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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대중기일(臺中記日)
    발급년
    186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대중기일(臺中記日)」은 유지(柳? ; 1626~1701)의 문집인 『괴애선생문집(乖厓先生文集)』 권 3의 잡저 부분에 실려져 있다. 그가 1676년 8월 2일에 성균관 직강에 임명된 이후 9월 6일에 서울로 향하여 13일 도착해서 이듬해(1677년) 1월 30일 사직 상소를 올리고 돌아올 때까지의 행력을 기록한 것이다. 사직 상소는 전에 이미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윤허를 받지 못하자 9월 22일 또 올렸으며, 1677년 1월 10일에 요통(腰痛)이 심하여 사직소를 다시 올렸으나 역시 윤허를 받지 못했다. 1월 29일에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고 30일 날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윤허 받지 못하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서울에 머물면서 웃어른을 찾아뵙고 친구를 방문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사항만 기록했다. 유지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오(重梧), 호는 괴애(乖厓)이다. 아버지는 희잠(希潛)이며 어머니는 안동금씨 사인 원(元)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특출하여 종형인 백졸암(百拙庵) 유직(柳?)의 문하를 쫓아 배우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624년(인조24)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1624년(효종5)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郞)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ㆍ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강직(剛直)한 성품에다 공정지치(公正之治)를 행하여 세인들의 중망을 받았다.
  • 제목
    대흥일록 1(大興日錄 1)
    발급년
    195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대흥일록(大興日錄)」 일(一)은 조선 후기의 문신 최학승(崔鶴昇 ; 1817∼1878)의 『화강일고(華岡逸稿)』 권 1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대흥군수로 있을 때 지은 일기로 기사년(1869년) 1월 1일에서 3월 9일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8월 그믐날까지는 아역(衙役)때문에 골몰하느라 기록할 수 없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8월 이후의 기록과 경오년(1870년) 1월에서 9월 6일까지의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소실되었거나 편집과정에서 빠진 듯하다. 19세기말 봉건사회의 관료가 목민관으로서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려는 모습에서 당시 사회상의 여러 가지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해(公?)의 수리, 사창(社倉)의 관리 소홀과 폐단, 간교한 아전들의 범법행위, 지방토호들의 횡포, 세금부과의 과중함, 매혼(買婚)ㆍ산송(山訟)ㆍ문벌로 인한 송사, 지방유생들의 접대 등 생생하고 사실적인 기록은 당시 사회의 이면을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정치사의 이면에 가려진 19세기 사회상을 봄으로써 민중생활의 단면을 파악할 수도 있다. 최학승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언(聲彦), 호는 화강(華岡)이다. 성균진사 윤곤(潤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연노씨(長淵盧氏)로 주학(周學)의 딸이다. 185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52년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1860년 성균관 전적ㆍ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1876년 국가에 큰 가뭄이 들고 흉년이 되어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사재를 털어 빈민을 진휼하고 환곡을 대납해주었다.
