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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곡무신록(屛谷戊申錄)』은 권구[權? ; 1672(현종 13)∼1749(영조 25)]가 1728년(영조 4) 이괄의 난을 당하였을 때에 안동에서 흉계를 꾸미는 자들이 음모를 은폐하기 위하여 변산에 역적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인심을 소요시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사실과 자신이 무함(誣陷)을 입었던 일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해 적당(敵黨)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임금을 모시고 국문을 하는 과정에서 권구의 대답을 듣고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특히 국문장의 대신들과 분위기 등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황원문견록(黃猿聞見錄)」이 부기되어 있고 여기에는 권구가 압송된 뒤에 예천, 영주 등등의 여러 주민들이 '권구는 죄가 없으니 곧 풀려날 것이다'라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기록하였다.
권구의 자는 방숙(方叔)이며, 호는 병곡(屛谷)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증(權登)의 아들이며,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다. 천문ㆍ역수(曆數)ㆍ역학(易學)ㆍ사기(史記) 등에 조예가 깊어서 『경의취정록(經義就正錄)』, 『독역쇄의』, 『기형주해(璣衡註解)』, 『여사휘찬의의(麗史彙纂疑義)』 등을 남겼으며, 그 밖에 옛날의 명훈(名訓)을 한글로 번역한 『내정편(內政篇)』과 『병곡집(屛谷集)』 등이 있다.
「병인일기(丙寅日記)」는 이우(李? ; 1739~1810)의 문집인 『면암집별록(?庵集別錄)』하(下)에 실려져 있다. 병인일기는 그의 아들 병탁(秉鐸)이 쓴 일기로,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신원회복을 위해 영남만인의 소두가 되어 소를 올렸고 노론이 집권하자 병인년(1806년) 전라도 강진 고금도로 유배를 가게 된 배경과 함께 배종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1월 14일 명을 받고 20일 떠나 2월 2일에 고금도에 도착해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죄가 없음이 밝혀져서 4월 24일 다시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우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춘(穉春), 호는 면암(?庵)이며 아버지는 소산 광정(光靖)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 죽소(竹所) 양현(良鉉)의 딸이다. 안동 소호리 출생이고, 백부 대산 이상정에게서 수업하였다. 유학과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병정일기(丙丁日記)』는 남급(南? ; 1592∼1671)이 기록한 것으로 안에는 「난리일기(亂離日記)」로 기록되어 있다. 병자년(1636년)과 정축년(1637년)간의 기록으로 청인들이 우리나라로 침입할 당시의 전후사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왕을 호종하면서 겪은 군주의 뼈에 사무치는 고통과 조정의 대응대책들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어 역사적 자료의 가치가 있다. 또한 당시의 청인들의 잔학한 만행과 민중들의 고통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병자호란이 우리민족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결과를 낳게 하였고, 힘없는 나라의 군주와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필사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서문과 발문이 붙어 있다. 남급의 자는 탁부(卓夫), 호는 유유헌(由由軒)이다. 융달(隆達)의 아들이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2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명유(名儒)로 침랑(寢郞)에 천거되었다. 병자호란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의흥현감(義興縣監)에 제수되었다.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병정일기(丙丁日記)」 1은 남급(南? ; 1592∼1671)이 지은 것으로 영양남씨 집안의 문집을 모은『신안세고(新安世稿)』 권 3 「유유헌유고(由由軒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년(1636년) 12월 12일 청나라의 침공에서부터 이듬해 정묘년(1637년) 1월 30일까지 난리를 겪으면서 청인들이 저지른 만행과 조정에서의 대응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또한 왕을 호종하면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일기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남급의 자는 탁부(卓夫), 호는 유유헌(由由軒)이다. 융달(隆達)의 아들이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2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명유(名儒)로 침랑(寢郞)에 천거되었다. 병자호란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의흥현감(義興縣監)에 제수되었다.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봉강영당영건일기(鳳岡影堂營建日記)』는 1728년(영조 4)에 그려진 화원군 권희학[權喜學 ; 1672∼1742, 호 : 감고당(感顧堂)]의 영정을 봉안할 영당의 건립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적어 놓은 도서이다. 한지에 필사하여 책으로 엮은 것으로 모두 58쪽이고 뒤에는 이 영당을 이건한 사실을 기록한 이건일기가 첨부되어 있다. 권희학은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화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 호칭을 사여하고 공신도상(功臣圖像)을 그려 봉안하는 작업이 국초부터 활발하였는데, 화원군 영정은 공식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서는 최후의 작화례(作畵例)로서 57세 때의 초상이 된다. 현재 안동시 남선면 신석리 봉강영당(鳳岡影堂)에 봉안되어 있다.
