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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동해유관록(東海遊觀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해유관록(東海遊觀錄)」은 김노선(金魯善 ; 1811∼1886)의 문집인『기계문집(奇溪文集)』 권 7에 수록되어 있다. 임자년(1852년) 4월 5일에 동해바다로 구경 갈 것을 약속한 후 10일쯤에 강운보(姜芸父)가 찾아와서 함께 가게 되었다. 천전, 백운정, 표곡, 수곡을 지나 관어대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바다를 보는 순간 마음속의 묵은 찌꺼기들이 다 씻어지는 듯한 상쾌함을 맛보게 된다. 맹자가 공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제자들의 문하에서 노닐 수 있음을 바다를 보는 것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바다를 볼 수 있음은 성인을 만난 것과 같다고, 여행의 의미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김노선의 자는 자유(子唯), 호는 기계(奇溪), 본관은 안동이다. 의성출생이며, 생부는 진사 양식(養植), 어머니는 의성김씨로 곤수(坤壽)의 딸이다. 백부 양정(養禎)에게 입양 되었다. 1865년(고종 2) 예조에서 시행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73년 향교의 교장이 되어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과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절충하여 시행에 힘썼다.
  • 제목
    동행록(東行錄)
    발급년
    185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행록(東行錄)」은 이헌락(李憲洛 ; 1718∼1791)의 문집인 『약남선생문집(藥南先生文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병신년(1776년) 8월 9일에 서울의 혜화문을 출발하여 포천에서 만원루(晩院樓)를 돌아보고 영평(永平)과 김화를 거쳐 금강산에 들어가 사천왕석문ㆍ삼불암(三佛巖)ㆍ일출봉ㆍ망고대(望高臺)ㆍ반야대(般若臺)ㆍ금강대ㆍ칠보암(七寶巖)ㆍ만경대(萬景臺) 등의 명승지와 유적을 두루 돌아보면서, 금수강산에 태어나 승경을 구경하게 되는 고마움과 때를 잘 만나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감사함을 기록하고 있다. 17일 스님이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하는 단발령을 넘어 복귀하는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이헌락의 자는 경순(景淳), 호는 약남(藥南),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766년 하양현감을 지내고, 1776년 익위사익위를 거쳐 상의원주부ㆍ함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 제목
    동화사완유기(桐華寺玩遊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동화사완유기(桐華寺玩遊記)」는 이광덕(李匡德 ; 1762~1824)이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인 『농산문집』 권 3에 실려져 있다.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桐華寺)를 유람하고 적은 것이다. 임인년(1782년) 가을에 낙재(樂齋)에 있었는데 동화사와의 거리가 불과 30 리 정도밖에 안되어서 유람하기로 결심하였다. 여행 도중에 들어오는 바위, 돌 등 자연경광들을 매우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의 모습을 '霜葉紅於二月花(서리 맞은 단풍잎은 2월에 피는 매화보다 붉다)'라는 시 구절을 인용해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광덕의 초명은 경원(慶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연(季淵), 호는 농산(農山)이며, 규복(奎福)의 아들이다. 정종로(鄭宗魯)와 신체인(申體仁)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류심춘(柳尋春)ㆍ류이좌(柳台佐)ㆍ홍우정(洪宇正)ㆍ신정주(申鼎周)과 교유하였다.
  • 제목
    두릉일기(杜陵日記)
    발급년
    189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두릉일기(杜陵日記)」은 유휘문(柳徽文 ; 1773~1832)의 문집인 『호고와선생문집(好古窩先生文集)』 권 12에 등재되어 있다. 일기는 무진년(1807년) 9월에 두릉(杜陵)에 있는 선생(류정원)을 배알할 것을 계획하고 9월 12일 떠나 17일 당도했다. 남자호와 더불어 복상문제ㆍ주서ㆍ음양오행ㆍ『근사록』ㆍ『중용』ㆍ『주례』ㆍ『소학』 등에 관한 내용을 질의하고 응답한 것을 기록했다. 10월 12일 두릉을 출발하여 17일 집에 돌아온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유휘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이며, 만휴(萬休)의 아들이다. 유장원ㆍ남한조ㆍ정종로의 문인이다. 1821년에 유장원이 지은 『예서통고』와 고조부 유정원의 『역해참고』를 교정하였다. 1830년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2년 뒤에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저서로 본집 이외에 『주역경전통편(周易經典通編)』?『율려신서(律呂新書)』?『창랑문답(愴浪問答)』 등이 있다.