  • 제목
    도산서원묘변시일기(陶山書院廟變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도산서원묘변시일기(陶山書院廟變時日記)』는 1901년 11월 1일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선생의 위패를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당직자가 급히 후손과 유림에 연락하고, 연일 유림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각문중과 향교와 서원 읍과 관청에 공문을 보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에 대처방법에 대하여 퇴계선생이 설월당에게 답한 내용을 『퇴계속집』에서 찾아 참고하고 의논하여 임시로 종이로 지패를 써 붙이고, 고유문을 지어 향사를 올리고 여러 서원과 향교 문중 등에서 찬조금 답지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고 당일 날 당직자의 벌칙을 의논하기도하며 [불신위호 난면삭벌(不愼衛護 難免削罰) 불심봉위 오득면벌(不審奉衛 烏得免罰)] , 위패를 새로 만들어 [위판의 치수: 고이척일촌팔분 광오촌 후이촌 액일촌위 원수좌판고 사촌팔분 장육촌팔분 방광삼촌육분 좌판혈심 이촌일분 (高二尺一寸八分 廣五寸 厚一寸 額一寸 爲圓首座 板高四寸八分 長八寸八分 方廣三寸六分 座板穴深 二寸一分)] 40여일 만에 다시 향사하고 봉향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 제목
    도산서원복주시일기(陶山書院復?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도산서원복주시일기(陶山書院復?時日記)』는 1901년 11월 1일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당시에 조정 관리로 있던 장화식(張華植 ; 1853-1938)이 기회를 보아 임금에게 은밀히 아뢰고, 장예원(掌禮院)에서 논의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아 밤나무 위패를 다시 하사하는 등의 내용들을 기록하였다. 순종(純宗) 때에는 봉강서원(鳳崗書院)에서 주자(朱子) 위판을 도난당하는 일이 있었으며, 영조(英祖) 때에 조중봉(趙重峯)과 김하서(金河西)의 위패를 분실한 일이 있었으나, 고종(高宗) 때에는 처음 발생한 사건이라 다시 위패를 내려주실지 걱정하는 내용들도 기록하였다. 『도산서원 복주시 장화식 재경일기(陶山書院復?時張華植在京日記)』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장화식의 측근에 있었던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장화식의 자는 병숙(丙淑), 호는 연파(連坡) 또는 학암(鶴岩), 본관은 인동, 영제(永濟)의 맏아들이다. 1877년(고종 14)에 진사가 되고, 음서로 금부도사(1887년)에 오른 후 외아문 주사, 봉화 현감(1892년), 영덕 현령(1893년)을 거쳐 군부 경리국(軍部經理局) 제2과장(1895년)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자, '역적을 치고 원수를 갚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나라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숨어살았다. 그러나 장화식을 각별히 아끼던 고종의 명령으로 다시 군부 경리국장(1897년)에 오르고, 1902년(광무 6) 9월 24일에 지금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정 2품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다시 육군 참장(參將, 1904년)을 거쳐 우리나라 통신 관청의 총책임인 통신원 총판(1905년)이 되었다. 1906년 4월에 통신원이 일본인에게 넘어갈 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관원들과 함께 총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며 고종이 퇴위(1907년)한 뒤 귀향(1908년)하여 일체 외부와 인연을 끊고, 학암정사(鶴岩精舍, 1915년)를 짓고 경전을 읽으며 자손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타계하였다
  • 제목
    도연유록(陶淵遊錄)
    발급년
    190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도연유록(陶淵遊錄)」은 정식(鄭? ; 1683∼1746)의 문집인『명암집(明庵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기미년(1739년) 가을에 도사(道事)때문에 호계서원에 모였다가 일을 마치고 청량산으로 가고자 했는데 소릉(少陵)이 도연을 구경하고자 하여 함께 유람하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도연주변의 사적 위치를 조명하고 경관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도연에는 높은 폭포와 떨어질 듯한 절벽에, 맑고 깊은 물이 있었으며 도연정과 그 남쪽에 표은초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식의 자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庵)이다. 동지중추부사 대형(大亨)의 손자이다. 일찍이 과거 보러 나가 병자호란 때 김지순(金之純)이 쓴 척화소(斥和疏)를 읽고 당세에 영리를 구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항상 패랭이를 쓰고 명산을 유람하였고, 만년에 두류산(頭流山) 속에 암자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 제목
    도연일기(陶淵日記)
    발급년
    18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도연일기(陶淵日記)』는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溫 ; 1598(선조 31)∼1669(현종 10)]의 위패를 모실 사당과 서원을 건립할 때의 과정을 기록한 문서이다, 서원을 건립할 계획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조정의 서원 남설(濫設)에 대한 저지로 좌절되었다가 1786년 태백오현(太白五賢)의 한사람인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증직과 제례문제가 거론되면서 다시 서원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여러 서원에 통문을 보내고 안동의 유림과 후손들이 사당을 건립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문서의 첫머리에 「계미건원시일기(癸未建院時日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 서원의 공사를 담당한 여러 공사원(公事員)의 이름과 일을 분담한 직책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서원이름을 도연이라고 정한 연유도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청송부사가 쓴 「유허비시서(遺墟碑詩序)」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다음으로 유허비를 세울 때의 일의 진행 과정을 기록한 「정유입석시일기(丁酉立石時日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 돌을 운반하여 비를 세우는 과정과, 오시복(吳始復)이 해남에서 영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어 오시복에게 제액의 글씨를 부탁하고 '숭정처사유허(崇禎處士遺墟)라고 할 것인가? 숭정처사김공유허(崇禎處士金公遺墟)라고 할 것인가?' 등등의 의견 조정 내용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김시온은 조선 효종ㆍ현종 때의 유학자로 호는 도연(陶淵)ㆍ표은(瓢隱)이다. 그는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崇禎處士)의 전형(典型)이었다. 1734년(영조 10) 증손 성탁(聖鐸)이 경연에 입시되면서, 절의가 알려져 3품직을 증직 받았다. 문집으로 『표은집』이 전한다.