『북유록(北遊錄)』은 무진년 7월에 함경도병마평사로 제수되어 이듬해 7월에 체직될 때까지 겪은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표지에 적혀 있지만, 일기 내용은 9월 6에서 이듬해 3월 3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주로 금강산 유람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금강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지역적 위치와 거리를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금강산 일대의 암자, 누대, 바위의 위치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표훈사사적(表訓寺史蹟)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 충숙왕때 민지(閔漬)가 지은 유점사사적기(楡岾寺事蹟記)를 그대로 싣고 있다. 여기에는 금강산의 명칭을 개골(皆骨)ㆍ풍악(楓嶽)ㆍ열반(涅槃)ㆍ금강(金剛)ㆍ지달(枳?)의 5가지로 적고 있다. 또 함경도 일대의 지역과 지역 간의 거리와 지역에 위치한 산의 명칭 등도 부기(附記)하고 있어 지질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북유록(北遊錄)」은 김병종(金秉宗 ; 1870∼1930)의 문집인 『수산집(秀山集)』 권 5에 수록되어 있다. 금강산유람의 생각이 간절해서 집안의 만류도 뿌리치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나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유람기이다. 4월 1일 출발하여 5월 13일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주요여행 경로는 영덕, 평해, 울진, 양양, 청간정을 거쳐 금강산 일대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돌아올 때는 철원을 거쳐 서울을 경유하여, 대전, 김천, 예천으로 차를 타고 내려왔다. 끝에는 산수 유람은 좁은 시각을 넓게 해주고 움츠렸던 마음을 활짝 펼쳐주며, 문장을 짓는데도 도움이 되는 등 유람의 유익한 점들을 언급하면서 산수 유람에 대한 감상문을 남기고 있다. 김병종의 자는 한우(翰宇), 호는 수산(秀山),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안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락(程洛)이며, 외조는 영양(英陽) 남유진(南有鎭)이다. 경술국치 이후로 세간사를 멀리하고 유교경전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명승을 유람하며 지냈다. 재종조(再從祖) 절계(節溪) 상진(相鎭)과 족숙 장암(莊菴) 시락(時洛) 등 선배를 따라 함께 독서하고 시문을 지었다. 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강마하였고, 저서로는 『성학속도(聖學續圖)』ㆍ『문소가례(聞韶家禮)』ㆍ『학림통록(學林通錄)』ㆍ『독서만록(讀書漫錄)』ㆍ『북유록(北遊錄)』등이 있다.
「북유록(北遊錄)」 상(上)은 류휘문(柳徽文 ; 1773~1832)이 기묘년(1819년) 가을에 금강산일대를 유람하고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 『호고와선생문집(好古窩先生文集)』 권 16에 등재되어 있다. 기성(箕城)으로 가서 관동팔경을 둘러보고, 금강산일대를 세밀하게 구경한 후에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서 돌아오는 여정으로, 모두 70일간의 여정이지만 「북유록」 상에는 9월 11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나 전설을 문헌에 근거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명승지의 내력을 이해하는데 한층 더 효과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영랑점(永郞岾) 정상에 오르면 우리나라의 주요 산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옴을 언급하고 있다. 류휘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이며, 만휴(萬休)의 아들이다. 류장원ㆍ남한조ㆍ정종로의 문인이다. 1821년에 류장원이 지은 『예서통고』와 고조부 류정원의 『역해참고』를 교정하였다. 1830년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2년 뒤에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저서로 본집 이외에 『주역경전통편(周易經典通編)』ㆍ『율려신서(律呂新書)』ㆍ『창랑문답(愴浪問答)』 등이 있다.
『북정기(北征記)』는 권대임(權大臨 ; 1659~1723)이 함경도 도사를 제수 받고 신미년(1691년) 7월 13일 함경도로 가면서 쓴 10월 27일까지의 일기이다. 함경도까지 여행하면서 지나가는 고을의 연혁, 역대 인물, 그들이 지은 시, 지명유래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일기 뒤편에 「망운대시서(望雲臺詩序)」와 「칠우정기(七友亭記)」가 실려 있으며, 갑술년(1694년) 5월 19일의 일기가 실려 있다. 이 일기에 남구만, 장희재 등 당시 정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도 거론되며, 이현석이 올린 상소문이 초록되어 있다. 초서로 필사하여 읽기는 어려운 면이 있으나 일기 중간에 국한문 혼용시조도 들어있어 흥미를 더한다. 권대임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만용(萬容), 호(號)는 칠우정(七友亭), 영해 송천(松川)에 거주하였다. 송천(松川) 득여(得與)의 아들로 이현일의 문인이다. 16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사랑, 선무랑이 되어 박사(博士)에 오르고 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이듬해 예조와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함경도도사에 재직하였으며, 1702년 형조정랑에 올라 춘추관기주관이 되었고 이어 만경(萬頃), 보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서문유(徐文裕), 황석래(黃石來), 정필시(鄭弼時), 김석구(金錫龜) 등과의 서신 왕래가 문집 4권 2책에 전한다.
