼 배를 타고 흥취를 맛볼 수 있는 물이 부족하지만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물과 늘어서 있는 괴암괴석의 절경은 적벽의 승경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느낀 흥취는 소동파의 운치와 부족할 바가 아님을 언급하고 있다. 이광정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이다. 택(澤)의 증손, 시암(時?)의 손자, 후룡(後龍)의 아들이다. 선룡(先龍)에게 출계하였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며, 1699년(숙종 2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50세 이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효행과 청렴함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ㆍ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ㆍ용양위부호군(龍?衛副護軍) 등에 제수되었다.
  • 제목
    구신록(求新錄)
    발급년
    191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신록(求新錄)』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의 신해년(1911년)의 일기이다. 서문에 『구신록』으로 명명한 이유를 밝혀 놓았으며, 신해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1년 동안의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본문은 날짜 아래 가로로 그 날의 일진, 간지를 기록한 다음 날씨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자신의 행적이나 견문을 기록하거나 친척이나 친구, 이웃들의 방문까지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간혹 자신이 지은 시를 본문보다 작은 세주형식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본문에 대하여 자세한 사항이나 24절기 등은 두주(頭註)형태로 적어 두었다. 특히 정월 초일일은 자신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뜻으로 경계잠을 지어 기록하였으며, 일년의 신수를 보는 시초점을 치기도 하였다. 선조가 남긴 글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교유하는 지우들이 선조의 문집을 발간했다는 소식도 기록하였다. 경전, 『주자서절요』, 『포은집』, 『가정집』, 『구사당집』, 『학봉집』, 『하당집(荷塘集)』, 선조의 『백졸암집』등등 읽은 책들은 모두 기록되어 있어 옛 선비들의 독서량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일기 끝에는 집안 할아버지가 『구신록』을 읽고 느낌을 발문으로 기록하였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다.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구심록(求心錄)
    발급년
    191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심록(求心錄)』5는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쓴 계축년(1913년)의 일기이다. 『구심록』5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영희의 일기 중 다섯 번째 책임을 알 수 있다. 한지에 해서로 쓴 필사본으로 표지포함 모두 52쪽의 제책본이다. 서문에 『구심록』 이라고 이름 한 이유를 밝혀 놓았으며, 계축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1년 동안의 일기를 기록하였다. 정월을 제외한 매월의 표시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드러나게 하였으며, 매월 1일을 제외한 날짜의 표시는 붓 대롱으로 동그라미를 친 뒤 날짜를 쓰는 식으로 표시하였다. 본문은 날짜 아래 가로로 그 날의 일진, 간지를 기록한 다음 날씨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자신의 행적이나 견문을 기록하였다. 친척이나 친구, 이웃들의 방문까지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간혹 자신이 지은 시를 기록하기도 하고 본문에 대하여 자세한 사항을 두주(頭註)형태로 적어 두었다. 선비들의 일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다.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구월산록(九月山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월산록(九月山錄)」은 이헌락(李憲洛 ; 1718∼1791)의 시문집인 『약남집(藥南集)』 권 4에 실려져 있다. 구월산 일대를 유람하고 기록한 유람기이다. 구월산은 일명 아사달산(阿斯達山)이나 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린다. 문화현(文化縣)에 있으며 월정사(月精寺)와 비로봉 등이 빼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월정사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패엽사(貝葉寺)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쓴 비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패엽사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삼성전(三聖殿)이 있는데 천왕상을 중심으로 동쪽 벽에는 환웅의 위패가, 서쪽 벽에는 단군왕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곳 문화현의 사람들은 구월산을 단군신화의 본거지로 여기고 있음이 입증된 셈이다. 이헌락의 자는 경순(景淳), 호는 약남(藥南),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신중(愼中)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로 덕기(德基)의 딸이며, 경주에서 태어났다. 권희(權僖)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4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강릉참봉이 되었고, 이어서 평양봉사를 거쳐 의금부도사와 사포서별제를 지냈다. 1766년 하양현감을 지내고, 1776년 익위사익위를 거쳐 상의원주부ㆍ함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 제목
    구위판매안시일기(舊位版埋安時日記)
    발급년
    20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위판매안시일기(舊位版埋安時日記)』는 1901년 도산서원에서 잃어버린 퇴계 이황의 위패를 하계에서 사는 이중벽(李中璧)이 이곡을 다녀오다 우연히 절벽아래 강가에 있는 것을 보고 후손들에게 알려 다시 찾아와서 매안(埋安)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1902년 2월 28일 이중벽이 우연히 발견하여 후손들에게 알려 유생들과 후손들이 강 속에 있는 것을 찾아오고 유림회의를 소집하여 전교당(典敎堂)에서 회의를 열어 암서헌(巖栖軒) 북벽에 매봉(埋奉) 할 것인가, 역락재(亦樂齋) 뒤편에 매봉 할 것인가를 논의하여 암서헌 북벽에 매봉할 것을 결정하고, 이강호(李康鎬)가 여헌집(旅軒集)중에서 자천서원 삼선생위판 개제문목(紫川書院三先生位版改題問目)과 구위판 매치문목(舊位版埋置問目)등을 등사해 와서 매봉고유문 작성에 참고하고, 밤나무 상자를 만들어 구위패(舊位牌)를 매봉하고 향사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 제목