  • 제목
    도연추향시전말기(陶淵追享時顚末記)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도연추향시전말기(陶淵追享時顚末記)』는 도연서원의 경절사(景節祠)에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 ; 1628~1673)를 배향할 때의 일을 날짜 별로 기록한 것이다. 김학배를 배향하자는 의견은 김시온을 향사할 때부터 이미 거론되었으나, 그동안 시행되지 않다가 을미년(1835년) 기양서원(岐陽書院)에서 유림들이 도연서당에 통문을 발송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삼계서원(三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등 여러 서원에서 통문을 보내고 향회를 열어 공사원(公事員)을 정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힘을 합하여 김학배를 경절사에 배향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김학배의 본관은 의성,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이며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송준길(宋浚吉)에게서 예학을 배웠으며, 성균관 안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의 교정관이 되어 경서를 간행하였다. 문집에 《금옹집》이 있다.
  • 제목
    도해일기(蹈海日記)
    발급년
    196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도해일기(蹈海日記)」는 김도현(金道鉉 ; 1852~1914) 의 문집인『벽산문집(碧山文集)』권 2에 수록되어 있다. 갑인년(1914년) 11월 2일 김도현은 나라 잃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이에 집안사람들과 아들인 여래(礪來)가 만류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도현은 자살을 하기 위해 관어대로 향하게 된다. 아들 여래는 관어대로 가는 도중에 겪은 일과 남긴 시와 유언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도현의 유언에서 수신제가의 도를 잃지 말고, 여자가 혼자 있을 때는 지친이라도 그 방에 들어가서는 안되며, 부녀자는 밤에 다녀서는 안됨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재물이 재앙의 근원됨을 역설하면서 자식들에게 검소하게 살 것을 유언하고 결국 그는 자식들과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관어대 밑 바다 속으로 자살을 하게 된다. 이런 전말을 아들 여래가 울분과 슬픔을 안고 기록한 것이다. 김도현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이며 별명은 도현(燾鉉)이다. 성하(性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이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혈족에게까지 단발의 위협이 닥치자, 곧 안동창의진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에게 대표로 파견되어 의진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07년 정미 의병 당시에는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 제목
    독대일기 2(獨對日記 2)
    발급년
    192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독대일기(獨對日記)」 이(二)는 곽종석(郭鍾錫 ; 1846∼1919)의 문집인『면우선생문집(?宇先生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곽종석의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宇), 본관은 현풍(玄風), 경상도 단성(丹城) 출신으로 원조(源兆)의 둘째 아들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니 그는 통곡하면서 문을 닫고 외인과 만나지 아니하며, 오직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 전국의 유림(儒林)을 망라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로 보냈다. 이것이 일제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출감하였으나 1919년 8월 24일 74세의 일생을 마치었다.