「북정일기(北征日記)」는 안일리(安日履 ; 1661∼1731)의 시문집인 『낙애문집(洛厓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갑술년(1694년) 문묘에서 출향(黜享)된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복향을 반대하는 상소로 인해 유배의 길을 가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써, 날씨ㆍ경관ㆍ느낌 등을 9월 19일부터 10월 26일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먼저 유배 갔던 배정휘(裵正徽)를 만나 경학과 『장자』, 『주서절요』등을 서로 강론하면서 학문연구에 주력하던 사실을 적고 있다. 안일리의 자는 길보(吉甫), 호는 낙애(洛厓), 본관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한소(漢召)이다. 17세 때 김태기(金泰基)에게 수업하였으며, 1690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1717년에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의 하교가 있자, 안동, 상주 등의 시소(試所)에 가서 유생들에게 세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릴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북정일기(北征日記)」는 권득기(權得己 ; 1570∼1622)의 시문집인『만회집(晩悔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유배를 가는 도중의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3월 8일 출발하여 28일에는 김화, 29일에는 포천에 도착하였으며, 4월 1일 남대천, 2일 회양, 6일 고산, 8일 함흥을 거쳐 유배지인 곳에 도착하였다가 유배령이 풀리자 28에 포천을 출발하여 다시 도성에 들어오게 된다. 비록 유배중이지만 주변의 경관을 자세하게 기술할 정도의 여유가 있을 정도로 마음은 편안한 듯하다. 여행거리는 총 4천 여리이며 고산의 대해가 가장 좋은 경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권득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극례(克禮)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繕工監役) 극관(克寬)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1618년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재직시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되자 극력 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종형의 제지로 주달되지 않았다. 경향의 촉망을 받았고, 만년에 유성(儒城) 해곡(海曲)에 은거 중 별세,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북정일기(北征日記)」는 이여규(李汝圭 ; 1713∼1772)의 시문집인『무민당문집(无悶堂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년(1756년) 여름에 이여구의 아버지가 북청(北靑)에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친을 하려고 9월 16일 떠나서 윤9월 21일에 도착하게 된다. 경관과 풍물을 읊은 시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어서 이채를 띠고 있다. 돌아오는 과정은 기술되어 있지 않고, 금강산 유람에 대한 아쉬움을 관동유람이 더 좋은 구경거리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달래고 있다. 경포대 글씨는 신익성(申翊聖)이 쓴 것이고, 오봉산낙가사(五峯山洛伽寺)에는 이화정단(梨花亭壇)이 있는데 세조가 이곳을 행차했을 때 생리(生梨)를 진상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아직도 매년 9월 절에서 배를 진상한다는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이여구의 자는 군집(君執), 호는 무민당(无悶堂),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이여구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었고, 장성함에 따라 경사(經史)를 정통하고 더욱 예서(禮書)에 힘써서 일용행사를 고례(古禮)에 비추어 실천하여 잘못이 없었다. 초년에 가세가 부유했어도 의복은 화려함을 피하고 음식도 좋은 것을 취하지 않았고, 부친께서 북관(北關)의 남영(南營)에 재임시 선생이 수천 리 길을 뵈러 갈 때도 말이 병들었으나 역마는 이용하지 않았다. 선생이 평생에 저술로 자처하지 않아서 시문을 지어도 원고를 남기지 않으므로 관동시(關東詩) 몇 편이 있을 뿐이다.