    구전선생강원일록(苟全先生講院日錄)
    발급년
    17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구전선생강원일록(苟全先生講院日錄)』은 김중청(金中淸 ; 1567~1629)의 1615년(광해군 7) 3월 16일부터 1616년(광해군 8) 10월 15일까지의 일기이다. 당시에 정언 벼슬에 있으면서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체제 및 내용은 월일, 그날의 일진과 날씨를 간략하게 쓰고 그날에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기록하였다. 본인과 생각이 같지 않은 부분은 맨 끝에 가소(可笑)라고 기록하였고, 당시 정치 중심에 있었던 이이첨, 이원익, 정인홍 등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과거를 시행하고 창경궁을 수선하는 일등과 일식 월식과 유성이 나타나는 일까지 자세하게 해서로 기록하였다. 여행 중에도 찾아온 사람, 숙박한 곳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다. 이 일기는 광해조 7~8년의 중앙 정계의 기록으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김중청의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구전(苟全)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첨지중추부사 몽호(夢虎)의 아들이며, 월천 조목의 문인으로 161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전적, 예조정랑을 역임했으며,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5년 정언이 되어 이원익을 논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1621년 승지로서 선유사가 되어 호남을 순행했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면서 인조반정 후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 제목
    군문일기(軍門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군문일기(軍門日記)』는 류후조(柳厚祚 ; 1798~1875)가 1811년(고종 11) 동짓날에 쓴 무신창의에 대한 기록이다. 모두 5권 2책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건(乾)에 해당한다. 무신란은 1728년 3월 15일 청주에서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이 이인좌(李麟佐) 형제 등에 의하여 살해됨으로써 발발되었다. 이인좌 등은 당시 경종의 죽음을 독살사건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일으킨 반란이다. 한때 관군이 밀려 위기상황에 봉착하기도 하였지만 박문수 등이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결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에서 의병을 모아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참여한 지역은 안동(安東), 영천(榮川,지금의 영주), 상주(尙州), 순흥(順興), 예안(禮安), 풍기(豊基), 예천(醴泉)으로 의병한 좌목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좌목에는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인적사항, 궐기내용, 군령, 통문 등을 모두 기록해 놓고 있어 당시 의병에 참여한 제반 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류후조는 본관이 풍산(?山)이며 자는 재가(載可), 호는 낙파(洛坡)이며 류심춘(柳尋春)의 아들이다. 1858년 정시문과 급제, 부사ㆍ부호군을 역임하였으며 1864년 이조참판 역임하였고 1866년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 해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그곳 서양인들의 동정을 알렸다. 1867년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872년 판중추부사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 제목
    금강기행(金剛紀行)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강기행(金剛紀行)」은 이교문(李敎文 ; 1866~1940)의 시문집인 『지재유고(止齋遺稿)』 권 5에 실려져 있다. 그가 평소에 금강산 유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70살이 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기묘년(1939년) 4월 3일에 친구들과 유람을 하게 되어 여행 중에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12일에 금강산 여행은 끝났으며, 다른 친구들과 작별하고 대구를 거쳐 마산을 들러 21일 진주 고리(古里)에 도착한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이교문의 자는 명선(鳴璇),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희란(熙란)의 아들로 진주(晋州)에서 살았다. 삼형제 중에서 둘째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큰형을 도와 일체의 잡무를 도맡아 하여 아우가 안심하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뒷받침하였다. 이리하여 가계가 윤택해지고 아우의 학업이 성취되자 정사(精舍)를 세워 독서와 수양에 힘썼다. 향내의 사우들을 초청하여 학문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 제목
    금강유산록(金剛遊山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강유산록(金剛遊山錄)」은 김희주(金熙周 ; 1760~1830)의 문집인 『갈천집(葛川集)』 권 6에 잡저의 형식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다. 나이 12살 때 산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노승이 금강산을 유람하고서 산사에 들러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이야기에 줌에 압도되어 유람하기를 결심하고 형 희소와 동복들을 데리고 8월 15일에 떠났다. 8월 19일에서 8월 30일까지의 여정을 매일 매일 자세하고 곡진하게 피력하고 있다. 김희주는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공목(公穆)ㆍ성사(聖思), 호는 갈천(葛川)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95년(정조 19) 식년친시(式年親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병조ㆍ예조의 좌랑ㆍ정랑을 지냈다. 영해부사(寧海府使), 안주목사,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 한성부좌윤,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1800년에는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만년에 재산(才山 :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葛山里)에 갈천정(葛川亭)을 짓고, 또한 덕봉(德峰) 아래에 덕봉정사(德峰精舍)를 지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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