  • 제목
    동경유록(東京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경유록(東京遊錄)」은 이덕홍(李德弘 ; 1541~1596)의 문집인 『간재선생문집(艮齋先生文集)』 권 7의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를 유람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경은 경주의 옛 명칭이고, 서경은 평양이라 일컫고 있다. 동래에 임무를 부여받고 한번 가려고 하였으나 8개월 동안 가지 못해서 청화절(淸和節) 재생백(哉生魄)후 1일에 선사(仙?) 장운거(將雲擧)와 하남(河南) 정중립(鄭中立)과 유람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장운거는 병 때문에 사양하여 정중립과 떠나기로 하였다. 이덕홍은 본관이 영천(永川)이고, 자는 굉중(宏仲)이다. 충량(忠樑)의 넷째 아들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30세에 오계정사(?溪精舍)를 짓고 위기지학에 힘썼다. 이황의 명으로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하였으며 스승 임종시 명으로 서적을 관리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집경전 참봉과 종묘직장을 역임하였다. 종묘방화사건으로 평은역에 유배되었다가 임진년 사옹서직장으로 복직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익위사부솔로 임명되어 피난 중, 노모가 걱정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서행길에 나서 용강과 의주 행재소에서 세자와 선조에게 왜적방어책을 상소하였다. 영춘현감을 역임할 때 많은 백성을 기근에서 구출하기도 하였다. 모친상에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졸하였다.
  • 제목
    동계잡록(東溪雜錄)
    발급년
    1988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계잡록(東溪雜錄)』은 우복룡(禹伏龍 ; 1547~1613)이 지은 것으로 명종 을축년(1565년)에서 선조 계묘년(1603년)까지 39년간 당시 정치의 득실과 사론(士論)의 추이, 임진왜란 때의 민생의 질고를 목격하고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이이의 붕당론과 동서분당의 척결을 주장하는 소(疏)와 이이(李珥)ㆍ정철(鄭澈)ㆍ성혼(成渾)ㆍ권덕린(權德麟)ㆍ이발(李潑) 등이 주고받은 편지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끝머리에 이정귀(李廷龜)와 김장생(金長生)이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율곡비문(栗谷碑文)」에 관해서 논한 글을 기록하고 있다. 우복룡의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현길(見吉), 호는 구암(懼庵)ㆍ동계(東溪)며, 민순(閔純)에게서 수업하였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성균관 예식에 참석하는 3공(公)과 육조 당상관에게 유생들이 정배(庭拜)하는 관례를 시정하여, 읍례(揖禮)를 하도록 건의함으로써 사림(士林)의 권위를 높였다. 1577년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소문전참봉(昭文殿參奉)이 되고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ㆍ김포현령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용궁을 끝까지 방어, 그 공으로 안동부사에 올랐다. 그 뒤 나주ㆍ충주의 목사(牧使)를 거쳐, 1612년 성천부사에 이르렀다.
  • 제목
    동송연재유람일록(同宋淵齋遊覽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송연재유람일록(同宋淵齋遊覽日錄)」은 우성규(禹成圭 ;1830~1905)의 문집인 『경재집(景齋集)』 권 7에 수록되어 있다. 계묘년(1903년) 3월 18일에 연재 송병선(宋秉璿 ; 1836~1905)이 묘동(妙洞)의 유호재(酉湖齋)에서 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가 함께 각 지역을 다니면서 강회에 참석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강회의 내용은 주로 『대학』의 3강령 8조목에 관한 것으로 8조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의(誠意)임을 언급하였고, 격물(格物)의 격(格)자는 도(到)의 의미가 있고, 물격(物格)의 격(格)은 진(盡)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말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호락논쟁의 인물성동이론에 대해 묻자, 송연재는 같은 것 속에 다른 것이 있고, 다른 것 속에도 같은 것이 있어 자신의 마음으로 묵묵히 깨달으면 그만이지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성규는 송연재와의 유람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음을 자인하고 있다. 우성규의 자는 성석(聖錫), 호는 경재(景齋)이다. 달성(達成)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 올라가 명유(名流)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성리학의 기본문제들을 탐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후학들의 학문방법에 대하여서도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 제목
    동유록(東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록(東遊錄)」은 남주(南洲) 조승기(趙承基 ; 1836~1913)의 문집인 『남주선생문집(南洲先生文集)』 권 7에 등재되어 있다. 동지들과 함께 1899년 4월부터 6월까지 영남지방의 명승지를 구경하고 느낀 감회를 일기체로 서술한 것인데, 경북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하여 경주의 옥산서원과 고적을 두루 보고 돌아온 것을 기록하고 있다. 조승기의 자는 국현(國賢),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아버지는 태용(泰容)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로 휘명(彙明)의 딸이다. 유주목(柳疇睦)의 문인으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1895(고종 32)년 을미사변(乙未事變) 후 향병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나라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해산시켰다.