『북천일록(北遷日錄)』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1556∼1618)이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폐비(仁穆大妃廢妃)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귀양 갈 때, 그의 문인 정충신(鄭忠信 ; 1576∼1636)이 수행하며 기록한 일기문이다. 책의 첫머리에 1617년에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쓴 북천일록서문(北遷日錄序文)이 있으며, 본문은 1617년(광해 9) 11월 1일 그가 귀양 가게 된 동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듬해인 1618년 8월 7일 그가 유배지에서 죽어 고향인 포천(抱川)에 안장될 때까지의 사실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광해군이 폐비하려 할 때 그가 올린 초고 1편을 원형 그대로 판각하여 첨부했으며, 1685년 이세구(李世龜)와 이민서(李敏敍)가 쓴 발문(跋文)이 각각 수록되었다. 내용은 그가 귀양지로 갈 때에 작별인사차 찾아온 지방 유지들과 주고받은 이야기, 작별연회석에서 서로 화답한 시 구절, 그리고 유배지에서 죽었을 때의 제문과 만사, 고향으로 장사지낼 때의 상황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항복은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ㆍ필운(弼雲)ㆍ청화진인(淸化眞人)ㆍ동강(東岡)ㆍ소운(素雲)이다.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고,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 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북한일기(北漢日記)」는 독립운동가 이승희(李承熙 ; 1847∼1916)의 시문집인『대계문집(大溪文集)』 권 30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년(1876년) 2월 22일에서 26일까지를 기록한 것이다. 별시를 보기위해 서울에 머물러 있던 차에 5, 6일의 여유가 남아서 북한산 여행을 약속하였다. 22일 혜화문(惠化門)을 출발하여 26일 창의문(彰義門)을 들어가는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23일에 동문을 따라 가니 갑자기 백운봉(白雲峯), 만장봉(萬丈峯), 노적봉(露積峯)이 뿔처럼 우뚝하게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24일자에는 만장봉과 백운봉사이에 백성들이 살고 있는데 '시두구아문(是狗竇衙門)'이라는 마을이었다. 이것은 병자호란때 청인들이 몰래 군사를 보내 이곳을 넘었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천한 이름을 붙여 그 땅을 욕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각 명승지에서 느낀 감정과 특기사항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어 북한산 여행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승희의 본관은 성산(星山), 일명 대하(大夏),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ㆍ대계(大溪)ㆍ한계(韓溪)이며, 진상(震相)의 아들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으며,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하여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북행록(北行錄)」은 김상정(金尙鼎 ; 1668∼1728)의 문집인『곡천선생문집(谷川先生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스승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변무소를 올리기 위해 인근의 명유들을 찾아서 허락을 얻어 소를 올리려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비록 일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제자로서 스승의 변무를 위해 앞장서서 애쓰는 모습에서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임인년(1722년) 4월 4일에 출발하여 본부로 돌아올 때까지 22일이 소요되었다. 마지막 부분에 여행의 전체적인 정황과 기록한 날짜가 4월 28일이며 기록자의 별호[용산산인(龍山散人)]를 밝히고 있어 여행의 전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상정의 자는 덕삼(德三), 호는 곡천(谷川), 본관은 김해이다. 김상정은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과 갈암 이현일에게 수업하였다. 성리학을 하면 대성할 것이라는 선생의 말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선현들이 밝히지 못한 점을 제설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갈암이 죽은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숙(家塾)을 설치(設置)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광정은 그의 시문이 명백하고 간양해서 말 한마디, 글자 한 자도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분이강무변사일록(汾李講誣事變日錄)』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후손이 『농암속집』을 발간할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이 퇴계(退溪)선생의 휘(諱)와 관련된 사항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반박한 내용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각 서원, 문중, 향교 등으로 통문을 보내고 답장한 글들로 이루어져있다. 분천에 사는 농암(聾巖)선생의 후손들이 『농암속집』을 발간하면서 「수수록(授受錄)」에서 퇴계 이선생(退溪李先生)이라고 한 대목을 퇴계선생(退溪先生)이라하고 성을 휘(諱)해야 한다는 주장을, 유곡(酉谷) 권씨 문중에서 『충재권선생문집(沖齋權先生文集)』의 부록에 실린 만사의 제목 아래에 퇴계 이선생(退溪李先生)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중간하면서 휘했다는 내용과, 이천 명도(伊川明道) 두 선생을 호칭할 때와 퇴계선생(退溪先生)의 형인 온계선생(溫溪先生)등을 예를 들어 설명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분천의 후손들이 답변한 내용과 영남지방의 여러 서원과 향교 등지로 보낸 통문과 입장들을 밝힌 답서와 소속된 향교의 유생들의 명단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비망기(備忘記)』의 기록자는 분명치 않으나 비교적 근세 사람으로 흥해 배씨가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도서의 대부분이 지우들의 주소이며, 일정한 체계 없이 일기를 기록하다가 지우들의 주소를 기록하기도 하고 시장의 물가나 소 값 등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본문의 내용들을 보면 임인년 11월 21일 개헌결정가부투표가승(改憲決定可否投票可勝), 계묘년 3월 16일 박의장 군정 4년 연장 선언, 10월 15일 대통령선거후보자 씨명(氏名) 등등 입후보한 후보의 기호와 이름 정당을 기록하였고, 민의원후보자(民議員候補者)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여 기록하였으며 고간지와 동해척주비의 원문도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는 없어 보인다.