  • 제목
    득신록(得新錄)
    발급년
    20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득신록(得新錄)』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쓴 12번째 일기책으로, 경신년(1920년)에 쓴 일기와 그 다음 해 신유년(1921년)의 일기인 『자신록(自新錄)』 13과 임술년(1922년)의 일기인 『항신록(恒新錄)』 14를 함께 묶어 놓은 책이다. 매 연도의 첫머리에는 서문으로 『득신록』과 『자신록』, 『항신록』 등으로 이름 한 이유를 밝혀 놓았으며, 월일의 간지를 쓰고 날씨를 간략히 기록한 다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중간 중간에 자신이 지은 시도 기록하였으며, 특히 정초와 세말에 꼭 시를 지은 것을 보면 한해를 맞이하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과 마을 촌장들이 다녀간 일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선비들의 일상을 살필 수 있는 일기이다. 마지막에 「서계이선생가장결론(西溪李先生家藏訣論)」이 필사되어 있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며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모계선생일기(茅谿先生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모계선생일기(茅谿先生日記)』는 모계(茅谿) 문위(文緯 ; 1554~1631)의 일기로, 기축년(1589년)부터 계사년(1593년) 4월 12일까지 4년 4개월간의 일기를 기록하고 있다. 두주(頭註)에 한강 정구(鄭逑 ; 1543~1620)의 연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필사하는 과정에서 모계의 일기를 수정하거나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원천(原泉) 전팔고(全八顧 ; 1540~1612)와 원계(原溪) 전팔급(全八及 ; 1542~1613)과 이웃에 살면서 경사(經史)에 대해서 토론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만난 사람들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어 인맥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문위의 자는 순보(順甫), 호는 모계(茅谿),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아버지는 산두(山斗)며, 어머니는 함양오씨이다. 거창에서 태어났으며, 덕계 오건과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金沔)과 함께 고령에서 왜적과 싸웠다. 김면이 싸움 중에 병으로 죽자, 뒷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고향에 내려가 10여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부제학(副提學) 김우옹(金宇?) 등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고령현감(高靈縣監)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신병으로 사임했다. 거창 용원서원(龍源書院)에 제향되었다.
  • 제목
    모년기사(某年紀事)
    발급년
    18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모년기사(某年紀事)』는 박하원(朴夏源 ; 1739-1806년)이 쓴 임오년(1762년)부터 병신년(1776년) 3월까지의 일기이다. 주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들만 기록하였다. 효장세자(孝章世子)가 9세에 사망한 뒤 장헌세자(莊獻世子 ; 1735~1762)가 세자가 되고 대리청정을 하는 과정과, 영조의 노여움으로 많은 대신들이 파직 및 귀양을 가게 되고 궁인들이 참수를 당하는 등, 당시의 정치 요직에 있었던 많은 관료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며, 결국 장헌세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고 영조가 제문을 짓고 사도세자로 시호를 내리는 과정과 영조가 지은 제문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임오년의 충신과 역적의 이름이 관직과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파 싸움의 폐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부록으로 중국 송나라 문천상의 글과 소동파가 신종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이 실려 있다. 박하원의 자는 대숙(大叔), 호는 도객(島客), 1792년(정조 16) 홍국영(洪國榮) 등의 세력가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 화를 당했으나, 그 후 이조참의(吏曹參議)ㆍ내무협판(內務協辦)에 추증되었다.