  • 제목
    동유록(東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록(東遊錄)」은 조술도(趙述道 ; 1729∼1803)의 시문집인 『만곡선생문집(晩谷先生文集)』권 9에 수록되어 있다. 조술도는 어릴 때부터 점필재 김종직의 「관동행록(關東行錄)」을 보고 산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직접 유람을 해본적은 없었다. 중형의 권유로 무자년(1768년) 9월 12일 함께 여행을 떠나서 관동팔경을 유람하게 되어, 이때 보고 듣고 느낀 점과 도중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조술도의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아버지는 희당(喜堂)이며,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종만(鐘萬)의 딸이다. 조부 덕린(德?)이 당쟁에 희생되자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의 문인으로 어려서 자질이 영민하여 경전(經傳),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관통하였다. 1762년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창건하여 형제와 함께 강학하다가 그 뒤에 만곡정사(晩谷精舍)를 지어 채제공(蔡濟恭)의 친필로 당호(堂號)를 달았다. 만년에 도산서원장(陶山書院長)을 역임하고 호문(湖門) 6군자로 칭송되었다.
  • 제목
    동유록(東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록(東遊錄)」은 허훈(許薰 ; 1836~1907)의 문집인 『방산선생문집(舫山先生文集)』 권 14의 잡저에 기록되어 있으며 금강산을 유람하고 느낀 점을 기술한 것이다. 무술년(1898년) 봄에 여행을 결심하여 4월 14일 여행을 떠나 7월 1일에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매일매일 일기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경험한 사실과 주요 여정지의 특기사항들을 함께 기록하고 있어 당시 금강산 여행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허훈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순가(舜歌)이다. 자질(資質)이 뛰어나고 총명이 남달랐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사사하여 천덕(天德)과 인도(人道)의 요지를 듣고 심의제도(深衣制度)하여 사칠설(四七說)을 강질(講質)하였고 또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에게 예설(禮說)을 질의하였다. 개령(開寧)의 방암(舫巖) 아래에 집을 짓고 방산(舫山)이라 호(號)하였으며 『서경』, 『예기』, 『논어』를 반복해서 공부하고 제자백가를 두루 연구하였다.
  • 제목
    동유록(東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록(東遊錄)」은 채헌식(蔡憲植 ; 1855∼1933)의 문집인『후담집(後潭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병인년(1926년) 2월 4일 달성에서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 28일 돌아올 때까지 600여리를 이동하며 25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유람기이다. 주요 경로는 반야월, 경산, 하양, 경주 가암동, 울산 구량동, 동래 온정, 청도이다. 특이한 사항은 경주 가암동(佳巖洞)은 경주최씨의 세거지이며, 임란 때 창의하고 병란 때 순절한 최진립(崔震立)의 비문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온정(溫井)의 온천이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채헌식의 자는 정여(定汝), 호는 후담(後潭), 본관은 인천(仁川), 아버지는 농(瀧)이며, 달성(達城)에 거주했다. 1881년에 증광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해에 회시(會試) 및 정시(廷試)에 參傍(참방)하는 등 남달리 재주가 비상하여 經史(경사)를 강론하더니, 樂育齋(낙육재)에 선발되어 6년 동안 학업을 닦았다. 東學黨(동학당)이 일어나 전국을 진동케 할 때 촌민을 동원하여 창과 칼로 무장시켜 감히 침경치 못하게 하였다. 달성에 문우관(文友觀)을 창설하여 여러 학생들을 훈도하며 봄, 가을에 강회(講會)를 열어 사문(斯文)의 계승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 제목