「사제일기(賜祭日記)」는 영조와 정조 임금이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고 혼령을 위로하고자 제문을 지어서 제사를 받들도록 한 전후과정을 도산서원에서 일기로 남긴 것이다. 사제(賜祭)는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祭祀)를 내려 주는 것으로, 이황은 학덕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기 때문에 조정공론을 모아 임금이 직접 제문을 지어 혼령을 위로하고자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었다. 모두 5차례의 사제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첫번째는 계축년(1733년) 12월 17일에 홍문관 부수찬 정형복(鄭亨復)을 보내어서 문순공 이황의 제를 올리게 하였고, 두번째는 병자년(1756년) 1월 18일에 부수찬 이석상(李錫祥)을 보내어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인 월천 조목을 위한 제를 올리도록 하였고, 세번째는 신축년(1781년) 5월 22일 승정원 좌부승지 이양정(李養鼎)을 보내어 이황과 조목을 위한 제를 올리도록 하였고, 네번째는 을사년(1785년) 2월 8일에 예조정랑 이재휘(李載徽)를 보내어 이황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를 올리게 하였고, 마지막으로 임자년(1792년) 3월 24일에 좌부승지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이황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문을 지어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나라에서 직접 사제(賜祭)를 하였으니 퇴계선생의 학문과 덕망이 그 당시에도 얼마나 훌륭하고 고원(高遠)하였는지 살펴볼 수 귀중한 자료이다. 제사의 진행과정인 홀기와 진설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사금동입석일기(沙禽洞立石日記)」는 이야순(李野淳 ; 1755~1831)의 문집인『광뢰집(廣瀨集)』 권 8에 실려져 있다. 퇴계선생의 둘째 부인인 허씨부인의 비문을 바꾸는 상황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야순의 종숙(從叔)인 이귀응(李龜應 ; 1729~1789)이 병오년(1786년) 가을에 영주 사금동에 세웠다. 그러나 후손들이 잘못되는 일이 많아서 비문을 바꾸게 되었다. 묘갈문은 죽유(竹?) 오운(吳澐 ; 1540~1617)이 찬한 것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진성이씨 집안의 비문은 퇴계선생의 유언으로 한동안 세우지 못하다가 이규응이 한스러움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8대조인 이빙(李憑 ; 1520~1585)과 7대조 이영도(李詠道 ; 1559~1637)의 묘갈과 퇴계선생의 두 부인들의 묘갈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야순은 비문을 굳이 돌에 새겨야 하는 것에 대해서 훗날 자손들이 성묘를 와서 무덤에 풀만 무성하게 우거짐을 본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비문이라도 있으면 자손들이 조금은 위로가 되기 때문에 비문을 세워야 한다고 비문건립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 이야순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건지(健之), 호는 광뢰(廣瀨)이다. 퇴계의 9세손이며 귀휴(龜烋)의 아들이다. 이상정(李象靖)과 김종덕(金宗德)의 문인이다. 1783년 용궁 향시에 응했으나 과장이 문란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1796년 뇌석정(瀨石亭)을 중건하여 이황의 저술들을 수집하여 연구하였다. 1808년 경기전참봉에 제수되었고 1891년 국장도감감조관, 1831년 장악원주부에 승진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사문문답일록(師門問答日錄)」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 1539~1601)이 1562년에 퇴계 이황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겸암집(謙菴集)』 권 4의 잡저에 기록되어 있다. 유운룡이 퇴계선생에게 『주자대전』과 『대학』중에 어느 것이 배우는 사람에게 더 절실한가를 묻자 여기에 퇴계선생은 배우기에 『대학』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흥기를 일으킨다고 답하였다. 또 『주자서절요』는 문법이 평범하지 않다고 하니 퇴계선생은 성정론에 관한 것으로 간혹 어록이 있지만 쓸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다. 또 『근사록』에 대해 문답한 것도 있다. 부기(附記)된 「문충공사문문답일록(文忠公師門問答日錄)」은 아우 유성룡과의 문답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다. 유운룡의 본관은 풍산(?山)이며, 자는 응견(應見), 호는 겸암(謙菴), 중령(仲?)의 아들이다. 이황의 문인이며, 음사로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에 제수되었으며 풍저창직장(?儲倉直長)을 거쳐 인동현감(仁同縣監)ㆍ광흥주부(廣興主簿)ㆍ한성판관(漢城判官)을 역임하였다. 임란에 류성룡의 간청으로 윤허를 받고 귀향하여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였다. 전후에는 풍기군수(?基郡守)ㆍ원주목사(原州牧使)를 역임하였다.