  • 제목
    모당일기(慕堂日記)
    발급년
    17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모당일기(慕堂日記)』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 1553~1634)이 쓴 것으로 상(上)ㆍ하(下)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의 내용은 경자년(1600년)부터 계축년(1613년) 11월 19일까지의 생활일기이며 날짜와 날씨를 간략히 쓰고 하루의 일과를 기록하였다. 매일 아침 항상 선조의 사당을 먼저 배알한 후에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으며, 친척이나 지우들이 찾아와 환담을 나누고 편지를 보내고 선생을 모시고 주위의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고 뱃놀이를 한 일도 모두 기록하였으며, 감흥이 일어나면 시를 짓기도 하였다. 『주자서』, 『주역』, 『근사록』, 『소학』, 『심경』, 『연원록』 등등 평소에 읽은 책들도 빠짐없이 기록하였고,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친 일이나 감기에 걸린 것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특히 정인홍이 「남명선생집후발」에 퇴계선생을 비난한 일 등을 통문을 통하여 알게 된 것도 기록하였으며, 붕당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서인과 북인의 인명도 거론하였고 한강(寒岡)선생이 지은 「동강선생만시」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하권은 갑인년(1614년)부터 기사년(1629년)까지를 기록하였다. 집안의 제사나 목화를 심고, 지우들 간에 편지를 주고받은 일, 가례의절(家禮儀節)을 교정한 일이나 그날의 읽은 책 등을 기록하였다. 영창군(永昌君)이 강화도에 안치되어 정항(鄭沆)에 의해 사망한 뒤에 정온(鄭?)이 올린 상소문의 글의 내용이 너무 심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노여움을 받아 유배를 당한 사실이나, 조호익에게 책을 빌리려 하였으나 한강(寒岡)선생이 예전에 10여권을 빌려가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기 때문에 빌리지 못한 일이나, 학봉(鶴峯)과 백담(栢潭)은 사이가 좋았으나 노년에 반목이 있어 백담의 초상에 가서 조문하며 곡은 하지 않았다는 등등 정치적 사건이나 성주(城主)나 지우들과 유람하며 나눈 대화내용도 기록하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선비들의 미묘한 입장 차이나 갈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손처눌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6대손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50여 년 간 적통(嫡統)으로 이학(理學)을 모두 전수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 및 문집 3권이 있다. 서산서원(西山書院)과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에서 받들어 오다가 1970년에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복원하였다
  • 제목
    묘변후의절(廟變後儀節)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묘변후의절(廟變後儀節)』은 1901년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잃어버리고, 지패(紙牌)를 만들어 봉안할 때의 고유문과 위패척도의 기준을 정한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지패를 임시로 분향할 때의 분향고유문(焚香告由文)의 원문과, 지패를 임시로 봉안할 수밖에 없는 사유와, 사용 근거를 『퇴계속집』의 현풍향교에서 선성(先聖)들의 위판을 봉안할 때에 설월당 김공(雪月堂 金公)에게 선생이 답한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고 하였다. 퇴계선생의 위패를 잃어버릴 때에 종위패(從位牌)도 움직였다. 원위(元位)를 봉안할 때에 종위패(從位牌)도 같이 개제(改題)하여 봉안하겠다는 내용과 위판(位版)의 척도는 한강(寒江) 선생이 성묘십철위판척식(聖廟十哲位版尺式)을 논하여 정한 내용과 갈암(葛庵)선생이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변고가 있은 뒤에 사림(士林)들이 물음에 답한 내용을 참고로 정했다는 내용들을 기록하였다.
  • 제목
    무경일록(戊庚日錄)
    발급년
    18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무경일록(戊庚日錄)』은 무오년(1798년) 1월분과 경신년(1800년) 1월부터 4월까지의 일기, 그리고 「소청일기(疏廳日記)」가 뒤에 수록되어 있다. 본 일록(日錄)은 안동향교 일지(日誌)인 듯하며, 매일 매일 기록한 것은 아니고 행사나 사건이 있을 때만 기록하였고 날짜 밑에 날씨의 기록이나 일갑자(日甲子) 같은 것 없이 단순히 내용만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본 일록의 내용은 결본이 되어 사건의 발단과 결말이 없어 무슨 내용인지 확실치 않으나 당시 남인과 서인간의 갈등을 기록한 내용이 대단히 많다. 무오년 정월의 일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十一日姜?姜遂煥安寬金益淳等率其黨及新通李時白輩突入校中爲先推覓乙卯年太學通文通文則京儒金直行抵太學文也又推尋前額案又詰問校僕曰江亭通文來乎校僕曰不來彼輩愕然相顧俄而一漢來投李泰?登通文蓋泰?輩?誣稷山李公某年頒赦官事也.......'(십일일 강력, 강수환, 안관, 김익순 등이 그들의 무리와 신통, 이시백의 무리를 이끌고 교내로 쳐들어 온 것은 먼저 을묘년의 통문을 찾고, 통문은 서울 선비 김직행이 태학에 항거한 文이다. 또 지난번 案을 찾기 위해서였다. 교복에게 따져 묻기를 강정(江亭)의 통문은 왔더냐 하니 교복이 오지 않았다고 하여 저들이 의아하게 서로 쳐다보았고, 조금 후에 한 사나이가 이태협에게 통문을 던졌다. 태협의 무리들이 직산 이공을 某年에 속여서 반사관 일에 끌어넣었었다........) .