    동유일록(東遊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일록(東遊日錄)』은 저자가 병술년 2월 8일 서울을 출발한 이후로 4월 9일까지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한 유람기이다.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포천(抱川), 영평(永平),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동해 일출, 삼일포, 사자암 등으로 유람하며 그곳의 경치를 보고 느낀 소감이나 옛 선현들이 지어서 걸어둔 시판(詩板)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처음 본 느낌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기도 하였다. 「해금강가(海金剛歌)」를 짓고 금강산에 제사를 올리며 「제금강산문(祭金剛山文)」을 지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2개월 가량을 금강산에 머물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도 빠짐없이 돌아보았으며, 사선정(四仙亭), 옥류동(玉流洞), 구룡폭(九龍瀑), 만폭동(萬瀑洞) 등지를 유람하며 선인들의 시판을 소개하고 그 운에 따라 지은 자작시도 기록하였으며, 특히 형제암(兄弟巖)에서는 선조의 시판을 보게 되어 감격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화운시(和韻詩)를 지었으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의 작자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선인들이 금강산에서 지은 시들과 저자가 화운한 시가 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 제목
    동유일록(東遊日錄)
    발급년
    184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일록(東遊日錄)」은 서사원(徐思遠 ; 1550∼1615)의 시문집인 『낙재문집(樂齋文集)』 권 7에 수록되어 있다. 계묘년(1603년, 만력 31)에 우연히 동쪽으로 유람을 하고 싶어 길을 떠나게 된다. 11일 영천, 13일 자인, 15일에 드디어 목적지인 입암(立巖)에 도착한다. 입암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빼어난 누대와 연못들의 경치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고 곡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집에 돌아온 날은 28일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유람한 후의 느낌은 바로 '흥진비래(興盡悲來)'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서사원의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 또는 낙재(樂齋),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전교 흡(洽)의 아들이며 백부 형(?)에게 입양되었다. 이천(伊川)출신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짓고 『심경』, 『근사록』 등을 연구하면서 장현광(張顯光)과 서로 강론하였다. 17년 동안 여러 관직의 제수가 있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많은 저서와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강서원(伊江書院) 및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하였다.
  • 제목
    동유잡기(東遊雜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유잡기(東遊雜記)』는 작자의 계부가 연기(燕岐)에서 고성(高城)으로 이배 된지 4년 만에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 집에 다녀갔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못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계부를 배종하며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겪은 경로와 좋은 경관들을 기록한 것이다. 4월 28일 하회(河回)에서 출발하여 9월 11일 집에 도착했으니 약 5개월간의 오랜 여정이었다. 금강산에 가서 느낀 것뿐만 아니라, 가고 오는 도중에 흥이 발하면 곧바로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작자의 풍류적 기상과 문학적 감수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뒷부분에 벌통의 모습을 보고 자세히 묘사한 '봉통설(蜂?說)'은 작자의 문학적 특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 제목
    동정록(東征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정록(東征錄)」은 김기찬(金驥燦 ; 1748∼1812)이 임인년(1782년) 7월 26일에 쓴 것으로 『동곽유고(東郭遺稿)』 권 2에 실려 있다. 당시 김기찬은 장릉별검(莊陵別檢)으로 월주(?州 ; 영월)에 있을 때에 장릉(단종)의 유사(遺事)를 읽고 슬프고 통곡스런 마음이 생겨 안동의 여러 부로(父老)들과 재물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려고 하였다. 이때 김종발(金宗發)이 본소의 별검으로 있어서 한 본을 베껴 '장릉청부소(莊陵請復疏)'라고 이름을 붙였다. 뒷날 중간 할 때 편집을 바란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김기찬은 의성(義城)인으로 자는 덕여(德汝), 호는 동곽(東郭), 김성일의 18세손이며 주훈(柱勳)의 아들이다. 정조 정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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