  • 제목
    무신근왕시일록(戊申勤王時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무신근왕시일록(戊申勤王時日錄)」은 이시항(李時沆 ; 1690~1749)의 문집인 『팔회당유고(八懷堂遺稿)』 권 2의 잡저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무신란이 발발하자 왕에게 보고한 내용을 일기의 형식을 빌려 1728년 3월 15일부터 11월 20일까지의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다. 매일매일 적은 것은 아니고 중요한 사실만을 기록하였다. 무신란은 1728년 3월 15일 청주에서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이 이인좌(李麟佐) 형제 등에 의하여 살해됨으로써 발발되었다. 안동의거는 3월 그믐날에 거행되었으며 당시 참여한 인원은 의병대장 류승현(柳升鉉), 부장(副將)은 권만(權萬), 좌방장(左方將) 이장(李?), 우방장(右方將) 김경심(金景沈) 등 모두 135명이였다.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영남지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음을 매우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추로지향(鄒魯之鄕)'의 땅에서 이런 일을 보고 묵과할 수 없음을 당시 70여 주(州) 사림들에게 알려 의병을 모으고 필요한 군량미와 무기 등을 모으도록 하였다. 또한 12가지 절목까지 만들어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의병을 통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시항의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태초(太初)이며, 적(適)의 현손이며 후식(後植)의 아들이다. 1721년(경종 원년) 문과 급제하였고, 마전(麻田) 군수를 역임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창의하여 원종공훈(原從功勳) 1등에 선록되었다. 1730년(영조 6)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 제목
    무신소청일록(戊申疏廳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무신소청일록(戊申疏廳日錄)』은 『재무신소청일록(再戊申疎廳日錄)』을 필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재무신소청일록』과 똑같고 해서로 썼으며 뒤편에 부록으로 장령(掌令), 대사헌(大司憲), 좌의정(左議政) 등이 올린 상소문과 여러 장계(狀啓) 등이 부록되어 있다. 부록은 행서로 썼다.
  • 제목
    무신일기(戊申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무신일기」는 조한유(曺漢儒 ; 1696~1752)가 무신란을 겪으면서 적은 일기로, 그의 문집인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상(上)에 실려져 있다. 일기는 2월 초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온 마을이 천연두에 걸려 천연두를 피해 성주 사월(沙月)로 피신을 한다. 그러다가 영해가 천연두를 피할 수 있는 깨끗한 곳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머물게 된다. 그러던 중 3월 26일에 괴한들이 고향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족들은 남겨두고 혼자 가서 아버지로부터 괴한들이 말과 먹을 것을 포략해 간다는 말을 듣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슬기롭게 괴한들을 물리친 뒤 부친과 친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 시킨다. 이렇게 괴한들의 난을 피해 겪게 되는 정황과 괴한들의 난폭한 행동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인 무신일기는 난이 발생한 경위와 조정에서의 대응책만 언급되었지만, 이 무신일기는 무신란이 일반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민간적인 차원의 피해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무신일기의 새로운 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조한유의 자는 미보(美甫), 본관은 창산(昌山)이다. 아버지는 호(灝)이고 어머니는 월성최씨 鎭南의 딸이며, 생부는 심(?)이고 생모는 양주조씨 성석(聖錫)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에 걸리면 똥을 맛보아 그 차도를 살필 정도였다.
  • 제목
    무신일기(戊申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무신일록(戊申日錄)」은 황익재(黃翼再 ; 1682∼1747)의 시문집인 『화재선생문집(華齋先生文集)』 권 5의 「소환록(素患錄)」에 수록되어 있다. 정미년(1727년) 늦겨울에 딸이 기이한 병에 걸려 이듬해 무신년(1728년) 봄까지 이어져 매우 위급한 지경이었다. 날짜만 보내던 차에 2월 25일 종성(鐘城)부사에 임명되어 명을 받들기 위해 문경을 지나 충주를 거쳐 3월 17일 청주에 도착했을 때 3월 15일 새벽에 이인좌 난이 발생했음을 접하게 되어, 난리 속을 피해 원주까지 가서 안무사 박태(朴台)를 만나게 된다. 박태가 장계를 올려 황익재를 경상우도 소모사(召募使)로 삼아 난을 평정하는데 일조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안동에 본부를 설치하고 토벌할 계획과 의병을 모집하여 결국 이인좌 난리의 주동자를 제압하고 10월 9일 귀가하게 된다. 황익재의 자는 재수(再?),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7년간 유배되었다. 1736년 복직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 제목
    문견록(聞見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문견록(聞見錄)』은 「일기」와 「임천서원청액소(臨川書院請額疏)」, 「지평시응지진언소(持平時應旨進言疏)」, 「사직소(辭職疏)」, 「사직잉진면군덕소(辭職仍勉君德疏)」 등의 5개 문건이 수록되어있는 도서이다. 「일기」는 1863년 계해년(癸亥年) 12월 8일 철종(哲宗)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철종 재임 시에 과거를 하여 직접 벼슬을 제수 받아 관직생활을 한 일을 회상하며 서울로 조문가는 과정을 기록하였으며, 「임천서원청액소(臨川書院請額疏)」는 임천서원에 사액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의 초고로서 사림을 대신하여 쓴다는 기록으로 보아 부탁을 밭아 쓴 것으로 보이고 뒷부분이 탈락되어 있으며, 「지평시응지진언소(持平時應旨進言疏)」는 관직생활을 할 때에 올린 글로써 다음과 같은 9개의 조목을 잘 이행하면 성군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며, 「사직소(辭職疏)」는 사직을 청하는 글이며, 「사직잉진면군덕소(辭職仍勉君德疏)」는 사직하면서 올린 글로써 본인은 사직을 하지만 나라를 근심걱정하며 성군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문장으로 경전과 선대의 사적을 예를 들어가며 제시한 글로서 지평을 지낼 때의 글과 중복되는 내용도 많이 있다.
  • 제목
    방장유록(方丈遊錄)
    발급년
    179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방장유록(方丈遊錄)」은 이동항(李東沆 ; 1736~1804)의 문집인 『지암문집(遲庵文集)』권 3에 수록되어 있다. 이 유록은 평소에 유람을 하며 기록으로 남겼던 그가 방장에서 뗏목을 타고 친구들과 친족 동생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유람기이다. 경술년(1790년) 3월 28일에 출발하여 5월 4일 돌아오기까지 한 달 남짓 간의 여행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동항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지암(遲庵), 칠곡(漆谷) 석전(石田)에 살았다. 항중(恒中)의 아들이며 최흥원(崔興遠)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추봉모(鶴雛鳳毛)라는 칭송으로 경사백서(經史百書)에 정통하여 향시에 여러 번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정주학(程朱學)과 동국선현의 문집을 탐독(眈讀)하여 거경궁이(居敬窮理)에 힘썼다. 서신 왕래는 박사원(朴士源), 정유휘(鄭幼輝), 성철(成澈), 안인일(安仁一), 도성세(都聖世) 등이며 「방장유록(方丈遊錄)」, 「해산록(海山錄)」등과 문집 6권 3책이 전한다.
  • 제목
    백세운결록(百世隕結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백세운결록(百世隕結錄)』 상(上)은 유이좌[柳台佐 ; 1763(영조 39)∼1837(헌종 3)]가 1800년 부여현감으로 재직할 때에 정조임금이 서거한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강제초계문신(講製抄啓文臣)으로 궁중에 근무할 때의 일들을 상기하여 기술한 내용이다. 분문의 내용은 '생당운수 사당결초(生當隕首死當結草)'라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제목 한 이유를 밝혔으며, 태조가 조선개국이래 지금까지 409년간 14대조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벼슬한 선조들의 관직과 직책 업적 공로와 승은을 입은 내력 등을 모두 열거하였다. 정조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당시의 상황과 사도세자의 재능 등을 상세히 기술하였으며, 정조와 대화를 나눈 내용과 책이나 부채 등 하사받은 물건들, 그리고 정조가 친히 과거시험문제를 내고 참관하는 일 등을 일자와 더불어 상세히 기술하였다. 임금에 대한 충정과 승은에 대한 보답으로 감회에 젖어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유이좌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주자서(朱子書) 3책을 하사받았다. 1796년 경연에서 주자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진강하였고, 1800년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곧 부여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1810년 군자감정과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1820년 예조참의, 1822년 동부승지, 1829년 부총관ㆍ우승지ㆍ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학서문집』 20권 10책이 있다.
  • 제목
    법성동건원일기(法聖洞建院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법성동건원일기(法聖洞建院日記)』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 건립과정의 전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서원건립 발의는 무오년(1738년) 3월에 안우석(安禹石)과 그의 조카 안택준(安宅駿)과 강원일(姜元一)이 먼저 창의하여 도내 사림에게 통고하였다. 그 이후 도회를 열고 안동부의 협조를 얻어 서원의 명칭은 '학동(鶴東)'으로 정하고 이재(李縡)를 경원장(京院長)으로 삼고, 서원 건립지는 법성동(法聖洞)으로 정하였다. 개기식은 4월 28일에 하였으며, 도내 각처에서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지원하여 서원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5월 20일 밤에 괴한 김경헌(金景?)ㆍ이만리(李萬里) 등 90여 명이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와서 묘우(廟宇)를 훼철하여 결국 서원건립은 무산되고 말았다.
  • 제목
    법성일기(法城日記)
    발급년
    17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법성일기(法城日記)』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과의 갈등 및 일의 진행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안동은 인조반정 이후 명환(名宦)은 별로 나오지 않았으나, 서원을 배경으로 결속하여 서인 및 노론정권에 대응하는 남인세력의 당론(黨論)을 형성하는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을 둘러싼 갈등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문서는 영조 14년(1738) 안택준(安宅駿), 감사(監司) 유척기(兪拓基)와 부사(府使) 어유룡(魚有龍)등이 김상헌을 제향하는 서원을 안동에 건립하자 김몽렴(金夢濂) 등 남인계 유생들이 반발하여 신축 중인 서원에 방화하면서 발발한 것이었다. 책의 첫머리에 청음의 묘지명이 실려 있고 「석실서원묘정비문」과 영남의 여러 향교와 서원 등에 협조문을 보내는 문서와 상소문, 서원건립을 반대하는 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러 글들이 필체도 달라 오랜 시간을 두고 덧붙인 문서로 보인다. 김상헌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ㆍ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1638년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 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 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 제목
    벽계무신일록(碧溪戊申日錄)
    발급년
    1907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벽계무신일록(碧溪戊申日錄)」은 권만두(權萬斗 ; 1674∼1753)의 문집인『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권 1에 수록되어 있다. 무신년(1728년) 1월 25일 장수현감에서 체직되어 2월 4일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울현(鬱峴)에 가보고 싶어서 3월 8일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 중에 무신란이 발발했음을 접하게 되고, 주동자들이 무기와 양식들을 모아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등의 정황들과, 이들을 진압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들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행 중이었지만 난리의 정황들을 보고 들은 것으로 기준하여 곡진하게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난리 속에서도 살아남아 5월 6일 결국 울현에 도착하여 성묘를 하고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지막부분에 원래 서쪽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남쪽으로 내려와서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언급하며 사람의 생사는 운명임을 말하고 있다. 권만두의 자는 용경(用卿), 호는 지족당(知足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중재(重載), 영덕(盈德)사람이다. 1711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1717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가 되었다. 그 후 호조정랑 등등의 관직을 거쳐 1725년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728년 정희랑(鄭希良)의 난에 육십치(六十峙)를 수비하는데 공이 많았다고 한다. 저술로는『사례집요(四禮輯要)』와 『영해읍지(寧海邑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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